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사상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배우지 않을 것인가?

* 이 글은 현대사상연구소 [현대사상 22 로자 룩셈부르크](201912)에 실린 글입니다.

1. 로자 룩셈부르크, 수정주의에 맞서 싸운 맑스, 엥겔스의 계승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위대한 공산주의자다. 로자는 국제주의자였다. 로자의 주 활동무대는 독일이었으나 폴란드, 러시아를 넘나들며 혁명활동에 참여했다. 로자는 말과 행동이 철저하게 일치했다. 로자는 투옥을 반복하며 혁명가로 살다 혁명가로 죽었다. 로자는 불꽃같은 혁명가였다. 로자는 혁명의 투혼을 평생 간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재적인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로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독일 사회에서 이방인이자 여성이자 장애인이라는 이중 삼중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혁명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평생 동지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와 동갑으로 1871년 파리꼬뮌이 일어나는 해에 태어났다. 참고로 레닌은 1870년생이었다. 로자와 칼 리프크네히트와 레닌은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로자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평생 정치적 동지였다. 로자와 칼은 1919년 독일 혁명의 시기에 노동자 계급을 배신한 독일 사민당(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의 샤이데만과 로스케 같은 반동배들의 백색테러에 의해 참살 당했다. 레닌은 로자와 치열하게 논쟁하면서도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철저한 반전 국제주의자로서 로자와 정치적 동지가 되기도 했다.

로자의 사상적, 정치적 삶의 주요 궤적을 보면, 1800년대 말에서 1900년 초 독일 사민당 내 베른슈타인 수정주의와 투쟁했다.

1905년 러시아혁명을 보면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민당 내를 잠식하고 있는 관료주의와 투쟁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는 전쟁 반대 투쟁을 하면서 애국주의에 빠져 전쟁공채 발행에 협조했던 독일 사민당의 사회배외주의(사회주의 내부의 쇼비니즘) 세력과 투쟁했다. 이 시기에 혁명적 분파인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어 투쟁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18년 독일 혁명의 시기에는 지배계급이 된 독일 사민당과 독일 사민당에 협조하고 있었던 카우츠키 같은 기회주의자들과 투쟁하면서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클라라 체트킨(Klara Zetkin), 레오 요기헤스(Leo Jogiches) 등과 함께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을 창립했다. 로자는 독일 공산당이 만들어지고 나서 겨우 2주 만인 1919년 1월 15일 참살 당했던 것이다.

1) 베른슈타인 수정주의와의 투쟁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의 물질적 토대는 독일의 경제적 발전과 장기간 지속되는 독일의 평화의 상황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에서 성장하는 사회민주당을 막기 위해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하는 동시에 각종 보험입법으로 노동자 계급에게 양보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에 걸쳐 베른슈타인에 의한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주의가 대두되었다. 맑스주의 정치사상이 총체적인 사상이고 영향력이 높을 때이기 때문에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맑스주의를 일부 수정한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이러한 맑스주의의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혁명적 사상을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맑스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전면부정이었다.

베른슈타인은 1895년 엥겔스 사후 1년이 지나지 않은 1896년에 수정주의적 입장을 당시 당의 이론지였던 《새시대Die Neue Zeit》에 게시했다. 이윽고 1899년에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로 수정주의 사상을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내에서는 이와 관련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수정주의 반대의 선봉장이 되었다. 로자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서문에서 개혁(개량)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본 순간 놀랄지도 모른다. 사회 개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개혁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사회혁명, 즉 자신이 최종 목적으로 설정한 현존하는 질서의 전복을 사회 개혁에 대립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 개혁을 위한, 또 기존의 기반 위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그리고 민주적 제도를 위한 일상적인 실천 투쟁은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지도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 사회 개혁과 사회혁명 사이에는 분리될 수 없는 연관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은 수단이며, 사회혁명은 목적이기 때문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 · 송병헌 옮김, 책세상)

혁명가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 먼 변혁을 위해 대중들의 당면 요구, 당면 투쟁을 부정한다는 주장은 혁명진영에 대한 개량주의자들의 오래된 비판이다. 실제 한국에서도 민주노총 중앙에까지 노골적인 개량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

언제까지 실력도 결의도 준비도 없는 체제전복전략 DNA에 묶여 기·승·전·투쟁에만 머물 것인가. 중심부 노동자만 먹고살 만한 이 상태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언제 올 지 기약도 없는 자본주의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노동자·민중의 삶을 개선하고 구조를 바꾸고 미래를 실험하자. 우리 살아생전에 최소한 북유럽만큼이라도 만들어 놓자.(한석호 노동운동가, “민주노총의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에 부쳐”, 매일노동뉴스, 2018.02.05)

혁명세력들은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자본주의 이후”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 노동자·민중의 삶을 개선하고 구조를 바꾸고 미래를 실험하”는 것을 거부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로자의 말처럼, 당면 노동자 민중의 민주주의 투쟁과 임금인상 투쟁과 제반 복지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 적극 결합하여 대중의 상태를 개선하고 제반 제도를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세력들이다.

맑스, 엥겔스 역시도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중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했고, 노동조합이 임금을 인하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시도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자는 “개혁과 혁명”의 결합을 주장하는데, 반대로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 세력들이야말로, “사회민주주의의 최종 목표인 사회변혁을 포기하고, 반대로 사회 개혁을 계급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만들라는 충고로 귀결될 뿐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로자는 그러면서 베른슈타인의 유명한 수정주의 금언을 인용하고 있다.

