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제국주의 강도단, 인류 대학살장 히로시마에서 가증스럽게도 전쟁 획책과 북핵반대를 외치다!
제국주의 강도 국가들의 수장들이 지난 5월 20일 히로시마에 모여 북핵을 반대하는 공동성명(코뮤니케)을 발표했다. 이 공동성명은 북의 “전례 없는 불법 탄도미사일 발사를 강력히 규탄”하고, 북의 “무모한 행동은 반드시 신속하고 단일하며 강력한 국제적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무기 및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 그리고 기타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폐기를 목표로 하는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재차 강조한다.”고 표명했다
더불어 “핵 확산금지조약(NPT) 아래에서 북한은 핵무기 국가 지위를 가질 수 없다”, “북한의 대량파괴무기나 탄도미사일 계획이 존재하는 한 (대북) 제재를 완전하고 엄밀하게 실시, 유지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며 강도와 같은 대북 제재를 한층 더 강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제국주의자들의 인식이 강도적이지 않은 적이 없고, 적반하장, 아전인수가 아닌 적이 없지만, 이번 히로시마에서 공공연하게 북핵 반대와 제재 지속을 천명하고,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 핵전력 증강과 지역 안보 위협을 명목으로 비난하며 반중, 반러 적대행위를 노골화 한 것은 더더욱 가증스럽고 뻔뻔하며, 파렴치하고 노골적이며 범죄적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가 어떤 도시인가?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인류역사상 최초로 핵이 실전에서 사용되어 수십만의 무고한 인류가 절멸당한 피학살의 도시다. 이 원자폭탄 코드명 ‘리틀보이(Little Boy)’, ‘팻맨(Fat Man)’은 그 익살스러운 명칭과 다르게 인류 대학살의 가공할만한 무기가 되었다.
1945년 8월 6일 월요일 아침 8시 15분경,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는 원자폭탄3)을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하였다. 핵폭풍과 열, 방사선은 당시 히로시마에 살고 있는 42만 명에게 직간접의 피해를 입혔고, 1945년 말까지 이 중에서 약 16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3일 후 8월 9일 오전 11시 1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나가사키 시민 27만 명에게 피해를 입혔고, 이 중 약 7만 4천 명의 생명이 사라졌다(정근식 2005, 13).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터진 폭발점 온도는 100만도 이상으로, 폭심지 지표면 온도는 3,000-4,000도에 달했다. 강력한 폭풍은 4km이상 파괴력을 미쳤고, 열과 폭풍은 폭심지로 부터 2km이내 모든 것을 파괴·소멸시켰다. 핵폭발로 인한 급격한 대기상태의 변화는 원폭 구름을 만들며 10km상공까지 치솟았고, 이 구름은 곧 비가 되어 내렸다. 이것이 방사능 덩어리 ‘검은 비’였다(박성실 2015, 2).(이은정 영남대, “피폭된 신체와 고통: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중심으로”, 민족연구 73호, 2019.02.13.)
일본 두 도시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추축국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벌인 전쟁과 식민 지배를 끝장내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명목으로 미제국주의자들이 자행한 잔학한 인류대학살은 면죄부를 받았다. 미제국주의는 이 가공할 인류대학살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피폭으로 사망하고 고통을 당한 수십만 인류와 후손들은 전쟁범죄자들이 아니라 무고한 민중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정작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 천황을 비롯해 일본 전범들을 비호하고 일본을 재무장시켜 군국주의 책동을 하게 만들었다.
이 원폭 투하로 식민지 치하에서 1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피폭을 당하고 그 중 절반인 5만 여 명의 두 도시 거주 조선인들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 피해 통계 중 한국인의 인적 피해는 10%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5년 단편적인 추정이지만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통계에 따르면, 히로시마 한국인 수를 8만 1,862명으로 집계하고 있고, 당시 추정 피해상황은 약 히로시마에서 총 피폭자 7만 명 중 사망자 3만 5,000명, 생존자 3만 5,000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나가사키에서는 총 피폭자 3만 명 중 사망자 1만 5,000명, 생존자 1만 5,000명으로 보았다. 즉 한국인은 두 도시에서 약 10만 명이 피폭되어, 그 중 5만 명은 사망, 5만 명은 생존하였다는 수치이다. 이 통계는 또한 생존자 중 4만 3,000명이 고국으로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잔류했다고 제시하였다.
