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대 김정호 박사의 발제문 “중국 사회주의인가 국가자본주의인가” 비평

12월 15일 <현실 사회주의 비교와 한국사회 미래 전망> 토론회에 발제문으로 실린 북경대 김정호 박사의 “중국 사회주의인가 국가자본주의인가”에 대해  비평을 올린다. 먼저 무엇보다도 김정호 박사가 중국사회에 대해 쓴 글은 먼저 한국 언론과 서방언론이 중국에 대해 유포하고 있는 부정적 시각, 게다가 좌파들 대다수나 맑스레닌주의 진영 일각에서도 국가자본주의나 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상황에서 중국사회의 새로운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균형적 인식을 높이게 하는 글이라 본다.

중국 인민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 수준과 소비 수준, 사회보장수준, 중국의 “상위 20위까지의 기업 중 국유기업이 대부분이고 민영기업은 모두 4개가 포함”, “50위까지의 순위를 소개하자면 민영기업은 모두 13개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 밖에 되지 않는다”는 글의 내용은 중국의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자본주의 언론이나 좌파들이 중국의 ‘농민공’들의 문제를 중국사회의 첨예한 계급모순의 중대한 현상으로 얘기하는데, “농민공들은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모두 집체소유기관(촌위원회)로부터 일정 면적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는 ‘든든한’ 후방기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한기에 이들은 도시에 나와 돈을 번 뒤 농촌에 돌아가서 그 돈으로 새집을 짓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이 같은 농민공들의 존재 양식도 많이 바뀌고 있는데, 자신의 토지를 ‘농촌합작사’라고 하는 일종의 새로운 생산협동조합 형식의 집체경영 주체에 위탁한 후, 자신은 가족을 모두 데리고 도시에 나와 아예 ‘도시민’으로 정착하는 사람들이 점점 주류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내용은 기존에 알 수 없었던 내용으로 중국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사회주의 사회로 여기며, 맑스레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실제 현실을 “위장하는” 술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흥미롭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법률’은 이 같은 제도화된 폭력을 뒷받침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여기서 중국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하는 이들의 논리를 쫒아가노라면 필연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 본질상 자본주의계급의 국가가 ‘사회주의로 위장’하기 위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본질상 대립되는 맑스레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부정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그런 방식을 통해서 그 국가가 실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대중들에게 ‘사회주의적 기만과 환상’을 불어넣어 주는 것만으로 지배세력은 과연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엔 이렇듯 맑스레닌주의를 자발적으로 대중에게 전파시킴을 통해서 기만적인 자본가계급의 국가는 (만약 중국이 사회주의로 위장한 자본가계급의 국가라면) 대중을 혁명화 시키게 되고, 그로부터 먼저 스스로 전복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맑스레닌주의 이론과 사상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김정호 박사의 글 중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인식하는 세력들, 사람들에 대해 맑스주의의 기본적 원칙인 소유문제를 가지고 한 사회 성격을 이해하지 않고 ‘노동자직접통제’의 문제를 가지고 소유문제를 대체하여 현실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세력들에 대한 비판은 주목해볼만한 평가이다.

첫째, 그들이 주장하는 이 같은 ‘노동자 직접통제’ 혹은 ‘자치’라는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될지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이론은 대단히 추상적이며,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둘째, 이 같은 ‘노동자 직접통제’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라고 할 때, 그것과 자본주의에 있어 당면한 구체적 변혁적 과제와의 관계 역시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즉 이전에는 소유관계의 철폐를 반자본주의 투쟁의 핵심강령으로 내걸었다고 한다면, 이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철폐의 의의를 국가자본주의론이 부정해 버린 상황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그 무엇을 현실 변혁운동의 구체적 실천 강령으로 내걸어야 할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예컨대, 노동자 직접통제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철폐한 국유화 이후의 과제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변혁과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사안인지가 불명확하며, 만약 후자라면 그것은 실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가 그것이다. 그 결과는 결국 구체적 강령(재벌국유화)을 추상적 강령(노동자자치)으로 대체하는 것이 되며, 이로부터 사실상 한국 현실 변혁운동에 있어 강령과 대안 부재의 문제를 낳게 만든다.

