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에서 사회주의 전복을 위해 잔혹한 민간인 학살 범죄조직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레이건과 CIA
전쟁 기간 소모사에 충성하는 정부군은 산디니스타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문 및 온갖 악행들을 일삼았다. 심지어 이들은 산디니스타로 의심되는 사람을 악어 우리에 던지는 짓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러한 악행을 자행하던 정부군 그 배후에는 물론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왜냐하면 소모사 정권은 전적으로 미국에 충성하는 정권이었고,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의 피해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당시 니카라과 인구가 대략 250만 명 정도였는데, 이 중 5만 명 이상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8만 명 이상의 니카라과 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부상당했으며, 15만 명이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났다. 10세 이하 어린이 가운데 4만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20만 채의 가옥이 파괴됐다. 16억 달러의 외채가 빚으로 남았고, 국내 전 산업의 1/3의 파괴됐다. 따라서 산디니스타에겐 니카라과를 재건해야할 과제가 남았으며, 소모사 정권이 만들어낸 비참한 빈부격차 및 불평등을 해소해야 했다. 이에 따라 빈부격차 해소 및 사회평등을 위한 움직임이 산디니스타 집권 하에 전개됐다. 아래 리우스의 저서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의 내용을 보자.
민중이 권력을 쟁취한 이후로 그들은 자신들을 조직화에 나갔다. 소모사를 내쫓고 나서 니카라구아인들은 다소간 쿠바의 모델을 참조해서 대중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동네마다 지역마다 마을위원회, 노동자 조직, 여성단체, 산디니스타청년회, 노동조합, 소농들의 모임, 교사회, 학생회, 국민보건 운동단체, 농민회 등에 국민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이처럼 산디니스타는 집권 당시부터 진보적인 정책들을 전개해 나갔다. 우선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토지개혁을 통해 대략 7만 명 이상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산디니스다 정권은 소모사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 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소모사 독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1979년 7월 20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혁명 평의회는 포고 3호를 발하여 소모사 가족, 국가방위군의 고위 지휘관 및 정부 고위 관료들의 소유 재산을 몰수하였고, 동년 8월 8일에 개정 보완되어 공포된 포고 제38호에 의하여 소모사 독재정권에 협력한 자의 기업이나 사유재산의 소유권 이전 또는 점유 등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1979년 11월 23일에는 1,500개의 플랜테이션 약 80만 핵타르의 농결지를 무상몰수 했다. 산디니스타 정권은 문맹퇴치운동에도 성공하여 문맹퇴치운동 실행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문맹률을 12%까지 줄였다.
이와 같은 산디니스타의 혁명적 조치는 반대 세력에 의해 방해받게 되었고, 니카라과는 다시 한 번 전쟁에 휘말리게 됐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자행한 의도적인 정치공작에 의해서였다. 당시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우리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면 수치가 아닐 수 없다.”고 하며, 니카라과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주장했다. 지미 카터 정부 시절의 이야기였다.
미국의 실질적인 니카라과 개입은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 이르러서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 2』에 따르면, “산디니스타의 존재를 공산주의의 위협이라고 본, 아니 더욱 중요하게는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오랜 지배에 대한 도전이라고 본 레이건 행정부는 즉시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미국은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또 다른 군사조직을 지지 및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그게 바로 콘트라 반군이었다.
콘트라 반군은 과거 소모사 독재정권 시절 그 하수인이었던 니카라과 국방군 잔존 세력이 모여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이들은 니카라과에 침투하여 군사작전 및 테러를 벌였으며, 온두라스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니카라과는 재건과 불평등 해소라는 과제 속에서 미국에 의한 정치공작 및 전쟁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이 남미 니카라과에서 벌인 전쟁은 가장 악랄하고 반동적이며 장기적인 전쟁이었다. |
니카라과 주재 미국 대사 앤서니 퀘인턴은 한 인터뷰에서 미국과 니카라과 정부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시점을 1982년이라고 했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 존슨에서 오바마까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앤서니 퀘인턴의 인터뷰 내용이 나온다.
