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어머니 – 김용균 재단 출범에 부쳐
세 어머니가 있다. 각각 고리끼의 리얼리즘 소설 ‘어머니’에 나오는 빠벨의 어머니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와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다.
세 어머니는 각자 다양한 의미를 가진 상징이다. 빠벨의 어머니는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 무렵 투쟁하다가 감옥에 갇힌 한 노동자의 어머니로서의 상징적 존재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박정희 시대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하다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서의 상징적 존재이다.
김미숙 씨는 비정규직 착취제도 하에서, 죽음의 외주화 하에서 끔찍하게 죽은 김용균의 어머니로서의 상징이다.
각자가 각 시대의 상징적 존재들의 상징이다. 세 어머니의 자식들은 모두 노동자다. 자식들은 모두 각성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다.
빠벨은 학습을 통해 짜르황제 체제 하에서도 발전해가는 러시아 자본주의를 뒤엎고자 하는 혁명가로 각성해 가는 노동자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세상을 바꿔가려 하지만 그 법과 법을 운용하는 체제가 철저하게 자본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근로기준법을 불사르며 투쟁하는 각성의 노동자다.
고 김용균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다가 생전 마지막 시절에는 “저는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며 ‘비정규직 공동투쟁’이 추진하는 대정부 요구에 인증 사진을 남기고 비정규직 삶을 고발하며 이제 막 각성해가던 노동자였다.
각자가 20세기 초반, 20세기 중후반, 21세기의 노동자이지만 생동하며 각성해가는 청년 노동자들이다.
세 어머니는 각성해가는 자식들의 어머니다. 세 어머니는 처음에는 자식들을 통해 변모해 가는 자식들의 대리상징이다. 세 어머니의 입지점은 자식의 삶과 투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수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어머니는 자식들이 겪는 극적 사건을 계기로 대리상징에서 자식들의 뜻과 유지를 집행하는 주체적이고 자주적 인간으로 극적으로 변신해 간다.
그 변신의 시작은 개별적인 고통과 고난 속에서 탄생하여 주체적 인간, 각성하고 변화발전해 가는, 더 나아가 가장 보편적이고 성숙한 인간이자 철저하게 투쟁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나아간다.
각성한 빠벨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빈곤과 굶주림, 그리고 질병, 이따위 것들이 바로 사람들이 죽어라 노동해서 받는 대가입니다. 모든 게 다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어서, 우리는 매일매일 노동과 진흙 구덩이, 그리고 사기 속에서 우리의 생명 전체를 죽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노동을 가지고 마음껏 즐기고 배불리 처먹으면서도 쇠사슬에 묶인 개처럼 우리를 무지 속에 묶어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아는 것도 하나 없고, 언제나 벌벌 떨며 살아와 모든 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밤이 바로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 말입니다!”
이소선 여사의 새로운 삶과 투쟁은 만인의 노동자를 위해 싸워달라는 자식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물론 태일이와의 약속 때문이지요. 육신이 불에 타 성모병원으로 옮겨진 태일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만은 이 아들을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겁니다.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뤄 주십시오’. 그래서 몇번이나 약속했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 정신’이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보다 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좀 더 고상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민중이 역사발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도 합디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나 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이타적인 어머니, 역사발전의 주인이 될 길을 제시하는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평생 그 삶을 살아갔다.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우리 아들들이 다시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며 “억울한 것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식의 비극적인 죽음을 계기로 “아들들”, 즉 이 땅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가는 보편적인 인식으로 나아간 것이다.
2019년 10월 26일 출범한 김용균 재단의 대표가 된 김미숙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자리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인데, 비정규직은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상황이다. 잘릴까 두려우면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죽고 다치면 실업상태였던 사람들을 채용한다. 부품처럼 채운다. 기업 입장에선 누굴 잘라도 상관없는 상황인 거다. 어떻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겠나. 청년 일자리 문제,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평등 문제는 안전과 연결돼 있다.”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님에게 행동을 요청했던 걸로 안다. 앞으로 좀 더 공부해야 하겠지만, 그분 행적을 배우고 싶다. 나는 아이가 죽은 후 삶의 이유를 잃었다. 한 번이라도 아이 얼굴을 보고 만질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살 이유가 될 텐데…. 이젠 용균이가 남겨준 숙제가 삶의 목적이 됐다. 내가 살아야 한다면 이런 것들을 안고 실현해 나가는 데 있지 않을까. 용균이가 피켓 든 이유를,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이소선 여사는 실제로 감옥 안에서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를 읽었다. 김미숙 씨는 전태일과 이소선 여사의 삶을 배우고 있다.
이제 김미숙 씨는 보편적 존재로서 고교 실습생 고 이민호의 어머니이자 구의역 사고로 숨진 청년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지금도 죽어가는 노동자의 어머니로 다시 살아가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노동자들을 기만하기 위해 내걸었던 거짓 구호였던 ‘노동존중’ 기치를 내던지고 노골적인 노동멸시와 배제로 자본가 정권으로서의 정치적 본색을 노골화 하고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영구적 비정규직인 자회사 비정규직이 되었다. 도로공사 톨게이트 사례에서 보듯 비정규직 대량 정리해고와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탄압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은 1만원 공약의 폐기와 최저임금법 개악으로 변했다. 노동자들의 빈곤은 더 깊어지고 있다.
김용균의 죽음 뒤에 개정된 산업안전법은 “김용균 법에는 김용균이 없다”는 조소가 있을 정도로 누더기 법이 되었다. 김용균을 죽게 했던 자본가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은 개정된 법에서 빠졌다.
김용균이 숨진 발전소를 포함해 조선소, 철도, 건설현장,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 노동자의 업무나 방사선 취급 업무도 도급금지 대상에서 빠졌다.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대한 작업중지명령도 유명무실하다.
최근에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추진하며 노동시간 단축은 커녕 과로사를 조장하고 있다.
심지어 현 정권은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도 유예조치를 지시함으로써 구미 불산사고와 가습기살균제 사고를 다시 재현시키려 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요구에 의해 노동자들에 대한 기업학살을 자행하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떨어져 죽고 터져 죽고 짓이겨 죽고 또 과로로 죽어간다.
죽음의 외주화의 배후는 외주화 자체이고 외주화의 배후는 비정규직 제도이다. 비정규직 제도의 배후는 무한이윤과 무한착취를 열망하는 자본주의 체제다.
20세기 초 러시아 노동자들의 삶과 20세기 중후반인 1970년대 박정희 체제 하에서 한국 노동자들의 삶이나 2019년 ‘촛불혁명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권의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하에서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착취와 억압과 고통을 당하고 있고 모욕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죽어가고 있고, 죽어간 노동자들의 부모들은 비통 속에 살고 투쟁하고 있다.
이 끔찍한 고통과 억압, 착취를 벗어나기 위해 이 체제를 분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들이여, 적을 향해 나가세, 굶주린 민중이여….. (고리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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