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의 혁명적 전통에 대한 그리스공산당의 ‘좌익’ 분파주의적 견해 비판

러시아혁명 102주년과 코민테른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혁명적 전통과 원칙을 되돌아보는 것은 다가오는 2020년과 향후 국제적 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현대 국제혁명운동의 중심에 해마다 열리는 공산당·노동자당 국제대회가 있다. 특히 이 국제대회는 2020년에는 평양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혁명적 재생의 중심에 그리스공산당이 있다. 공산당·노동자당 국제대회 역시 그리스공산당(KKE)이 중심이 되어 개최되어 왔다. 우리 역시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그리스공산당에 주목해 왔고, 여러 차례 그리스공산당의 글을 번역하고 소개해오기도 했다. 우리는 그리스공산당을 “21세기 볼셰비키 전위”라고 찬사와 함께 기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찬사와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공산당이 2017년 20차당대회 보고 및 테제에서 쿠바에서 “자본주의 관계의 지속적 강화”가 이뤄지고 조선에서 “자유경제지대”, “시장”을 추구한다고 보면서, 국제 제국주의 진영의 포위 말살 공세 속에서 사회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회주의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고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성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원론적으로 사고하여 현실사회주의를 비난하는 분파주의적 견해에 대한 우려를 지울 수 없었다. 심지어 조선의 정치적 특성을 ‘족벌체제’로 규정함으로써 조선의 정치적 특수성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제국주의 진영의 평가에 결과적으로 동조하는 문제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공산당이 가지고 있는 ‘좌익’ 분파주의에 대한 우려가 이번 코민테른 역사를 평가하는 중앙위원회 문서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리스공산당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막대하게 큰 만큼 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좌익적’ 분파주의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비판함으로써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올바른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공산당의 코민테른 역사에 대한 글은 한마디로 코민테른의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에 대한 부정 내지 왜곡이다. 그동안 트로츠키주의를 비롯해서 제국주의 진영의 역사가들조차도 이에 동조하여 코민테른 역사를 난폭하게 왜곡하여 왔는데, 그 왜곡은 지극히 상투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바로 코민테른 6차대회는 사회민주당에 대한 “사회파시즘론” 규정을 들어 ‘좌익적’ 편향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7차대회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노자협조주의라는 우익주의로의 반대편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6차대회에 대한 상투적인 비난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파시즘론”을 주창하여 사회민주주의 세력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함으로써 파시즘의 대두를 불러온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6차 대회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해서 “자본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투쟁의 통일전선을 분열시키고 해체시킴으로써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 내부에서 제국주의의 주요한 기둥”(코민테른 자료선집1,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동녘)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통일전선을 부정하는 것을 오히려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시즘과 관련해서는 “부르조아는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파시즘의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고, 사회민주주의와의 연합의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자본주의에 있어 가장 위기적인 시기에는 사회민주주의 그 자체가 파시즘의 역할을 맡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 “그 사실이 다른 정치상황하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반정부당의 자격으로 부르조아정부에 대해 반항의 기세를 보이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고도 하고 있다.

6차대회가 “사회파시즘론”으로 파시즘의 대두를 막지 못했다는 코민테른에 대한 비난은 가장 저열하고 근거 없는 악선전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 공산당의 경우에도 히틀러의 부상에 대항하여 독일사민당에 대해 4차례에 걸쳐 공동으로 맞서 싸울 것을 제안하기도차 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은 쏘련과 공산당을 파시즘보다 더 증오하여 이러한 통일전선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파시즘에 협조함으로써 파시즘을 불러온 직접적인 주범이다.

그러나 그 저열한 악선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코민테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로 자리 잡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반공주의가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6차 대회에서도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이 독일혁명을 분쇄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같은 혁명가들을 참살한 주범이며 파시즘과 협조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기회주의 세력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는 배외주의에 빠져 제국주의 전쟁을 찬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카우츠키를 필두로 러시아 혁명을 반공주의로 비난하는데 앞장서 왔다. 레닌 역시도 이들에 대해 “제국주의의 대들보”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데 6차대회에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규정은 레닌의 규정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7차 당대회 인민전선이 계급협조라는 악선전은 이후에 살펴볼 것이지만, 6차대회와 7차대회의 문서나 이 대회 전후 코민테른에 소속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실천적 모습을 보면 이러한 규정이 심각하게 악의적인 왜곡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공산당의 코민테른에 대한 평가 역시 이러한 분파주의적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공산당들과 당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전략의 문제들과 갈등들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기여하였던 공헌을 부정하지 못한다.(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성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100년”, 2019년 2월 26일, 번역, 노사과연, 정세와 노동, 2019년 10월 30일)

