<중국혐오의 정치적 기원 5-2> ‘진보주의자들’의 역사 인식 결여가 중국혐오를 지속시킨다

미국 하원위원장 낸시 펠로시가 대만을 방문한 뒤 중국의 대만포위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여기에 대응하여 대만의 포사격 훈련이 있었다. 이어서 미국 의원단대표 10명이 대만 방문을 재차 강행하고 난 뒤에는 중국 전투기들이 대만해협을 넘어 위협 비행을 하기도 했다.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고 급기야는 미국을 따라 일본 의원단들이 대만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올 가을에는 미국이 대만과 공식적인 무역·투자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조만간 미국 군함과 군용기를 보내 타이완 해협을 통과시킬 계획이다. 대만이 우크라이나처럼 전쟁의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펠로시는 자신의 대만원정이 “대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펠로시는 대만에서 “세계는 민주주의와 독재정치의 선택에 직면해 있습니다. 대만과 전 세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미국의 결의는 여전히 굳건합니다.”, “중국의 압박으로 대만의 민주주의가 압박 받고 있고”, “시진핑 주석이 인권과 법치를 무시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중국은 이에 대해 펠로시의 대만 입국이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에 대해 중대한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면서 강력 반발했다. 미국 의원단 대표들의 대만 방문에 대해서는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과 중·미 3대 공동성명 규정을 공공연히 위반했다”며 “중국의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을 침범하고 대만 독립·분열 세력에 심각하게 잘못된 신호를 줬다”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 독재 권력에 의한 대만 민주주의의 훼손이고 인권과 법칙의 무시다. 중국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은 주권 문제이자 완전한 통일의 문제고 보편적인 국제관계의 문제다. 지금 세계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둘러싸고 확연하게 찬반이 갈라졌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는 세력은 ‘반제자주 진영’에 서는 것이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은 미국을 위시로 한 서방 제국주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 앞에서 제3의 길은 없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진영’ 내에서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반대하며 중국이 제국주의적 폭력으로 대만의 자결권을 부정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대만 분리는 미제가 획책하는 전쟁과 영속적 분단을 의미한다

 

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사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을 통치한 적도 한 번 없지요. 이런 영유권 주장의 근거란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중화민국의 영토를 계승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궁극적으로 청나라 영토의 계승자라는 논리며, 또 하나는 대만을 국공내전의 이미 패망한 쪽으로 보는 국공내전 연장선상의 논리죠. 한데, 사실 양쪽 논리에 수많은 흠집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청나라 영토 계승론이라면,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영토이었던 외몽고(오늘날 몽골)를 중국이 왜 포기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국공 내전 연장의 논리라면 이미 당-국가 (국민당의 1당 국가) 아닌 다당제 국가/본성인의 국가가 된 대만의 “현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이고요…좌우간, 이 “하나의 중국”의 논리는 결국 제국주의적 “폭력”의 일종이죠. 대만인들의 민족자결권을 부정하는 폭력이지요.

