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3 스딸린의 가르침 스페인 공산당에 대한 지도 원리

특집3

스딸린의 가르침
스페인 공산당에 대한 지도 원리1)

1940년 호세 디아즈(José Diaz)2)

스페인내전2

스페인에서의 민족혁명전쟁은 2년 반 동안 고도의 긴장 상태에서 전 세계의 혁명세력들과 진보세력들의 입장을 견지했다. 스페인 인민들은 우세한 적에 맞서 스페인 혁명의 성과물들과 스페인 민족의 자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숭고한 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영웅적 용기 속에 완강하고 가치 있는 투쟁은 장기적으로 진행됐다.

국제적인 반동세력의 총연합전선과 제국주의 세력의 연합전선은 혁명적인 스페인에 맞서 실질적으로 결집했다. 이 세력들 – 일부는 공공연하게, 나머지는 다소 은폐된 형식으로 – 은 스페인 인민에 맞서 대규모의 개입 정책을 추구하였다. 반동세력들이 혁명적인 스페인의 영웅적인 투쟁을 교살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2차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제 2차 인터내셔널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인민들에게 “불간섭(non-intervention)”의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던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요청을 받아서, 반동세력이나 배신자 블룸(Blum)과 결탁했다.3)

그 결과, 스페인 인민의 투쟁은 스페인을 공격했던 반동 연합세력에 의해 교살되었다. 그러나 빛나는 작품들 속에 쓰인 혁명적인 스페인의 영웅적인 저항은 스페인과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가슴속에, 투쟁하는 대중들의 가슴속에,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노예화된 인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스페인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의 교훈들은 스페인 인민들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약탈 전쟁의 교사자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이 교훈들은 착취계급에 반대하는 투쟁과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의 무기로써 스페인 인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스페인 인민들은 정의로운 이상을 위해 싸웠기 때문에, 가장 광범위한 대중들이 타오르는 열정을 가지고, 아낌없는 자기희생을 가지고, 지칠 줄 모르는 주도성을 가지고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기 때문에, 혁명적인 스페인 대중들과 인민전선에서 단결한 임금노동자들의 총체적인 봉기가 모든 국가에서 국제적인 연대의 물결을 불러일으켰고 주로 쏘련의 인민들 사이에서 아낌없는 우의와 정치적인 원조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스페인 인민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우세한 세력들에게 저항할 힘을 찾아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 도시의 쁘띠부르주아와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이 광범위한 집결은 공산당의 지속적인 노력과 올바른 맑스-레닌주의자들의 정치노선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로지 스페인 공산당은 항상 맑스, 엥겔스, 레닌과 스딸린의 가르침들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였기 때문에, 스페인의 구체적인 정세에서 스딸린에 의해 발전되고 보완된 레닌주의의 전술적인 원칙들을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였기 때문에, 스페인 공산당은 이 정치노선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실천했으며, 이것이 스페인 인민들의 투쟁의 골격이 되도록 했다.

 

투쟁이 발전되었던 구체적인 정세,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전략

 

스딸린 동지는 우리들에게 정확한 정치노선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은 “각 국가의 민족적인 특수성과 구체적인 민족의 특징을 절대적으로 고려한 원칙들”이라고 가르친다. (J. V. Stalin, Remarks on Timely Themes, p. 19, Russ. ed.)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 오류들을 피하기 위해 맑스-레닌주의의 다양한 테제들과 가르침들을 기계적인 암기를 통해 배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공산당이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국내 정세와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 것과 최대한의 진지함을 가지고 공산당의 상호작용과 협력을 연구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시대와 다른 국가들의 정세와 더불어 주어진 순간의 정세를 총체적으로 단지 비교할 뿐만 아니라 정세의 구체적인 특징과 성격을 고려한 분석만이, 오로지 그러한 분석만이 정확한 정치노선의 공식화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도움이 될 것이다.

