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엄한 시련의 시기 항일투쟁사
[세 가지 세미나]
2.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김일성과 만주항일 전쟁》
저자: 와다 하루키
역자: 이종석
범위
제 5장 만주항일전쟁의 종결
1. 동남부 숙정치안공작과 양정우의 최후
2. 김일성부대에 의한 마에다중대의 전멸
3. 위증민의 보고
4. ‘소할바령회의’에 대하여
5. 항일연군 영도간부 제2차 하바로프스끄 회의
6. 두 개의 야영
7. 항일연군의 마지막 1년
2024년 2월 25일(화요일) 밤8시
세미나 링크
https://us06web.zoom.us/j/85807732935?pwd=9wAbt7sjapCuR3RZhmiqbivFgYSbA0.1
적진 한 가운데에서 철저한 사상과 인간의 한계를 넘는 의지를 가지고 항일투쟁을 하며 침략 일제의 배후를 치며 일제 관동군을 격퇴해 왔던 만주의 항일연군에게 1939년 10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준엄한 시련의 시기였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루거우차오 사건, 7.7사변)을 사건을 조작해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상해와 남경을 점령하고 그해 12월 남경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인 난징대학살을 자행하였다. 이 학살로 최소 12만명에서 최대 35만의 중국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일제는 침략 무력의 배후에서 일제를 괴롭히는 만주유격대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면 중국대륙을 점령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7만 5천 명의 병력을 구성하여 대대적인 항일 유격대 토벌에 나섰다.
전멸된 악명 높은 마에다 중대(위)와 일본군 토벌대 |
조선과 중국의 항일 유격대 내에는 변절자가 생겨나고 토벌에 희생당하면서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다.
이후 살아 남은 항일유격대는 소련 영내로 들어가 부대를 정비하며 소부대 활동으로 전환하여 진격 활동을 계속하면서 결정적 전환의 시기를 염두에 두면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이 시기에 일제가 소련 근동 지방을 치려 하는 상황에서 1941년 6월 22일 추축국인 독일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내부의 모순이 깊어지면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쏘련 근동 침략 기도는 좌절되었다. 이 때 쏘련은 일제와 쏘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로 인해 항일 유격대 내에서는 낙담자들이 생겨나고 변절자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일제는 사방으로 출격하여 패배를 자초하였다. 독일과의 방공협정은 파기되어 쏘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가장 강성한 시기에 일제의 패배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 국제정세 변화를 웅대하게 예상한 유격 지도자들만이 이 곤란한 시기를 낙관주의를 가지고 부대를 유지하며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5장은 국제적 격변의 시기에 닥쳤던 이 준엄한 시련의 시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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