역사적으로 대만은 중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영토였다.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배하고 난 뒤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이 대만을 합병했다.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강화조약으로 일본에 강탈당했다가 일본의 패전 이후 대만은 중국으로 다시 귀속됐다. 이후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대륙에서 승리하고 장제스 국민당 군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점령, 통치하면서 양자는 무력통일 차원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웠다. 국민당은 대만을 반격 거점으로 하여 중국 공산당을 물리쳐서 고토를 회복하고 대륙을 통일시키려 하고 중국은 대만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중국을 완전하게 통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과 대만의 화해협력으로 평화적 통일의 원칙으로 발전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대륙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당 정권과 대만으로 쫓겨 간 중화민국 국민당 정권은 국제적인 냉전과 쌍방의 적대적인 의식 속에서 일종의 ‘제로 섬 게임’과 같은 대항일변도의 양안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즉, 중국은 ‘대만해방’을, 대만은 ‘대륙수복’을 목적으로 ‘전승’ 아니면 ‘전패’라는 정책논리를 견지한 정치·외교·군사적인 대결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대만은 중국의 일부이며, 대만에 대한 주권은 중국에 있다는 ‘하나의 중국’원칙을, 대만은 일종의 망명정부로서 중국 대륙에 대한 주권은 여전히 중화민국 자신에게 있다는 ‘하나의 중국’원칙을 각각 천명하게 되었다. 각각 완전히 해석을 달리하는 ‘하나의 중국’원칙이었지만 이 원칙의 저변에는 치욕적인 중국근대사를 배경으로 탄생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모두 중국의 분열은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중국민족주의적인 정서가 공통적인 저변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의 중국’원칙에 대한 공동인식으로 인하여 국제적으로는 어느 쪽의 ‘하나의 중국’원칙을 지지하느냐의 문제가 곧 누구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느냐를 결정하는 전제조건이 되었으며, ‘두 개의 중국’은 양측 공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국제사회에서 어느 쪽의 ‘하나의 중국’원칙을 지지하는가의 문제는 결국 1970년대 초 대만의 후원자였던 미국의 정책변화에 의해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반면, 제로섬적인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양안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중국’원칙에 대한 공동인식은 마오저둥(毛澤東)으로 하여금 무력통일정책에서 평화통일정책으로의 전환은 가져오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제2차 대만해협위기를 거치면서 장세스(蔣介石)의 ‘하나의 중국’원칙을 확인한 마오는 진먼(金門)과 마주(馬祖)를 중국대륙과 대만을 잇는 연결고리로 인식하게 되었고 당시 미국의 ‘두 개의 중국’정책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진먼과 마주를 국민당의 수중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결정과 함께 급진적인 무력통일정책에서 점진적인 평화통일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일국일제(一國一制)’에 기초한 구체적인 평화통일 방안을 제시하게 되었다.(김옥준 (계명대학교), “마오저둥 시기의 통일정책 : ‘하나의 중국’ 원칙 확립과 정책변화”,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사회과학연구 2010년 제21권 4호)

1949년 9월 21일 전국정치협상회의 개막식에서 마오는 “우리민족은 앞으로 다시는 치욕을 당하는 민족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이 선언은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비롯해 제국주의에 침략당하면서 반식민지 중국이 겪어야 했던 치욕과 고통 속에서 나왔다.

 1949년 9월 21일 역사적인 전국정치협상회의 개막식이 개최되고 있다.

마오의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는 중국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과 서구 열강의 중국분할과 주권 침해에 대한 강한 반발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중국과 중국민족에 있어서 영토의 분열과 주권의 침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용인될 수 없는 사활적 문제가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의 중국’원칙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던 것이다.(같은 글)

이 일국일제에 기초한 “하나의 중국” 원칙은 이후 덩샤오핑의 ‘평화통일ㆍ일국양제’ 통일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은 서방 열강들에 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국토완정을 통해 민족통일을 완수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미국의 “두 개의 중국” 정책에 맞서 더 이상 중국과 대만이 대결과 적대가 아니라 “하나의 중국” 원칙 하에 민족적 화해협력과 교류로 상호 간의 신뢰를 쌓아 나가고 종국에는 ‘일국양제’로 각 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홍콩이 영국 식민지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이 일국양제가 실제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은 한(조선)반도에서 남과 북의 연합연방제 통일 원칙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일국양제 원칙이 아니라 서로의 제도와 체제를 통해서 상대방을 흡수통일하려고 한다면 이는 결국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대륙 통일 이후 대륙에서 쫓겨난 장제스가 대만을 점령하고 백색테러 정치로 대만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만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보호령’하에서 반공주의 전초기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쏘 사회주의 간의 대결을 이용해 쏘련을 고립시키고 중국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는 목적으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중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71년 10월, 제26회 유엔 총회에서는 제2758호 결의를 통과시키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권리를 회복하고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대표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대표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기반으로 중국은 지금까지 미국, 한국을 비롯한 181개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중·미 양국은 1970~80년대에 3개 공동성명에 서명했으며, 미국은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이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대만과는 문화, 비즈니스 및 기타 비공식 관계만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이를 기반으로 중·미 관계는 지난 40여 년간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유지해왔다.([싱하이밍 中 대사 특별기고] 절대 다수 국가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 아주경제, 2022-08-09)