셋째, 이 이론의 해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실 사회주의가 존재한 이래로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된 일체의 경험들을 대부분 부정하고 악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그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과연 김정호 박사의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은 무엇이 문제인가?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이행의 필수적 과정인가?

긍정적인 의미도 있는 글이지만, 김정호 박사의 입장 중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김정호 박사가 베트남을 포함해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의 모범이라고 간주하고, 심지어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중간강령’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비판적이다.

김정호 박사는 사회주의 시장과 계획의 문제를 기능주의적, 주관주의적 문제 정도로 취급한다.

소위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는 단지 사회의 자원배치를 실행하기 위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수단에 불과하며, 모두 사회의 본질적 성격규정과는 무관한 그 하위개념에 속한다. 사회 성격은 상위개념, 즉 생산관계의 핵심인 ‘소유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과 같은 ‘기본제도’를 통해 규정되며, 거꾸로 시장이냐 계획이냐의 하위개념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라 할지라도 국유기업들이 시장주체로 참여하여 자신들이 생산을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시장경제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반대로 과거 히틀러나 일본군국주의 그리고 두 차례 세계대전 기간 중 서구 국가들에 광범위하게 출현했던 전시경제처럼, 자본주의경제에서도 필요하다면 국가가 민간기업을 대신해서 전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직접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취할 수도 있다. 비록 계획경제라고 까진 할 순 없지만, 박정희 개발독재정권 하에서 한국경제는 국가가 수립한 계획이 경제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개발과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회성격 규정에는 아무런 본질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시장이 존재한다고 해서 곧 자본주의는 아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시장과 상품생산과 거래가 있었고, 사회주의에서도 시장과 상품거래가 존재한다. 그런데 상품생산과 시장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는 아니지만, 상품생산과 시장이 지배적인 사회는 바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생산은 개인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 즉 판매할 수 있는 교환가치를 위한 상품생산이 목표다. 자본주의에서는 심지어 인간 노동력조차도 상품이 될 정도로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사회다. 자본주의는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있지만 그 소유는 개별 자본가들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개별 생산주체들, 즉 기업차원에서는 계획이 있지만 전 사회적으로는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이 존재한다. 히틀러나 일본 군국주의 하에서의 국가에 의한 일부 계획이 자본주의 무정부성, 무계획성을 일소하는 전면적 계획도 아니었을 뿐더러, 국가계획의 목표나 그 중심에 있던 전시경제도 위기에 빠진 독점자본주의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노동자적이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내용이었다. 파시즘은 계획경제 체제가 아니라 시장경제체제의 위기 속에서 독점자본주의를 구출하기 위한 가장 극렬하게 반동적인 테러독재 체제였다.

박정희 시절 계획 역시 전면적인 사회주의 계획과 달리 무정부성과 무계획성 속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축적을 주도하는 ‘국가자본주의’적인 계획으로 한국에서 독점자본의 성장을 도모하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자본의 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강요하고 인민들을 말살하는 반공주의 테러독재 체제였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는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철폐하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철폐한 사회다. 노동자, 농민이 집단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국유화나 협동조합 등의 형태로)하는 사회다. 그 성격도 전면적인 사회주의 계획, 인민의 물질적, 정신적, 문화적 복리를 강화하기 위한 계획이다.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단지 사회의 자원배치를 실행하기 위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면 굳이 혁명을 통해 생산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는 같은 생산양식 하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 원리에 의해 서로 다른 생산과 분배양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는 “사회의 본질적 성격규정”에 따라 그 양식을 달리 가지게 되는 것이지, 사회의 본질적 성격규정과 관계가 없는 하위개념이 아니다. “생산관계의 핵심인 ‘소유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따라 생산과 분배양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시장이냐 계획이냐의 하위개념을 통해” “상위개념, 즉 생산관계의 핵심인 ‘소유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과 같은 ‘기본제도’를 통해 규정되며, 거꾸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위가 상위를 규정하는 않는다는 의미이지 상위와 하위가 서로 다른 규정을 가진다는 것은 아니다.