최종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는 항상 무(無)이며, 운동이 전부이다.(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책)

로자는 개량주의의 근본적 한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쓰디쓴 자본주의의 바다에 사회개량주의의 레모네이드 몇 병을 넣어 이 자본주의의 바다를 사회주의의 단물로 바꾸겠다는 베른슈타인의 생각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며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덜 공상적이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 관계는 점점 더 사회주의적인 것에 접근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 법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에 더 높은 벽을 세운다. 이 벽은 사회 개량이 진전됨으로써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서도 약화될 수 없으며 반대로 더욱 강화되고 높아질 뿐이다. 따라서 이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로지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것뿐이다.(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책)

로자는 위 인용문 바로 위에서 푸리에(Charles Fourier)의 팔랑스테르(phalanstère), 즉 생산 협동조합과 소비 협동조합을 언급하고 있다.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점진적인 길로 두 가지 방식을 제시하는데, 노동조합 또는 “경제적 민주주의”나 협동조합이 그것이다. 현대자본주의에서도 소부르주아에 의해 특별하게 취급되고 있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반자본주의 개혁의 시도로 협동조합 노선을 제출하고 있는데, 이 협동조합 노선에 대해 철저하게 과학적인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다.

협동조합, 특히 생산 협동조합의 경우 그 본질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중간적 존재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교환 속에 있는 사회화된 소규모 생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 교환은 생산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이 무자비하게 착취하도록 한다 … 이렇게 볼 때 생산 협동조합의 경우,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완전한 {시장의} 절대권력으로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며, 자기 자신에 대립해서 자본주의 기업의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생산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든지 노동자들의 이익이 좀더 큰 경우에는 해체되는 식으로 소멸한다 … 즉 생산 협동조합은 가장 유리한 경우일지라도 지역적인 소규모 판매와 직접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수의 생산물, 특히 생필품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생산의 모든 결정적인 영역, 즉 섬유, 석탄, 금속, 석유, 그리고 기계, 철도, 조선 산업 등은 소비자 연맹에서, 따라서 협동조합에서 처음부터 배제된다.(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책)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로자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한 방편으로 제기되는 협동조합 노선에 대해 날카로운 과학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점점 더 독점이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민주화가 독점자본의 이 사회 지배를 은폐하는 수단인 것처럼, 이 독점강화의 모순을 은폐하고 환상을 불어넣기 위해서, 또는 독점을 해결할 수 있는 주관적 착각에 빠져서 ‘경제민주화’ 운동이 제기되고 있다. 이 경제민주화의 일환으로 협동조합 운동이 국가나 심지어 자본에 의해서도 지원되고 있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시민사회 단체에서도 역시 협동조합 운동이 마치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협동조합 운동은 로자의 비판처럼, 거대 자본운동의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력을 잃고 대다수가 파산하거나 점점 더 소생산의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다.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기는커녕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모순을 점점 더 확인하게 하는 사례로 전락하고 있을 뿐이다.(이에 대해서는 “협동조합 운동, 200년 동안 지속된 지독한 환상”, 노동자정치신문, 92호, 2013-02-02을 참고하기 바란다.)

베른슈타인의 국가개혁론, 법률개조론은 독일 사민당 내에서 그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독일 사민당은 맑스주의와 라쌀레주의가 통합해서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맑스주의가 노동자 계급 운동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통합은 불가피했다.

라쌀레주의는 국가기구를 중립적인 것으로 봤다. 라쌀레주의는 노동자가 보통선거권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사회주의 정책을 취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에어푸르트 강령은 맑스주의 사상이 관철된 강령이었으나 여전히 “자유로운 인민국가” 같은 라쌀레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국가는 계급지배의 수단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다수 노동자 민중의 지배와 억압 수단인 반면에, 사회주의에서 국가는 압도적 다수 노동자 민중이 반혁명 분자들을 지배, 억압하는 대중국가라고 보았다. 사회주의에서 국가는 구 지배계급에 맞서 싸워 자신을 소멸시켜야 하는 반(半)국가라고 보았다. 이 반국가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이다. 계급지배가 완전히 사라지면 국가는 그 존재이유가 없기 때문에 사라지고 단지 대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행정적, 경제적 조직화의 기능만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 사민당 내에서 라쌀레주의와 끊임없는 이론투쟁과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개혁한다고 하는 라쌀레주의는 맑스와 엥겔스의 투쟁으로 독일 사민당 내에서 사실상 맥을 못 추게 되었다.

그러나 엥겔스 사후 신흥 라쌀레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는 독일 사민당이 비스마르크 권력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이겨내고 의회선거에서 약진하고 난 뒤에 더 힘을 얻었다. 이 라쌀레주의의 정치적 계승이 바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나타났던 것이다. 로자는 이 신흥 라쌀레주의의 예봉을 꺾기 위해 날카롭게 투쟁하였다. 신흥 라쌀레주의는 정치권력 장악을 블랑키주의로 매도하면서 부르주아 입법주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요컨대 역사의 진행에서 법률 개혁은 항상 상승하는 계급이 정치권력을 탈취하고 기존의 모든 법체계를 충분히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고 느끼게 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세력을 획득하는데 이용했다. 베른슈타인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블랑키주의적 폭력이론이라고 비난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는 여기에서 수백 년 이래 인류 역사의 축이며 추동력인 것을 블랑키주의적인 오산(誤算)으로 여기고 있다. 계급사회가 존재한 이래, 또 이 사회의 역사를 만드는 본질적인 내용이 계급투쟁인 이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항상 상승하는 모든 계급의 목표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각역사적 시기의 출발점이면서 종착역이었다. … 따라서 법률 제정과 혁명은 뷔페에서 따뜻한 소시지나 차가운 소시지를 고르듯, 역사의 뷔페에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역사 발전을 위한 서로 다른 방법이 아니라, 계급사회가 발전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계기들이다. 이것은 남극과 북극처럼 또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처럼, 서로를 조건 짓고 보완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배제한다.

