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의 반공 반북 ‘사회주의’는 베른슈타인식 “가치로서의 사회주의” 전통을 계승하는 사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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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ㆍ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당시 여러 가지 유형의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 중에는 부르주아 사회주의, 봉건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맑스는 각종 반동적, 공상적 자칭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며 ‘과학적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맑스ㆍ엥겔스의 전례에 비춰볼 때, 우리 사회에도 각종 유형의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이 중 노동당의 사회주의는 ‘반북반공’ 사회주의다. 우리는 여러 차례 노동당과 이백윤 후보가 내세우는 ‘민주 사회주의’가 ‘반공반북’ 사회주의라고 비판해왔다. 또 수억, 수십억 인류가 피눈물로 건설하고 지금도 그러하고 있는 현실의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수사가 무엇이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개혁, 즉 사민주의에 이르게 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비판이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 실제 그렇다는 것을 노동당 이백윤 후보가 직접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백윤 후보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반공주의라고 하는 벽 때문에 한계를 넘지 못했다.”([인터뷰] 이백윤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 2022.03.02, 이하 인용은 같은 기사)
반공주의라는 벽 때문에 한계를 넘지 못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공주의의 벽을 부셔야 한다. 역사적 관점이 있다면, 아니 진보적 수준의 상식이라도 있다면, 이 벽이 분단으로부터 기인했으며,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북을 악마화 하며 민중을 대량 학살하고 억압한 반공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정치적 결론을 내려야 한다.
기자는 이번 대선과정에서 부딪쳤던 반공주의 벽의 실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이백윤 후보에게 어떻게 인식하고 이 벽과 맞서 싸울지를 물었다.
“말 나온 김에 반공주의적 선입견에 대해 더 들어가보자. 이 후보가 나오는 유튜브 채널이나 노동당 공식 SNS 등에 가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북한으로 꺼져라’, ‘국정원에 신고하겠다’, ‘국가보안법 위반 아니냐’ 등등 이런 식으로 악플을 단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멸공의 횃불’이란 군가 영상 링크를 걸어놓기도 했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지금이 1980년대인가? 시대착오적인 ‘레드 컴플렉스’에 갇힌 사람들이 사회주의란 말만 듣고 무작정 간첩 취급을 하고 있다. 이 후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에 대해 노동당 이백윤 후보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제 빨갱이 타령은 그만하고 좀 더 본질적인 논쟁에 집중해야 할 때다.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사실 노동당은 북한을 찬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진보진영에서 꽤 반북에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란 구호 때문에 자꾸 북한과 엮고 ‘멸공의 횃불’을 들이대는 것은 이런 논리다.”
“북한은 사회주의 독재 국가=노동당은 사회주의=고로 노동당은 북한을 좋아한다.”
기자의 질의에 대해 이백윤 후보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세상 단순한 1차원적인 논법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작금의 북한은 무늬만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지 중세 왕조 국가나 다름 없다. 노동당이 찬양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정말로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노동당 이백윤 후보는 자신들의 구호대로 선을 넘기는커녕 금기의 선을 사정없이 짓밟고 서 있다. 반공주의의 벽을 넘기는커녕 반공주의의 벽 앞에 주저 앉아버렸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반공주의를 적극 조장하며 “세상 단순한 1차원적인 논법”을 구사하고 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작금의 북한은 무늬만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지 중세 왕조 국가나 다름 없다”는 대중들한테 뼛속 깊이 각인된 “반공주의적 선입견” 때문에 “북한으로 꺼져라”, “국정원에 신고하겠다”, “국가보안법 위반 아니냐”는 광기어린 악플이 달리고 “‘멸공의 횃불’이란 군가 영상 링크를 걸어놓기도” 하는 저열한 작태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노동당이 사회주의를 대중화 하려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다 해도 대중들한테 각인된 이 반공주의가 어떻게 이 땅에서 형성되었고, 어떻게 이 반공주의가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고 노동자와 민중의 정당한 저항과 투쟁을 잔인하게 짓밟으며 이 사회를 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차단해 왔는지를 끈질기게 설명하고 설득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백색테러체제가 심각하게 왜곡하고 은폐한 북의 진실에 대해 알려내려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노동당 이백윤 후보는 “사실 노동당은 북한을 찬양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는데, 국가보안법으로 탄압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북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진실을 왜곡했는가. 대부분은 반공주의와 맞서 싸우고, 반공주의 체제가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극렬하게 적대시하는 북에 대해 편견과 독단에 빠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실을 추구했다는 이유로, 분단을 넘어 통일을 추구했다는 이유로, 같은 민족에 대해 적대하지 말자고 했다는 이유로, 분단의 주범인 미국을 규탄했다는 이유로 등 갖가지 명목으로 무고하게 학살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는 탄압을 당하고 감시, 사찰 당하며 인권을 말살 당하지 않았나.