“계획경제는 한 사회의 자원배치방식과 관련하여 단일한 중앙집권적 의사결정 주체가, 행정명령을 통해 경제단위 간의 갈등을 조정하며, 정신적 자극에 의한 동기부여를 중시하는 경제체제이”고, “시장경제는 한 사회의 자원배치방식과 관련하여 분산된 의사결정 주체가, 시장경쟁을 통해 경제단위 간의 갈등을 조정하며, 물질적 자극에 의한 동기부여를 중시하는 경제체제이다”라는 규정도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심지어는 틀리기도 한 규정이다.

계획경제는 정신적 자극으로 동기부여를 하고, 시장경쟁은 물질적 자극에 의한 동기부여를 한다는 것도 틀린 규정이다. 사회주의에서도 정신도덕적 자극을 우선시 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물질적 자극을 불필요 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역시 물질적 자극이 중심이지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정신도덕적 자극을 가한다.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것도 노동자에게 희생을 전담하기 위한 것이지만 부르주아적 정신도덕적 자극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사적자본에 의한 분업화된 생산으로 사적자본의 이윤추구가 근본적인 생산의 목표이다. 반대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따라 집단화된 생산체제에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계획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은 이미 사회적 노동의 일부이다.

시장경제는 “분산된 의사결정 주체가, 시장경쟁을 통해 경제단위 간의 갈등을 조정”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분산된 의사결정 주체”이기 때문에 무정부성을 통해 공황이라는 파국을 거치며 조정되는 것이지, 합리적 과정을 통해 균형적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회주의에서도 단박에 상품생산을 철폐할 수는 없다. 스탈린도 《쏘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 문제》에서도 주장했듯이, 사회주의도 시장을 단박에 일소시킬 수 없고 부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에서도 소생산자들의 소유가 있는데, 이는 자발적이고 상대적으로 장기적으로 설득과 모범의 창출을 통해 집단적 소유로 이전시켜서 상품생산의 범위를 줄여나가야 한다. 게다가 국유기업과 농촌 협동조합 생산물과의 교환도 거래를 통한 상품 교환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기에는 국가에서 협동조합에 공급하는 트랙터와 기타 장비들은 상품이 아니었다. 기계트랙터스테이션(MTS)은 스탈린 이후 흐루시초프 시절에 상품이 되었다. 국가가 자본주의와 대외무역을 할 때에도 상품거래이나 국가가 대외무역을 독점하여 자본주의 사기업 간 거래와는 다른 형식을 취했다.

레닌이나 스탈린이나 상품거래는 한꺼번에 일소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절멸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유자적 생산이 사회주의 생산에 의해 포위되어 축소되지 않고 반대로 확대, 강화되어 간다면 그것이 자본주의 반혁명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계를 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사회에 상품경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소련의 스탈린시대에 이미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품관계가 사회주의경제의 어느 특정 영역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이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볼 때 사회주의경제에 있어 상품관계의 ‘보편성’에 대한 인정은 현대 사회주의와 구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이처럼 사회주의에서 상품경제는 스스로 존재하는 이유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객관적 경제법칙으로서 인간이 억지로 제한하거나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인간은 단지 그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객관현실을 직시하면서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만약 낙후된 농촌경제가 아직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등 상품경제가 미발달한 상태라면, 의식적으로 그 발전을 촉진시켜야 한다. 상품경제가 충분히 발전할 때라야 비로소 경제 전반은 진정으로 활성화되며, 각각의 기업 및 생산단위는 효율성이 제고되고, 사회분업의 확대와 생산 전문화 및 협업의 발전을 통해 생산의 사회화 수준이 한 단계 드높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회주의에 있어 상품경제가 존재하는 한 그 기본적 법칙으로서의 ‘가치법칙’의 작용 역시 필연적이며, 이 같은 가치법칙이 제대로 작동키 위한 시장경제의 존재 역시도 필연적이게 된다.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치법칙의 작용”이 자본주의처럼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스탈린은 그것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사회주의 제도 하에서도 가치 법칙이 존재하며 작용하는지 묻는다.

