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게 잊혀진 전쟁인 한국전쟁의 진실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 이 글은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에 있는 글을 여러 참고문헌을 통해 보다 보완한 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세계를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누었다. 그러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전 세계적인 대립으로 이어졌고, 내전으로 번지기도 했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독립을 하게 된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그러한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바로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 냉전 초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국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 또한 대략 3년간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사실상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다. 미국의 워싱턴 DC에 있는 3개의 전쟁 메모리얼이 이를 잘 입증한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메모리얼(WW2 Memorial)’은 그 자체가 아주 거대하며, 관광하는 사람들이나 미국인들이 찾기 쉽게 워싱턴 DC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오벨리스크탑 근처에 있다. 링컨 기념탑 우측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Vietnam War Memorial)’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전쟁답게 분위기가 어둡고, 5만 8천 명의 미군 전사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반해 링컨 기념탑 좌측에 있는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은 있는 거라곤 M-1 개런드 소총을 들고 있는 사람 크기의 미군 병사 동상들밖에 없다. 워싱턴 DC에 있는 메모리얼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잊혀진 전쟁이다.

필자는 미국을 2018년과 2023년에 방문했다. 2018년에는 군 복무를 마치고 난 뒤에 갔었고, 2023년에는 AOK(Action One Korea) 단체에서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앞서 언급한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지난 2023년 여름 필자는 워싱턴 DC에서 미국 내의 여러 진보단체 및 통일운동 단체들과 함께 “70년은 너무 길다!”, “코리아 피스 나우!”라는 구호를 외치며 백악관을 중심으로 행진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참여하면서 미국 내에 진보 세력들이 제법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 한국전쟁에 대해 우익화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미국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2023년 7월 말부터 8월까지 필자는 워싱턴 일정에 이어 뉴욕에 이틀, LA에 이틀 체류하며 동포사회와의 만남을 가졌다. 워싱턴에서는 주로 한국전쟁 70주년 관련한 행사에 참여했고, 뉴욕과 LA에서는 재미교포들을 대상으로 45분 이상의 강연을 했었다. 그 당시 필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보는 미국에 관해 강연을 했고, 이 전쟁을 같이 연결해서 봐야한다 말했었다. 정연진, “정전70년, 워싱턴DC에서 새 희망을 보다②”, 통일뉴스, 2023.08.20.,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841>.

한국전쟁을 다루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적 시각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치를 당시 미국 내에서는 한국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사실상 일어나지 않았었을 정도였고, 미국 사회도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에 심취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학계나 그나마 역사를 아는 대다수의 미국인이 내리는 한국전쟁은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전쟁”일 것이다.

* 물론 미국 내의 좌파들이 한국전쟁이나 한반도에 관해 관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안나 루이스 스트롱(Anna Louise Strong)은 그 당시 한반도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부 사실만이 검열과 통제를 거쳐 미국인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허용된다. 북조선에 대한 명백한 사실이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다면, 남한 관련한 정보는 더글라스 맥아더 휘하의 도쿄 사령부에 의해 철저한 검열을 당하고 있다.”고 증언했었다.

실제로 2013년 버락 오바마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이 전쟁은 대한민국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오바마는 “5,000만 명의 한국인들이 누리는 자유, 활발한 민주주의,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는 북한의 억압·빈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말하며,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렸다.*

* 박현, “오바마 “한국전, 승리한 전쟁””, 한겨례, 2013.07.28.,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597457.html>.

아마 그들이 생각을 더 정리해서 말하자면, “한국전쟁은 1950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과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시작했고 미국은 한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며 1953년에 휴전으로 끝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애덤 울람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도 불렀다.* 후버 연구소 소속의 소련사 연구자인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 또한, 전쟁의 책임을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막중하게 있다고 주장했다.**

*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문서가, 2017, 108쪽.