실로 모든 법률 헌장은 오로지 혁명의 산물이다. 혁명이 계급 역사의 창조 행위라면, 법률 제정은 그 사회의 정치적인 존속을 표현하는 것이다 … 법률 개혁 작업을 단순히 넓은 혁명으로, 또 혁명을 응집된 개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완전히 비역사적인 인식이다. 사회 변혁과 법률 개혁은 시간의 지속이라는 면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계기다 … 따라서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변혁 대신, 그리고 이에 대립해서 법률 개혁의 길을 찬성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같은 목표에 이르는 더 조용하고 확실하고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표를 택한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사회질서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과거 사회질서 속에서 단지 양적 변화들만 택하는 것이다 … 임금 노예제가 법률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임금 노예제를 단계적인 ‘법적인 방법으로’ 폐지할 수 있는가?(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책)

법률 도입으로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로자의 글 중에서 백미 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법률 제정과 혁명은 뷔페에서 따뜻한 소시지나 차가운 소시지를 고르듯, 역사의 뷔페에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로자의 풍자는 신랄한 문학적 비유인 동시에 혁명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다.

“법률 개혁의 길을 찬성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같은 목표에 이르는 더 조용하고 확실하고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표를 택한 것이다”라는 말은 베른슈타인 등 수정주의자들의 점진주의, 개량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자본주의는 헌법이나 법률에서 재산권, 물권법, 채권법 등 다양한 형태로 사적소유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적소유권은 봉건제의 지주적 소유, 수공업생산과 그 과도기의 공장제 수공업(메뉴팩쳐) 같은 후진적 소유에 맞서 대공업이 우위를 차지하는 경제적 관계, 생산에 대한 지배를 통해 확립되었다. 이 사적소유의 확립과정에서 나폴레옹 법전에서 보듯, 부르주아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법률관계가 제정되었고, 최종적으로는 구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정치혁명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다. 3권 분립은 구 지배계급과 신흥 지배계급 간, 정치세력들 간의 계급투쟁의 결과물, 힘의 역관계를 반영하여 공동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했다. 물론 구 지배계급도 새로운 사회 변화에 맞춰 왕정복고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 타협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승자는 자본가 계급이었다.

자본주의 법률은 각종 노동악법 도입에서 보듯, 자본가들의 착취를 보장하고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도록 한다.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하에서 제정된 정리해고제, 파견제, 기간제법과 파업권을 제약하는 법률과 손배 가압류 등 민사상의 억압적 법률 등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취가 법률로 보장돼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헌법에서는 국민적 자유의 행복추구권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법개정으로 착취를 철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파괴하고 피착취, 피억압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혁명’이다. 문재인 정권이 ‘촛불혁명정부’라고 명명하여 ‘혁명’의 의미를 왜곡, 타락시키는데 혁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압받고 착취 받는 노동자 민중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노동자 민중은 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여 자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전 사회적인 집단적인 소유로 만들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이 지지부진하거나 기만적이거나 본질적인 변화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것은 기존 제도적 틀 내에서, 기존 기구를 하나도 청산하지 않으면서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엥겔스도 사적유물론에 대한 설명에서 경제적 토대와 정치적 상부구조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 ― 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 ―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 ― 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1890년 9월 21일)

엥겔스는 경제적 토대가 궁극적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지만 반대로 상부구조가 경제적 토대에 미치는 상호작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엥겔스는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계급투쟁의 결과들”에 따라서 법률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법률은 “계급투쟁의 결과들”, 즉 힘의 역관계도 반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승리한 계급이라 할지라도 전투에서 패배한 계급의 입장을 일부라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률 제정은 혁명의 결과로 승리한 계급의 계급 지배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노동자 민중의 투쟁성과도 일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만들어지면서 노동자보호에 대한 일부 전진적인 조치들이 있는데, 그 제헌헌법은 민중의 피가 들어가 있다. 일본의 ‘평화헌법’에도 역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수천만 아시아 인민들과 일본 인민들의 피눈물이 담겨져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이 지배계급의 계급지배의 수단이라는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기본권을 위한 투쟁 역시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개정을 통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견해는 로자가 명철하게 폭로한 것처럼 법적 환상에 매몰된 결과다. 법적 환상은 반드시 의회주의와 연결된다. 법을 제정하는 것이 의회(국회)이기 때문이다.

2) 독일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와의 투쟁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사민당의 관료주의에 대한 분노와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로자는 사민당과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료주의에 맞서 싸웠다. 특히 로자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몰래 잠입해서 격동의 러시아 혁명을 직접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투옥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로자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통해 대중의 역동성을 목격하고는 1906년 《대중파업론》을 통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중요한 주장을 한다.

