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교체로 낡은 체제를 영속화 하려는 최면술과 기만책에 맞서 싸우자!
* 이 글은 [노동전선] <정치선동연단>에 같이 실렸습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비춰보면 인간 개개인은 미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 대선을 앞두고 여와 야의 유력한 대선주자들과 정치집단들 간의 이전투구가 계속되며 정치적 변화를 약속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새로운 인물의 교체로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 정치적 조건은 무엇인가? 부르주아 정치는 특정 인물의 출신과 가정환경과 성격, 성향 등을 내세워 계급지배의 본질을 은폐하고 인물의 교체만으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열리는 것으로 민중을 속인다. 이러한 호도책에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때만 되면 넘어가서 부르주아 정치가들에게 기대를 가지고 ‘비판적’ 지지를 한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대통령을 했던 노무현에게는 ‘착한 노무현’ 이미지를 씌우고 반대로 이재명에게는 ‘전투적 노무현’이라는 이미지를 씌운다. 이로써 노무현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대통령을 했으나 본성이 착해서 적폐세력들하고 철저하게 싸우지 못하고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치게 되었다는 ‘노무현 신화’가 만들어졌다. 이 신화에 의하면 노무현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연민과 안타까움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
‘신화 창조자’들은 이재명은 다르다고 강조한다. 이재명은 가난한 집안 출신에 인권변호사라는 노무현과 비슷한 인생역정을 가지고 있으나, 시장과 도지사 역임 과정에서 보듯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신념과 추진력과 꺾이지 않는 소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 노무현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흰소리를 한다. 이렇게 또다시 새 신화는 만들어지고 이 신화를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유포하여 다수가 믿는 여론으로 만든다. 이로써 문재인과 민주당의 근본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당, 이재명의 민주당론이 만들어져 정권교체와 다를 바 없다는 근거가 나온다.
[인간 이재명]은 이재명의 출생부터 소년공 시절, 변호사,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그리고 유력 대권 후보가 되기까지 그가 마주한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한 ‘이재명 서사의 정본(定本)’이다. 한 인간으로서 이재명의 삶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텍스트이자 언론에 의해 왜곡된 ‘사실과 진실’에 대한 검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재명은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서사를 가진 인물이었다. 최악의 조건에서 최상의 도전을 감행하고, 성공해온 그의 서사는 아주 드라마틱하다. 서사의 세부도 매혹적이다. 화전민의 집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소년공이 되었던 그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공단으로 돌아가 노동자의 벗으로 살다 시장이 되고, 도지사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사건들로 아로새겨져 있다.( 《인간 이재명》 보도자료1)
인간 이재명은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서사를 가진 인물”로 신격화 되었다. 이재명은 “노동자의 벗”으로서 성공한 ‘전태일’이 되었다. 문재인을 숭배하며 이재명을 비난하던 민주당 주류 중 상당수가 이재명파로 옮겨가고 새로이 보충된 세력들로 신주류가 형성되어 이재명 신화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대깨문이라고 조롱받던 맹목적 문재인 지지자들은 슬쩍 이재명 지지로 말을 갈아타고 있다. 대중들이야 정치적 대안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다 할지라도 과거 문재인의 열혈 숭배전파자에서 이재명 숭배전파로 옮겨간 소부르주아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언론인들은 문재인 집권기간의 실정에 대해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자기비판이나 사과도 하지 않았고, 그것의 근본원인에 대한 최소한의 분석조차 시도하지 않는 정치적 무책임함과 뻔뻔함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으로 이명박의 당선이 노무현의 거듭된 반민중적 실정의 결과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있는데, 사실 이명박조차도 샐러리맨 신화로 그의 삶이 격정적으로 포장되어 비열한 사기꾼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신화 역시 박정희 신화에 기초하고 있으며, 문재인 신화 역시 노무현을 끝까지 지킨 진실한 벗으로서 노무현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 문재인 신화는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과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하는 이명박 앞에서도 잃지 않는 품격과 자제력 같은 인간적 덕목을 바탕으로 했다. 아무리 망각은 인간의 최대 축복이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집단 망각과 최면은 부르주아 정치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출신은 성분의 기초이다
한 인간의 삶과 지표에서 출신성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출신은 세계관, 인성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윤석열과 그 집안은 이 사회 지배계급의 역사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윤석열 부친 윤기중은 일본 문부성 1호 장학생으로 일본 동경상대에 유학한 후 1997년까지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교수를 지냈던 친일 엘리트이자 극우 뉴라이트 회원으로 알려져 있다. 친일파 출신 엘리트 아버지가 교수인 부잣집 도령 윤석열은 대학 때까지 매를 맞으며 엄격하게 자라났다고 고백했는데, 이러한 출신배경은 고스란히 윤석열의 인성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을 수밖에 없다.