** 로버트 서비스가 집필한 스탈린 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많은 부분 스탈린에게 있었다. 그가 만일 김일성에게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무장도 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치열한 내전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버트 서비스, 윤길순 옮김, 『스탈린, 강철 권력』, 교양인, 2007, 937~938쪽.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들은 사실 문제가 많은 관점이다. 우선 한국전쟁은 관점에 따라 누가 일으켰는지를 대답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는 질문은 대답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주장했다.* 커밍스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한국전쟁을 북한(조선)의 침략으로만 물으려는 이들의 의제에 비판하기 위함이다. 한국전쟁이 전개과정과 양상을 보면 그 책임을 북한에게만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브루스 커밍스, 김범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2-2 – 폭포의 굉음 1947~1950』, 글항아리, 2023, 275쪽.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면서, 자유주의국가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막아낸 전쟁이다. 이러한 미국의 반공주의적 시각은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 세력(사실은 극우에 가깝다.)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참전했던 한국전쟁은 과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소위 대한민국 보수 세력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 과연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일까?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전개되었고 끝났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 선언 이후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다. 해방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이들이 들어오자 한반도의 신탁통치 관련한 논쟁이 불거졌고, 소련과의 합의를 보지 못했던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넘기면서 1948년 이남 지역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한반도 이북 또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독정부를 세웠다. 그리하여 1948년 8월 15일 한반도 이남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그해 9월 9일 한반도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 근처에선 남한과 북한 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즉 이 시점부터 한반도는 전쟁의 위협에 놓였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지도부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초반의 경우 스탈린이 남침을 허용치 않았으나, 1949년 10월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의 트루먼 정부가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미국의 반공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하자 스탈린 또한 1950년에 남침을 허용했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 현재 학계의 입장은 한국전쟁은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필자는 이런 시각이 오히려 한국전쟁을 보는 데 있어 관점을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잘 훈련된 군대였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250대의 T-34 탱크를 비롯하여 소련제 ‘야크 전투기’와 대포 박격포로 무장했던 북한군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남한의 군대를 순식간에 괴멸시키기 공격 시작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도망치기 바빴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개입을 했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오키나와에서 한반도로 즉각 투입된 미군을 격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했고, 그렇게 해서 1950년 8월 남한 땅의 90%를 접수했다.

그 이후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수많은 군대를 투입하여 전쟁을 끝내려 했지만, 미군과 UN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항을 통해 지원 병력을 보충해 나갔고, 더는 진격할 수 없었다. 지속적으로 증원된 병력을 받은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교전해나갔고, 미 공군은 한반도 전역에 인민군 시설을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한국군과 미군 UN군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었고, 북한의 조선인민군은 9월 28일 서울을 내줘야 했다. 10월 1일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해나갔고, 미군과 UN군 또한 진군해나갔다.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이 한국군에게 떨어졌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에 인접한 초산군에 이르렀으며 11월 23일에는 함경남도 혜산시, 11월 26일에는 함경북도 청진시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한국군과 미군 그리고 UN군이 진격한 것에 분노한 중국 측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라는 가치 아래 참전을 단행했다. 대략 30~50만 이상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다시 유엔군 측에게 불리해졌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 측에게 넘어갔다. 수원과 용인에서도 후퇴해야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자 더글라스 맥아더는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대통령 트루먼이 그를 해임했다. 그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부근까지 전쟁을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1951년 여름부터는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고, 대략 2년간 38선 부근에서 양측의 교전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휴전 협상이 길었던 것은 양측의 포로 문제에서 합의를 쉽게 보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아무튼,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회담이 성사되면서 끝이 났다.*

* 박태균,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책과함께, 2005, 184~235쪽. 

여기까지가 대략 한국의 보수 세력이나 미국의 우익성향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한국전쟁의 전개와 범위일 것이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대략 3년간 전개되었고, 적잖은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사망자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 3년 동안 도합 40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그 중 최소 200만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미군은 총 3만 6,940명이 사망했고, 남한의 사상자는 131만 2,836명으로 이 중 사망자가 41만 5,004명이었다. 북한의 사상자는 민간인 100만 명과 군인 약 52만 명을 포함하여 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중국군의 경우 90만 명이다.* 반면에 이것보다 조금 더 높게 잡은 추산치도 있으며, 관련 추산치에 따르면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대략 500만 명의 인명이 사망했다.**

*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2017, 71쪽.

** Smith David Michael, Endless Holocausts – Mass Death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Empire, Monthly Review Press, 2023, p.178~179.