1972년 4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원폭피해자 추정치로 총 피폭자 7만 명 중 사망자 4만 명, 생존자 3만 명(귀국자 2만 3,000명, 일본 잔류자 7,000명)이었다. 그리고 귀국자 가운데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은 2,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피폭자 7만여 명 가운데 1만여 명(1세 2,300여 명, 2세 7,500여 명, 1세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등록자 기준이며 2세는 추정치)이 현재 한국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피폭자의 피해는 다양한 신체 질환뿐 아니라 재산 손실, 장애로 인한 노동력 상실, 가정 해체, 방사선에 의한 질병 및 후유증 등 2차적인 증상까지 다양하다. 이들에게는 유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피폭자 자손과의 결혼을 꺼리는 문제와 병자 대하듯 하는 사회적 편견 등의 정신적 피해도 적지 않았다. 1세 피해자 뿐 아니라 자녀들 역시 일반인보다 무려 100배에 이르는 유병률을 보이면서 2ㆍ3세 피해자들도 뇌성마비, 시력장애 등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실태조사 조차 한·일 양국에서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한일국교정상화 전에는 물론 1965년 한일조약에서도 양국간의 일괄 국교 타결 원칙에 가려져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그 뒤 일본 정부는 “재한 피폭자 배상에 대해서는 일한조약에서 체결을 끝냈다”라는 답변으로 대신하였다.(“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피폭된 피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 피해자들은 피폭 당시의 공포와 참상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죽는데 우짤끼라요. 그 다음 뛰어 오는 사람도 있고, 첫째는 물을 찾더라고예. 삶긴 사람들이 머리 있는 사람도 없고. 시내서 오는 사람은 옷 입은 사람도 없고. 남잔가 여잔가 구분도
못해요. 새까마이 숯덩거리데요. 물을 주면 데굴데굴 구불러서 죽어뿌려요. 인자 우리 부친이 바다에 뛰어서 들어가는 바람에 얼굴은 안 삶아서 그렇지 뒤에는 다 삶았어요. 다 삶아도 우째된 판인고. 아이고. 미치겄다. 보상금도 못탔습니다.[1929년생, 이영자, 창원대 경남학연구센터 2017, 34]
막내이가 [원폭] 투하 바람에 집에 찡기가 그날 그 자리에서 죽었어예. 만 7개월밖에 안됐지 뭐. 그래 놓으이 기왓장에 고마 눌리가. 엄마하고 같이. 엄마가 아직(아침) 묵고 젖 먹여 재인다고 있다가. 엄마는 뚫고 나오고. 연기가 휩쓸 리가 깜깜하이 어두운데 찾도 못하고.
난제 없어졌을 때 본께네 아가 하마 숨 떨어졌뿟더래요. (중략) [남]동생들은 일본서 원자탄 맞아가지고 한국 나와서 고마 일찍 가뿌맀어. 아주 젊을 때 고마. 결혼은 했지만은 아주 일찍 고마 삼십도 못 돼서 두 사람이 갔어. 바로 내 밑에 동생 둘이서. (중략) 나는 둘째. 내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그분도 원폭 당해 가꼬 암을 20년 넘게 앓다가 갔어. (중략)
맨 처음에는 골수암. 처음에 걸렸는 암이 골수암이라서 머리 다 깎고 그래가 수술했는데 우리 한국에 있었을 거 같으마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많이 치료가 잘 안 되서 못할 낀데. 그 분들이 이민을 가가지고는. 캐나다 토론토 살고 있으니께. 이민을 가가지고 있으니까 암을 빨리 발견해가지고. 암 수술을 6번 하고. 7번 만에는. 20년이 넘도록 암을 앓았으니까. 암이 생기고도 많이 오래 살았는 택이죠? 마지막에는 7번째는 또 골수암이 걸렸는데, 골수암이 너무 깊으게 걸렸다고. 처음에 수술한 닥터가 맨 끝까지 거기서 돌봤는데, 그 닥터가 마지막에 7번째는 수술할라 캐도 너무 위험하고 하니 편히 가도록. 본인한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편히 가도록 치료하고. [1930년생, 김순희, 2018.1.1.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인터뷰](이은정 영남대, “피폭된 신체와 고통: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중심으로”)
이들 원폭 피해자들은 대다수가 ‘군도’로 불리는 히로시마에 강제동원되어 온 식민지 조선인들이다. 이들이 당한 고통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한테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폭 피해자들은 피폭의 고통에 더해,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마무리된 된 한일 국가의 외면 속에, 피폭자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 평생을 고통 받고 살거나 피폭 후유증으로 짧은 생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만행으로 2천만 아시아 인민과 3백십만 명 이상 일본 인민의 희생당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행한 반인륜 침략 전쟁범죄 때문에 전범과 상관없고, 자신들 또한 이 침략전쟁의 무고한 피해자가 되기도 했던 일본 민중, 더욱이 식민지 조선인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보, 천보를 양보하여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수십만의 희생자가 나왔지만, 그것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패전하게 되고 일제에 의한 더 많은 피해를 막고 수억의 식민지 치하의 민중이 해방되었다면 그러한 피해는 안타깝지만, “부수적 피해”고,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미제국주의자들이 자행한 인류에 대한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였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는 그러한 명분으로 신화가 되었고 정당화 되었다. 사실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원폭 투하라는 사실은 만천하에 알려졌지만, 여전히 그를 둘러싼 역사적 진실은 금기시 되거나 은폐되고 있다.