역사적 문제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리스공산당의 주장처럼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할 때만이 전면 부정, 무익한 부정이 아니라 변증법적 부정으로 역사적 문제들의 평가를 통해 그 자양분을 흡수하고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여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발전시킬 것인가? 이다. 만약 그 부정이 가장 긍정적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 부정은 전면 부정, 무익한 부정에 다름 아닌 것으로 말로는 변증법적 부정을 말하되 실제로는 형이상학적 부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 공산당은 코민테른 역사를 살펴보면서 코민테른의 가장 원칙적이고 풍부하게 맑스레닌주의를 발전시킨 측면을 부정적으로 살펴보는 ‘좌익적’ 분파주의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코민테른 6차대회에 대한 좌익적태도

그리스공산당이 어떻게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9. 제3차 대회(1921년)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강령에 대한 토론은, 제6차 대회(모쓰끄바, 1928년 7월 15일-9월 1일)에서 마침내 끝을 맺었다.

강령에는, “불균등한 경제 및 정치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므로 “최초의 사회주의는 몇몇의,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레닌주의적 분석이 올바로 강조되었다. 하지만 강령은, 국제적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각각의 자본주의 국가들의 위치에 기초하여, 세계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서 투쟁하는 혁명을 3가지 주요 유형들로 구분하였다: 1.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즉각적인 이행이 가능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2.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다소 빠른 이행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변혁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평균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 국가들, 3.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화를 위한 전 기간을 필요로 하는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국가들.

독점자본주의 시대의 국제적 성격과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의 심화는 과소평가되었다. 더욱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분석은 자본주의 경제의 불균등한 발전과 국가 간의 불평등한 관계가 자본주의에 기초해서는 폐지될 수 없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의해 유도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의 성격은, 국제 제국주의 체제에서의 각국의 위치의 상대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해결이 요구되는 근본적인 모순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사회주의적 성격과 혁명의 임무는,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노동자 간의 근본적 모순의 첨예화에서 비롯된다.(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같은 글)

6차 당대회는 1929년에 발발한 전 세계적인 대공황 직전인 1928년에 열렸다. 이 6차 당대회에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을 최종적으로 채택했다. 이 6차대회 강령 “서론”에서는 “제국주의는 사멸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시대이다”(코민테른 자료선집1, 같은 글)라는 레닌주의적 시대 규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6차대회 강령은 곧이어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에 대해 과학적으로 묘사하며 사회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을 자신감에 차 선언하고 있다.

1914년부터 1919년까지의 세계대전과 이 전쟁에 의해 야기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는 세계경제의 생산력 증대와 그 국가적 격차 사이의 첨예한 모순의 직접적 결과이며, 이는 자본주의사회의 내부에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조건이 이미 성숙하고 있고 인류가 한층 더 발전하는 데 있어 사회주의 자본주의적 외피가 참을 수 없는 족쇄로 되었으며 자본주의의 굴레를 혁명적으로 타도할 임무가 역사적 일정에 올라 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코민테른 자료선집1, 같은 글)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는 내적으로는 자본주의 내부 모순의 심화와 외적으로는 쏘련 사회주의의 발전과 민족해방투쟁으로 인해 더욱 더 극심화 됐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시대는 “혁명이냐 야만이냐”는 양극단의 선택지만을 남겨 놓게 된다.

전반적 위기의 시대를 규정한 6차대회 강령은 “제국주의시대는 자본주의의 기본적 모순을 점차 거대한 규모로 재생산한다”고 규정을 내리고는 이에 따라 “공황은 한 지역이나 한 국가의 공황으로부터 수많은 나라들을 휩쓰는 공황으로, 마침내 세계공황으로 전화한다. 국지적인 전쟁 대신 국가연합 상호간의 전쟁과 세계전쟁이 나타난다”고 단언하고 있다.

1929년부터 촉발되어 1930년대의 상당 기간을 강타한 전 세계 자본주의 대공황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전면화 함으로써 6차대회 강령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생활력을 발휘했다. 이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혁명적 위기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반혁명적 테러주의 체제인 파시즘이 등장하고 이에 맞서는 반파시즘 투쟁이 1930년대를 대공황만큼이나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대로 만들었다. 이 계급투쟁은 국내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수준에서 가장 격렬한 형태의 “국가연합 상호간의 전쟁과 세계전쟁”으로 나타났는데, 스페인 내전(내전이자 사실상의 국제전)을 비롯해 독일 파시즘과 쏘련의 전쟁, 민족해방전쟁,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모순과 전쟁이기도 한 2차 세계대전이 그것을 증명했다.

6차대회에서는 대두하는 파시즘에 대한 경계와 대응투쟁이 이뤄지고 있으나 본격적인 반파시즘 투쟁논의는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인 1935년에 열린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이루어졌다.

