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인식을 위하여 – 자본주의 남의 눈으로 사회주의 북을 바라보지 마라!  

* 아래 글은 <청년문화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http://cheongnyeon.net/v1/archives/1787
 
1

자신의 바깥에 있는 대상, 특히 미지의 대상을 바라볼 때는 자신의 사고, 인식, 경험에 갇혀 그 대상이 되는 사물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존재하지 않는 신에 대한 형상도 그 대상을 인간의 감정, 모습을 투영해서 바라본다.
신화도 그 전형적인 사례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모습대로 질투하고 때로는 싸우고 노여워하는 의인화된 대상들이었다. 물론 이 그리스 신화는 인간을 삶을 풍부하게 하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정반대되는 다른 사회구성체를 자신의 사회의 원리, 작동방식대로 투영해서 바라보는 것은 왜곡이 된다. 특히 반공을 국가의 사상적 기치로 하는 반공주의 사회의 모습 그대로를 북에 투영해서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날조가 되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한 북에 대한 악선전은 바로 남쪽 사회와 권력의 모습을 북에 투영해서 날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박정희 정권의 고문, 납치, 살해 같은 파쇼적 탄압이 북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굶어주고 맞아죽고 동사해 죽는 극단적 고난을 감수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던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 지도자들이 박정희 정권의 인사들처럼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고 부패와 탐욕에 찌들어 있는가 하면 ‘채홍사’처럼 여성에 대한 성적 유린을 저지르고 성적향락을 추구하는 타락자들로 묘사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남쪽에서의 권력과 권력자들의 실제의 모습을 은폐하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 그것을 북쪽에 그대로 전가하여 물타기 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 하는 한편 그것이 모든 권력일반의 모습이라고 묘사하여 북을 왜곡하고 남의 민중이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효과도 거둔 것이다. 그런데 또 저들 남의 권력자들의 인식은 자신들 권력, 권력자들의 사고, 행태들을 넘어설 수 없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북에 대한 악선전 역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해서 악의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조중동 역시 마찬가지인데 남에서 나타나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대립을 북의 평양과 지방의 문제로 투영하고 남의 극단적 부의 불평등을 투영해서 북에서도 자산불평등, 소득불평등이 극심해지고 있다고 프로파간다식 기사를 쓰고 있다.

2

사회주의에서의 합리적이고 발전된 생산방식을 채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인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레닌은 사회주의에서 테일러리즘 같은 생산방식을 도입하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본은 노동자에 대한 가일층의 억압을 위해, 자신들의 이윤 증대를 위해 공장 내부의 노동을 조직화하고 합리화한다. 그런데 모든 사회적 생산에는 위기들로 이끄는 카오스가 남아서 강화되는데, 그때에는 축적된 부가 구매자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수백만 노동자들은 일터를 찾지 못해 굶주려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테일러 시스템은 – 그 작성자들의 승낙도 없이 그리고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손아귀에 모든 사회적 생산을 장악하고 모든 사회적 노동의 올바른 배치와 합리화를 위해 자신들의, 노동자들의, 위원회들을 임명하는 그런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다. 거대 생산, 기계, 철도, 전화기 – 이 모든 것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네 배로 단축시키고 지금보다 네 배나 더 많은 복지를 그들에게 보장할, 수천가지 가능성들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 위원회들은 노동조합들의 도움을 얻어서 사회적 노동에 합리적인 배치의 이런 원칙들을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때에 그것은 자본에 의한 그 시스템의 노예화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레닌, 「테일러시스템 –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 레닌 전집, 24권, 임채희 역, <진실의 길> 35호, 1914년 3월 13일, 서명 : 엠. 엠. 수고본과 대조한 신문<진실의 길> 370-371쪽, 텍스트에 따라 인쇄되다)

이러한 레닌의 사회주의 생산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난이 제기되기도 했다.