그러나 미국이 애초에 의도한 바와 다르게 중국이 다당제 서방 자본주의 국가로 변모하지 않고 미국의 국제적 패권질서를 위협하게 되자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걸고 신장위구르, 홍콩에 이어 대만에 대한 분리주의 기도를 하고 있다.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공개적으로 부정할 명분이 없자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말장난을 하면서 대만의 분리독립을 획책하면서 중국을 계속 자극해 왔다. 트럼프 정권 당시에 미중 대결이 고조되면서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의 대결이 고조되었고, 펠로시 하원 의장의 대만 방문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이후 대결을 고조시키는 위험천만한 책동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을 통치한 적도 한 번 없지요”라는 박노자 교수의 인식은 “하나의 중국” 원칙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만은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잡기 훨씬 이전인 약 500여 년 전부터 인종적으로나, 언어, 문화적으로 중국 역사(특히 중국 푸젠성)의 일부였다. 박노자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래 한국이나 조선(북)은 단 한 번도 조선을 통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남과 북의 통일 근거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민족문제는 남에서 대한민국이 성립되고 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의 역사적 문제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체가 등장하고 양자가 분열됐다고 해서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중국의 민족분열은 외세 열강들의 중국 식민지 지배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식민지배의 역사를 최종적으로 청산하는 역사적 과제의 의미도 있다.

대만이 청나라의 영토였다는 것을 근거로 “청나라의 영토이었던 외몽고 (오늘날 몽골)를 중국이 왜 포기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라는 박노자 교수의 주장은 억지논리로 일관해 있다. 그런데 대만과 몽골은 역사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

몽골은 한 때 세계 상당부분을 지배하는 제국이었고 심지어 97년 동안 원나라로 중국을 지배하기도 했다. 이후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국 전열을 지배하면서 몽골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쏘련에 이어 두 번째로 외몽골은 몽골인민공화국(현재는 몽골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내몽고는 일제 괴뢰국가로 전락했다.

1947년 소수 민족 자치구를 가장 먼저 선보인 곳이 내몽골이다. 내몽골은 공산당에는 열렸으되, 국민당에는 닫힌 공간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국공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이병한 역사학자, 몽골 분단의 비밀…”칭기즈칸의 부활을 막자!”, [유라시아 견문] 내/외몽골 : 제국의 유산, 프레시안, 2015.06.09.)

이처럼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잡기 이전에 괴뢰 정부를 반대하는 내몽골 인민들과 손잡고 항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괴뢰국을 축출하고 나서 네이멍구(내몽고)는 인민들의 열망으로 중국 자치국이 되었다. 현재 내몽고에는 약 80%의 한족이 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1920년대부터 몽골의 자주적 국가 수립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반면 중화민국은 몽골을 중국 영토로 간주하여 수복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다가 2012년에야 영유권을 포기했다. 시진핑 주석은 2014년 몽골을 방문하여 몽골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대만의 자결권 운운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부정하고, 외몽골의 독립 사례에 비춰 이 원칙이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상반되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사실을 은폐·왜곡,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 “국공 내전 연장의 논리”라는 주장은 이미 살펴봤듯이, 역사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박노자 교수는 “이미 당-국가 (국민당의 1당 국가) 아닌 다당제 국가/본성인의 국가가 된 대만의 ‘현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데, 대만에서 수십 년간의 국민당 파쇼 독재가 1970년대에 무너지면서 최근에는 본성인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정권을 잡고 있다고 해서 역사적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에서 분단을 낳았던 미군정과 이승만 권력인 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와 이후 자유당 독재가 무너졌다고 해서 외세의 지배와 분단이라는 역사적 문제가 사라지는 것인가? 박노자 교수의 논리는 부르주아 다당제를 미화하는 논리이기도 하고,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역사적 문제를 부정하는 몰역사적 관점이기도 하다. 더욱이 민진당은 “하나의 중국론”을 부정하고 중국 혐오를 부추기며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역사왜곡까지 저지르며 대만을 침략하고 식민통치를 했던 일제를 미화하고 찬양하며 미국을 숭배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타이완 ‘정체성 정치’의 함정”, 경향신문, 2018.08.08.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미제국주의는 2차 대전 이후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반공주의 체제를 유지, 강화하고 전후 국제 패권질서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문제는 “중국 대만과 관련해서는 사회주의 중국이 일본 침략의 주요 피해자임에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점”과  “타이완을 비롯한 여러 섬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권리를 침해”하고, “중국 국토의 0.3% 밖에 차지하지 않는 대만(장제스)의 국민당정부를 인증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봉쇄,”(서승 우석대 석좌교수·동아시아평화연구소 소장, 《신냉전시대와 남북통일의 길》, <동아시아에서 자주·평화의 조건 -계속되는 항일투쟁>, [6.15공동선언 22주년기념 학술토론회], 2022년 6월 10일) 하게 했다.

