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는 북유럽 국가들에서 존재했는가?(번역)

안드레아스 쇠레센(Andreas Sörensen)

역자: 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 이 글은 그리스 공산당이 운영하는 블로그인 <공산주의를 방어하며(In Defense of Communism)>에 올라온 북유럽 자본주의 비판 글입니다.

출처:

http://www.idcommunism.com/2021/12/has-socialism-ever-existed-in-the-nordic-countries.html?fbclid=IwAR0LJROK46v9GOmRciNKYVDo1ORvBVs_wcyU_Z1AsAV2MW6z9Y4sSvD1pds

스웨덴의 좌파 정치인 조나스 쇼스테트(Jonas Sjöstedt)와 덴마크의 펠레 드라그스테트(Pelle Dragstedt)는 “아르베트 디바트(Arbetet Debatt)” 신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 드라그스테트와 디바트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스웨덴을 포함하여 북유럽 국가에서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는지를 논하며 글을 썼다.

우리는 스웨덴 공산당 당수인 안드레아스 쇠레센(Andreas Sörensen)이 2021년 11월 30일 “Riktpunkt(리크트품)”에 쓴 글을 번역하여 게재했다. 쇠레센의 글은 “북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작동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며, 쇼스테트와 드라그스테트 주장에 대한 응답에 해당된다.(블로그 운영자 주)

 

쇼스테트와 드라그스테트의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에서 이의를 제기할 부분은 없다.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조장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지구상의 우리의 미래를 위협한다. 우리는 현재 높은 주택대출과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불안정 고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경우는 많다. 폭넓은 시야로 세계를 인식하고, 불의를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논할 때 우리의 방향성과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사민주의자들의 노선은 판이할 수밖에 없다.

 

북지국가는 사회주의 국가인가?

 

스웨덴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에서 스웨덴의 복지는 사회주의의 모범적인 사례로서 인식되고 있다. 쇼스테트와 드라그스테트가 말한 것처럼, 스웨덴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세계의 등대이자, 기존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례로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회주의의 작동 방식을 알기 위해 해외를 드나들며 동분서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스웨덴에서 자본주의로부터 탈피를 지향하는 협동조합적 소유와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사례는 우리에게 충분한 학습 소재를 제공해주고 있다. 쇼스테트와 드라그스테트가 펼치는 주장의 토대는 이와 같으며, 위험을 야기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주장은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공상적인 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회복지제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제도 확립의 역사는 투쟁하고, 희생을 치루며 승리를 거뒀던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운동의 발자취이기도 하다. 비록 장점과 단점을 모두 논할 수 있다고 해도, 사회복지의 역사는 발트 해 저편에 존재했고 스웨덴의 대기업들의 횡포를 저지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던 사회주의 본연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복지제도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흐름이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복지를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 고려해보자.

“100만인 거주 프로그램”(The million programme)으로 알려진 공공주택사업이 입안됐을 때,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고려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주택 건설은 민간 기업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스칸스카(Skanska, 스웨덴의 건설회사)가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백만인 거주 프로그램은 또한 스웨덴 국내에 있던 기존의 산업 중심지에 노동력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맡았으며, 산업정책의 중대한 골자를 이뤘다.

마찬가지로 단일학교가 도입된 것도 학생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발전은 기계의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대기업들의 필요에 따라 필요하게 된 것일 뿐이다. 예컨대, “빗자루가 제 역할을 다하게 만들려면 막대를 아끼지 마시오”라고 권더 해그(Gunder Hägg)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의료의 개선 역시 마찬가지로 인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척된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은 단기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했다. 산재로 “다친” 노동자는 노동현장에 다시 투입되기 위해 기능을 회복해야 했다.

부르주아적 관점이 복지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복지가 자본주의적 복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북유럽에서 복지를 “사회주의”적 복지라고 부르는 것은 편협하고 잘못됐으며 충분하지 못한 설명으로서, 사회주의 자체가 복지의 발전을 추동할 수 있는 역량을 간과하고 있다.

 

공동소유(公同所有)

 

공동소유를 논함에 있어 쇼스테드와 드라그스테트는 노동자들에 의한 두 가지 소유의 형태를 지지한다. 쇼스테드와 드라그스테트는 노동자자주관리 회사와 협동조합을 논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적 소유의 유의어로 간주하는 국유체제를 지지한다.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하는 회사와 협동조합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협동조합과 회사들이 자본주의 사적소유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협동조합에 있는 노동자 개개인의 경우 분명히 압박감을 덜 수 있고, 운영 형태에는 분명 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협동조합이 시장경제 내에서 운영되고 있고, 시장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존재하기 위해선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암시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쇼스테드와 드라그스테트가 쓰지 않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문제는 개별 기업이 아닌 시장 그 자체이며, 이는 시스템 자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떤 역할을 맡는가?

 

국가는 사적 자본의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 사회복지의 업무들을 일정 부분 떠맡는다. 국가기구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해보자. 국가의 가장 중대한 과제는 만사가 순조롭게 굴러갈 수 있게 보장하는 데에 있다. 필요에 따라 사회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더욱 정합적인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사적자본이 충분한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부문에서, 흑자를 얻을 수 있는 창구가 없는 곳에서 활동을 전개해왔다.

화물 운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철도망을 생각해보라.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복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재벌이 운영하는 민영산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광산업을 상기해보라.

회사들의 흑자 여부는 본 글의 맥락에서 중요한 논제가 아니다. 국가에게 복지는 적자만 야기할 뿐이다. 근로인민의 세금을 통해 충당되고 지불되는 복지에 대한 비용은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숄스테트와 드라그스테트가 지적하듯이 국가에게 자금을 가져다주는 국유기업들은 충분하게 존재한다. 복지에 쓰이는 비용은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다- 스외덴 국내와 국외에서 자본주의가 창출하는 효율적인 활동으로부터 나오며, 현실에서는 사적자본을 대상으로 재정을 지원하는 데에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은 사적자본이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투자할 필요가 없는 여분의 재원이다.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쓰이지 않는 자금은 흑자를 창출한다.

우리가 말하는 요점은 간단하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기관이다. 사회복지는 그 자체로서 사회주의와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공동소유는 평범한 인민들이 아니라 오직 자본주의만을 위해 복무할 뿐이다.

 

복지국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우리가 만일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면 향후에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북유럽 국가의 역사와 사회주의 사상의 흐름들을 모두 학습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역사를 배우고자 한다면 사과와 배의 색깔을 혼동하는 일이 없이 사상이론의 기본적인 토대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슐스테트와 드라그스테트가 시작한 논의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발자취와 이들이 말하는 미래에서 답변을 구하고자 한다면 실망스러운 감정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슐스테트와 드라그슈타트의 논쟁은 유의미한 결과를 창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제안은 단지 다소 나은 자본주의를 향한 투쟁으로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을 뿐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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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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