즉,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이 전쟁으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또한 휴전으로 끝나면서 남북한 모두 전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 모두 양측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생겼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방향으로 갔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숫자를 증가했고, 이는 지금까지 미국의 최신식 전쟁 기계를 한반도에 설치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남측과 북측 할 거 없이 양측은 자신들이 사실상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러한 주장을 북측만 하는 줄 알지만, 사실 남측과 미국 측도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오마바 대통령이 “한국전쟁은 사실상 대한민국이 이긴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남측과 북측의 정치인들의 행적, 분단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전쟁으로 이어졌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사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설립되기 1일 전 한반도 이남에서 1만 6,000명의 넘는 정치범을 석방시켰고 아울러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학생과 청년 1만 5,000명 정도를 제대시켰으며,* 단 며칠 만에 조선인 수만 명을 석방시켜 치안 유지 임무와 정치활동에 참여시켰다. 이러한 활동으로 8월 말까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한반도 전역을 통틀어 총 145개 정도의 지부를 형성했다.**

*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후마니타스, 2023, 88쪽.

** 브루스 커밍스, 김범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글항아리, 2023, 129쪽.

그러한 노력들은 이북에 주둔했던 소련보다 미국이 행한 크나큰 압력으로 좌절되었는데, 그것은 미군정이 건준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점령군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미국은 한반도에서 친일파들을 앞세워 그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주었고, 1945년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그러한 친일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반공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1970년 남파공작원으로 남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된 김진계의 경우 수기에서 “포고문에서부터 한국인을 깔보는 위협적인 용어를 썼고, 일본 제국주의와 거의 차이가 없는 점령군으로 군림하려는 자세가 은연 중에 거부감을 일으켰다.(중략….) 미군정은 일제시기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김성수나 송진우 등 친일세력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앉히고 중앙에서부터 친일관리들을 재등용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미군은 군정경찰을 정비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각 지역 보안대를 곧바로 과거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경찰서로 재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썼다.*

*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 현장문학사, 1990, 47~48쪽.

실제로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친일관료·식민경찰·일제군인 등 부일협력세력을 군정청에 고용했으며, 이들이 인사를 선별하는 기준은 친미적이거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 262쪽.

특히나 미군정의 문제점은 경찰 등용에서 드러났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미군정 하에서 경찰 간부 가운데 최소 80%가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경찰이었다.* 반면에 또 다른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미군정 당시 조선인 경찰과 헌병 모두가 미군 장교의 최고 명령 체계 아래에 있었고, 더욱이 경찰의 85%가 가학적 고문이자 일본 통치의 잔인한 집행자였다고 책에 썼다.** 심지어 카치아피카스는 경찰관들의 90%가 미국에게 봉사하기 이전 일본 천황에게 봉사했다고도 주장했다.***

*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I, 2023, 234쪽.

** 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 옮김, 『한국의 민중봉기 – 민중을 주인공으로 다시 쓴 남한의 사회운동사 1894년 농민전쟁~2008 촛불시위』, 오월의봄, 2015, 129쪽.

*** 조지 카치아피카스, 앞의 책, 2015, 156쪽.

따라서 미군정이 내세운 세력과 그들의 존재는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정 공보부가 1946년 4월과 5월에 실시한 여론 조사를 보면, (1) “당신은 미국인이 한국인을 경멸한다고 보는가?”, (2) “일제시대에 비해 미군정 시대가 나은가?”라는 질문에 (1)에 대해 서울에서는 그렇다 40%, 아니다 39%, 모르겠다 21%, 서울 이외 도시 지역에서는 그렇다 41%, 아니다 40%, 모르겠다 19%, 농촌 지역에서는 그렇다 29%, 아니다 35%, 모르겠다 36%라고 응답했다. (2)에 대해서는 서울에서는 그렇다 63%, 아니다 16%, 서울 이외 도시 지역에서는 그렇다 55%, 아니다 12%, 모르겠다 33%, 농촌 지역에서는 그렇다 49%, 아니다 15%, 모르겠다 36%라고 응답했다. (1)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와 아니다가 비슷하거나 농촌지역에서는 오히려 아니다가 더 높은 것으로 봐서 전반적으로 미국인의 태도에 불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가 아니다보다 더 많긴 하지만 모르겠다라는 응답이 상당히 높으므로 미군정기가 일제시대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213~214쪽.