윤석열은 노동자계급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윤석중은 90의 고령임에도 최근 시가 40억의 고급주택을 다운계약해 세금을 회피하고자 할 정도로 이 나라 지배계급 특유의 부패와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부패하고 극우적 세계관을 가진 가정 밑에서 자란 윤석열은 노동자계급을 비천한 존재라고 교육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대학에 가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있었겠지만 윤석열은 부유한 가정환경 덕에 9수까지 하며 오로지 사법고시에만 매진하며 자신의 반민중적 집안환경과 극우적 세계관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쳐 버렸다. 게다가 민중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닌 파쇼권력 기구인 검찰 세계에 몸을 담고 그 세계의 정점인 검찰총장이 되었다가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되면서 자신의 세계관에 걸맞은 극우적 정치행보를 가고 있다.
일본원전 사고 비호, 불량식품 발언, 노동에 대한 거듭된 비하, 주52시간과 최저임금제 폐지 같은 일련의 발언은 실언이라기보다는 그 반노동자적이고 극우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윤석열은 오로지 문재인의 실정에 대한 국민적 혐오라는 반사이익에 기대 차기 권력을 넘보게 되었다.
윤석열의 성장배경과 반대로 지독한 가난을 경험하면서 약자에 대한 동정, 인간애, 부자에 대한 분노와 평등한 삶에 대한 희구가 한 인간의 세계관의 기초로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가난한 출신이 보증이 될 수는 없다. 가난한 출신이 한 인간의 성분의 보증이라면 비교적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홍준표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반민중적 정책과 거침없는 막말과 뻔뻔함과 파렴치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가난한 출신배경을 극복하기 위해 출세와 부를 꿈꾸며 입지전적으로 노력한다면 이기주의적 심성만이 생길 수 있다. 가난을 딛고 입지전적으로 쌓은 권력과 부를 오로지 자신이 노력한 결과로 보고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힐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성공신화를 일반화 하여 가난을 불평등한 사회문제로 보기 보다는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력으로 보며 가난한 사람, 약자를 경멸할 수 있다.
가난한 출신성분을 가진 이가 역사발전에 복무하며 진보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난을 통해 출신 배후에 있는 이 사회구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진보적 관점을 가지고 민중과 함께 이 사회를 변화, 개조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민대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인민대중이 역사를 이끌어온 주인이라는 인식을 하여 인민을 섬기는 위민이천의 숭고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결국 출신성분은 진보적 세계관의 기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엥겔스 같은 인물은 자산계급 출신이다. 그러한 엥겔스가 맑스와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 초석을 세우고 평생을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인민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계진보를 위해 싸웠던 것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고 이를 전면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본가 자식인 엥겔스가 20대 초반 나이에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이윤과 부의 원천인 공장 주변과 노동자들의 생활의 터전인 불결한 뒷골목을 경멸하고 심지어 노동자계급에게 적의를 보이기조차 할 때, 엥겔스는 런던 이스트앤드 뒷골목을 누비며 노동자들의 힘들고 거친 삶을 동정하고 더 나아가 비천한 대접을 받는 노동자계급이 역사발전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과학적 인식을 하였다.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현세에서 가지는 고통과 비참함, 존엄의 상실, 심지어 일부 범죄와 도덕적 타락마저도 부르주아 계급지배가 낳은 결과물이라며 부르주아 계급에게 적개심을 표출했다. 엥겔스는 청년 시절의 세계관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며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이것이 엥겔스의 위대성이다.