그렇다. 존재하며 작용한다. 상품과 상품 생산이 있는 곳에는 가치법칙도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가치법칙의 작용 범위는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상품 유통, 즉 매매를 통한 상품교환, 주로 개인 소비 상품 교환에 미치고 있다. 물론 이 분야에서는 가치법칙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절자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가치법칙의 작용은 상품 유통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작용은 생산에도 미친다. 물론 우리 사회주의적 생산에서는 가치법칙이 조절적 의의는 가지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시 생산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생산을 지도함에서 있어서 그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한 된다 … 그렇다고 하여 이 모든 것은 가치법칙의 작용범위가 우리나라에서도 자본주의 하에서와 같다거나 가치법칙이 우리나라에서도 생산의 조절자로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 가치법칙의 작용범위는 우리 경제 제도 하에서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며 국한되어 있다 … 도시에도 농촌에도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가 없고 생산수단이 사회화되었으니만큼 가치법칙의 작용범위와 생산에 대한 그 영향의 정도가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스탈린,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 제 문제”)

김정호 박사의 주장처럼,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이 “하나의 객관적 경제법칙으로서 인간이 억지로 제한하거나 소멸시키지는 못한다”면 그 사회는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상품생산과 상품 유통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이 지배하고, 의식적, 사전적 계획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쏘련에서 낮은 생산력 하의 계획경제가 문제인가?

김정호 박사는 중국에 대한 박식함에 비해 쏘련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다.

과거 ‘소련식 모델’을 취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에 있어 그 같은 비대한 관료주의 문제가 발생했던 배경은 다름 아닌 ‘계획경제’에 있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생산력수준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계획경제에 의존하고, 너무 조급하게 시장경제의 기능을 부정했던 탓이다.

과거 사회주의국가들은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이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생산력’ 발전 보다는 ‘생산관계’의 고도화 측면을, 효율보다는 평등을 더 중시하였다. 그것은 소련에서 전인민소유제의 공유화를 서두르고 전일적 계획경제체제를 수립한 것을 통해서, 그리고 유고사회주의가 노동자 자치관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쏘련의 계획경제와 관료주의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주장만 있을 뿐 구체적인 사실로 입증이 없다. 쏘련이 “생산력수준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계획경제에 의존하고, 너무 조급하게 시장경제의 기능을 부정했던” 것을 쏘련해체 탓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르주아들의 쏘련에 대한 역사관과 다를 바가 없다. 쏘련은 황제체제의 유산을 안고 출발했지만 사회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거대하게 생산력이 발전했다. 빠르게 미국에 이어 제2의 생산력 발전을 이뤘다. 달에 무인우주선을 가장 먼저 착륙시킨 것도 쏘련이었다. 쏘련의 해체와 낮은 생산력 수준은 전혀 관련이 없는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쏘련의 계획체제와 유고의 ‘노동자 자치관리’는 정반대되는 개념이자 원리였다. 유고의 ‘노동자 자치관리’는 유고 시장사회주의의 원칙 하에서 강조되었다. 유고를 필두로 동유럽사회주의는 계획이 아니라 시장과 이윤체제를 강화하다가 해체되었다.

첫 번째는, 지역격차의 확대와 민족대립의 재현이다. … 두 번째는, 사회적 투자의 약체화이다. 자금이 정치조직의 수중에서 기업으로 대폭 이전된 결과, 원료개발, 농업개발 등 채산성이 나쁜 산업부문과 교통, 수리, 교육, 보건 등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부문의 자금확보가 쉽지 않게 되어 신문 등에서도 그 폐해가 빈번히 취급되어졌다. 세 번째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라 불리는 제 현상의 심각화이다. 디노메이션이 인플레를 가속화시켜 데이날의 가치저하가 한층 빈번하게 매스컴에 실리는 만화의 소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기업은 자주적 결정권을 얻었지만, 동시에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경제에 정통한 경영전문가층의 역할이 높아지고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는 오히려 형해화하는 경향이 눈에 띠게 되었다.