따라서 미군정이 세운 남한 정부는 이와 같은 문제점들이 산재해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군정에 협력한 친일파들은 남한 사회의 주류가 됐다. 2000년대 초반에 남한 정부가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90% 이상이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미군정이 창설하여 키운 군대도 그러했다. 1950년 대한민국 군대의 모든 사단이 예외없이 전직 일본군 장교의 지휘하에 있었다.** 즉, 이것이 바로 미군정 체제와 대한민국 정권이 가지고 있던 모순이었다.

*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29쪽.

** A.B 에이브람스, 앞의 책, 2022, 102쪽.

미군정이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승만도 상당히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이승만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총령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독립운동 내에서 갈등과 분열을 창조했던 인물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했던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유학할 당시 또 다른 제국주의자 우드로 윌슨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승만과 친일세력들은 분단을 획책하는 행위를 자주 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있은 후 이들은 신탁통치 문제를 통해 정치공작을 일삼았다. 그들은 마치 “소련이 찬탁 미국이 반탁”을 주장했다며 사실을 왜곡하여 좌익 세력들을 공격하며 민족반역세력으로 몰아갔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았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은 5년이내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신탁통치 10년을 주장했다. 쉽게 말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게 분단을 막는 길이었다. 소련의 주장은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미국과 합의하여 한반도에 만든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1946년 신탁통치 논쟁에 휩싸인 이남에서 그러한 분열과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지만, 지도자 여운형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극우세력들의 테러에 휩싸였고, 미군정과 이승만의 방조 아래 암살당했다. 그와는 별개로 박헌영이나 이현상 등을 포함한 남로당 세력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이남의 좌익 세력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을 두어 여러 정치 및 경제 투쟁을 전개해 나갔지만,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다.*

* 해방 이후 가장 인기가 많았던 지도자로 알려진 몽양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그 시기 북한에 있으면서 김일성에게 여운형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트롱이 남긴 책에 따르면 “김일성 수상은 해방정국 시기 잠시나마 존재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설립한 인물이자, 미군정이 우익정부 하에서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좌익 쪽 인사로 내세웠다가 이 인터뷰보다 2개월 전에 극우 테러리스트에 의해 비명횡사한 근로인민당의 주석인 여운형의 암살에 대해 언급했다. 김일성은 나와 인터뷰를 하기 6주 전인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대규모의 민중 시위의 여파로 서울에서 하게 되었을 때, 남한 경찰들이 시위군중을 해산사키고 집회에 참여한 이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8월 쯤에는 좌파성향의 신문사 기자들이 서울에서 열린 공동회의에서 소련 측 대표단과의 기자회견을 마친 뒤 체포되었다고도 했다. 김일성 수상은 “반동분자들과 친일 테러분자들에 의해 이와 같은 많은 어려움들”이 생겼지만, “조선인민은 궁극적으로 통일되고 민주적인 정부를 반드시 세울 것이며, 그게 바로 조선인민의 강력한 의지다.”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Anna Louise Strong, “Inside North Korea : an eye-witness report”, 1949, p.19~20.

특히나 1946년 북한에서 월남한 인사들로 구성된 극우조직 서북청년단은 좌익을 죽인다는 명분을 들어 광적인 폭력과 살인을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질렀다. 대구 10.1 항쟁을 시작으로 수많은 노동자, 농민 투쟁이 미군정과 친일 세력들에 의해 진압당했다. 남한 출신으로 남로당에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던 비전향장기수 양원진의 자서전에는 미군정의 통치가 일제 통치 못지않게 가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그 당시 신학기는 9월이었다. 섬 출신이다 보니 일제시기부터 하숙비는 쌀이었다. 장정이 한 달 먹는 식량이 대두1말반(1말은 15kg)으로 22kg 정도였는데, 하숙비와 자기 먹을 것 정도해서 도합 3말(45kg) 정도를 냈다. 일본은 전쟁시기에도 하숙비는 빼앗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정청에서는 쓰리쿼터하고 GMC(미군 트럭)를 탄 군인들이 와서 학생들의 쌀을 빼앗아 갔다. 나는 바로 그 이튿날 거리에 나가서 반미투쟁을 했다. 그때가지만 해도 나는 학생운동을 안 했고 좌익학생들이 나를 우익학생으로 점찍어 놓았다. 좌익 상급생들이 내가 경례를 안 했다고 끌고 가서 주의만 주고 놔주었던 적도 있었다.(중략….) 학생들이 미군정청에 쌀을 빼앗기고 나서 거리로 나가자고 했다. 교무주임은 가지말라고 말렸다. 그때 “쌀을 달라”는 구호가 내 마음하고 맞았다. 목포역 광장으로 가니 목포중학교만 빼고 목포상업학교, 문태중, 정광중, 목포여고, 정명미션스쿨 등 학생들이 많이 왔다. 목포중학교는 선생들이 학생들의 시위 계획을 먼저 알고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수학여행을 떠나 버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이 대구 10월인민항쟁이었던 것 같다.”*