박노자 교수는 “‘하나의 중국’의 논리는 결국 제국주의적 ‘폭력’의 일종이죠. 대만인들의 민족자결권을 부정하는 폭력이”라고 하는데, 이는 ‘민족자결’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중국이 제국주의라는 잘못된 인식도 문제거니와 이러한 ‘민족자결’은 실제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 부각된 역사적 문제를 전면 부정하고, 이러한 원칙을 반대해 왔던 미제국주의의 ‘두 개의 중국’ 원칙, 즉 중국의 분열과 분할 논리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박노자 교수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독재관, 이러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고 그 논리를 전파하고 있다. 미국 식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권’이 미제국주의가 전 세계에서 패권을 부리고 다른 나라를 침략, 약탈하는 제국주의 패권논리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만에서 대립이 격화되는 배후에 미제국주의가 있고, 중국의 군사적 대응은 미제국주의가 제공한 원인에 대한 결과적 대응임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대만의 독립, 분리는 박노자 교수의 인식대로 대만의 ‘자결권’이 아니다. 미제국주의에 대한 대만의 더 심각한 종속과 대만민주주의의 파괴와 파쇼 통치의 심화, 중국과 대만의 영속적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며 미중 대결의 격화, 중국과 대만 대립의 격화로 전쟁을 부른다. 결국 이 논리는 미제국주의가 획책하는 전쟁과 대결을 추종하는 심각한 강도적 논리다. ‘민족자결’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민족자결의 역사와 자결의 내용을 간과하는 무지한 논리다.

대만 내에서도 진보세력들과 평화주의 세력들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해 타이완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는 환중후이(還中會) 활동을 해왔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도전은 일국양제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중국과 대만의 통일원칙을 깨는 것이며 이는 곧 중국과 대만 간의 대결을 고조시키는 행위이며 결국은 전쟁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반북의식이 고조되는 반면에 친미 숭배 감정이 높아지는 것처럼, 대만에서도 중국 혐오가 고조되는 반면에 친미 숭배 감정이 드높다. 이는 타이완 사회가 반중 친미로 우경화되었기 때문이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으로 명망이 높으면서도 역사적 관점의 결여로 인해 러시아 혐오에 이어 중국 혐오에 앞장서고 있으며, 종국에는 미제국주의의 의도에 놀아나는 제국주의 추종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더 확고한 진영주의(당파성)에 입각해 역사의식을 확립해야 한다

 

오늘날 미제국주의를 비롯한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걸고 중국, 쿠바, 조선 등에 대해서 공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때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약탈과 파괴, 전쟁과 민주주의의 유린을 은폐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특수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진보세력의 진보적 세계관의 기본 원칙이자 기준이다.

신장위구르, 홍콩 등지의 ‘인권문제’라는 것도 상당부분 과장, 왜곡돼 있으며 이 문제는 대만 문제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미제국주의를 비롯한 서방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을 해체시키기 위해 조장한 것들이다. 국내외의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과 ‘진보단체’들이 중국의 인권 운운하며 이러한 의도에 동조하고 있다.