“북한은 무늬만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고 “중세 왕조 국가나 다름 없다”며 북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있는 이백윤 후보는 최소한 이 부분에서는 조선일보 식의 극우적 사고와 무엇이 다른가.
노동당 홍세화 고문이 항상 강조하는 말마따나 과연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노동당 이백윤 후보는 과연 국가보안법이 조장한 편견과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하게 자주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 이백윤 후보의 반북 인식은 과연 타인으로부터, 특히 반공주의 체제가 강요한 반공주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형성되었는가.
“무늬만 사회주의”니 “중세왕조 국가”니 하는 이백윤 후보의 인식은 앞에서 예로든 “몰지각한” 극우 대중들의 인식과 조금이라도 다른 게 있는가.
북이 “중세왕조 국가”와 다름없다면, 왕조국가의 지도자들이 반일 반봉건을 내걸고 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무장항쟁을 하고 지금도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세왕조 국가”의 경제기반인 지주-소작관계는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양반 사대부 신분질서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주-소작관계 대신 생산수단이 국유화 되고 전국적으로 국영농장, 협동농장이 즐비한 나라가 어떻게 “중세왕조 국가”와 다름없을 수 있는가.
미제를 위시로 한 제국주의의 고립말살책과 싸우며 국유화와 협동조합 체제, 무상체제가 과연 사회주의의 “무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백윤 후보는 사회주의 요체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허울만 국유화, 협동조합이지 인민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없다고 할 것인가. 과거 통합되기 전 ‘변혁당’의 주장을 볼 때, 틀림없이 그렇게 답변할 텐데 과연 중앙집중 경제는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배제하는가. 그렇다면 북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대안의 사업체계’ 원리와 사례를 보기 바란다. 협동조합 운영 사례도 보기 바란다. 세포 등판 같은 자연개조 사업에서 보여준 인민대중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보기 바란다.
이백윤 후보는 이른바 ‘3대 세습’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 텐데, 권력승계 절차나 원리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세습 권력’이 무슨 가치와 제도를 옹호하고 있는가. 봉건 모리배들처럼, 거대토지를 세습 받았는가. 수십, 수백 명 노비를 세습 받았는가. 재벌처럼 천문학적 거대한 부와 기업을 물려받았는가. 인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가.
인민대중들에게 봉건 왕조처럼 군림하고 사는가 아니면 인민대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가.
노동당과 이백윤 후보는 이러한 질문과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할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무지하고 이 무지에 근거한 적대관이 대중들의 반공주의 인식 수준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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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사회주의는 관념과 공상이 아니라 전인미답의 길을 걸으면서 수억, 수십억 인류가 피와 땀으로 건설해 오며 분투했고, 지금도 제국주의와 싸우며 분투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진보적 인류의 실험들이 항상 전진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현실의 제약 속에서 한계와 무수한 오류와 시행착오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실험이 있었기에 식민지 해방이 있었고 제국주의의 힘이 제한되고 자본주의 내에서조차도 복지와 권리를 부분적으로라도 쟁취할 수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진전만큼 인류의 진보가 있었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한 지금에서 인류는 길을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새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노동당의 ‘민주 사회주의’ 기치는 국유화니 중앙집중 체제니, 프롤레타리아 독재니, 당의 영도 강화니, 지도자의 중심적 역할이니,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건설과 자력갱생의 원리니 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고 적대시하면서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절대 현실의 사회주의가 될 수 없다. 결국 사회주의는 이 체제의 모순을 깨고 실제적인 역사적 경험, 체제의 모델을 가지고 건설해가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베른슈타인이 말한 “가치로서의 사회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무늬만 사회주의”로 여기에 실제로 남는 것은 사민주의 노선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 베른슈타인 식 전통을 잇는 사민주의 세력들은 공히 현실의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감을 보여 왔다.