풍부한 혁명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치열한 토론을 거쳐 단일한 국제강령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6차대회는 혁명의 나침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6차대회는 레닌주의의 과학적 규정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는 전세계를 금융자본의 사슬로 속박하고, 피와 무기와 기아를 수단으로 모든 나라, 민족, 인종의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멍에를 받아들이게 강제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착취, 억압, 예속을 이를 데 없이 강화시켜서, 프롤레타리아를 권력획득이라는 직접적 임무에 당면하게 함으로써 노동자가 국경에 상관없이, 또한 민족, 문화, 언어, 인종, 성, 직업의 차이에 상관없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일한 국제군대로 굳게 결집할 것을 필요하게 만들고 있다”라며 엄숙하게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국제주의 선언을 하고 있다.

이로써 진보적 인류는 《공산당선언》이래 제국주의 시대에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강령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강령은 러시아 혁명의 승리와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성공적 발전 이후 국제적으로 강력한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부대의 집결로 인해 현실적 힘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실천 강령이기도 했다.

이 6차대회 강령은 특히 전 세계를 교살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서 “민족·식민지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했는데, “인종적 소속에 상관없이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 즉 국가로서의 분리까지도 포함하는 자결권의 승인”과 함께 “모든 민족과 인종의 완전한 평등”을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쏘비에트 국가가 “모든 수단을 다하여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을 쟁취한 여러 민족의 민족문화를 보장하고 지지함과 더불어 이 문화의 내용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일관된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취할 것”, “진정하고 완전한 민족적 평등의 견고한 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과거의 피억압‘지방’, ‘변경’, ‘식민지’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방향에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 정치적 및 문화적 발전을 모든 수단으로 촉진시킬 것”, “배외주의, 민족적 증오, 인종적 편견, 기타 봉건적·자본주의적 야만의 사상적 산물인 모든 유물과 투쟁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6차대회의 “민족·식민지문제” 강령은 레닌주의의 민족자결권 원칙의 계승이자 풍부한 발전이다. 이 강령은 “인권선언” 보다 수십 배 더 풍부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제국주의자 윌슨의 사이비 “민족자결주의”의 기만과 위선에 비해, 제국주의에 의해 민족적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식민지·반식민지의 수십억의 프롤레타리아와 진보적 인류가 민족해방투쟁의 전망을 공산주의로 향하도록 한 빛나는 모범이었다.

그러나 그리스공산당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기여하였던 공헌을 부정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공헌을 공헌으로 인정하는 대신에 “모든 공산당들과 당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6차대회 강령이 “세계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서 투쟁하는 혁명을 3가지 주요 유형들로 구분”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요소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6차대회 강령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 전화해가는 부르조아민주주의형의 혁명, 민족해방 전쟁, 식민지혁명”으로 나누었다. 특히 3번째 유형인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중국과 인도, 조선 등)나 종속국가들(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서는 “한편에서는 봉건제도와 전(前)자본주의적인 착취형태들과의 투쟁과 농민의 토지혁명의 철저한 수행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외국제국주의와의 투쟁이다.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은 통상 일련의 준비단계를 거쳐서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전화하는 한 시기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그리스공산당은 이에 대해 “독점자본주의 시대의 국제적 성격과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의 심화는 과소평가되었다”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의 성격은, 국제 제국주의 체제에서의 각국의 위치의 상대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사회주의적 성격과 혁명의 임무는,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노동자 간의 근본적 모순의 첨예화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의 이러한 주장은 “각국의 위치의 상대적 변화”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조차도 국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어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당면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공산당의 주장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의 단계를 둘러싼 스탈린-트로츠키 논쟁, 중국 공산당 안팎의 논쟁, 일본에서는 강좌파-노농파 논쟁에서 당시 공산당의 정통적 입장으로 알려진 입장이 아니라 혁명의 단계를 거부하는 트로츠키 노선을 지지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식민지·반식민지 사회를 국제적 규정만 보고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여 쏘비에트 체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면 혁명 과제로 제출하였다. 이는 이 점에서는 그리스공산당과 같은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선다면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의 요구인 토지분배 보다는 즉각적인 집산화 요구를 하게 되어 프롤레타리아 계급동맹의 대상인 농민 대중과 철저하게 결별하게 되는 것이며, 식민지·반식민지에서 민족부르주아를 포함한 반제국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식민지 반(半)봉건 사회론’은 당시 중국, 조선,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반식민지 사회를 규정하는 틀이다. 이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은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 “토지개혁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지 않고, 봉건적 토지소유를 철저하게 분쇄하지 못한 채, 상품경제의 침투, 따라서 또한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적 발전방향으로 나아감에 대응하여, 봉건적 토지소유가 그 본질을 남기면서 타협적, 적응적으로 재편된 토지소유”(식민지반봉건 사회론, 미래사)를 핵심 근거로 사회를 규정한다.