“노동을 함으로써 인간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세계관은 뿌리깊은 토대를 가지고 있다 … 헤겔은 소위‘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동의 긍정성을 이야기했다 … 이런 논리가 헤겔좌파들에 의해 노동만이 인류를 촉진하여 해방시킨다는 선언으로 이어지고 맑스주의는 이것을 계승했다. 레닌도 그런 철학하에 게으름을 쁘띠부루조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철의 노동규율과 테일러주의에 열광하여 적극 도입을 서두른다. 이것은 스탈린에 의해 완성되는 데 결국 노동은 생산력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은 생상(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며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나쁜 것은 생산력자체를 질곡으로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주의란 생산관계의 소유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현실사회주의는 따라서 노동 그 자체에 대한 분석과 대안까지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사회주의가 추구했던 해방전략은 진정한 노동해방, 인간해방으로까지 나가지 못하고 단지 노동에 주인이 자본가에서 국가로 변하게 한 것에 불과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쨌던(든) 적어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유했던 가치관이 있다면 그것은 거칠게 말해서 긍정적 노동관이라 할 수 있다.”(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장 이수봉,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2009년 2월)

이러한 입장은 먼저 자본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 사회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의 구별없이 사회주의를 바라본다는 점과 노동규율 일반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또한 (국가) 자본주의론이라는 반동적 관점으로 쏘련 및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일반이 모든 인류사회 일반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사회 동력임을 무시하고 있고, 게다가 착취적 노동과 해방된 노동의 차이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 주장은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세력들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생산관계 변혁 대신에 분배관계의 변화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기본소득제는 계급투쟁 없이 그 재원을 어디로부터,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방안이 없다는 점에서 분배의 문제에서도 공상적이기조차 하다.)
위 글은 노동자정치신문, “기본소득제 비판(2) -이른바 ‘좌파’ 기본소득제의 반동성”(노동자정치신문 89호, 2012-10-31 23)이라는 기사에서 인용한 글인데, 위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레닌이 주장한 테일러주의는 착취가 사라진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착취의 수단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생산조직 방식이 된다.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신기계, 신기술 도입과 합리적 생산방식은 노동시간 실질적 단축으로 노동자의 인간다운 노동과 풍요로운 삶을 일구는 해방의 무기가 된다’구요?

  • 노동의 구상과 실행의 분리와 노동에 대한 세세한 통제를 의미하는 테일러주의에서 도대체 무슨 해방을 맛봅니까?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일지라도, 테일러주의는 일부 특정세력(관료, 감독관)이 노동에 대한 통제를 하도록 만드는데, 거기서 무슨 해방이 일어납니까? 사회주의 덕분으로 잉여노동을 빼앗기지 않더라도, 테일러주의에서 노동과정 자체는 억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동 안에서 무슨 즐거움을 찾습니까? (테일러주의는 사실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생산주의의 도구입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에서 테일러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 ‘합리적 생산방식은 노동시간 실질적 단축으로 노동자의 인간다운 노동과 풍요로운 삶을 일구는 해방의 무기’라구요? 이 말은 테일러주의로 통제되고 힘든 노동을 할지라도, 생산성이 증가되니,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해방은 노동 밖, 여가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노정협의 주장은 자신들이 비판했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과 동일하게 됩니다. 즉 해방은 노동 밖에 있다는 주장이 됩니다. 이런 모순적 주장이 어디 있습니까?
  • 사회주의에서는 노동과정 속에서도 노동자 자신의 통제가 이뤄지며, 즐거운 노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테일러주의를 수용하겠다구요? (물론 기술적으로 어쩔 수 없는 극히 제한적 부분에서는 테일러주의를 관료의 결정이 아니라 해당노동자의 합의 하에 수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디어는 정말 끔찍하군요.

예를 들어 현대차 공장에서 착취만이 문제입니까? 자본에 의한 노동과정 통제도 문제가 아닙니까? 자본이 관료로 바뀌어 노동과정을 통제한다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10시간씩 단순 반복으로 나사 쪼여 봤습니까? 먹물이 이 글 썼습니까? 미국식의 반공주의적 소련 비판도 문제지만, 이런 식의 소련 옹호는 긍정적 대안을 구성하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정신 좀 차리세요.”(한심이, 012-11-22)

구 사노준(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위원회, 현재 변혁당)의 인식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는 관료적/명령적 계획경제를 도입하는 한편, 자본주의적 생산시스템의 도입을 통해 노동자를 생산력 구성의 한 요소로 전락시켰다.”(사노준 장혜경, 변혁전략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 전면화를 위한 전국공동토론회 2차 토론 변혁전략)