“나는 사람이 꼭 부지런하지 않아도, 매순간 쫓기고 살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회, 이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차이점은 학술적으로 구분하자면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사회주의 그 다음 단계로서의 공산주의 말이다. 사실 이런 것은 학술적인 차이일 뿐이다. 현재 이런 구분은 딱히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문제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인 자살률, 여성이 남성보다 30% 넘게 임금을 적게 받는 문제, 이런 불평등과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 무슨 대단한 이상향을 만들어 놓고 이건 사회주의고 이건 아니고 이렇게 구분하는 건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착취질서 철폐, 국가권력 타파, 생산수단 몰수와 국유화, 또 이를 실제로 추구했던 구쏘련이나 북의 사회주의 대신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 사회주의”라는 것은 “사회주의 최종 목표라는 것은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며 운동이야말로 나의 전부다”라는 베른슈타인의 “가치로서의 사회주의”, 즉 개량주의 노선이다.
맑스주의가 공산주의를 두 단계로 나눈 것은 비단 학술적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잔재 및 잔존세력과의 투쟁의 문제, 국가소멸과 그 근거의 문제,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대중국가의 건설, 사회주의 경제계획과 문화혁명, 농촌과 도시의 대립,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해소,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과 노동자의 관계의 문제 등 사회주의 건설문제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이는 이백윤 후보가 선의를 담아 진심으로 말하는 “나는 사람이 꼭 부지런하지 않아도, 매순간 쫓기고 살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회”를 실제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행의 문제, 사회주의 단계의 문제다. 사회주의 건설 전망이 구체적으로 없기 때문에 이백윤 후보와 같은 사고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위 인터뷰에서 기자는 노동당 이장규 전 정책위원장의 “가치로서의 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인용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에 대한 일종의 지향성이고 자기 스스로에 대한 거울이다. 혼자서 자본주의에만 매몰되어 살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돌아보는. 가령 이런 거다. 성경이나 불경에 좋은 말씀 많지만 현실적으론 그걸 다 지키면서 살지 못 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산다면 스스로 아예 그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다.”
물론 사회주의를 현실의 전망으로 사고하는 것이 이장규 전 정책위원장의 말대로 “당장 자본주의 뒤집어엎자든지 사회주의 혁명하자든지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은 충분하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주체역량의 문제를 비롯해 지금 당장 그것을 추진할 주객관적 조건의 문제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 실현 경로와 전망을 부정해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욱이 이 사회모순을 역사적,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의 전망을 갖는 대신에 사회주의를 “자기 스스로에 대한 거울”, “혼자서 자본주의에만 매몰되어 살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니 “성경이나 불경에 좋은 말씀”처럼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사는 따위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사회주의는 가치로서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과학적,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현실 사회주의의 투쟁과 경험을 총체적으로 자양분으로 삼고, 그 모델을 현실에서 구현할 방법과 수단을 찾으며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선진부대인 노동자가 새 사회를 건설할 전망을 마련하고, 그 조건, 역량을 갖추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쟁취하고, 피억압 민중과의 단결을 모색하는 것이다.
분단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분단된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추구하고 그 걸림돌인 외세와 외세에 빌붙은 국내 통치계급과 투쟁하는 것이다. 반공주의 벽을 부수기 위해 투쟁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자주적 사고, 변혁적 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노동당은 사회주의를 대중화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사민주의, 그것도 반공주의에 사로잡힌 사민주의를 대중화 하는데 기여했다. ‘민주적 사회주의’ 가치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사회주의 원칙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했다.
“개량이냐 혁명이냐”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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