조선에서도 1910년-1918년에 걸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는데, 이 사업은 토지의 자유로운 저당·매매를 보장하여 지주의 토지 독점을 강화하였다. 이 토지 사업은 봉건적 지주-소작관계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봉건적 지주-소작관계에 남아 있던 전통적 안정성이나 약간의 온정주의마저도 무너뜨리고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거나 심지어 소작관계를 박탈하기도 했다. 일제가 토지 소유를 강화하면서도 지주 계급을 강화함으로써 이들 특권 계급을 내세워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로써 조선사회는 일제시대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토지문제가 격렬한 계급투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사회 성격 규정에 의해 토지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을 당면목표로 삼고 투쟁했던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일치했다.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부르주아지는 통일전선의 대상이 됨으로써 반제 민족해방 투쟁의 동맹군이 확장되었다.

혁명의 단계를 거부하는 트로츠키 노선은 현실의 혁명에서도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광범위한 반일본제국주의 통일전선이 부단하게 시도되었고, 혁명 이후에 는 경자유전(耕者有田)원칙에 따라 토지 집산화가 아니라 토지 분배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혁명에서도 반일본제국주의 통일전선이었던 국공합작을 이루어졌고 이후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신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행기를 거쳐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쿠바혁명 역시 반봉건 혁명을 거쳐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6차대회 강령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좌익적 분파주의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있었는데, 이 좌익 분파의 주장은 그리스공산당의 주장과 맥을 같이 했다. 6차 대회에서 당시 혁명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눈 것은 “제국주의시기에 격렬해진 자본주의발전의 불균등성의 결과로, 자본주의의 형태는 다양하고, 각국에서 그 성숙도가 형형색색이며, 혁명적 과정의 여러 조건이 다양하고 독특하”기 때문에 이행의 다양한 형태를 가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공산당은 6차대회에서 “‘불균등한 경제 및 정치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므로 ‘최초의 사회주의는 몇몇의,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레닌주의적 분석이 올바로 강조되었다”면서도, “국제 제국주의 체제”만 강조했을 뿐, “각국의 위치의 상대적 변화”는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통일전선의 빛나는 사례, 7차 대회 반파쇼 인민전선을 비난하는 그리스공산당

앞에서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의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노자협조주의라는 상투적인 비난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리스공산당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7차대회를 비난하고 있다.

10.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제7차 대회(모쓰끄바, 1935년 7월 25일-8월 21일)에 앞서, 프랑스 공산당과 에스빠냐 공산당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집행위원회와 협의하여, 사회민주당들과의 협력을 요청했다. 결국, 이들 국가들에서의 인민 전선은 1936년에 공산당과 사회민주주의 및 기타 부르주아 정당과 기회주의 운동 사이의 정치적 협력의 한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자본주의적 권력에 도전하는(지) 않았던 정부에 참여하거나 또는 그 정부를 지지하였다.

제7차 대회는 다가오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성격을 제국주의적이라 규정했지만, 동시에 반파쑈 전선을 수립하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실제로, 제7차 대회는 반파쑈 정권의 출현을 노동자 권력으로의 이행의 한 형태로 본다고 결의하였다.(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같은 글)

그리스공산당은 공산주의 통일전선의 가장 빛나는 모범이자 풍부한 발전을 이룬 코민테른 7차대회를 가장 중점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디미트로프 테제’로 알려진 인민전선을 반대하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공산당과 스페인 공산당이 7차 대회 이전부터 인민전선을 채택하였는데, 이 “인민 전선은 1936년에 공산당과 사회민주주의 및 기타 부르주아 정당과 기회주의 운동 사이의 정치적 협력의 한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자본주의적 권력에 도전하는 않았던 정부에 참여하거나 또는 그 정부를 지지하였다”라고 비난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프랑스공산당의 인민전선과 스페인공산당의 인민전선에 대해 각각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배경에 의해 형성되었고, 어떠한 의미와 한계가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1933년 독일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잡은 뒤, 1934년 2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의회정치를 전복하고 파쇼체제를 수립하려고 기도하는 파시스트들의 폭동이 벌어졌다. 파시스트들의 폭동은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프랑스 전역에서 반파시즘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져 이 책동을 막았다. 이 무렵 노동자들 사이에서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의 통일전선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반파시즘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당에 반파시즘 공동투쟁을 제안했다. 당시 사회당 내에는 극우파, 레옹 블룸의 중앙파, 극좌파가 분열하고 있었는데, 극우파는 제명되고 당내 다수파인 중앙파는 공동투쟁에 반대했다.