쏘련 등 현실사회주의의 중앙집중계획을 관료적, 지령적 경제로 간주하고 ‘민주적 사회주의’ 운운하는 이들의 인식은 현 변혁당이 되었어도 하나도 변치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주의의 핵심원리, 생산의 조직화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결여되고 사회주의 건설의 구체성, 현실성이 결여된 일종의 범무정부주의다.
이러한 사고 역시 자본주의의 눈으로 사회주의를 투영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착취가 없는 해방된 노동, 소외가 없는 주체적 노동, 이로써 노동의 결과가 사회적 재생산 등을 제외하고 자신에게 온전하게 돌아오며, 자본의 이윤추구가 아니라 인민의 복리, 전 사회의 발전을 위한 사회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생산은 그 형식이 같다고 해서 그 내용과 본질이 같은 것은 아니다. 해방되지 않은 사회에 산다고 해방된 사회에 대한 인식을 해방되지 않은 인식으로 그대로 투영해보는 것은 노예다. 구제불능의 정치적 노예가 되는 것이다.
맑스는 흑인이 노예가 되는 것은 특정한 생산양식 하에서 벌어지는 문제라고 하고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맑스, 「임노동과 자본」, 박종철출판사 선집 1권 555쪽)

이 착취적, 노예적, 제국주의적 생산양식을 철폐하면 흑인노예는 해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생산수단이 됨으로써 착취와 지배의 수단이 되는 면방적기는 새 사회에서는 인류의 소비를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맑스는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계도입도 자본주의 하에서는 착취적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파멸적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 강도를 높이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의 노예로 만들며,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자본론 1권)

3

북에서는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이라고 3대혁명 소조 운동을 펼쳐왔는데, 이 가운데 기술혁명의 과제로 과학기술혁명을 강조해 왔다. 최근 이것은 CNC(컴퓨터수치제어)의 도입과 무인화, 자동화에 대한 강조와 실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을 인용하면서 역시나 자본주의의 눈으로 북의 생산을 투영해 바라보는 인식이 나타나고 있다.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자리를 빼앗을 가능성이 있는 무인화를 ‘실업’ 개념이 없는 사회주의 북한이 추구한다는 게 일견 모순돼 보이기도 하지만 젊은이 상당수가 군 복무 중이고 출산율까지 떨어져 생산가능인구가 적기 때문에 무인화는 필수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박수윤, ‘대북 제재 정면돌파’ 북한, 공장 자동·무인화 거센 바람, 연합뉴스, 2020.02.16.)

다음은 <좌충우돌 아줌마의 북맹탈출 평양 이야기 >의 저자인 김이경 씨가 위 연합뉴스 기사 내용에 대해 자신의 SNS계정에서 논평한 글이다.

“북의 젊은이들은 상당수가 군 복무중이라 무인화를 한다’고 평가절하하는군요. 마치 인구가 부족해서 어쩔수 없이 무인화 한다는 것처럼 묘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무인화는 노동자들의 실업으로 직결되지만, 사회주의에서 무인화는 노동력을 문화적인곳, 인민들의 후방생활을 더 풍부하게 하기위한 삶의 질 개선분야로 돌려집니다. 북의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에서는 공장노동자가 3000명인데 반해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노동자 가족 후방사업에 9000명이 돌려진다고 합니다. 후방사업은 무엇을 하냐고요? 노동자와 가족들을 후방생활인 농장, 양어장, 축산, 주택건설, 복지시설과 운영 그리고 전문화를 위한 교육과 전문연구인력 양성 등입니다. 북에서는 노동자들의 살림집도 건축회사가 짓는 것이 아니라 그곳 노동자들과 인민군대가 힘을 모아 건설합니다.”

다른 사회에 대한 인식, 특히 이북사회에 대한 이남사회의 인식은 편협, 왜곡되어 있고 반공주의적으로 날조되어 있다. 심지어 ‘진보진영’에까지 이러한 국가보안법이 강요한 반북주의 인식이 팽배해 있다.
방북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고초를 겪은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는 북에 대해 인식을 할 때 ‘내재적 접근법’을 강조했다.