은밀한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82년 3월 15일이었다. 당시 CIA는 니카라과 요원들을 활용해 니카라과와 온두라스를 연결하는 교량들을 파괴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산디니스타 정부를 대상으로 한 전쟁을 전개하면서 무기 판매를 통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고, 이것이 바로 이란-콘트라 사건이었다. 미국은 당시 이스라엘 무기 거래상들의 도움을 받아 적성국인 이란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미사일을 판매했다. 그리고 그 대금의 일부를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남미 마약조직이 미국시장 진출에 편의를 제공받는 대가로 중개인 역할을 했다. 당시 레이건과 지지 세력들이 벌인 이 사건은 미국 국내법을 철저히 무시하고 벌인 일이었다. 스캔들이 처음 활자화한 시기는 1986년11월 3일이었다. 레바논의 알 시라지의 특종보도가 미국을 발칵 뒤집었다.
당시 미국은 ‘테러국가와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외교원칙을 가졌는데, 이것에 위배되는 사건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부인과 침묵으로 일관하다 ‘알 시라지의 보도는 사실’이라는 이란 당국의 발표가 나오자 변명에 나섰다. 이란으로 무기가 수출됐다는 사실을 부인하던 레이건 대통령은 결국 무기 수출을 인정하면서도 인질 교환의 대가라는 점만큼은 부인했다. ‘이란으로 토우 미사일 몇 대가 넘어갔을 뿐’이라고도 덧붙였다. 물론 레이건의 주장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미국은 이런 불법적이고 기만적인 거래를 통해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이 자금을 통해 마약 거래까지 손을 댔는데, 콘트라 반군이 전세 낸 여객기가 마약을 미국에 내려놓고 무기를 적재한 채 떠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CIA가 조종했다.
레이건 정부 시절 이란-콘트라 사건은 미국이 벌인 최대로 추악한 정치 스캔들이었다. |
레이건은 마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폭압적이고 인민억압적인 독재체제라 왜곡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왜냐하면 미국이 지원한 콘트라 반군은 니카라과 전역에서 소름끼치는 민간인 학살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니카라과 국내에서 대중적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던 콘트라 반군은 온두라스에서 국경을 넘나들면서 농장과 마을을 습격하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학살하는 잔학행위를 벌였다. 이는 당시 콘트라 반군의 대령출신이던 에드가르 차모르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출석하여 한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산디니스타를 물리칠 수 있는 길은 기관이 다른 나라의 공산당 폭동에서 사용한 진술, 즉 살해, 납치, 약탈, 고문 등의 전술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민간인들이 냉혹하게 살해됐습니다. 다른 많은 민간인들도 고문, 사지절단, 강간, 약탈 등의 학대를 받았습니다. 반혁명군에 가담했을 때 나는 그것이 니카라과인들의 조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결국 미국 정부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콘트라 반군은 테러 전술을 동원해 학교와 병원, 협동조합, 교량, 발전소를 파괴했다. 특히 산디니스타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과정에서 살해당한 민간인의 숫자는 3~5만 명인데, 절대다수는 콘트라 반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콘트라 반군의 학살은 너무나도 심각했다. 심지어 니카라과 주재 미국 대사관은 콘트라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인사의 주장을 인용하며, 콘트라 반군이 콘트라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고, 용광로에 넣어 끓여 죽였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콘트라 반군에게 납치된 어린 소녀들이 밤낮으로 강간을 당했다고도 보고했다.
1984년에 이르러 인권 단체들에 의해 콘트라 반군이 저지른 상당수의 야만적인 전쟁범죄가 보도됐다. 이와 같은 보고들을 보면 콘트라 반군이 강간, 고문, 살인, 불태우기, 눈멀게 하기, 사지 절단, 어린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참수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산디니스타 정부는 1981년부터 1984년 사이만 하더라도 콘트라 반군이 최소 910명 이상의 주(州)공무원을 암살했고, 8,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1985년에 이르러 콘트라 반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숫자는 13,000명으로 증가했다. 5세에서 60세 노인까지 포함하여 총 21명의 민간인이 죽고, 8명이 부상당한 콘트라군 기습공격에 살아남은 한 16살의 생존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콘트라 반군은 군사작전이 끝나자 트럭에 불을 질렀습니다. 제가 숨죽이며 누워있던 곳에서도 산 채로 불에 타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죠.