* 양원진,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 (사)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2018, 74~75쪽.

대구 10월 항쟁이 격화되자 미군은 경찰력과 군대로 대응했다. 심지어 진압을 위해 탱크도 투입했다. 최소 1,000명에서 7,000명이 사살됐고, 2만 2,000명이 감옥에 구금됐다.*

* 조지 카치아피카스, 앞의 책, 2015, 141~145쪽.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탄압은 제주도와 여순에서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분단정부 수립에 맞선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이승만과 미군정은 이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제주 4.3 항쟁 당시 미국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최소 3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제주도지사가 미국 정보부에 은밀히 전한 자료에는 사망자가 6만 명이라 표기 되어 있으며, 4만 명이 일본으로 도피했다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공식적으로 3만 9,285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400개의 마을 중에 170만 남았으며, 제주도민 5명이나 6명 중 1명꼴로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커밍스는 이보다도 더 많게 집계한 추정치도 있다고 말했다. 커밍스에 따르면, 2010년대 최근 연구로는 당시 무자비한 진압으로 살해된 사람의 숫자가 8만 명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1940년대 말 제주도 인구가 많아야 30만 명이었다는 것이다.*

*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2017, 181~192쪽.

여순도 마찬가지다. 여순도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무수히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2005년에 나온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통계를 볼 필요도 있다. 여기서 조사한 여순사건으로 인한 피해자 규모는 여수 지역 5,000명, 순천 지역 2,200명, 보성 지역 400명, 고흥 지역 200명, 광양 지역 1,300명, 구례 지역 800명, 곡성 지역 100여 명으로 총 10,000여 명이다.*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정리한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을 보면, 여순항쟁으로 인한 피해자 규모는 여수, 순천, 보성, 고흥, 광양, 구례, 곡성을 합쳐서 총 1만 명인데, 이 중 지방 좌익과 빨치산에 의한 학살은 500명인데 반해, 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은 무려 9,500명이라는 자료도 있다고 언급했다. 즉, 이 기록에 따르면, 무려 학살 비율이 우익이 95%, 좌익이 5%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 이영일, 「여순사건 국가폭력의 위법성과 진상규명의 방향」, 여순사건 57주기 학술세미나 발표자료집, 2005, 25쪽.

**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353쪽.

즉, 1950년 6월 25일 소위 전면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이승만과 미군정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노엄 촘스키에 따르면, 대략 5년 기간 동안 최소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미군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시기 광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전역에서 자행되었던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이는 한국전쟁 초기 수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학살로써, 최소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 노엄 촘스키, 김보경 옭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33~34쪽.

한국전쟁 기간을 통틀어 3년 기간 동안 이승만 정권은 대략 10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이승만의 군대와 우익 조직들이 한 학살은 무수히 많다. 지난 2023년 뉴스타파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민간인 학살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진상이 나온다. 뉴스타파는 한국군과 미군 그리고 좌익에 의한 학살을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를 냈다. 이 통계를 보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가해 주체별 희생자 57,968명 중 미군과 한국 우익 군경이 살해한 비율이 86%고 인민군 및 적대세력이 14%로 나온다. 좌익과 우익의 학살 비율이 한국 측 진상조사만으로도 최소 1/6에서 1/7 차이가 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한국전쟁에서의 좌익과 우익의 학살 비율은 1 대 10으로 본다.***

* 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책보세, 2012, 260쪽.

** 뉴스타파,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4화 : 민간인학살, 2023.07.21., <https://www.youtube.com/watch?v=tmughpLyr2k&t=1516s>.