‘좌파’ 지식인이라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평화주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잘못된 대응이다”(가디언, 2022년 6월 22일)라는 칼럼에서 “우크라이나를 전폭 지지하는 것이 우리가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더 강력한 나토가 필요하다”며 서방 제국주의의 편을 들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 발리바르는 프랑스 언론 <미디어파트(Mediapart)>와의 인터뷰에서 “평화주의는 선택지가 아니다”(3월 7일)라며 공허하게 반전평화를 외칠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과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해야 할뿐만 아니라 러시아 시민들의 손으로 푸틴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발리바르에게는 이것이 국제주의라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국제이주팀, 2022.03.13.)가 이 인터뷰 기사를 번역해서 공개하기도 했다.(주지하듯 [사회진보연대]는 진보단체임을 자처하면서도 반북반공주의적이고 윤석열을 지지하고 조선일보의 찬사를 받고 급기야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까지 하는 대표적인 ‘좌파’단체이다.)

박노자 교수는 사회진보연대의 발리바르 인터뷰 번역 글을 공유하며 “역시…마르크스주의 이론 석학다운 탁견”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최소한의 입에 발린 말로서의 ‘평화주의’도 거부하고 서방 제국주의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박노자 교수는 대만을 둘러싼 분쟁에서도 일관되게 이러한 관점에 서 있다.

정성진, 박노자 등 (범)무정부주의 지식인들이 맑스주의를 참칭하며 발행하는 잡지 <마르크스주의 연구> 2022년 가을호 편집자 주에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와 다르게 국제적으로 반전운동이 전개되지 않은 이유가 “진보좌파 상당수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미’‘진영주의(campism)’의 프레임으로 묵인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의 야만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진영주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이전 전쟁을 계급적 시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강력한 국제 반전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반미가 ‘진영주의’라며 쏘련 해체 이후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에 대한 지속적 위협, 2003년 서방의 레짐 체인지 기도로 드러난 마이단 쿠데타와 중립적인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정부의 전복과 돈바스의 자결권을 부정한 학살 전쟁과 신나찌의 준동과 백색테러, 두 차례에 걸친 서방과 친 서방 우크라이나 정부의 민스크 평화협정 위반 등 서방의 침략전쟁 기원을 무시한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에 더해 이들 제국주의의 ‘진보적’ 벗들은 노동자 민중, 피억압 민족이 계급적 당파성, 세계관을 반미반제에 두는 것조차 극렬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반미주의는 ‘좌파 지식인’들이 일방적으로 반미주의를 규탄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게 게 아니다. 반미주의는 강력한 역사적,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미의 기초는 현실 그 자체이다. 미제국주의가 저지르는 패권, 살육, 전쟁, 약탈, 인권 유린, 정치적, 경제적 지배 등이 미국을 반대하는 풍부한 토양이 된다.

반미의 사상적 기초는 당파성이다. 진영주의는 곧 당파성을 말한다.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 당파성이다. 박노자, 정성진 등은 이 당파성을 버리자고 한다. 쏘련을 위시로 한 공산주의 진영과 미국 서방 제국주의 사이에 냉전이 펼쳐지는 시기에 진영론이 나왔다. 현실 정치에서 이 진영주의를 벗어난 순수한 중립은 어디에도 없다.

홍명교는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양비론과 중립주의를 들고 나왔다.

미국과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지닌 위험성을 정당하게 비판하려면, 중국의 군비 증강과 패권주의,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삐를 풀고 전세계 군비 증강에 기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 점증하는 군사 경쟁과 전쟁 위기 속에서 만국 노동자의 평화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는 20세기 냉전 시대를 보는 고정된 시야가 아니라, 21세기 정세에 적합한 아래로부터의 국제주의, 갱신된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노동자단체냐, 정치단체냐”…노조는 ‘정치’하면 안 되나, 한겨레, 2022-08-20)

노조가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것이 노조의 정치적 개입이 당파성이 없이, 역사적 원인에 대한 고찰 없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따라서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미국과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중국의 군비 증강이 동일한 것이 아니며, 미국의 핵독점, 핵패권 전략과 북의 핵개발이 동일한 것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그리고 최근에는 아시아판 나토를 획책하는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행동이 전 세계 전쟁 위기의 원흉이다.