“북한사회를 내재적으로 보자는 것이 북한의 모든 것을 옹호한다는 비난이 많았다. 그러나 내재적 관점은 일방적으로 타자의 모든 것을 자비심으로 바라보고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재적’이라는 말에는 ‘경험적’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타자를 자기 스스로가 그린 추상적인 대상으로 대하지 말고 직접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만 타자가 지니는 긍정성과 부정성이 함께 드러나고 타자에 대한 비판적 지평도 보이게 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우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경험은 결국 자기가 가졌던 기존의 편견을 넘을 수 있는 자기비판의 계기도 마련해 준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잘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다 … 즉 전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부분을 잘 알아야 하고,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또 전체를 잘 알아야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이 문제에 직면할 때 때로는 극단적 ‘불가지론’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우리는 인식하려는 대상의 성격을 잠정적으로 우선 규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 중요한 요소가 바로 경험적, 실천적인 검증이다 … 북한사회를 내재적으로 보자는 것도 ‘북한이라는 거대한 텍스트의 전체를 알 수도 또 부분도 사실 잘 모르니 아예 포기하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 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선 관점을 바꾸어 ‘역지사지’ 해 보고 그 다음에 ‘대화’라는 경험을 통해 이를 검증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에서 타자의 ‘완전한’ 이해를 담보하는 ‘왕도의 길’이 있었다면 이 세계는 이미 갈등 없는 완전무결한 세계가 되었을 것이다. ‘내재적’ 이해는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생활세계에서 적어도 무지와 갈등을 줄여보자는 인식 태도이지 타자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갈등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열쇠는 아니다.”(최미랑 기자, [경계인 인터뷰] 송두율 교수 내 영혼, 갈라진 영토 한쪽에 갇혀있지 않을 것”, 경향신문, 2017.05.03.)

그런데 북에 대한 “적어도 무지와 갈등을 줄여보자는 인식태도”를 가지는 내재적 인식을 위해서는 먼저 북에 대해 “직접 경험”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분단되고 정치적 교류는 고사하고, 지적, 학문적 교류도 철저하게 차단당한 이 사회에서 내재적 인식으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에 대한 참된 인식이 불가능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우리는 먼저 북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과 싸워야 한다. 반공주의와 이 반공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과 국가정보원 같은 국가권력의 백색테러폭력 체제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노예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통해 이러한 맹목적 반북주의 인식을 바꿔나갈 수 있다.
‘북한 바로 알기’는 맹목적 반북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중적 수준의 운동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적 인식으로 사회주의를 제대로 인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가 각각 무엇인지, 서로 어떻게 다른지 맑스주의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생산의 국유화와 계획화가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를 (국가) 자본주의로 보고, 특히 제국주의와의 불가피한 무기경쟁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자본주의로 간주하는 인식도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의 정치적 지도와 중앙집중적 계획을 관료주의의 지표로 보고 사회주의를 부정, 비난하는 태도 역시 사회주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현실주의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이 필요한데 사회주의의 원리상을 가지고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하는 사회주의의 현실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국제주의 사상과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뒤섞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사회는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다. 따라서 한 사회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지배와 항일투쟁,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미군정 진주와 노동자 민중의 해방열망 간의 계급투쟁, 남북의 분단과 전쟁, 정전체제의 존속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일제시대 항일무장 투쟁에서부터 우리의 인식은 철저하게 반공주의적으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강고하게 펼쳐진 항일무장투쟁사부터 학습하는 것으로부터 현대사를 새롭고 풍부하게 인식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결국 내재적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이 가리고 있는 반북주의를 극복하고 자주적, 역사적 인식을 해야한다. 자주적, 역사적 인식의 기초이자 바탕은 바로 과학적 인식이다. 내재적 인식이 결국은 특정한 대상을 참되게 이해하는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참되게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수단과 무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무장한 맑스레닌주의 사상일 수밖에 없다.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적 인식으로 무장하여 대상, 사물을 인식하는 것, 그것은 맹목과 독단, 편견을 극복하고 노예화를 벗어나 해방자가 되는 길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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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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