출신 보다 백배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어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가이다
출신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하고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이다. 가난한 집안이나 노동자계급출신이 정치인이 되어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면 자신의 출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가난한 집안 출신에 노동운동을 하는 인권 변호인이 되었다. 노무현을 다룬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이 부림사건 변호를 맡게 되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군사파쇼 체제와 싸우는 투사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노동자와 약자의 대변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급속도로 재벌의 변호인이 되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1년이 체 안 되는 2013년 12월 비정규직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의 연이은 분신투쟁이 있었다. 노무현은 비정규직 제도와 비정규직 악법에 맞서 자신을 몸을 불살라가면서 극한적으로 저항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끝났다”며 비정한 말을 내뱉었다. 노무현은 집권 기간 내내 정규직 노동자 노동귀족론, 고임금론을 유포하며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에 나섰고, 비정규직 악법 도입에 앞장섰다. 노무현은 인권 변호인에서 재벌의 변호인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은 자주적 인식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노무현은 미제의 요구를 추종하여 이라크에 파병을 하였다. 노무현 정권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7백 여 명의 대추리 주민들과 활동가들에게 헬기, 살수차, 물대포와 1만 2천 여 명의 경찰특수기동대, 공병, 용역깡패까지 동원해 평택 대추리에서 잔인하게 폭력진압을 하였다. 노무현 정권은 한미FTA체결에 앞장서면서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해에 복무하였다. 자주의 변호인이었던 노무현은 미제의 변호인이 되었다.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서사를 가진 인물”인 이재명은 민주당의 신주류 대선후보가 되고서는 소년공 시절의 역경과 가난을 새까맣게 잊은 채, 수사로서 내건 ‘대동세상 억강부약’이라는 슬로건을 접고 흑묘백묘론 실용주의 노선을 자처하는 “정치적 속물이 되기에 충분한 서사를 가진 인물”로 타락일로에 있다. 심지어 두 달 여 전에 전두환의 공과를 논하던 윤석열을 그토록 비난하더니 그새 자신이 한 말을 망각하고는 뻔뻔하게 박정희와 전두환의 역사적 공과를 논하고 있다. “이미 배치된 사드는 용인할 수밖에 없다”며 국내외적으로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는 소성리 사드 배치 문제를 외면하고는 참외 농가나 방문하는 비열한 정치 모리배 행보를 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토록 기존 정치인들은 과거 출신이나 이력, 자기가 내세웠던 공약과 상관없이 대통령 후보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압도적 다수 노동자와 민중의 이익을 거듭 배반하고 지배권력의 이익에 철두철미 봉사하게 되는가? 먼저 사드 배치 문제만 보더라도 미제국주의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드배치 반대를 공언했으나 그 공언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소성리 주민들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사드 배치 완성을 향해 가면서 한 마디 구차한 변명도 하지 않는 문재인도 이 때문이다. 문재인이 자기 손으로 4.27판문점 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민족자결을 합의하고도 이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도 미제국주의의 요구를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인 개개인의 인물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느 정치세력과 함께 하고 있으며 누구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가이다.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웠던 김대중이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부평에 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하여 노동자들을 체포하고 4월 10일 무자비한 경찰폭력 만행을 자행한 것도, ‘촛불혁명정부’를 자처하며 적폐청산을 외쳤던 문재인이 기존 적폐체제를 수호하는 반동적인 정치를 하는 것도 재벌과 제국주의 이해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재명은 민주당 정치인으로서 국내외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의 이해를 대변한다. 민족적 이해보다는 외세 제국주의의 이해를 대변한다. 