정치투쟁이 확산되어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됨과 아울러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주고 또 싸우려는 충동을 강화시킴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띄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자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바로 이 저수지에서 정치투쟁은 늘 새로운 힘을 끌어내며 동시에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칠줄 모르는 경제적 공병(工兵)들을 각각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끌어간다. 그로부터 대규모 정치투쟁들이 뜻하지 않게 폭발한다.(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풀무질, 최규진 옮김)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2년)에서 비판한 것은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이 아니었다. 이미 러시아에서는 1800년대 말부터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심지어 제도개선 투쟁이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에 대한 폄하도 아니었다. 레닌은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이 점점 더 분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짜리즘 타도라는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고, 러시아 내에서 전위정당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방기하고 대중투쟁의 뒤를 쫓아가기에 급급한 사회주의자들의 경제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레닌은 로자와 마찬가지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관계에 대해 로자와 같은 관점으로, 심지어 비슷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제파업과 정치파업은 서로를 지탱하며, 각각은 다른 하나의 힘의 원천이 된다. 파업의 이러한 형태들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진정으로 광대한 대중 운동, 더욱이 전국적 의미의 운동은 불가능하다. 운동이 초기 단계에 있을 때 경제파업은 종종 후진 대중을 일깨우고 분발시키며, 운동을 전체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 경제파업과 정치파업 사이의 연관은 항상 존재했다. 반복해서 말하는데, 그러한 연관이 없다면 위대한 목표를 쟁취하려는 진정 거대한 운동은 불가능하다.(레닌, “경제파업과 정치파업”)

다만 레닌에게는 제도화된 노동조합은 없지만 대중의 역동성과 자발성은 있는데, 정치운동은 아마추어리즘적이고 제대로 조직된 목적의식적인 당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반면에, 당시 로자에게는 거대한 50만에 육박하는 거대한 당과 125만에 달하는 거대한 노동조합은 있는데 관료주의화 된 당과 조합주의화 된 노조가 문제였던 것이다. 로자는 독일 사민당과 비대한 독일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관료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특히 1895년에서 1900년 사이의 엄청난 경제적 번영기에 독일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빠르게 성장하여 노동조합이 완전하게 독립하였고 노동조합들의 투쟁 방법이 특화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상임 노동조합 관료제가 도입되었다 …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해야 할 특화된 전문적인 행위는 당연히 본질상 편협한 시야와 평화적인 시기의 분절된 경제투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너무나 쉽게 관료주의와 편협한 전망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열중하고 있는 경제적인 게릴라 전쟁의 그럴듯한 임무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사소한 경제적인 성취, 모든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에 최고의 가치를 두게 하고, 그리하여 더 커다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부르주아적 사회 질서가 노동조합 투쟁에 강요하는 객관적 한계를 숨기면서부터, 노동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와 관련하여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모든 이론적 비판에 대한 적대가 생겨난다 … 사회민주주의적인 이론에 대항한 전선이 마침내 형성되었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적인 논리에 맞서는 가운데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지 않는 노동조합 투쟁을 통하여 경제적인 진보의 끝없는 전망을 열어 줄 ‘새로운 노동조합 이론’을 암중모색하고 있다.(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책)

사민당은 의회 내에서의 정치투쟁,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이라는 오늘날 ‘양날개론’으로 대표되는 역할 분담론이 이때 만들어졌다.

독일에서는 정치활동은 사회민주당, 경제활동은 노동조합으로서, 서로 독립하여 동권론(同權論)이 주장되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르조아사회의 평온한 ‘평상적’ 발전이 가져다 준 환상이며, 여기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정치활동이 의회투쟁에서끝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목전의 경제활동에 투입되듯이 사회민주당은 목전의 정치활동에 몰두하는데, 그것은 어떻든 부르조아사회제도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에 불과하고, 훨씬 저 쪽에서 있는 궁극목표를 위한 일단계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과의 동권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끌어내리고, 사회민주당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정당에서 소시민적인 개량주의정당으로 변질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민주당의 기회주의적 경향의 하나의 표현인 것이다.(孝橋正一, 《영원한 여성 로자 룩셈부르크 -생애 ․ 사상 ․ 편지》, 도서출판 여래)

독일 사민당은 의회주의에 빠져들고 노동조합은 정치투쟁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조합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독일 노동조합 운동의 성장과 관료화는 “1895년에서 1900년 사이의 엄청난 경제적 번영기”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시기는 베른슈타인 수정주의가 태동하고 번성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당 내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도 그 동반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노동조합 운동 역시 “노동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상실한 채 이를 비판하는 혁명이론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했다.

노동조합 관료들 사이에서는 로자가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노동조합 투쟁을 “시지프스의 노동”으로 간주했다고 하여 분개했다. 그러나 로자는 위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언급했듯이, 노동자들, 노조의 일상투쟁과 생활개선 투쟁에 적극적 의의를 부여했다. 다만 이러한 투쟁은 자본의 공격에 맞서 노동자들의 삶을 지키거나 개선시키지만, 이 투쟁만으로는 노동자들의 착취질서를 벗어나지 못하며 공황이나 자본의 생산성 향상 등으로 인해 언제든지 성과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게다가 “경제적인 진보의 끝없는 전망을 열어줄 ‘새로운 노동조합 이론’”은 노사 파트너쉽, 노사 상생, 노사협조 등으로 표현되는 자본의 사상에 불과했다. 이는 결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무장해제 시키고, 노조를 약화, 파괴시키며 노동자들을 자본의 노예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게다가 독일은 이후 “경제적인 진보의 끝없는 전망”은커녕 공황과 전쟁과 살육과 백색테러, 심지어 파시즘의 회오리 속으로 끌려들어가야 했다.

