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9.11 2001년 9.11테러와 1973년 칠레에서의 9.11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전 세계 사람들이 9월 11일을 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도 2001년 미국이 직접 경험한 9.11 테러를 기억할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동부 상공을 비행하던 여객기 4대가 소규모 납치범들에 의해 동시에 납치됐는데, 이 중 여객기 2대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에 충돌했고, 세 번째 여객기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펜타곤(미국 국방부)에, 네 번째는 승객들의 반격으로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했다.(패트릭 잭슨, “9.11 테러 20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나?”, BBC 뉴스 코리아, 2021년 9월 7일)


9.11테러로 대략 3,000명이 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중 대다수는 세계무역센터에서 나왔다. 4대의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 246명 전원이 사망했고, 쌍둥이 빌딩에서만 2,600~2,700명이 사망했으며, 펜타곤에서도 125명에서 18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숫자는 가히 놀랄만한 수준인데, 1941년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든 진주만 기습 공격 사망자를 우회한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군 2,335명과 민간인 68명이 사망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9.11 테러는 이것보다 수치가 더 크다.(김재명, “진주만 성공 뒤 흐뭇했던 일 국왕이 반전 평화주의자?”, 프레시안, 2023년 2월 4일.)
사실 진주만 기습 공격은 엄밀히 말해서 하와이에 있는 민간인 시설을 의도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당시 미 해군의 주력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 일본 대본영의 본 계획이었다. 당시 미국은 전함 애리조나호·캘리포니아호·웨스트버지니아호가 침몰되었으며, 오클라호마호는 전복됐다. 메릴랜드호·네바다호·테네시호·펜실베이니아호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밖에도 함선 18척이 침몰하거나 크게 손상되었고, 180대가 넘는 미군 항공기가 파괴됐다. 위에서 언급한 사망자 2,400명과 더불어 부상자까지 합치면 3,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반면 일본군은 단지 제로센 항공기 29대와 소형 잠수함 5대를 잃었다.(장호철, “77년 전 오늘 일본의 결정은 결국 오판이었다”, 오마이뉴스, 2018년 12월 7일.)
9.11 테러는 부상자까지 합치면 총 사상자가 진주만 기습 공격을 압도한다. 당장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여 생긴 사망자만 2,600명이 넘고 파괴된 잔해와 유독성물질이 가득한 현장속에서 일했던 소망관을 포함하여 또 다른 수천 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하거나 질병에 걸렸다. 부상자의 숫자만 하더라도 최소 6,000명을 넘긴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9.11 테러는 미국에게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지난 2022년 9월 12일(미국 시간으로 9월 11일)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Joe Biden)은 9.11 테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지키고, 보호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9.11 테러범들이 화염에 묻으려고 했던, 자유로울 권리를 보장하는 바로 그 민주주의 말입니다.(뉴스광장, “테러 현장 3곳서 열린 9.11 테러 추념식…바이든 “민주주의 수호 책임””, KBS 뉴스, 2022년 9월 12일.)