침략적, 패권적 미국의 핵독점 전략과 이에 대응하는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북핵을 동일시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반미 반제 없는 핵무기 반대, 평화주의는 현실 정치에서 공허하거나 미제의 이해에 복무한다. 미제국주의가 핵독점, 핵패권을 가지고 북에 대한 포위 말살 공세,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마당에 양비론, 중립론을 펼치는 것은 실제로는 미제국주의의 패권, 침략정책에 눈감고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냉전 시대를 보는 고정된 시야”를 버리자는 것은 반미반제 세계관과 노선을 버리자는 것이다. “21세기 정세에 적합한” 국제주의는 여전히 제국주의 패권을 가지고 세계에 대한 침략전, 약탈전을 자행하고 있는 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패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홍명교는 양비론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의 대부분 투쟁사가 미제국주의의 패권에는 대개 침묵을 지키고 반중, 반북에 나서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영주의, 당파성은 덮어놓고 내 편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당파성은 과학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성을 기초로 한다. 진리에 기반하고 있다. 맑스는 《자본론》서문에서 이 당파성에 대해 자본주의 초기의 진보적 시기에 진리를 탐구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있었으나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계급대립이 치열해지면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누구의 편을 들고, 누구의 이해에 복무할 것인가로 변해버리면서 대다수가 속류 경제학자로 타락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노동자 인민의 이해에 기초한 세계관, 여기에 당파적으로 복무하는 세계관은 진보적일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기반, 진리를 추구한다. 반면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의 당파성은 거짓선전 왜곡과 조작에 기초한다. 결국 당파성을 상실한 진보는 주관적으로는 진보를 자처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이해에 봉사하게 된다.

지금까지 <중국혐오의 정치적 기원>을 다각도로 다뤘는데, 중국과 중국을 둘러싼 문제는 지정학적, 역사적으로 깊게 연관이 되어 있는, 한국과 조선, 일본, 러시아가 연루된 문제이기도 하고, 여기에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개입해온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한미일 동맹과 조중러 동맹의 문제, 남과 북의 분단과 통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적 문제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정치를 규정하고 있다. 역사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역사적 관점을 가지지 않고 하나의 장면, 현상만을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면 반드시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실례로 북의 핵시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중국의 대만 포위 등에 대해서도 근본적 원인과 역사적 배경을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장면만을 포착해서 드러난 현상만을 본다면 북과 중국의 호전성, 침략성 밖에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일면적, 일방적, 표면적 사고 속에서는 사건의 근본 원인은 사라지고, 원인과 결과는 뒤죽박죽 돼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오늘날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1958년 중국과 대만·미국 사이에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라 불리기도 하는 진먼 포격전 이후 중국과 미국·대만 사이에 최고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1995년 리덩후이 대만 총통의 미국 방문으로 3차 대만해협 위기가 촉발됐지만 당시 중·미간의 충돌이 일정하게 제어된 상태에서 전개됐던 것에 비춰, 지금의 군사적 충돌 위기는 우크라이나에서 이미 전쟁이 장기화 돼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어떤 양상으로 촉발될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층 더 심각하다.

1958년 8월 23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진먼에 주둔한 국민당군에 대한 곡사포 공격을 개시하여 수십만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특히 “대만해협에서 중국과 대만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미국이 개입하는 경우에 일본과 한국이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지 않는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다”, “전쟁 수행 지원이 됐든 무역과 경제 교역 중단이 됐든 역내 국가들은 분쟁에 말려들고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라는 마크 에스퍼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이 예측처럼, 대만에서 군사적 충돌은 1, 2, 3차 타이완 해협 위기와 달리 곧바로 한반도까지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가게 한다.

여기에 ‘을지 자유의 방패’(을지프리덤실드)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이 훈련은 방어적인 전쟁훈련이 아니라 북에 대한 선제타격, 북 지휘부 공격을 목표로 내건 침략전쟁 기도다. 자유의 방패라는 이름으로 이 전쟁훈련의 침략적 성격을 은폐하려 하고 있으나 이 자유의 방패는 실은 피억압 민족, 피억압 계급의 자유를 말살하는 침략과 전쟁의 총검이다.

지배계급의 세계관,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에 맞서 시급하게 노동자 민중의 역사의식, 계급의식을 확립해야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참화를 막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 이것이 진보진영에게 부여된 긴급한 역사적 임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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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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