2. 한계 및 오류

그러나 동시에 로자는 일정한 정치적 오류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로자같은 위대한 인물의 사상과 실천은 우리같이 범속한 수준으로는 평가가 불가능하다. 오직 레닌과 같은 위대한 혁명가의 사상과 관점으로써만이 그 정치적 오류와 한계를 비판할 수 있다. 레닌은 로자의 정치적 한계나 오류를 비판할 때조차도 로자의 혁명적 입장에 대한 찬사를 전제하고 있었다. “독수리는 때로는 닭보다 낮게 날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의 높이에 이를 수 없다. 그녀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말은 지금도 유명한 이야기다.

다음에 살펴볼 것이지만, 로자의 정치적 약점인 ‘민족자결권’에 대해서 비판할 때조차도 “전반적으로 유니우스의 소책자는 훌륭한 마르스크스주의 저작이며, 십중팔구 그 결함은 아마 어느 정도는 우연히 발생한 것일 것이다”(레닌, 《유니우스 팸플릿에 대하여》, 아고라출판사, 양효식 옮김)라는 전제를 잊지 않고 있다.

1) (초)중앙집중주의론

1902년 러시아 2차 당대회 이후 당은 당원의 자격 조건과 당의 성격을 둘러싸고 엄청난 내분에 휩싸였다. 이 논쟁은 당을 지지자 정도로 하자는 마르토프가 중심이 된 멘셰비키와 더 엄격한 규율을 갖추고 당의 한 부서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당으로 하자는 레닌 중심의 볼셰비키로 갈라졌다. 이는 당원의 자격조건뿐만 아니라 좀 더 대중적인 정당으로 할 것인지 전위정당으로 할 것인지 당의 성격을 둘러싼 차이도 있었다.(물론 레닌이 말한 전위정당도 대중적 전위정당으로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논쟁은 러시아 내부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주된 관심 사항이었다. 당시 독일 사민당 내에서 저명한 인사들 대다수가 멘셰비키의 입장을 지지했다. 로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격파하고 사실상 합법성을 가진 대중정당으로 발전한 사회민주당의 입장에서 레닌이 주장하는 당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1904년 로자는 레닌의 당조직론에 대해 “극단적인 중앙집권주의”, “무자비한 중앙집권주의”로 간주하며 신랄하게 비난을 했다.

일반적으로 사회민주당의 전술정책은 고안, 계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전략 정책은 일련의 전진해가는 자생적 계급투쟁 행위의 산물이다. 의식화되지 않은 대중이 의식화된 소수를 앞서며, 역사과정의 논리가 그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의 주관적 논리에 앞선다. 이것은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조직이 보수적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얻은 바로는, 거의 모든 시기에 노동운동은 당이 총력을 기울려 일할 새로운 지평들을 열러간다는 것이다. 오히려 당의 지도조직들은 노동운동이 보다 넓은 지평으로 전진해가는 것을 가로막으려, 그 노동운동에 족쇄를 채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 … 레닌식의 초중앙집권주의(Ultra Centralism)은 창조성과 자발성을 질식시키기 쉬운 상하명령식 발상에 다름아니다. 초중앙집권주의는 결코 긍정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못한 생각이다. 레닌의 관심은 당의 활동을 풍성하게 하기보다는 당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당의 활동을 하나로 통합시키기보다는 결박시키게 된다.(로자 룩셈부르크,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두레)

로자는 심지어 “사회민주당의 전술정책은 고안, 계획될 수없는” “자생적 계급투쟁 행위의 산물”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 때문에 로자는 “자발성주의자”라는 비난마저 듣게 된 것이다. 《대중파업론》에서도 로자는 러시아에서 분출된 혁명을 보면서 “사회민주당의 임무가 대중파업을 기술적으로 준비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전체 운동에 대한 정치적 지도라는 점이 자명해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적 지도를 강조하면서도 기술적 지도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로자는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조직이 보수적 역할을 하게 된다”며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일반화하려고 했다.

1920년에 쓴 저작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교훈에 대해 말하면서 러시아 혁명의 기본적 특성들을 그 이상으로 과장하여 “확장할 경우에는 엄청난 오류에 빠질 것이다”(《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라고 러시아 혁명의 모든 점을 일반화하고 보편화하는 데서 오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레닌은 “역사의 현 시점에서, 모든 나라에게 가깝고도 불가피한 그들 미래의 어떤 것, 그것도 무척 본질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러시아 모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레닌에게 있어서 혁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지점은 무엇이고 전 세계 혁명운동이 놓치지 말아야할 핵심 교훈은 무엇인가?

지금 확실히 누구나 깨닫게 된 것은 만일 우리 당에 가장 엄격하고 정말로 강철같은 규율이 없었더라면, 또는 노동계급 전체 대중으로부터, 곧 후진계층을 지도하거나 그들을 자신들과 나란히 가도록 할 수 있었던 사려 깊고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유력한 노동계급 내의 모든 분자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볼셰비키가 단 2개월 반도 권력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레닌, 같은 책)

“절대적인 중앙집중화와 가장 엄격한 규율이라는 것이 부르조아지에 대한 승리의 한 본질적 조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레닌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볼셰비키형 전위정당으로 무장시키려고 노력했다.