물론 이 연설에서 바이든은 2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패전과 철군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혼란 상황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바이든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성 같은 건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심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라크를 침공하여 100만 명 이상의 중동인을 학살한 역사는 전혀 되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사실 미국은 무수히 많은 전쟁범죄를 자행했지만, 정작 아무런 처벌을 받은 사례가 없다. 그래서 미국은 그 어떠한 전쟁범죄를 저질러도 처벌 대상에서 항상 제외되는 나라다. 말 그대로 전범국가임에도 처벌받지 않아 세계 강대국의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 쿠데타 사주로 칠레에서 벌어진 또 다른 9.11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9월 11일은 진주만 기습 공격 못지않은 추모의 날이자 굴욕의 날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인들이 전혀 모르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자신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바로 그 날이, 자신들이 또 다른 나라에서 무차별 테러리즘을 선사했다는 사실 말이다. 거기다 이 천인공노할 테러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빈라덴의 9.11 테러가 일어나기 28년 전 칠레에서 벌어졌다. 바로 미국이 사주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다.
미국과 서방의 언론을 사실상 비판 없이 로봇마냥 받아 적는 국내 좌우 언론들은 라틴아메리카가 왜 반미역사를 가지는 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 이 언론들은 우고 차베스가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로 묘사했다. 또한 이들은 쿠바에서 노골적으로 친미 반공 네오콘 세력들이 시위가 일어나자 마치 무슨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로 왜곡했다. 2021년 7월 12일자 연합뉴스의 기사 제목을 보면, “공산국가 쿠바서 반정부 시위…”독재타도”·”자유” 외쳐”인데, 제목 수준이 가히 한심한 수준이다. (고미혜, “공산국가 쿠바서 반정부 시위…”독재타도”·”자유” 외쳐”, 연합뉴스, 2021년 7월 12일)
이와 같이 미국식 자유주의에 가스라이팅 당한 기사들은 리비아 카다피 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됐는지를 전혀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냥 미국이 지원하고 후원하면 전부다 민주화 시위고 유로마이단처럼 반데라*주의자 네오나치들“이 주류로 암약해도 일단 ‘민주주의’ 시위가 되는 기적의 논리가 펼쳐지는 것이다.
* 반데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하여 반소투쟁을 벌였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으며 냉전 초기 미국에 협력하여 친미반공투사가 된 인물이다. 유로마이단 폭동 시기 반데라를 찬양하는 구호가 우크라이나 서부 곳곳에서 외쳐졌다.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동반한 미국의 색깔 혁명 공작이 이렇게 타국의 주권과 역사 그리고 문화와 정치를 지극히 미국 중심으로 왜곡하고 있다. 거기다 당시 쿠바 반정부 시위는 규모가 수백 명 수준이었고, 맞불집회는 수천수만 명이 했지만, 국내 언론은 그런 맥락을 전부다 생략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식 친서방주의가 민중들을 ‘민주화’라는 단어로 집단 망각하게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미국의 또 다른 9.11 테러를 일반인들에게 얘기하고 알리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드는 작업이며,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칠레 아옌데 정부의 역사와 친미 테러리즘의 역사를 얘기하도록 하겠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에 가장 긴 영토를 자랑하는 칠레는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으로서 미국 구리생산 양대 기업으로서 케니코트와 아나콘다가 장악하고 있었다. 1950년대 당시 칠레 정치에 뛰어든 살바도르 아옌데는 미국이 평소 말하는 이른바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 인물이었다.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은 에두아르도 프레이 후보를 지원하여 살바도르 아옌데 후보를 낙선시켰다. 이후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써가며 칠레의 반공 그룹들을 지원하는 한편, 군사원조 1억 6,300만 달러를 제공함으로써, 칠레를 브라질* 다음가는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미국은 칠레군 장교 약 4,000명을 파나마에 있는 미군 학교에 보내 게릴라 소탕 전술 훈련도 시켜줬다.(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이광일 옮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76~77쪽.)
* 브라질의 경우 주앙 골라트라는 좌파성향(사실상 민주사회주의 성향, 그러나 반미주의가 있음.)의 인물이 대통령이었는데, 미국이 1960년대에 이 정권을 전복시켜 친미 반공국가를 만들었다.

아옌데는 1970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고, 실제로 대선 공약으로 “미국 기업들을 국유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옌데는 1970년 9월 4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두 경쟁자를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1971년 7월부터 케니코트와 아나콘다 그리고 세로광업(Cerro Mining)을 국유화했고, “칠레 경제 수출의 80%가 소수 외국계 거대기업의 손에 들어가 있으며, 이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또한 아옌데는 미국의 구리기업과 같은 외세의 기업들이 42년 동안 40억 달러 이상의 이윤을 냈고, 그들 때문에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았음을 강조했다.(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앞의 책”, 2015, 77~84쪽.)
실제로 아옌데 정부는 민중을 위해 각종 진보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아옌데의 진보적인 개혁으로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이 8% 이상으로 치솟았고,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5% 이하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으며, 전반적으로 칠레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됐다. 아옌데의 초기 개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칠레 민중들은 좌파 정부인 아옌데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빅터 피게로아, 정인환 옮김,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서해문집, 2016, 193~194쪽.)
다시 말해, 아옌데 정부는 과거 친미정권 시절 소외받던 민중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였고, 실제로도 그런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말 그대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의료를 제공하고자 했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어린이들에게 무상급식과 아침식사 그리고 우유를 제공했으며, 원활하지 못했던 전기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아옌데 정부가 칠레 민중에게 대대적으로 지지받았던 이유 중 하나다. 왜냐하면 아옌데 정부 이전에 칠레 역사상 이 정도로 민중을 위해 이토록 헌신한 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가 민중 민주주의를 통해 장기 집권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게 있어서 아옌데는 죽어야 하고 제거돼야만 할 대상이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였는데, 칠레의 구리 수출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은 비축한 구리를 대량으로 방출해 세계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다. 또한 당시 칠레 아이들에게 필요한 분유 수입에 경제제재를 가해, 아이들을 영양실조에 빠지도록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미국은 분유 제조회사들을 협박해 칠레에 분유를 수출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또한 당시 친미우익 부유층들을 동원하여, 제재로 부족한 물자들을 사재기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물자 부족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아옌데 정권의 국민적 지지율을 하락시키기 위해 도시 간 물류수송을 트럭에 의존했던 칠레의 운송회사에 스파이를 위장취업시켜 어용단체를 통해 파업을 선동하고 주도했다. 그 결과 1972년 10월 미국이 계획했던 바와 같이 칠레 운수업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다.(‘MBC 신비한티비서프라이즈’ 2013년 7월 14일 방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1973년 3월 칠레 총선에서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1998년 기밀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칠레를 대상으로 경제제재를 가하고 쿠데타를 사주한 인물이 바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당시 화폐가치로 약 900억 원을 쿠데타 자금으로 쿠데타 준비 세력에게 지원했고, 쿠데타를 실질적으로 실행했다.(‘MBC 신비한티비서프라이즈’ 2013년 7월 14일 방송.)
그렇게 해서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대통령 궁을 포위하고 있는 군인들(위)과 사망한 아옌데의 시신을 옮기고 있는 군인과 소방관들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로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였다. 아옌데 대통령이 있던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은 쿠데타군에 의해 포위됐다.
* 칠레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대대적인 좌파척결 및 학살을 자행했다. 그의 악행으로 칠레 민중은 17년 이상의 군사독재 속에서 살아야했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문당했다.