구체적인 정세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스페인 반동들의 반란의 순간에 정세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이었고 간섭 기간 동안 그것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스페인은 본래 상당하게 봉건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쁘띠부르주아 유형의 농업 국가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5~6년 동안 (1931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국가의 이 전반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민족혁명전쟁 이전 기간이었다. 고용인구의 59%는 농업에 종사하였고 20% 이하 인구가 공업, 운송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인구의 나머지는 국가행정기관이나 혹은 지방자치기관, 군대와 이른바 자유직에 종사하였다. 토지 소유의 분배는 경제와 정치생활에 대한 봉건적 잔재의 강력한 영향과 함께 스페인의 농업적이고 쁘띠부르주아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표시였다.

대토지 소유자들(100헥타르와 그 이상의 소유자들)4)로써 말할 수 있는 토지 소유자들의 2%는 전체 경작 가능한 토지의 67%를 소유하였다. 이 그룹에는 52,000헥타르를 가진 페네란다 공작(the Duke of Peneranda)과 그 밖의 라티푼디움(편집자: 스페인 및 중남미의 대토지 소유자) 뿐만 아니라, 96,000헥타르를 가진 알바 공작(the Duke of Alba)의 라티푼디움과 79,000헥타르를 가진 메디나첼리 공작(the Duke of Medinaceli)의 라티푼디움이 포함되어 있다. 토지 소유자들(10헥타르까지)의 86%는 전부 합해 경작 가능한 전체 토지의 단지 15%만을 소유하였다. 우리가 전체 토지 소유자들 중 39%가 1헥타르 이하를 소유하고 있고 빈곤에 빠진 농민들의 거대한 다수가 합해서 전체 면적의 1.1%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설명을 덧붙였을 때 이 그림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이 뿐만 아니라,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했던 250만 명의 농업노동자들이 있었다. 통계적으로 토지 소유자들로서 간주된 농민들의 상당 부분은 현실적으로 단지 임차인이거나 재임차인 이른바, 스페인 농업의 반(半)봉건적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했던 임차인 관계, “라바쓰아이레스(rabassaires)”였다.

봉건제의 동반자인 가톨릭교회는 경작 가능한 전체 토지의 1/3뿐만 아니라, 스페인 전체 국부의 거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스페인에는 200,000명의 수도사들이 있었다. 스페인에 는 35,000개의 학교가 있는데 반하여, 총 36,000개의 교회, 수도원과 예배당들이 있었다.

24,500,000명의 주민들 중에서 7,000,000명이 까딸루냐(Catalonia)5), 바스끄(Basque)6)와 갈리시아(Galicia)7)의 소수 민족에 속해 있었다. 민족문제는 공화국에 의해 오직 부분적으로 해결되었다. 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은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 있었다.

모든 국가의 경제적인 수준의 척도인 중공업과 기계 건설은 단지 미약하게 발전되어 있었다. 총 1,900,000명의 공업노동자들 중에서 67%가 고용되었던 경공업(농업생산물, 직물산업 등에 종사)은 스페인 전체 경제 발전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경공업에서 수공예품 생산은 예외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직물 공업에서는 중소 소유자들이 우위를 차지하였다. 경공업은 약간만 집중화되었다. 그러나 중공업 특히 광산 분야(석탄, 철광석, 납, 구리, 칼륨, 수은 등등)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여기에서는 독점자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페인은 식민지의 인민을 억압했던 자본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스페인은 예외적으로 외국 자본에 의존하는 국가였고, 그들의 경쟁자들을 희생하여 스페인에서 자기들의 세력 합병을 위해 서로 싸웠던 개개의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투쟁의 무대였다.