레닌은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 사민당이 보여준 배외주의적 입장으로 전쟁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로자 룩셈부르크 등 혁명적 분파들이 이때 일찌감치 당을 독립하여 혁명적 당을 만들어 투쟁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혁명적 분파들은 실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당내 이데올로기 투쟁을 했지만 그들을 당 밖으로 축출하여 당의 사상적 독자성을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은 문제였다. 또한 레닌은 카우츠키를 비롯한 중앙파 역시도 이데올로기적으로 폭로하고 당적으로 일찌감치 분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볼셰비키는 비합법을 중심에 두면서도 합법과 반합법적 활동 등을 탄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당은 혁명적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적 힘을 발휘하고 당의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18년 독일 혁명의 상황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공산당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독일공산당의 창당 자체가 볼셰비키형 정당으로의 전환점일 수 있으나 너무 때늦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칼 카우츠키, 레오 요기헤스가 사회민주당의 반동배들에게 타살을 당하고 독일 혁명이 실패하고 난 뒤에야 볼셰비키형 전위정당으로의 무장의 필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로자와 레닌의 당논쟁은 러시아 혁명의 승리에 비해 로자와 독일 혁명의 비극적 패배로 명확하게 누구의 주장이 진리인지 명확해졌다.

혁명 상황에서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백색테러에 당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당지도부들 역시 비합운동을 위한 기술을 거의 배우지 못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레닌의 볼셰비키가 1917년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에게!”를 내걸었던 시점에서도 볼셰비키는 때 이른 혁명 시도를 자제시킬 수 있었던 반면에 독일 공산당은 그러지 못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끊임없이 통일전선론 같은 당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논의하고 현실투쟁에 적용했음에 비해 로자와 독일 공산당은 그러지 못했다. 공장세포론 같은 당조직론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치열한 사상적 통일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도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은 그러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진실로 혁명적 운동이 범한 오류는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박영옥 역, 두레)

로자를 “자발성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만든 유명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자들의 논리로도 자주 사용되고, 더 나아가 쏘비에트 비방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이용됐다. 그런데 로자는 “현명한 중앙위원회”와 “진실로 혁명적 운동”이 서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로자는 지도자와 대중을 분리시켰다.

로자와 독일 공산당의 비극은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없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현명한 중앙위원회”나 더 나아가 이 중앙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당전체가 비록 때로는 오류를 범하고 시행착오를 거친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 단련되고 성숙해지면서 혁명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승리할 수 있고, 승리 이후 승리를 굳건하게 할 수 있다.

2) 민족자결론의 문제

로자는 국제주의적 관점에 섰지만 민족자결권에 대해 반대했다. 민족자결주의가 폴란드에서 대두된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사회주의를 향한 목표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비판은 로자의 가장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로자가 1915년 4월에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감옥에서 쓴《유니우스 팜플렛》은 1916년 발행됐다. 로자의 관점은 《인터나치오날레》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레닌은 이 입장을 비판했다.

이 야만의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 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민족적 이익이란 것도 근로인민 대중을 그들의 화해할 수 없는 적인 제국주의를 위해 복무하도록 몰아가는 기만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 지금의 전쟁(제국주의 전쟁: 필자 주)에 대한 규정을 제국주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 더구나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나 반식민지가 민족 전쟁을 벌이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 식민지와 반식민지(중국, 터키, 페르시아)이 인구는 거의 십억 가까이 된다. 즉 지구 인구의 반이 넘는다. 이들 나라에서 민족해방 운동은 이미 매우 강력하거나, 성장해서 성숙해가고 있다. 모든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식민지의 민족해방 정치는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의 민족 전쟁으로 계속될 것이다.

로자의 ‘민족자결권’에 대한 반대는 이후에는 훨씬 더 완강해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에 쓴 이 글은 로자의 사후인 1922년에야 공식 출간됐다.

러시아 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이 자민족의 운명을 독립적으로 결정할 권리-“심지어 러시아로부터의 정부분리권을 요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를 갖는다는 정식(Formula)은 밀류코프와 케렌스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정에서도 레닌과 그의 동지들에 의해 특별한 슬로건으로 완고하게 재천명되었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이 같은 정식은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국내정책에서 핵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 레닌과 그 일파가 그 슬로건을 내세우며 보여준 완고함과 경직성은 놀랄 만한 것이다 … 각 민족의 민주적 정치활동이 실제로 가장 값있고 중요한 사회주의 정책의 토대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레닌과 볼셰비키의 그 유명한 ‘민족자결권’은 공허한 쁘띠부르조아의 허장성세이며 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모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 레닌과 그 일파는 ‘분리’까지 포함하여 민족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핀란드 ․ 우크라이나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발틱 국가들 ․ 코카서스 등을 러시아 혁명에 대한 신념에 찬 맹방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의 결과를 목도해야만 했다. 이들 ‘민족’은 차례로 새로 인정된 자유를, 러시아 혁명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면서 그것에 반대하는 독일 제국주의와 동맹하는 데 사용했으며, 독일의 후견 아래 러시아에 대한 반혁명의 기치를 내걸기도 했다.(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박영옥 역, 두레)

