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2) –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모두 진실인가?

2019년 2월 22일

첫 번째 연재 글이 발표된 뒤 보여준 독자들의 관심과 평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기에 우선적으로 답하는 것이 필자의 임무다. 먼저 스탈린을 둘러싼 논란이다. 한 대학생 독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저희 같은 평범한 대학생들은 예를 들어 기사의 ‘반스탈린주의는 쏘련 사회주의의 실질적인 건설자인 스탈린에 대한 비난을 내세웠지만 실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부정하여 수정주의 사상을 유포하는 수단이었다’라는 내용 등이 아직 낯익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교육과정과 언론에서 얘기하는 내용과는 사뭇 달라 이질감 또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다룰 핵심 주제 중 하나지만 먼저 간략하게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다. 제국주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진실인가? 특히 이 체제와 대립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체제와 그 지도자들에 대해 “일반적인 교육과정과 언론에서 얘기하는 내용”은 모두 진실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대다수가 새빨간 거짓이다. 진실 보다는 정치적 의도로 대부분 조작 또는 왜곡했다.

스탈린은 그 주요 대상이다. 스탈린이 지도자로 있던 시기에 제국주의 체제가 체제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1929년부터 시작되어 1930년대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이 전례 없는 대공황에 휩쓸려 대량실업이 만연하고 빈곤이 창궐할 때 당시 쏘련은 공황과 실업을 일소하고 무상체제 기반을 다지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자연 쏘련 사회주의를 동경하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체제경쟁을 하는 쏘련과 그 지도자를 극도로 중상모략 하는 것으로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려 했다. 체제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을 종쏘주의 간첩으로 몰아 탄압하기도 했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이유로 북을 비방하고 그 지도자를 악마화 했다. 이러한 공적 비방과 조금이라도 다른 평가를 하게 되면 국가보안법상으로 처벌을 당해야 했고 심지어는 정보기관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조차 했다. 이로써 공산주의 체제의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의식에서 악마가 되어야 했다.

위대한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쏘비에트 체제를 실질적으로 건설한 지도자였던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와 그 추종 역사가들, 언론 등으로부터 무식쟁이, 폭군, 도살자로 불렸다. 그런데 ‘무식쟁이’ 스탈린은 맑스주의 대가였다. 일례로 스탈린은 《맑스주의와 언어학의 제 문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교제의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복무적 역할은 한 계급에만 복무하고 기타 계급에는 불리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사회의 모든 계급들에게 동일하게 복무하는데 있다.”

“사람들, 개개의 사회적 집단들, 계급들은 언어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언어를 이용하며 자기들의 특수한 어휘, 특수한 술어, 특수한 표현들을 언어에 강요하려고 노력한다.”

언어 그 자체는 지배계급이나 피지배계급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중립적인 소통의 수단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각각의 집단이나 계급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관계에 맞춰 언어를 이용하려 든다고 했다. 가령 ‘북핵문제’, ‘비핵화’ 등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사용하는 특수한 표현 형태이다. 이러한 특수한 언어표현에 의하면 제국주의의 핵독점 전략과 북에 대한 공세는 사라지고 제국주의에 맞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북핵이 모든 분쟁의 원인이 되게 된다. 북핵이 전 세계를 위협하는 근본원인이라는 언어적 규정에 의해 “북한 비핵화”가 문제 해결의 출구가 되게 되는 것이다.

1962년 7월부터 쏘련 대 미국, 쿠바 대 미국 간에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이를 보통 “쿠바 미사일 위기”라 한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서 쏘련에서는 보다 중립적인 “카리브해 위기”라는 표현을 쓰고 쿠바는 “10월 위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런데 미제가 주조해낸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표현에서는 미제국주의의 쿠바 말살 책동은 원천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언어의 특정 표현을 자신들 이해에 맞춰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전도된 인식이 생겨나게 되고 거짓이 진실로,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자유’와 ‘인도주의’와 ‘민주주의’는 통상적으로 좋은 말이다. 그러나 미제가 그 중립적 언어를 독점적으로 사용하여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때 그것은 난폭한 자주권의 유린과 파괴, 침략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시장의 자유’는 곧 착취의 자유이고, 그 착취의 자유는 비용절감과 이윤극대화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여전히 매일 같이 노동자들의 참혹한 죽음의 행렬이 벌어지게 된다.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즉 착취자들과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이는 피착취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독재다. 저들의 지배를 영구적으로 재생산하는 수단이다.

맑스·엥겔스는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을 “지배계급으로 높이는 것과 민주주의를 전취(戰取)”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봤다.

이는 본래의 한자적 의미인 民主(백성민 주인주)에도 가까운 것이다. 맑스는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부르주아 공화국의 진정한 형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모토인 ‘자유 평등 박애’를 ‘보병·기병·포병’이라는 훨씬 분명한 표현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라고 조소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초석도 민중에 대한 무참한 살육을 통해 다져지지 않았던가!

스탈린, 제2차 대전 당시 히틀러 나찌즘을 분쇄한 최고 사령관

스탈린은 2차 대전에서 히틀러와 독일 나찌즘을 분쇄한 쏘련의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쏘련인민 2700만 명의 희생으로 인해 인류는 나찌즘과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기회를 맞이했다. 2차 대전 이후 쏘련과의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자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을 결정적 승리로 이끌었던 쏘비에트 체제와 스탈린을 극렬하게 중상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 사후 등장한흐루쇼프는 1956년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 ‘개인숭배’와 ‘범죄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하며 스탈린 격하 운동에 나섰다.