핵심 그룹을 이끄는 국가기관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육군이나 해군에서 강력한 봉건제의 잔재가 지배적이었고, 특히 정상의 핵심 그룹들은 오래전부터 귀족 출신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던 중세적인 과거 – 지방적 편협함(provincialism), 주 분할제도(cantonalism), 지방주의(regionalism) –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이 후진성의 역사적인 결과는 모든 단계에서 감지될 수가 있었다. 지방적 편협함은 스페인의 경제적, 정치적 삶에 뿌리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큰 국가들에서보다도 훨씬 더 분열됐던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잘 알려진 스페인의 “카시키즘(Caciquism*)”(은 스페인노동총동맹(U.G.T.)와 전국노동자연맹(C.N.T.)**의 노동조합 중앙들에서, 사회당을 포함하여 부르주아 정당과 쁘띠부르주아 정당들에서, 지방자치 단체들에서, 마을들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기관에서도 지배적이었다. 많은 지방들과 도시들은 어떤 방해도 없이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소수의 강력하고 유력한 파벌의 통제 하에 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6년 이상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당면한 기본적인 과업들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토지 문제였다…. 총 4,000,000명의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과 농업노동자들 중에서 단지 150,000명만이 토지를 받았지만 전적으로 불만족스러운 크기였고 토지의 경작을 위해 필요한 연장과 기구도 없었다. 공식적으로 국가로부터 분리된 교회는 모든 물질적 재산들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역시 상당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대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낡은 반동의 군대는 특권적 계급(caste) 정신과 반혁명의 소굴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게다가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과 농민계급은 파업투쟁과 다른 투쟁 방식들을 가지고 자본가와 지주들의 파괴행위(sabotage)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화국 정당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던 정부로부터 봉기를 몰래 준비하고 있었던 부르주아, 지주들과 군대의 반혁명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국내 정세의 이러한 특징은 스페인 인민 투쟁이 발생하고 있던 시기의 국제 정세의 몇 가지 가장 중요한 특징에 의해 보완되어져야한다. 이 당시의 국제 정세의 특징은 비록 분열된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모순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직은 전쟁의 폭발로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혁명적인 스페인에 반대하는 반동의 연합 전선을 형성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국제적인 정세뿐만 아니라 스페인 공화국 내부 정세의 이 모든 특성은 노동자계급의 전략적인 과업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민주주의의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국제 연대의 기초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투쟁의 사회적인 기초를 확산시켜야 할 긴급한 필요에 직면하고 있었던, 스페인과 같은 후진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당면한 과업으로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 공산당에게는 분명하였다. 그 때문에, 주어진 정세의 분석과 세력 관계의 구체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더욱 발전시키고 완수하는 과업을 자체적으로 설정하였다.

이 목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거대 자본가들과 지주들이 없는 공화국, 1931년 4월 14일에 설립된 공화국에서처럼 권력이 부르주아와 지주 연합의 수중에 있지 않고, 프롤레타리아가 필연적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계급, 농민과 도시 쁘띠부르주아, 소수 민족 연합의 수중에 있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변형시키는 것으로써만이 달성될 수가 있었다.

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발전이 스페인의 반동분자들과 외국의 간섭주의자들에 반대하는 무장투쟁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쁘띠부르주아들과 같은 광범위한 대중들의 이해를 얻기 위한 결정적인 전제조건이었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더욱이 이 적들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그 결과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전제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민족 혁명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전술

 

그러나 스딸린 동지는 정확한 정치노선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 각각 하나의 투쟁 기간 동안 각 국가에서의 구체적인 정세 분석에만 우리 자신을 국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정확한 분석은 단지 기초가 될 수 있고 정확한 전술노선을 위한 필수적인 출발점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각국 공산당의 기본적 원칙은, 비록 이 동맹이 일시적일 뿐이고, 동요하고, 견고하지 못하고, 불확실하다고 할지라도, 대중들 사이에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동맹을 보증하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도 이용해야한다.”(J. V. Stalin, Remarks on Timely Themes, pp. 19-20.)