이러한 당 내 정세는 당을 위기로 몰고 가, 사회당은 1934년 초기의 4개월간 노동운동과 반파시즘 투쟁이 고양되는 상황 속에서 1만 5,000명의 당원을 잃었다. 1934년 5월의 톨루즈 당대회에서는 대의원의 3분의 1 이상이 좌파에 찬성했다.(코민테른 자료선집3, “프랑스 사회당 · 공산당 행동통일 협정”에 대한 주석1), 동녘)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빗발치는 압력과 이에 영향을 받은 사회당 내부의 정치적 변화로 ‘프랑스 사회당 · 공산당 행동통일 협정’(1934년 7월 27일)이 체결됐다.

1936년 4-5월 총선에서는 극우파쇼가 220석을 얻는 데 비해, 인민전선으로 공동행동을 한 통일전선 세력들은 376석을 획득(공산당은 4년 전 총선에서의 10석에서 7배 이상으로 의석을 늘린 72석, 사회당은 97석에서 146석으로 제1당이 되었고, 반면 자유주의 급진당은 158석에서 116석으로 42석이나 상실했다)하여 사회당 지도자인 레옹 블룸(Léon Blum)이 수상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연립정부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극우파쇼 세력의 후퇴와 인민전선의 승리에 힘입은 노동자들은 그해 5-6월에 200만 명이 참여하는 공장점거를 포함한 총파업을 통해 단체교섭권 보장, 2주 유급 휴가, 40시간 노동제, 은행 국유화 등의 사회개혁적 요구들을 쟁취했는데, 당시의 투쟁의 성과가 프랑스 ‘복지 국가’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1936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려 했을 때, 레옹 블룸 정부는 영국 보수당 정권의 압력과 인민전선 내부 자유주의 급진당의 눈치를 봐서 ‘불간섭 정책’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스페인 인민전선에 대한 무기지원을 금지시켰다. 급진적인 노동자들과 공산당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싸웠다.

스페인 인민전선은 사회당, 공산당, 공화당 계 좌파세력, 갈리시아, 카탈루냐 민족주의자가 결합하여 1936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스페인 토지의 상당 부분을 보유하고 있었던 페네란다 공작(the Duke of Peneranda)과 알바 공작(the Duke of Alba)과 79,000헥타르를 가진 메디나첼리 공작(the Duke of Medinaceli) 같은 대토지 소유자들(라티푼디움)과 가톨릭교회의 토지를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급진적인 토지혁명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1936년 7월 군벌, 가톨릭교회, 대토지 소유자들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을 앞세워 군사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다. 주지하듯,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1936년 11월 25일에는 국제공산당에 반대하는 조약이 처음으로 독일과 일본에 의해 체결됐는데, 이로써 파시스트 추축국들의 타도 목표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필두로 해서 쏘련 사회주의와 국제공산주의 운동이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 내에서 공산당과 노동자 계급은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코민테른은 국제의용군 모집을 주도하고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진보적 노동자들이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했다. 쏘련은 직접적인 군사 파견과 함께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압도적인 프랑코 파시스트 군대의 무력 앞에서 처절하게 패배했다.

간략하게 프랑스와 스페인 인민전선에 대해 살펴보았다. 프랑스 인민전선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인위적인 고안물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열화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투쟁 요구에 의해 촉발되었다. 프랑스 인민전선은 파시즘을 격퇴하고 노동자계급의 진보적 조치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역사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은 보다 급진적인 정세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당이 중심이 된 인민전선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함으로서 제국주의의 동맹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로써 그리스공산당의 평가처럼, “사회민주당들과의 협력” 자체를 거부했다면, 프랑스 인민전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공산당은 당시 프랑스에서 “사회민주주의 및 기타 부르주아 정당과 기회주의 운동 사이의 정치적 협력의 한 형태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통일전선 자체를 부정한다. 그리스공산당의 입장대로라면 노동자계급의 열화와 같은 반파시즘 공동투쟁의 요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총선에서 인민전선 세력들이 획득한 의석을 볼 때도 인민전선이 당시 투쟁적인 노동자 인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공산당이 인민전선으로 인해 의석을 7배 이상으로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아직 소수파 세력이었다. 반면 극우파쇼세력은 기세가 꺾였음에도 불구하고 220석이나 획득했다. 이를 두고 볼 때 인민전선이 아니었다면 프랑스 공산당과 진보적인 노동자 계급은 절대적 고립을 면치 못했을 것이고 파쇼세력들은 독일처럼 프랑스에서도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레옹 블룸 정부의 배신은 사회당 정부의 배신으로 규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독일에서 파시즘의 권력 장악에 대해 파시즘과 협력했던 사회당이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 가장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공산당에 돌리는 것과 배신자 레옹 블룸 정부가 아니라 그 정부를 규탄하고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 지원했던 프랑스 공산당을 비난하는 것은 마찬가지의 잘못이다. 게다가 이를 두고 인민전선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역사에 대한 극단적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프랑스 인민전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민전선이 아니었다면 폭동으로 권력을 잡은 파시스트 세력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을지 예상하면서 인민전선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