그 외에도 히노테가주에서 발생한 콘트라 반군의 무차별 공격에 살아남은 한 생존자도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로자(증언한 생존자 지인으로 추정)는 콘트라 반군에 의해 가슴이 잘렸습니다. 그녀의 가슴이 잘리자, 콘트라 반군은 그녀의 가슴 뿐만 아니라 심장까지 꺼내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죠. 남성들은 팔이 부러졌고, 고환이 잘렸으며, 눈알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목이 잘렸고, 그 잘린 틈으로 혀를 빼내어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런 극악무도한 콘트라 반군의 잔혹행위를 목격한 생존자들이나 목격자들은 미국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배낭과 텐트, 부츠 등을 보았다고도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콘트라 반군은 산디니스타 정권의 경제를 망치기 위해 공습을 가하여 의도적으로 농작물을 손상시키고, 수확을 방해했으며, 담배를 말리는 건조창고나 곡물 저장고, 관개 시설, 농가 주택은 물론 기계, 도로, 다리, 트럭등을 의도적으로 사보타주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리고 이들은 니카라과의 어업에도 극심한 파괴와 손실을 입혔다. 미국은 니카라과의 50년 동안의 무역 수출액에 버금가는 170억 달러의 경제 손실을 입혔으며, 전쟁 기간을 통틀어 대략 5만 명이 인명이 희생됐다.
결국 소모사 정권으로부터 폐허나 다름없는 니카라과를 물려받았던 산디니스타는 미국의 경제, 군사 개입과 끊임없이 싸웠지만, 1990년 13개의 우익정당이 합당하여 이루어진 친미정당 우노(UNO)에게 2만 표의 차이로 선거에서 패배했다. 산디니스타를 제치고 들어선 친미정권은 1982년 당시의 경제력을 회복하는 데 대략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사실 이 선거에서도 미국의 개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말 미국의 백악관은 친미 성향의 후보인 비올레타 차모로가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금수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비올레타 차모로는 선거 기간 동안 NED로부터 총 1,100만 달러나 지원 받았다.
이 친미정권은 결과적으로 산디니스타가 이룩한 업적들을 차례차례 파괴했다. 친미정권은 모든 국유화된 재산을 사유화했다. 소수의 과두 세력으로부터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분배한 토지들을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었으며, 유상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나눠준 토지들도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예전의 지주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경제정책들은 니카라과의 부패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고, 공공지출 예산을 삭감하여 가난한 민중들이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받게 만들었다. 친미 정권은 대략 17년간 집권했지만,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 모순의 극대화는 결과적으로 다시 한 번 산디니스타가 집권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2007년 산디니스타는 다시 선거에 도전했고, 다니엘 오르테가는 선거를 통해 니카라과 대통령이 되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2기 집권기에 베네수엘라와 쿠바로부터 석유와 의사들을 지원 받아서 이를 전력생산과 공공의료서비스, 교육시스템 확충에 쓰고 최저임금도 올리는 복지 정책을 부활시켰다.
대통령이 된 다니엘 오르테가는 개헌안을 통과시킨 다음 대통령 선거에 몇 번 출마하든 제한을 두지 않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1년 대선에서 오르테가는 62%의 득표율로 대승을 거두며 3선에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매년 4-5%대의 경제성장을 그럭저럭 이룩하면서도 공공서비스를 확충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 장기집권이나 독재자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복지 정책으로 인한 대중들의 지지율이 높아 2016년 대선에서도 70%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2021년 선거에서도 75%의 득표율로 집권하여 4선에 성공했고, 그리고 현재까지도 오르테가는 니카라과의 지도자로서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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