기업별 ‘민주성’, ‘독립성’, ‘분산성’, ‘자치’의 강화는 지역별 민주성, 독립성, 분산성, 자치를 강화하도록 하고, 이는 민족별 민주성, 독립성, 분산성, 자치를 강화하도록 하면서 유고 시장사회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이 확대 심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 모순의 심화는 무정부성으로 나타나면서 결국 기업 간 지역 간, 민족 간, 노동자 간 빈부격차와 불평등,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민족 갈등과 대립을 고조시켰다. 이 때문에 “알바니아인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코소보 메트비아 자치구와 크로아티아 공화국 등에서 민족대립이 더 극심하게 나타났다.(전국노동자정치협회, “수정주의의 전위, 유고 시장사회주의”, <노동자의 사상 1호>)

유고의 시장 사회주의 노선은 이미 1980년대 중반에 대량실업과 외채문제와 인플레이션 같은 자본주의 문제를 낳았다가 결국 유고를 해체로 몰아갔다. 유고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으나 이미 사회주의 계획생산이 약화되고 그것을 쇄신할 당의 전위성도 약화된 상태에서 교정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쏘련은 유고 시장사회주의와 동유럽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내 수정주의가 발호되다가 결국 고르바초프 때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표현되는 사유화와 부르주아 다당제 도입,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사상의 수입, 당의 우경화와 관료화, 서방의 군사적 압력 등으로 해체됐다. 물론 쏘련 해체 전후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해악을 인식하고 당을 진정으로 쇄신하고자 하는 흐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당이 진정한 쇄신을 하여 만연했던 자본주의 요소들을 일소하거나, 당스스로 다당제를 막고 중국처럼 공산당 독점만 유지하고 있었어도 해체를 막을 기회는 있었다고 본다.

김정호 박사의 주장과 반대로 쏘련 내에서 암시장과 사적소부르주아 경제, 시장의 확대가 후르시초프 시절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회주의 계획체제를 약화시키기 시작했고 수정주의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키란과 케니(2004)는 쏘련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시장경제, 소위 2차 경제 활성화를 들고 있다. 키란과 케니에 의하면 1953년 이후 사회주의 내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가진 새로운 경제적 근거가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2차 경제라는 것이다. 이 2차 경제란 인구집단이 첫 번째 사회주의 경제이외에도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사적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2차 경제 기원은 1차 경제에 속한 노동자나 농부들이 합법적으로나 불법으로 개인 활동을 통해서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하는 노동시간이 증대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수 년 동안 2차 경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게 되고 소득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소부르주아 계층을 부활시켰다.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시대의 가장 부패한 집단이 이 2차 사적경제와 그것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계층에 속해 있었다. 사적경제활동은 사회주의 하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나, 스탈린 시대에서는 절제되었지만 그 이후 흐루시초프 시대에서 활력을 찾기 시작했고, 브레즈네프 시대에서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시대에 와서는 1차 사회주의 경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2차 경제는 쏘련 사회주의에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2차 경제는 소득, 생산, 재분배 체계의 사적인 근원을 창조 또는 재창조 했다. 2차 경제는 광범위한 부패와 범죄를 낳았다. 2차 경제는 사적인 기업들을 정당화하는 사상들을 낳았다. 2차 경제는 체계의 비판자들과 반대자들을 위한 자금 공급원이 되었다. 2차 경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사상을 위한 물질적인 기반을 제공했다.(노동자정치신문, 2012-10-02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 저자 그로버 퍼와의 인터뷰(3부 최종), “쏘련 사회주의 붕괴 원인은 무엇인가?” 글 편집자 주)

그런데 쏘련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시장의 점진적 확대와 계획의 약화를 레닌시절의 신경제 정책의 사례를 들어 정당화 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의 내전으로 황폐해지고 농민과의 동맹이 약화된 것 때문에 불가피하게 취해진 자본주의적 양보 조치이고 일시적 조치임에도 이를 장기간 지속되어야 할 필수적 조치로 왜곡하여 자신들의 수정주의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레닌 시절의 신경제정책은 자본주의적 양보인 동시에 사회주의 진지를 결국은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레닌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노기 장군의 예를 들어 포위전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적 양보를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로 포위하여 결국은 사회주의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레닌의 신경제 정책은 내전으로 피폐한 경제를 정상으로 돌려놓았으나 네프맨이라는 신흥 농촌 부자들의 등장과 투기, 이에 따르는 도시생산물과 농촌식량가의 극단적 격차로 도시에 곡물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협상가격차 위기가 등장하여 스탈린 시절에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전면적 강화를 의미하는 농촌 집산화가 대대적으로 개시되었던 것이다. 이후 쏘련사회주의는 농촌에서조차 사회주의 생산이 강화되고 전반적으로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고 무상체제의 기반이 다져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수정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내전 이후의 일시적 방책을 상황이 전면적으로 바뀐 상황에서도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모델로 한 자신들의 시장과 이윤체제의 강화를 정당화 했다.