앞에서 그리스공산당 스스로 언급했던 것처럼, 역사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역사적 성과와 함께 역사에서 범하는 오류와 한계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인민전선과, 인민전선 내부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범한 오류와 한계들이 코민테른의 반파시즘 통일전선이라는 인민전선 원칙 자체에서 비롯된 것인지, 실제적인 현실 운동 과정에서 개입하고 실천하면서 벌어졌던 오류와 한계였는지도 균형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자본주의와 싸우고 있다. 프랑스에서 이 투쟁을 훨씬 전진시켜야 한다. 자본주의는 단지 하나의 역사적, 경제적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계급, 인간, 은행 따위의 형태를 갖고 있다. 우리의 지령 가운데 그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모든 것을 인민전선을 위해, 모든 것을 인민전선에 의해”, 즉 우리는 모든 정치적 · 전술적 조치, 의회 내의 또한 의회 밖의 조치, 인민전선의 발전, 지방위원회의 조직, 군대 내의 조직, 농민 사이의 조직, 필요에 따라 인민전선을 방위하고,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그것을 발전시켜 강화한다고 하는 프랑스와 프랑스인민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필요에 따라 수행되어야만 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디미트로프, “프랑스 문제에 대하여”, 1935년 5월 11일, 코민테른 자료선집 3, 동녘)

인민전선은 이처럼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가장 효과적인 방편으로 하고 것이다. 인민전선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역사적, 경제적 범주”로 추상적으로 분석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본주의의 구체적 특수한 형태를 핵심적으로 분석하고 여기에 맞서 생동적이고 창조적으로 투쟁했다.

그리스공산당은 “좌익적” 관점으로 역사를 단순화 하고 분파주의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인민전선의 원칙과 그 적용에서의 문제들은 나눠서 바라봐야 하고, 그 적용 역시 성과와 한계를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특히 스페인에서 인민전선 정부는 부르주아 연립정부가 아니라 진보적인 정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인 심각한 역사적 무지이자 왜곡이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역사적으로 아주 중대한 시기에,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파시스트 국가들이 이 정부는 무너뜨리려 하였고, 이에 맞서 국제적으로 진보적 인류 전체가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의 승리를 염원했던 것이다.

실례로 1936년 10월 7일 스페인에서 수행된 토지혁명은 평소 대토지 소유자와 교회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강령을 가지고 있었던 스페인 공산당 소속 농업부 장관에 의해 시행됨으로써 가난한 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의 요구에 가장 철저하게 부합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인민전선 정부는 스페인에서 60% 정도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 대다수의 확고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와 그 정부에 참여했던 스페인공산당을 “사회민주주의 및 기타 부르주아 정당과 기회주의 운동 사이의 정치적 협력의 한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자본주의적 권력에 도전하는(지) 않았던 정부에 참여하거나 또는 그 정부를 지지하였다”고 규정하는 것은 극단적인 “좌익” 분파주의다.

인민전선은 반파시즘 통일전선이다.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통일에 기초하여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통일전선의 틀로 끌어들여 투쟁했다. 그런데 인민전선은 전술적 조치로 시작됐으나 인민전선 전략으로 발전했다. 그리스공산당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구 대신에 “반파쇼 전선을 수립하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고, “반파쇼 정권의 출현을 노동자 권력으로의 이행의 한 형태로 본다고 결의”한 것에 대해 계급협조라고 비난하고 있다.

제7차 대회는 다가오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성격을 제국주의적이라 규정했지만, 동시에 반파쑈 전선을 수립하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실제로, 제7차 대회는 반파쑈 정권의 출현을 노동자 권력으로의 이행의 한 형태로 본다고 결의하였다.

제7차 대회는 … 환상과 화해 정신을 불러일으켰고, 사회민주주의와 기회주의에 맞서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선의 혼란과 쇠퇴를 가져왔다 …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위한, 파씨즘에 맞선 투쟁과 외세 강점으로부터의 해방은, 자본에 맞선 투쟁과 분리되었다.(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같은 글)

그러나 코민테른 7차대회는 그리스공산당의 평가와 정반대로 “환상과 화해정신”이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의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쟁을 불러일으켰고 식민지 · 반식민지 국가에서 민족해방 투쟁을 위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추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디미트로프는 인민전선의 정신과 원칙을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통일전선 정부가 정세에 적합한 일정한 근본적인 혁명적 요구, 예를 들어 생산의 통제, 은행의 통제, 경찰의 해산, 경찰에 대신하여 노동자 무장민병의 설치 등등을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