미국이 수행하는 반쏘 반공전이 원폭 투하의 배경
‘사상의 은사’이자 권력에 맞선 참된 언론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히로시카-나가사키 원자탄 폭탄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이 문제와 의문에 관해서 가장 권위적인 연구가는 미국의 과학사가 스탠리 골드버그 박사다.
그에 의하면 트루만 대통령의 연속적 원폭투하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미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대일전쟁을 단시일에 종결시킨다는 ‘인도적’이유이고, 둘째는 만주에서 대일전쟁에 참여할 소련을 견제하고, 미국의 단독적 승리로 전쟁을 종결시킴으로써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단독적 패권을 확고히 다진다는 외교적 이유이며, 셋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책임자들이 그 계획 추진과 관련된 많은 비난과 반대를 모면하고 중요한 실책들을 면책받기 위하여 폭발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민간도시를 목표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들 쟁점에서 ‘전쟁 조기종결’설은 위에서 충분히 검토했다. 외교적 동기는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소련의 세력권 확장을 저지하려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와 군대의 일관된 주장인 ‘인도주의적 동기’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항복일로부터 3개월 내에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대일전쟁에 참전한다는 얄타협정의 비밀합의에 따라서, 나치 항복일로부터 정확히 3개월 되는 날인 8월 8일 만주로 진격했다. 미국은 바로 그 이틀 전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전면적 군사개입으로 일본은 사실상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는 무력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군이 만주에서 총공격을 개시한 바로 다음날 제2의 원자폭탄을 급히 나가사끼에 투하했다.
트루만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군부와 정책고문들은 얄타협정 비밀합의에 따라 8월 8일 소련군이 대일전쟁에 참전하기 앞서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미국이 일본군 항복의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소련 정부를 통해서 연합국 정부들에게 항복의사를 전달하고 있던 상태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적인 단계에서, 그리고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하루씩 전후해서 미국이 일본의 인구밀집 도시 두 개를 원자폭탄으로 소멸해버린 동기와 목적이 ‘전쟁 조기종결’의 필요 못지않게 대소련 견제에 있었다는 논리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셋째는 미국 국내의 정치역학 논리다. 트루만 대통령과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초대형ㆍ초비밀 계획을 추진한 정부 고위직 관리, 군인 장성, 과학자, 원폭사업 물자 납품업자 등 이익집단은 그들이 만든 신무기의 위력을 일본의 도시 폭격에서 극적으로 입증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할까봐서 오히려 두려워했다.(리영희, ‘1945년 `히로시마`의 영원한 논쟁’, 윌프레드 버체트 저, “히로시마의 그늘” 추천의 글, 1995년)
이러한 주장은 리영희 선생뿐만 아니라, 기존 정설로 알려진 역사의 진실을 새롭게 추구하는 ‘수정주의’ 학자들이나 상당수 언론에서 이미 원자폭탄 투하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진실로 인정되고 있다.
여러 증언을 통해 드러난 것을 보면, 진실은 미국인들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은 일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군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힘을 과시하기 위한 외교적 목적에서 원폭을 썼다.(정남구, [특파원 칼럼] 원폭은 신의 징벌이 아니다, 한겨레, 2013-05-30)
불행하게도 지난 70여 년간 대다수 미국인들은 히로시마가 조기 종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앞으로도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정책당국자들의 주장을 맹신해 왔다. 미국 핵이 존속돼 온 이유다…
새뮤얼 워커라는 역사학자는 “미국은 수십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원폭을 투하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원폭 공격이 없었어도 전쟁은 비교적 이른 시일에 끝났을 것이며, 일본 본토 상륙은 필요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말한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20여 년간 미국에서는 트루먼 등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곧 히로시마의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65년 가 알페로비츠가 <핵 외교(Atomic Diplomacy)>란 책에서 ‘원폭 투하의 주요 이유는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었으며 ‘소련에 겁을 주어 전후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신화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2차 대전 당시의 비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면서 정부 당국자의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났다.(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 프레시안, 2017.07.25.)