*** 필자는 그것보다 비율 차이가 더 심할 거라 생각한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1950년 10월 당시 미국과 남한의 조사를 토대로 계산하면, 북한군과 남한의 그 협력자들이 학살한 사람들의 수는 2만 명에서 3만 명 사이이며, 한국전쟁 정전 이후 전범재판을 준비하는 데 참여했던 미국인들은 이들이 총 2만 9,915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국 우익의 학살 규모가 100만 명이라는 추산을 토대로 생각해보자면, 이중 좌익의 학살은 3%고 우익은 97%라는 추정치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2017, 261~262쪽.

한국전쟁 시기 이와 같은 민간인 학살은 북한에서도 일어났다. 신천 대학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신천 학살은 한국과 유엔의 북한 점령 시기 발생했던 가장 끔찍한 대학살 사건이었다. 대략 52일 동안 신천에서만 3만 5,000명 이상이 살해되었고, 그 중에 어린이 8,000명과 교사 400명도 있었으며, 신천의 석당교 위에서는 2,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묶인 채 강으로 던져졌고 따라서 익사했다. 그리고 한 저장고에선 1,200명이 불에 타 죽었다.*

* 조지 카치아피카스. 앞의 책, 2015, 198~199쪽.

신천학살의 주체로 북한은 미국을 지목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우익 반공세력들도 학살에 가담했다고 주장한다. 아래의 북측 자료를 보도록 하자.

“우리의 제도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는 청산된 착취계급 잔여분자들은 옛 토지를 되찾으려고 칼을 갈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점기간 계급적 원쑤들이 발간한 도공보 토지귀속에 관한 건과 놈들이 조직한 치안대·학생무장대·대한청년단등 각종 반동단체들. 지주·자본가 세상을 복귀하려는 반동 놈들이 이를 사리물고 작성한 학살자 명단!(중략….)”*

“미제는 유엔의 기발을 도용하여 북반부에 식민지통치제도를 세우기 위한 책동을 강화하는 한편 반동적인 식민지통치질서를 보장하기 위한 인민탄압의 도구로서 각종 반동테로단체를 조작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일시적강점지역들에서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 청산된 지주, 예속자본가, 변절자, 타락분자들을 긁어모아 《치안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를 비롯하여 《멸공단》, 《백골단》, 《학도호국단》 등 각종 반동테로단체들을 조작하여 인민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파괴와 략탈의 도구로 삼았다. 놈들은 평양에서만도 강점후 인민정권기관들을 파괴하고 악질반동분자들을 긁어모아 《멸공구국회》,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 40여개의 반동테로단체들을 조작하였다.”**

* Paektusan Revolutionary Army, [KCTV] US Sinchon Massacre 신천 양민학살 사건 (1999), 2021.06.25., <https://www.youtube.com/watch?v=JwYKaDXhqX0&t=234s>, 접속날짜: 2024.12.02.

** 허종호,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 2권,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3, 123쪽.

한국전쟁 당시 월북과 납북 그리고 민간인 학살을 연구한 이신철에 따르면, 미군과 한국군 점령시기 이북 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앞서 언급한 신천 학살 35,383명을 포함하여 대략 17만 2,001명이다.* 이신철은 이 학살들 절대다수가 우익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저서 및 연구 논문들에서 주장했으며 좌익이 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표현했다. 다만 인민군이나 좌익에 의한 학살은 남녀노소 노인 아이 유아 가릴 거 없이 학살했던 우익과 한국군 하고는 분명한 차이가 났다. 적어도 좌익과 북한군 측에선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 좌익이나 인민군이 한 것으로 알려진 학살들을 보면, 절대다수가 “우익 집안의 가족들이나 우익 출신의 군인과 경찰 청년단을 대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1990년대 진상조사 과정에서 좌익이한 것으로 알려진 학살이 우익이 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의 경우 ‘삼대기율 팔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 Three Rules of Discipline and Eight Points for Attention)’ 원칙을 잘 따랐는지, 민간인 학살 기록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 이신철, 「6·25 남북전쟁시기 이북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 『역사와 현실』 54, 한국역사연구회, 2004, 140쪽.