레닌은 15년 전에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 혹은 접근의 형태를 찾아내는” 것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라고 우리에게 호소했다. 분명 통일전선정부는 일련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이행형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좌익’ 공론가는 레닌의 이 지시를 언제나 회피해 왔다. 시야가 좁은 선전가들인 그들은 단지 ‘목적’에 관해 말할 뿐, ‘이행의 형태’ 등에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익 기회주의자는 노동자 사이에 부르조아지의 독재로부터 프롤레타리아독재로 가는, 의회를 통한 평화로운 산보라는 환상을 퍼뜨리기 위해 이 두 개의 독재 사이에 특수한 민주주의적 중간단계를 설정하려 했다. 이 가공의 ‘중간단계’를 그들은 또한 ‘이행형태’라고도 부르면서 레닌까지 인용했다! 그러나 이 속임수를 폭로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혁명’에의, 즉 부르조아 독재 타도에의 이행과 접근의 형태에 관해 말했던 것이지 부르조아독재와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이의 이행형태에 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혁명에의 이행형태에 그처럼 유난히 큰 중요성을 두었던 것인가? 그것은 그가, 참으로 광범한 근로대중을 혁명적 전위쪽으로 끌어들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력획득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문제에 있어서는 대중에게 단순한 선전과 선동이 그들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법칙, 즉 모든 대혁명의 기본법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정치적(혹은 혁명적) 위기가 발생하면 공산당 지도부는 혁명적 봉기의 슬로건을 내세우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광범한 대중이 그들의 뒤를 따른다는 생각하는 것은 흔한 좌익식의 오류다.(디미트로프, “파시즘의 공세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임무”, 통일전선 연구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대하여, 거름)

위 부분은 좌우익 기회주의와 코민테른의 입장에 대한 왜곡과 오해에 맞서 인민전선의 진정한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인데, 반파시즘 통일전선론의 백미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디미트로프는 인민전선이 어떠한 정치적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정부는 최종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이 정부는 착취자의 계급지배를 타도할 힘이 없고, 따라서 파시스트 반혁명의 위험을 최종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주의혁명의 준비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디미트로프, 같은 글)

이처럼 반파쇼 통일전선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궁극목표로 가는 현실적 수단, 사활적인 방책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리스공산당은 디미트로프가 비판했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목표”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는 특수한 이행형태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공산당 “지도부는 혁명적 봉기의 슬로건을 내세우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광범한 대중이 그들의 뒤를 따른다고 생각하는 흔한 좌익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가장 배외주의적인, 가장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의 노골적인 테러적 독재”로 파시즘을 규정한 7차 대회에 대한 그리스공산당의 부정은 파시즘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는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그리스공산당에게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반대만 있을 뿐, 파시즘이라는 특수한 시기에 특수하고 비상한 대응이 없다. 이 역시 현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그런데 파시즘이 금융자본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의 권력이기 때문에 공산당이 주도하여 파시즘을 패배시킨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패배로 연결되는 길이 열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코민테른 7차대회의 통일전선 원칙은 실제로 쏘-독 전쟁에서 파시즘의 패배 이후 동유럽 각국에서 성립된 공산주의 진영의 승리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 민족해방 투쟁의 승리와 인민전선 정부의 수립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역사로부터 구체적으로 입증되었다.

스페인을 필두로 한 의회주의를 통한 공산주의 도입을 추구하는 유로 꼬뮤니즘의 득세는 인민전선의 결과가 아니라, 스페인 내전의 패배로 인해 패배주의와 청산주의가 대두하고 쏘련공산당 20차 당대회 이후 확산된 수정주의의 결과다.

사회주의 조국 쏘련을 방어하는 것은 숭고한 국제주의적 임무였다

사회주의 조국이자 전 세계 진보적 인류의 등대였던 쏘련을 방어하는 것은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숭고한 임무였다. 코민테른이 쏘련 대외 정책의 도구로 전락되었다는 비난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비난인데, 그리스공산당이 이와 유사한 비난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유감이다.

쏘련 대외 정책의 목표와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쏘련의 노력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성격에 관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노선상의 모순들에 또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한 사회주의 국가의 대외 정책의 요구가, 자본주의 각국을 위한 혁명적 전략의 필요성을 대신할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의 궁극적인 보장은, 사회주의의 전 세계적인 승리 또는 강대국 집단(a powerful group of countries)에서의 사회주의의 우세, [다시 말하면,] 따라서 각국에서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같은 글)

사회주의의 전 세계적 승리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혁명에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 특히 쏘비에트 러시아가 패배한다면 그 후과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히틀러 독일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쏘련의 승리는 동유럽과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실현을 가져오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면 1990년대 초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는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승리와 각 나라에서의 혁명의 위축을 가져오고 노동자들의 삶을 심각하게 후퇴시키는 반동적 결과를 가져왔다.