“미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대일전쟁을 단시일에 종결시킨다는 ‘인도적’이유”는 위 글처럼 당시 일본 정부가 이미 항복 의사를 연합국 정부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방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처음으로 개발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전에서 사용한다는 세 번째 이유와 함께, 가장 크게는 쏘련의 군사적 승리를 막기 위해서 미국은 황급하게 일본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제국주의는 쏘련에 의한 일본의 패배와 일본 진주는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승리라고 간주했다. 미제는 소련의 승리 이전에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패전을 이끌어내고 그 공(功)으로 자신들이 주도하는 반공주의 전후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이 전후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영, 미, 프 제국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일본, 독일 추축국에 맞서는 국제적인 반파시즘 투쟁에 참여하여 쏘련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웠지만, 국제적인 파시즘 대 반파시즘 전선의 전초전이었던 스페인 내전에서는 ‘불간섭’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공화정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였다. 독일 히틀러가 쏘련을 침공하여 양자가 파멸할 때까지 싸우기를 열망하며 독일 히틀러와 싸우지 않고 파시즘의 대두와 전쟁을 부추겼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하자 뒤늦게 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추축국과 싸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역시 1944년 6월 22일 소련이 동부전선에 독일군에 맹공(바그라티온 작전)을 가함으로써 서부 전선의 독일군이 동부로 이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시스트 군국주의 세력을 격멸하는 주요 세력은 3000만 명이 희생당하면서 파시즘을 격퇴했던 쏘련과 일제에 맞서 싸웠던 중국 공산주의 세력들과, 이탈리아 빨치산, 조선의 반일 유격대들이었다.
“2차 대전 연합군 최종 표적은 히틀러가 아니었다”(박인규 편집인, 프레시안, 2015.04.24.) 스탈린과 쏘련, 국제적인 공산주의 세력들과 민족해방 세력들이 주적이었다.
미제에 의한 원폭 투하는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국제적인 반파시즘 공동전선의 막바지 시점이자 공산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간의 냉전이 개시되는 시점에 자행되었다. 미국이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힘을 과시하기 위한 외교적 목적”으로 원폭을 투하했다는 주장은 이후 역사적 사실로도 증명되었다. 미국은 1947년 6월 구-미 회의에서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혹은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제시했는데, 이는 2차 대전으로 황폐화된 서구 유럽의 경제를 재건하고 이를 통해 쏘련을 포위하는 반공산주의 서방진영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고 실제 미국이 1947년 이후 반쏘 봉쇄 정책을 계속하면서 쏘련에 대한 핵위협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쏘련은 미제에 대항하기 위해 핵실험에 박차를 가하고 마침내 1949년 8월에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 핵위협에 맞설 수 있었다.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국의 해방과 국민당의 패배, 그 직후 한국전쟁(조국해방전쟁)에서 미대통령 트루먼과 군부 등 미제국주의자들은 전쟁 초기부터 원자폭탄 사용을 검토하고 특히 1950년 11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평양과 만주에 원자폭탄 사용을 구체적으로 고려하고 맥아더에게 그 사용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 쏘련이 이 전쟁에 참전할 경우 쏘련에 대해서도 핵공격을 가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의도는 쏘련의 핵무장과 보복 가능성, 중국과의 전면전 비화 가능성, 서유럽 국가들과의 이견 등으로 인해 좌절됐다. 미국은 1958년 이남에 전술 핵무기를 도입하고 일본 내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핵무기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핵잠수함과 핵폭격기 등으로 한국과 일본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다. 1959년 주한미군 오산 비행장에서 핵을 실은 전투기 연료 탱크에서 불이 나 폭발하는 사고와 오키나와 나하 비행장에서 핵미사일이 미군의 조작 실수로 발사되어 위험천만한 핵사고 참화가 벌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수십 만 무고한 인류를 학살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실험을 하고 핵으로 다른 나라를 위협하고 핵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침략전쟁과 제재를 가하는 등 전 세계에서 모든 핵위협의 원흉은 언제나 미제국주의였다.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핵으로 자행한 인류 대학살 범죄는 미국의 반쏘 반공전의 일환으로 자행되었고, 그 이후의 핵전쟁위기와 핵위협 역시 마찬가지다.