1973년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와 군부 세력들

전투기가 궁을 폭격했고, 탱크가 출격했으며, 쿠데타군이 진입했다. 당시 아옌데를 포함한 지지세력들은 총을 들고 쿠데타군에 맞서 저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피노체트가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손쉽게 진압됐고, 아옌데는 쓸쓸하게 자결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아옌데가 한 다음 연설이 있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겁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같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선 안 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옌데가 죽고 나서, 미국이 사주한 칠레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 아옌데가 죽고 나서 칠레 역사는 먹구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피노체트와 군부 일당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칠레 전역에 있는 축구 경기장과 군의 막사, 운동장 및 각종 시설들이 민중을 구금하는 시설로 전락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체포 및 구금됐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피노체트 정권은 공식적으로 최소 3,2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인 수치는 이것보다 더 높다.
이런 체포, 구금, 처형 과정에서 외국인 색출 작업이 기승을 부렸다. 아옌데 정부가 조직한 ‘게릴라 부대’에 외국인이 가담했다는 게 이유였다. 상관 명령에 불복종한 병사들도 총살됐다.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도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사살됐다. 아옌데 정부 시기 인민연합 정치를 펼쳤던 칠레 좌파정당이나 좌파정당의 평당원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도 피노체트 정권에서 탄압받았다. 많은 이들이 살해되거나, 하루아침에 실종됐다. 피노체트가 다스린 군사독재 17년 동안 대략 3만 명에서 6만 명이 이런 식으로 군부 정권에 의해 죽어나갔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칠레 전역이 민중과 좌파들의 피바다로 물들었다.
이렇게 죽거나 고문당했던 이들 중에는 어린이 수십 명도 포함됐다. 고문당하거나 수감되는 과정에서 부모가 실종된 수천 명의 아이들이 고스란히 방치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가했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들도 유린당했다.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강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칠레의 유명한 좌파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감 당했던 이들은 엠마 왓슨이 출연한 영화 ‘콜로니아’에 나온 것처럼 친나치 인사들이 만들어낸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처럼 피노체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칠레의 역사는 암흑의 터널에 진입했다. 미국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서서히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스크주의’를 박멸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이 축출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을 민영화했고, 여타 광업 부문을 외국계 업체에 개방했으며, 칠레의 여러 지하자원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수입 상품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칠레의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실업과 빈곤율이 급등했고, 임금도 급락했다. 칠레 좌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사회적 성과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칠레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인민 연합 집권기인 1970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였을 정도다.

 

50년 전 미제가 칠레인들에게 자행한 9.11’테러’를 결코 잊지 말자!

 

이것이 바로 대다수 미국인들이 전혀 기억하지 않는 미국이 자행한 9.11 테러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본 9.11테러의 피해만 생각하고 있을 뿐, 자신들이 자행한 9.11 테러는 아예 존재자체를 모르고 있다. 미국이 칠레에서 벌인 쿠데타는 대다수 칠레인들에게 오사마 빈라덴이 자행한 것보다 훨씬 참혹하고 끔찍한 9.11테러였으며, 그 9.11 테러로 칠레인 수만 명이 죽고 수십 만 명이 감옥에 구금되어 고문과 구타에 시달렸다. 반대파의 시신은 헬리콥터에 실려 바다에 수장되기까지 했다.
사실 미국의 이런 9.11 테러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이 지원한 친미 독재자들은 이른바 CIA가 주도하는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에 협력했다. 이 나라에서 대략 좌파로 규정된 무고한 사람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고, 또 다른 수십만이 감옥에 구금됐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브레즈네프 체제에 반체제 인사 두 명이 감옥에 보낸 것을 인권유린이라 비난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수십 만 명의 인사들을 그렇게 죽이고 구금했다.
2023년 9월 11일은 미국이 칠레에서 9.11 테러를 가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여전히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신들의 이윤축적을 위해, 비슷한 짓을 자행하려고 한다. 물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미국이 명령하면 무조건 따르는 한국 같은 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제국주의 체제에 맞서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반미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쿠바를 중심으로 한 라틴아메리카 국제좌파연대가 반드시 승리해야 하며, 미국이 사주한 자칭 민주화의 흐름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이 외치는 위선적인 ‘민주주의’와 ‘민주화’라는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들이 외치는 ‘민주화’의 실상이 사실은 친미 독재자 사주라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미국의 9.11 테러 50주년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할 교훈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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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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