코민테른 해산을 두고 “그것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국제적 제국주의에 맞선 공산당들의 통일된 혁명 전략이 필요하다는, ≪공산당 선언≫의 정신과 문자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에 모순되었다”고 비난하는 것 역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상투적인 비난과 동일하다.

11. 제국주의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15일,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상임 간부회의(Presidium)의 제안에 따라,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자체 해산이 결정되었고, 모든 공산당들이 이를 승인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해산은,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 통일의 한 형태로서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는 평가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해산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7차 대회 이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집행위원회가 “각 개별 국가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상황과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발생한” 노동 운동의 모든 사안들을 “공산당들의 조직 내부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 개입은 원칙적으로 피하면서” 의결할 필요성이 강조되어 왔었다. 또 이렇게 적혀 있다. “각국 공산당들과 그 지도 간부들의 성장과 정치적 성숙을 고려하여 … 전술한 고려 사항들에 이어, 각국 공산당들과 그 지도 간부들의 성장과 정치적 성숙을 고려하여, 그리고 또한 지금의 전쟁 중에, 여러 당들(sections)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해산 문제를 제기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집행위원회 상임 간부회의는, 세계 대전이라는 조건 때문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대회를 소집할 수 없기에, 다음의 제안에 대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당들(sections)의 승인을 요청함을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국제 노동 운동의 지도 중심으로서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을 해산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당들(sections)을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대회의 규약 및 결의들에 따른 의무들로부터 해제함.(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같은 글)

그리스공산당의 글에서처럼, 코민테른 해산은 “세계 대전이라는 조건”이 먼저 크게 작용했다. 쏘련이 독일의 침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산당들의 조직 내부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자제해야 하는 상황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국 공산당들과 그 지도 간부들의 성장과 정치적 성숙을 고려하여”야 했고, 무엇 보다도 “여러 당들(sections)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해산 문제를 제기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이 강력하게 활동을 할 때에는 쏘련 중심의 일방적이고 관료적인 활동을 했다고 비난하다가 막상 코민테른의 해산에 대해서는 국제주의적 원칙을 버렸다고 비난하는 경우들이 흔히들 있다. 그러나 코민테른 역사를 살펴보면 레닌 당시부터 해체 직전까지 내부에서는 혁명의 원칙들, 정세, 전략전술, 각국의 상황 등에 대한 풍부하고 격렬한 논쟁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코민테른 논쟁사는 전 세계 혁명적 원칙과 전략전술의 보고가 되고 있다. 그런데 코민테른 해산은 중앙에서의 일방적인 방침이 아니라 여러 당들이 해산 문제를 제기한 것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코민테른 해산은 쏘련 공산당과 스탈린의 단독적 방침이 아니라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코민테른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자체 해산 결정은 …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국제적 제국주의에 맞선 공산당들의 통일된 혁명 전략이 필요하다는, ≪공산당 선언≫의 정신과 문자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에 모순되었다”고 비난하는데, 그러한 논리대로라면 제1차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임무가 다했다는 것을 근거로 맑스와 엥겔스가 그것을 해산했던 것 역시 비난받아야 한다.

코민테른 해산 결정에 대해 당시 만주 일대와 백두산 일대에서 반일 무장항쟁을 하던 공산주의자들도 이를 전격적으로 환영하고 나섰는데,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하고 자주성을 발휘해야 하는 시점에서 해산이 정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후르시초프 시절 당시에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는 각국의 공산당들에게 당대회 결과를 내리매김 식으로 강요하고, 심지어는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당들에게는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고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대국주의적 횡포가 극심해지기도 했다. 이로써 국제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중소 분쟁 등 국제주의적 분열이 극심하게 나타나고, 전 세계 대다수 공산주의 운동 내에 수정주의 운동이 지배하면서 공산주의 진영의 해체 원인을 제공하는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제22차 공산당·노동자당 국제대회가 2020년 평양에서 개최된다. 2020년 평양에서 열리는 국제대회는 현재로서는 조미 간 대립이 격화되고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한 가운데서 개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2차 당대회는 쏘비에트권 해체 이후 제국주의 포위 속에 군사적으로 제국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경험들뿐만 아니라, 경제에서의 자력갱생과 자주성의 사상 등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다양한 경험들이 검토되고 또 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국제주의적 투쟁의 결의들이 이뤄질 것이다.

그리스를 비롯한 각국에서 사회주의 승리 역시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 사회주의 건설과 승리의 경험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공산당이 이 경험을 통해서 ‘좌익적’ 분파주의를 딛고 혁명적으로 도약하는 기회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2020년은 그리스공산당뿐만 아니라 국제공산주의 진영이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2020년은 한국에서도 혁명운동 진영이 도약하고 전체 운동이 발전하는 한 해가 될 것을 기대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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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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