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
미제국주의에 의한 원폭 투하는 정의의 전쟁 수행이 아니라 집단학살이자 잔학한 전쟁범죄다.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을 ‘핵에 의한 집단 학살(nuclear genocide)’이라고 규정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 리차드 미니어는 히로시마를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전쟁범죄, 즉 핵 홀로코스트(atomic holocaust)라고 말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는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로부터 절멸주의(exterminism)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승리를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으며 도시와 국가, 그리고 세계까지도 파괴하는 것, 즉 핵무기에 의한 전면적 파멸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학자들만의 의견인 것도 아니다. 도쿄 전범 재판(1946~1948년)에 참여했던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소수 의견을 통해 미국의 원폭 공격은 “(태평양전쟁에서 일어난 사건 중) 나치 지도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가장 근접한 유일한 사례”라고 지적했다.(박인규, 같은 기사)
그럼에도 미제에 의한 이 인류 대학살은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으로 철저하게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
셔윈은 히로시마 이후 수 십 년에 걸친 역사학자들의 연구 끝에 ‘히로시마의 진실’이 거의 밝혀졌으나 이러한 역사 연구의 결과들이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는 미국에서 역사가의 역사 해석이 정치적 통제하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역사가는 진실을 밝혀냈으나 그 진실이 일반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이라고 말한다.(같은 글)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은 직접적으로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의 진실이 알려지지 않게 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은 더 나아가 G7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한 미제를 위시로 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확대재생산 되어 지속되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고 인류를 대학살한 히로시마의 진실을 덮음으로써, 그 뿐만 아니라 ‘북핵반대’라는 명목으로 북에 대한 적대시 정책, 제국주의자들의 핵독점 정책, 핵패권 정책을 은폐함으로써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을 상속하고 있다. 또한 2천만 아시아 인민과 3백십만 일본 인민의 피와 반전평화의 염원이 서려 있는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일본을 다시 침략 전쟁국가로 변모시킴으로써 그 유산을 확대재생산 하고 있다. 반북, 반중, 반러 ‘가치동맹’을 기치로 미일한 전쟁동맹의 유지, 강화를 위해 일제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전쟁범죄, 미제가 자행한 핵홀로코스트는 금기가 되어 면죄부를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젤렌스키 꼭두각시 정부와 신나찌를 내세워 러시아 혐오를 조장하고 우크라이나에 러시아를 향한 핵미사일 배치기도와 위협, 수십 개의 생화학 무기 실험장 운영,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그 전쟁을 대만과 한반도로 확장하려고 한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가증스러운 거짓말로 자신들의 제국주의 전쟁책동을 은폐하고 인류를 위협하는 핵공갈과 위협이 바로 자신들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이 제국주의 책동에 초청받아 제국주의 야만과 전쟁책동에 동참하려고 하는 윤석열은 이 전쟁책동에 동참하여 반민족 적대행위를 고조시키고 있고 전쟁위협을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에 의해 우크라이나에서 오늘날 전쟁이 자행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제국주의자들과 꼭두각시 정권이 도발한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민중은 전쟁 참화로 고통 받고 있다. 나토는 전쟁주범이다. 아시아판 나토는 아시아, 특히 대만과 한반도를 제2의 우크라이나 참화장으로 만들겠다는 섬뜩한 공세이다.
더욱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핵방사능 오염수 방류는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이 여전히 핵사고와 재앙으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인류적 범죄 사건이다. 유전자가 변형되고 세포가 파괴돼 각종 암이 유발되고 생식 기능이 저하되는 살상무기인 오염수와 히로시마에서 방사능 덩어리 ‘검은 비’가 내려 피폭시켰듯이, 대기중에 떠도는 핵방사능은 일본 자신과 주변국을 핵방사능으로 위협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G7의 제국주의 강도들은 북과 중국과 러시아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격렬하게 규탄하면서도 정작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는 의제로 삼는 대신에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처리된 물의 방류가 국제원자력기구 안전 기준 및 국제법에 맞게 실시돼 인체나 환경에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보하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의 독립적인 검증을 지지한다”며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엄중한 비난을 삼가고 “일본이 국제사회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개방적이고 투명한 태도로 계획을 진행할 것을 권장한다”는 수준의 문구조차도 공동성명에서 빼는 것으로 일본을 비호하고 있다.
7인의 강도단들은 “모든 사람의 안전이 훼손되지 않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한다.”는 공동 문서를 발표했다.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은 핵무기 자체가 아니라 제국주의 핵무기와 제국주의 침략, 패권정책, 이중잣대에 있다는 것을 강도 G7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인류는 핵무기, 핵재앙,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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