과연 국제주의는 모든 민족자결(병합 반대와 분리의 자유)을 부정해야 하는가? 로자의 국제주의는 ‘순수’국제주의였다. 로자는 국제주의를 식민지 해방투쟁과 긴밀하게 연결시키지 못했다. 로자는 민족자결권에 대해 “공허한 쁘띠부르조아의 허장성세이며 사기”라고 했는데, 레닌은 지구 인구의 반이 넘는 식민지, 반식민지의 문제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민족자결에 대한 완강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지지했기 때문에 전 세계의 식민지, 반식민지 인민들은 러시아 혁명에 열광하고 민족해방 투쟁을 통해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로자는 “레닌과 그 일파”가 민족의 분리의 자유를 포함하여 민족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으로 인해 이들 민족들이 “새로 인정된 자유”를 러시아 혁명을 반대하고 독일 제국주의에 동맹하면서 반혁명의 기치를 내거는 계기도 했다고 했다. 로자의 이러한 입장은 지극히 일면적인 관점이다. 우선 이는 전 세계 식민지, 반식민지에 끼친 혁명적인 영향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하다. 또한 민족자결권 부여를 러시아 혁명에 반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도 근거가 약하다. 만약 혁명 러시아가 민족자결권을 반대하면서 로자 식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편입시키려 했다면 오히려 민족감정과 권리에 상처를 받은 이들 민족들은 러시아 혁명을 더욱 더 격렬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또한 역사는 로자가 예로 들었던 대부분이 민족들이 쏘비에트에 자발적으로 편입이 되거나 사회주의 국가가 된 것으로 로자의 주장이 오류임을 입증했다. 쏘비에트연방(쏘련) 자체가 수많은 민족들의 결합체이기도 했다. 역사는 민족자결권 원칙이 얼마나 현실주의적이었고 중요한 원칙이었는지를 보여준다.

3) 자본축적론

로자는 《자본축적론》에서 맑스가 자본론 2권에서 다룬 “재생산 표식론”에 대해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히 마르크스와 분리된다”(사씨사까 이쓰로, 《마르크스주의 비판과 반비판》)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맑스는 “재생산 표식론”에서 사회의 전체 생산을 제1부분인 생산수단 생산부분과 소비수단 생산부분으로 나누고 이를 통해 단순재생산과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런데 로자는 맑스의 표식을 비판하면서 “잉여 생산물의 판로를 ‘스스로는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제 사회층이나 제 사회’에서 구하고, 이것에 의해 ‘제국주의 기초의 건설’을 ‘자본축적의 제 법칙’에서 도출하려고”(같은 책) 한다. 그러나 맑스의 “재생산 표식론”을 “불비례설”이라고 하면서 이 재생산 표식론으로부터 자본주의 축적의 애로를 발견하고 공황론을 도출해 내려는 시도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러시아의 합법적 ‘맑스주의자’인 투간 바라노프스키처럼 이를 토대로 “축적의 무한한 진행을 논증하려고”(같은 책)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과잉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는데 반해, 자본의 무한한 이윤축적욕에 의해 대중의 소비를 제한하려는 “절대적인 제 분배관계를 기초로 하는 소비력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같은 책)고 하고 있다. 따라서 “투간이 표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미비함을 주장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한한 전진을 논증하려고 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표식의 미비함을 주장하여 자본축적이 필연적 중단을 논증하려고 했다고. 두 사람은 같은 줄기에서 나온 두 개의 가지 – 단, 정반대로 뻗은 – 이다.”(같은 책)

로자는 맑스와 엥겔스의 자본주의 자체 내의 적대적 계급모순을 포착하려 하기 보다는 “비자본주의적 환경”의 소멸로 자본주의 붕괴를 예측했다. 그러나 로자는 맑스주의의 방법론을 오해 내지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비변증법적이었다.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인 환경’, 즉 국내에서의 독립소생산이나 반노동제적 농업, 그리고 국외에서의 ‘저개발국’ 등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이 ‘비자본주의적인 환경’이라는 먹이를 다 먹어버리고 말 때가 온다. 즉 세계전체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으로 분리되어 버릴 때가 온다. 그 때에 세계는 ‘순수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화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로자는 말한다. ‘순수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축적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비자본주의적 환경’이 ‘붕괴’되었을 때 자본주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의는 또한 영원히 유산되는 것이다 … 로자의 ‘변증법적 모순’은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다. 변증법은 내적모순의 운동법칙이다. 로자는 자본주의를 그 내적 모순의 전개로 포착하려 하지 않고 ‘비자본주의적인 환경’ 요컨대, ‘제3자’와의 외적 대립의 전개로서만 포착하려 하고 있다 … 로자의 이론에서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역사적 한계’는 그 내적 모순의 전개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자본주의적인 환경’이라는 외부 ‘제3자’의 소멸 속에서 구해진다. 그러므로 이 불순한 현실은 내적모순 즉, 계급투쟁의 전개를 거치지 않고 ‘외부’의 소멸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붕괴되는 것이다.(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 《자본주의 붕괴논쟁》,〈보론: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동붕괴론 비판〉, 과학과 사상)

4) 농업문제

로자는 러시아 혁명 직후에 러시아에서 즉시 집산화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로자의 요구대로였다면 러시아에서 노농동맹은 깨졌을 것이고, 러시아 혁명 권력은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끝난 뒤 10년 이상이 지난 1929년에야 당내의 격렬한 논쟁을 거쳐 시작될 수 있었다. 로자의 농업문제에 대한 입장은 ‘극좌’적 오류라 할 수 있다.