최근 영국 맑스의 무덤을 괴한이 붉은 페인트로 훼손했는데, 괴한은 거기에 “볼셰비키 학살 기념비 : 1917∼1953년 6천600만 사망”이라는 글을 써놓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쏘련에서 볼셰비키가 자국 인민 6,500만을 학살하였고 맑스의 사상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히틀러와 나찌의 선전상인 괴벨스의 프로파간다와 이와 손잡은 극우 언론인인 윌리엄 허스트(William Hearst), 쏘비에트체제가 들어서면서 부와 권력을 빼앗긴 망명객들이 반쏘 선전과 스탈린의 학살에 대한 극단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대숙청(The Great Terror, 1969)과 슬픔의 추수(Harvest of Sorrow, 1986)를 쓴 유명한 역사가인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가 있다. 그는 파쇼 기구와도 연결돼 있었고 영국 외무부 산하 정보기관(정보조사부, 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보기관이 제공해준 조작된 자료를 재가공하여 그 글을 썼다. 서방 제국주의 언론에서는 이를 광범위하게 유포하여 쏘련에서 대량 인민학살이 벌어졌다고 대중들이 믿게끔 만들었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반공주의 선전에 앞장선 대가로 2005년에는 (아들)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기도 했다.조선일보, 조갑제, 극우 목사 김홍도, 심지어는 한국의 오세철 교수 같은 자칭 ‘좌익 공산주의자’들도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김정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1억 명이나 되는 인민들을 학살했다고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의 출처는 프랑스 극우진영이 발행한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였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나찌가 학살한 2,500만의 4배나 되는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공산주의자들은 나찌보다도 훨씬 더 잔혹한 학살자들로 전락했다. 대한민국 이승만이 1백만 명의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했는데, 이들은 “김일성, 김정일이 전쟁으로 죽이고 굶어 죽인 자 총수가 700만 명이나” 된다는 고발로 이승만의 학살을 은폐하고 다른 데로 전가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광주에서 북한군 600명 개입설을 주장하며 광주의 피해자들을 “괴물집단”으로 묘사하는 파렴치한 “파쇼 괴물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존속하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가? 바로 이 그 괴물들을 부양시키는 반공주의라는 서식처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은 평생을 반공주의 체제의 우상숭배와 맞서 싸웠던 참된 지식인이었다. 박정희 시절이었던 1977년 《우상과 이성》이라는 저작으로 반공법으로 구속되었을 때 리영희 선생은 상고이유서에서 당시 국가권력의 저열함에 대해 통렬하게 항의했다.

“어떤 사람의 긴 생애에서 국민학교 때의 글짓기 연습장에서 ‘김’(金)자를, 중학교 때 물리 노트에서 일(日)자를, 고등학교 시절의 연애편지에서 성(成)자를 그리고 대학 졸업논문 속에서 만(萬)자 등으로 골라낸다. 그것을 이으면 ‘김일성 운운’이 될 것이다.”(리영희, 「상고이유서」, 『역설의 변증』, 두레, 374-375쪽)

지도자에 대한 인민들의 존경을 ‘개인숭배’라고 비난하는데, 실제로는 반공주의 우상숭배가 한 사회 전체의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작가 황석영 씨가 1989년 방북 이후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시와 사회사, 1993년)라는 방북기를 출판했다.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목숨 걸고 밝혀내야 했던 동토의 파쇼사회가 바로 한국사회였던 것이다. 황석영 씨는 실제 방북으로 인해 7년 형을 선고 받고 4년 간 옥살이를 했다. 이병진 교수는 인도 유학시절인 1993년, 1994년 두 차례의 방북을 했다는 이유로 이명박 정권 당시인 2009년 구속되어 기나긴 감옥생활을 마치고 2017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내란혐의로 구속된 이석기 전 의원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여전히 기나긴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짧은 글로 제국주의의 반쏘 반공주의 선전의 실체를 다 드러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반스탈린주의는 반쏘주의, 반공주의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에 대한 대학생 독자의 이질감의 기원은 대략 이와 같은 정치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여 답변의 형식으로 기사를 써보았다. 반스탈린주의가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부정하여 수정주의 사상을 유포하는 수단이었다’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다뤄볼 것이다.

단결은 무엇이고 그 선행조건은 무엇인가?

한 독자께서는 다음과 같은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 이 글을 만일 좌파진영의 사람들이 보고 반박한다면 뭐라고 할 것입니까? 이래서야 어떻게 진보진영이 제대로 나아갈 수 있을지 갑갑합니다. 제발 좀 우리 과거의 관성에서 좀 벗어납시다.”

불의한 것이 있고 진리가 아닌데 그것에 눈감고 무조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단결은 아니다. 이러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중의 이해를 중심에 두고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는 단결이 진짜 단결이라고 생각한다. 그 진보적 단결의 저해 요소는 바로 ‘진보진영’ 내에서조차 팽배한 반공주의다. ‘종북’이라는 용어의 창시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조선일보가 아니다. 바로 ‘진보진영’에서 종북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권력자들이 이를 진보진영 분열과 탄압에 이용했다. 단결을 위해서는 단결의 선행조건이 있다. 진짜 단결, 진보적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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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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