이처럼 대한민국 군인과 우익 청년단의 광적인 학살은 당연히 미군의 방조와 도움 아래 일어났다. 미군 방첩대의 경우 한국의 경찰 및 청년단체와 협력하여 민간인 사이에서 좌익 색출에 나섰다는 점에서 우익 세력들의 민간인 학살을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군 또한 전쟁 초기 민간인 학살을 조직적으로 벌였는데, 1950년 7월에 있었던 ‘노근리 학살 사건(No Gun Ri massacre)’이 바로 그것이다. 노근리 학살 당시 미군은 그 지역에 살던 몇 백 명의 민간인들을 피난시키는 척하면서 폭격을 퍼부었고, 도망친 민간인들이 다리 밑으로 숨자 기관총과 소총을 발사하여 3일에 걸쳐 학살했다. 미군 제7 기병연대가 저지른 이 학살로 대략 300~6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참고로 제7 기병연대는 1876년 리틀빅혼 전투에 참가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토벌한 군대였고, 1890년에는 그 악명높은 운디드니 학살을 벌인 군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자면, 한국전쟁 당시 이들이 민간인 학살을 벌인 것과 연결성이 아주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중 가장 심각한 민간인 학살은 바로 공중폭격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미국은 즉각적으로 한반도에 군사개입을 했고, 7월쯤에는 제공권을 장악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한반도 전역에 폭격을 감행했고,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2년간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952년 7월 11일 평양을 목표로 한 ‘전면적인 공격’에서 주간에 1,254회의 공습 출격이 있었고 야간에는 B-29 폭격기의 54회의 출격이 있었다. 미국 공군의 평가에 따르면 최종적인 도시 파괴의 규모는 독일과 일본에 비해 훨씬 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1942~1945년 동안 65만 7,000톤의 폭탄을 독일 본토에 투하했고, 미군이 독일 본토에 투하한 것까지 합치면 120만 톤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총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추가적으로 3만 2,557톤의 네이팜 폭탄도 투하했다.*

*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2017, 216~227쪽.

미군이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폭격은 상당히 효율적인 파괴와 살상을 불러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다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 추산된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의 도시는 초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2017, 226~227쪽.

미군의 북한 폭격 중 매우 끔직한 전쟁범죄는 1950년 11월 8일 신의주에서 발생했다. 1950년 11월 8일 유엔군 소속의 비행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폭격하여,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되었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는데, 그중 80%인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단 하루의 폭격으로 5,000명이 참혹하게 죽었고, 3,155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136~138쪽.

브루스 커밍스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미공군은 똑같이 어리석고 무의미한 파괴 행위를 베트남에서 되풀이했다. 집중 폭격은 어떤 전쟁에서도 결정적인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국제연합의 대량학살협약은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를 “국민적, 민족적, 종족적, 종교적 집단의 전부나 일부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저지른 행위로 규정했다. 여기에는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집단의 물리적 파괴를 꾀하고자 그 삶의 조건에 고의로 해를 가하는 것”이 포함된다. 협약은 1948년에 채택되었으며 1951년에 발효되었다. 미국 공군이 바로 그 정의에 의거하여 국제연합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북한 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하던 때였다. 어떤 이들은 적의 도시를 표적으로 지역폭격을 가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불법이 아니었고, 1948년 8월 스톡홀름에서 체결된 적십자사의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이후에야 불법이 되었다고 언급한다. 두 조약은 이 공중전에 아주 작은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그 공중전은 어리석고 무자비하게 자율적으로 수행되었다.”*

*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2017, 228쪽.

책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 사령관이던 커티스 르메이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워버렸어요.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 존 다우어, 정소영 옮김,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창비, 2018, 73~74쪽.

커티스 르메이의 주장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초토화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은 최소 100만 명이 넘는다.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북한 사람이 미군 폭격으로 학살당했을 수도 있다. A.B 에이브람스는 커티스 르메이의 보수적 추산을 인용해 북한 인구 최소 20%가 사망했고, 심하면 30%로도 추산이 가능하다고 책에 썼다.*

* A.B 에이브람스, 앞의 책, 2022, 95쪽.