3. 한국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2018년은 맑스 탄생 200주년이고 2019년은 로자가 참살당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로자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웠는데 한국에서도 여전히 제국주의에 의해 전쟁위기가 끝나지 않고 있다. 남북, 조미 정상 회담과 그것의 결렬과 그것의 재성사 가능성 등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전쟁위기가 고조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북, 조미 정상 회담의 성사되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나아가는 길은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수준에서의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이다.

그런데 “북핵”을 핑계로 북에 대한 경제제재와 전쟁책동이 지속되고 있지만, 북핵은 미제국주의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다. 미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제국주의 체제가 북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고립말살 정책이 “북핵”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이 전쟁위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21세기에도 역시 제국주의 전쟁 책동이 전쟁위기 고조의 원인이다. 특히 트럼프, 아베는 군국주의 책동의 최선두에 서 있는 반동적인 전쟁 책동자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른바 ‘좌파’ 대다수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채, 미제국주의와 북핵 둘 다가 문제라며 양비론, 중립주의에 빠져 있다.

레닌에 의해 ‘좌익 공산주의’라고 호된 비난을 받았던 세력들은 오늘날에도 로자 룩셈부르크 사상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로자의 사상을 계승, 지양하는 관점이 아니라 로자의 오류를 극단화함으로써 기회주의 세력으로 변모하고 있다. 로자는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몇 가지 측면을 비판하면서도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두에서 앞서 나가는 불멸의 역사적 기여”이며, “이 점에서 도처에서 행해진 사회주의적 변화의 미래는 ‘볼셰비키주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러시아 혁명》, 같은 책)며 찬사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로자의 계승자들을 자처하는 정치세력들 중에는 트로츠키주의와 좌익 공산주의 세력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반쏘 반북주의를 공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진실로 혁명적 운동이 범한 오류는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박영옥 역, 두레)라며 로자의 유명한 “초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비난은 오늘날 쏘련 및 현실사회주의를 “전제주의”로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위 로자의 저서에 대한 버틀램 울프의 서문을 보라.)

로자는 오늘날 반레닌주의적이고 반쏘 반북적이며 때로는 무정부주의적이기도 한 “신좌익”에 의해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 그녀는 프롤레타리아트 속에 부르조아지의 영향을 전달하기 위한 기회주의적 ‘조직’과,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조아지에 대한 투쟁으로 이끄는 혁명적 ‘조직’ 간의 일체의 구별을 없애버리는 길을 열었다. 여기에 이 위대한 공산주의자 ‘레닌’의 이름이 ‘조직’으로부터의 ‘개인’의 자유, 또는 ‘스탈린이스트당’의 ‘관료주의’ 지배에 대한 타도를 요구하는 현대의 ‘신좌익’ 반공주의의 방패막이에 이용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녀 자신은 죽기2주 전에 독일공산당의 창립에 지도적인 역할을 완수함으로써 완전하게 스스로의 잘못을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 《자본주의 붕괴논쟁》, 〈보론: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동붕괴론 비판〉, 과학과 사상)

로자의 최대 정치적 약점은 ‘민족문제’에 있다. 로자의 국제주의는 이 점에서 일면적이었다. ‘민족자결권’을 부정하는 국제주의는 참된 국제주의가 아니다. 오늘날 ‘국제주의’를 자처하며 반제국주의를 외치는 세력들도 이 점에서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북에 대한 미제국주의의 침략 책동에 맞서 북이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이 공세와 맞서 싸우는 것은 오늘날 ‘민족자결권’의 문제다. 이들의 추상적인 국제주의는 리비아, 시리아, 우크라이나, 최근에는 이란 등 세계전역에서 미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전 세계 제국주의 진영이 자행하는 전쟁과 침략책동에 대해서 또한 중립주의, 양비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은 이들 나라에서 제국주의와 손잡고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에 나서는 세력들을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간주하고 환호하는 것으로 제국주의 체제에 봉사하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책동에 맞서 싸운 로자의 불꽃같은 투쟁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날 로자 룩셈부르크 사상은 앞에서 말했듯 계승과 지양의 대상이다. 로자의 참살자는 독일 사민당 지도부들이었다. 독일 사민당은 혁명을 참살하면서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노사정위원회(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의 사민주의 교섭전략이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창궐하고 있다. 노동조합 운동을 관료주의, 교섭주의, 타협주의로 타락시키고 의회주의 양날개론을 완성하려는 시도를 분쇄해야 한다. “새로운 노동조합 운동” 운운하며 자본과 상생, 타협하려는 시도를 분쇄해야 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꼬뮌을 보면서 “기존의 국가기구를 그대로 인수해서 사용할 수 없다. 분쇄해야 한다”는 국가론의 정수가 담긴 사상을 발전시켰다. 라쌀레주의,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의 반노동자적 전통이 오늘날 ‘사민주의’라는 개량주의자들의 의회주의, 국가기구 개혁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대체로 자발성과 역동성이 살아 있다. 로자와 반대로 우리는 레닌의 문제의식, 즉, 경제주의와 조합주의에 맞서 싸우는 의식적인 투쟁을 통해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해나갈 수 있는 혁명정당이 필요하다. 로자의 혁명성을 계승하되, 로자의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는 맑스주의, 21세기의 혁명적 맑스레닌주의가 우리의 사상적 기치가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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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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