쏘련과 유고 등 쏘비에트 체제 내에서는 시장과 계획의 문제가 사회주의 생산에서 언제나 중요한 내부 투쟁의 문제, 정책적 논란의 문제였다. 그런데 계획 보다는 시장을 우선시 하는 수정주의자들이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상적, 정치적으로 맑스주의 기치를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적 사고와 원리에 점차적으로 굴복하다가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쏘비에트 체제가 해체되게 된 것이다.

김정호 박사가 말한 “전인민소유제의 공유화를 서두르고”가 스탈린 시절 농촌 집산화라면 그것은 쏘련의 사회주의 생산을 강화한 것이고, “전일적 계획경제체제를 수립한 것”은 스탈린의 앞에서의 글에서 보다시피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스탈린 이후에 “전일적 계획경제체제”의 문제라면 수정주의가 강화된 사실에서 볼 때도 더더욱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극복 방안은 공상적이다!

김정호 박사는 중국사회가 “궁극적으로는 계급차별을 없애고, 마지막에는 ‘시장경제’까지 극복”을 목표로 삼는다고 했다. 이 말은 현재 중국사회는 “계급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극복해야할 “시장경제”의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여 사회주의를 궁극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으로 중국사회의 미래가 진보적 인류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가치법칙이 지배하고 “시장경제의 존재 역시도 필연적”인 중국사회에서 “시장경제는 장차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김정호 박사는 다시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에 대해 기능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으로 접근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계획경제’가 다시 전면적으로 부활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한 영역인 ‘사물인터넷’의 발전은 이 같은 전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시기에 접어들면 인간은 각종 수치화된 정보의 수집과 기록·처리에 있어 거대한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최근 미래의 사물인터넷과 관련된 묘사가 매우 유행하고 있다. 각 개인과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생활과 생산 및 공공의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은 각종 센서에 의해 포착된 후 모두 디지털화 되어 시시각각으로 체계화된 사물인터넷 망을 통해 집결된다. 그리하여 이들 정보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자동 분석된 후, 필요한 경제 및 공공적 계획이 수립되게 된다. 인간은 이제 다시 시장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며, 시장의 무정부적 성격과 이로부터 발생되는 주기적인 경제공황도 겪을 필요가 없게 된다. 이렇듯 인류가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 전반의 생산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 지면서, 시장은 자연스럽게 그 기능을 상실해 간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계획경제’가 다시 전면적으로 부활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지만 이 조건이 현실화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적소유 체제의 철폐이다.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적소유 체제의 철폐 없이 단순하게 과학기술의 발전만으로 “시장은 자연스럽게 그 기능을 상실해” 갈 수 있는가? 자본주의에서 아무리 인공지능 같은 자동화, 정보화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집단적 소유체제가 아닌 상황에서 개별 자본은 계속 경쟁의 가속화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무정부적 과잉생산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공지능의 발전은 무인화를 가속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실업을 급속도로 증가시킨다. 실업의 만연으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들은 전 사회가 강요하는 실업의 고통으로 인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무정부적 과잉생산과 대중의 빈곤은 깊어짐으로써 소비의 대립이 심화된다. 자본주의 경제공황은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겪을 필요가 없게”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심각해지게 되는 것이다.

김정호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혁명이 필요 없다. 자본주의 하에서도 정보통신의 발전에 따라 계획생산 체제로 자연 변모해나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극히 공상주의적이다. 인공지능 같은 생산력 발전은 오직 사적 자본가들의 거대 독점체제를 강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강령’은 가지고 있되, ‘대국주의’적 태도의 청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강화, 반제국주의 투쟁,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강화라는 근본목표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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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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