이재명은 이 체제 속에서 이들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이재명은 대통령이 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철두철미 기회주의적 행보를 일삼고 있을 뿐이다. 유시민은 이재명이 완성형이 아니라 ‘발전도상인’이 되어가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는데, 이재명은 변방출신 ‘비주류’ 정치인에서 민주당이라는 지배계급 정치집단의 전형적 인사로 처신하며 갈수록 완성형이 되고 있다. ‘대동세상 억강부약’ 슬로건을 슬그머니 내던지고 ‘중도파’의 표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타락도상인’이 되어 가고 있는 그 자기배반적 행태야말로 완성형 정치인으로 가는 길이다. 혹시 이재명이 권력을 잡게 된다면, 노무현, 문재인처럼 반민중적 통치배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정치인들 개개인들의 정치적 특성이나 우연이 아니라 정치적 필연이다. 이 필연성을 알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한다. 정치에서 중립은 없다. 모든 정치, 정치가들은 특정 계급, 세력을 대변한다.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국민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그런 따위의 중립적 정치는 없다. 계급지배 사회에서 오늘날 민주당 국민의힘은 국내외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 제국주의, 특히 미제국주의의 요구와 이해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있다. 시시때때로 국민을 내세우지만 실은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 기반이고 권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국민의힘 양당 정치 세력에 속해 있는 정치인들은 이들 양당체제의 이해에 복무한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다투지만 저들이 단 한번이라도 미제국주의의 이해, 재벌들의 이해를 거스르고 그 지배체제와 싸운 적이 있는가?
부르주아 정치인 개개인의 개인적 이력이나 내세우는 공약을 보고 환호하거나 정반대로 실망하는 것은 이 체제 시스템의 본질을 안 보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말할 것도 없고 이재명은 과연 문재인과 다르게 미제의 이해를 거슬러 4.27판문점과 10.4평양선언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가? 정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전쟁 동맹을 해체시킬 수 있는가? 천정부지로 오른 주택가를 안정시키고 인민들의 주거권을 확보해줄 수 있는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인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맑스가 한 말이 일부 단편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아편은 인간을 환각상태에 빠뜨려 일시적으로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게 하고 눈앞의 현실에서 도피하게 한다. 그렇게 보니 인물의 교체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본주의 정치시스템이야말로 인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아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맑스와 엥겔스는 이름만 바꿔 사물의 본질을 바꿀 수 있다는 사이비 철학가들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권력자 개개인의 면모를 바꿔서 세상을 변화, 개조시키겠다고 하는 자들, 세력들, 또 여기에 기대하고 환호를 보내는 자들, 세력들은 모두 사이비거나 사이비 정치에 놀아나는 것이다. 정의당 심상정처럼 양당지배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제3지대 운운하며 안철수, 김동현과 손잡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양당지배 체제의 새로운 부속물이 되겠다는 전형적인 사기꾼적 정치책략이다.
진보정치세력 내에서 ‘체제교체’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집권하여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는 것만으로는 체제를 교체할 수 없다. 이 체제교체는 실제로는 생산수단을 장악한 국내외 재벌들로부터 생산수단 소유권을 박탈하고 노동자 민중의 집단적 소유로 삼아야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의회기구, 언론기구와 검찰기구, 국가정보원 같은 부르주아 관료, 폭력 통치기구를 분쇄하고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들을 분쇄해야 한다. 폭력적인 체제의 기구들을 궁극적으로 비호하는 물리력인 미제국주의 군대를 축출해야 한다. 민중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고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인 반공반북주의를 척결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기존 국가를 단순히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동시킬 수는 없다”는 맑스와 엥겔스의 말이 얼마나 심오한 혁명적 통찰력과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지 거듭 되새겨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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