당연한 얘기겠으나, 남한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야기시켰다. 이런 폭격은 여순항쟁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리산에 고립되어 게릴라 투쟁을 하던 빨치산들을 대상으로도 자행되었다.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빨치산들은 추위와 고립 속에서 미군의 폭격도 견뎌내야 했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미군은 빨치산을 대상으로 네이팜 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군은 재귀열을 퍼뜨리는 세균전까지 했다. 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재귀열은 남부군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막대한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미국산 세균은 북한 지역에도 대대적으로 살포되어 중공군은 물론, 지료약을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한반도를 신무기 시험장으로 삼은 미국은 소형 핵탄두나 다름없는 네이팜탄과 세균무기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 안재성, 『이현상 평전』, 실천문학사, 2007, 386쪽.

앞서 필자가 인용한 세균전 내용의 경우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벌였다는 증거는 바로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서 2010년에 발굴된 미국 문서다. 2010년 아랍계 언론인 <알자지라>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세균전 실험을 명령한 문서를 발견했다며 문서를 공개했다. 그 문서는 1951년 9월 21일자에 작성됐고,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세균전 명령문서였다.*

*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88쪽.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미국이 저지른 잔악 행위와 범죄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는 북한의 침략을 막는다는 구실을 들어 한반도에서 아주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러한 미국의 전쟁범죄와 추악한 민낯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우익 내지는 반공적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써, 그러한 전쟁범죄 또한 같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 또한 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일방적으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더글라스 맥아더를 찬양하는 2016년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이나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아름다운 여배우로 유명해진 메간 폭스가 나온 2019년 반공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과 같은 영화가 나왔다는 건 한국 사람들의 한국전쟁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한국전쟁에서 이 전쟁을 누가일으켰는가에 대해서 묻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와 같은 게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과거 반공주의가 모든 것을 합리화하던 군사독재 시절,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북한의 동맹국이던 소련에게 전가됐다는 점과 지금도 동어반복이 정치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국전쟁의 역사적, 정치적 기원을 왜곡하거나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 어깨걸고, 2020, 80쪽.

본 글에서 자주 언급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여러 근거들을 통해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을 내전이자 혁명전쟁이라고 책에서 주장했다.* 이와 같은 커밍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뜻 동의하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이 하나의 담론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분명한 건 한국전쟁에 관한 주장들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커밍스가 혁명전쟁이라 표현한 데에는 김일성 정부 초기 북한 정권의 인적 구성과 이들의 항일경력을 보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 브루스 커밍스, 김범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2-1 폭포의 굉음 1947~1950』, 글항아리, 2023. 28쪽.

** 윤충로에 따르면,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을 벌였고, 끝까지 일본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버티었다. 즉, 그 속에서 친일세력에 대한 척결의지를 키웠으며, 실제로 1946년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대표자 801명에 대한 박일우의 보고에서 민족적 성격이 드러난다”고 썼다. 박일우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전에 일제에게 체포당한 동지들 중 감금자 수는 219명 36%, 1~5년 징역자 수 149명 18%, 6~10년 징역자 수 71명 7%, 10년 이상 징역자 수 26명 3%, 최고 징역자 연수 18년인데 그 수는 1명이고 옥중 생활한 동지들의 총 수 263명이며, 그 징역의 총 연장 연수는 1,087년이었습니다. 반일투쟁으로 혹은 지하운동 혹은 무장폭동 등 망명으로 외국에서 혁명사업하던 동지들의 수는 427명 53%이었습니다.” 윤충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선인, 2005, 304쪽.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끝이 났다. 휴전회담에서 당연히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북진통일’만 주구장창 외쳤기 때문이다. 휴전회담에서 양측이 합의를 보기가 힘들었던 사안이 양측 포로문제였는데, 북진을 주구장창 주장하던 이승만은 1953년 6월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여 휴전회담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1950~1953년까지 대략 3년간 전개된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3만 6천 명 이상이나 되는 병사를 잃었다. 또한, 최소 2,150대의 항공기를 전쟁 수행과정에서 손실했다.*

* 정길현, 『미국의 6.25전쟁사 – 왜, 비긴 전쟁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을까?』, 북코리아, 2015, 294쪽.

그래도 미국은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이끌면서, 이승만 반공정권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패권을 한반도에서 절반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 전쟁의 수렁에 빠져 쓰라린 패배를 맞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The Vietnam Wa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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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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