스페인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그러한 대중 동맹들이 있었다. 이 동맹들이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은 부단한 투쟁을 수행하였다. 민족 혁명전쟁의 전 과정 동안 공산당의 전체적인 전술은 프롤레타리아의 이 동맹들을 끌어들이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대중 동맹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과 혁명의 도정에서 모든 급변과 뒤틀림, 전쟁에서의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대중동맹을 지도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이 모든 불화와 갈등을 극복하고 혁명의 길을 따라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충분한 경험을 축적했고 견고하며 훈련된 당, 선진적인 혁명이론에 정통할 수 있는 혁명당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노동자계급은 진정한 공산당이 필요했다. 오직 그러한 당만이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에서 주도권(hegemony)뿐만 아니라, 투쟁 동안 독자적인 힘으로 노동자계급의 통일과 신뢰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우리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당의 창조를 위해 싸웠다.

노동자계급에 의한 이러한 지도 역할의 실현을 위한 결정적인 전제조건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인 통일이었다. 스페인 프롤레타리아는 분열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은 다른 정당들, 예를 들어, 사회민주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노동 대중들 사이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시기에 전쟁터에 참여했다. 바스끄 지방과 갈리시아 지방에서처럼 각 지방에서는, 상당한 노동자들이 여전히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들의 영향 하에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다수는 오랫동안 스페인 노동운동에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던 조직인 U.G.T.와 C.N.T.라는 두 개의 가장 큰 노동조합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노동조합 중앙은 각자 자기들의 길을 가면서 분열되어 행진하였고 그들 사이에서 격렬한 투쟁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스페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가 이전의 경험, 예를 들어 혁명 전의 러시아와는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딸린 동지가 지적한 바대로, 러시아에서는 노동자계급의 당이 노동조합 이전에 존재하였다. 러시아에서는 당이 경제투쟁을 포함하여 모든 영역들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직접 지도하였다.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의 정당들보다도 훨씬 더 이전에 존재했던 서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스페인은 달랐다. 서구 노동운동의 이 특성은 다른 어떤 국가에서보다도 스페인에서 더 날카롭게 나타났다. 노동운동에 깊이 뿌리박힌 무정부주의가 노동자들이 정당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체계적인 투쟁을 전개하였고, 대중들이 노동운동에서 혁명적인 당의 결정적인 역할을 이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쏟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레닌과 스딸린 같은 뛰어난 지도자 하에서 새로운 유형의 혁명적인 당을 창조했던 볼셰비끼는 노동운동 시작부터 멘셰비끼와의 화해할 수 없는 투쟁에 의해 노동운동의 결정적인 부분들에 멘셰비끼가 뿌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또한 볼셰비끼 당의 지도하에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인 통일을 공고히 하는 위치에 있었다. 스페인 상황은 달랐다. 스페인 공산당은 전쟁 동안 이러한 통일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수십 년 동안 무시되었던 모든 것을 보완해야 했고, 따라서 노동조합들이 노동운동에서 전통적으로 수행했던 강력한 역할과 전국적인 군사 봉기의 발발 후 수행했던 강력한 역할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통일의 달성으로 가는 길에 있어 어느 정도 부분적인 성공들을 달성하였다(U.G.T.와 C.N.T. 사이에서 통일된 행위의 실현). 그러나 본래 이 두 노동조합 조직들의 기관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정치인들, 개량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파벌들은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항복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공산당은 주요한 애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노동조합 통일의 부족은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약화시켰고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민족 독립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편으로 끌어들여야했던 가장 중요한 동맹은 거대한 농민대중들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초기부터 당은 농업문제의 해결책을 위해 싸웠으며, 동시에 그로 인해 스페인에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깊이 뿌리 박혀 있던 봉건제의 잔재의 청산을 위해 싸웠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산당은 노동자계급과 수백만 명의 농민들 사이에 강한 결속을 확립할 수 있었다.

우리 당은 스페인에서 그러한 동맹의 중대한 필요성을 이해했던 유일한 정당이었다. 우리 당은 가난한 농민들과 농업노동자들 사이에서 이 토지의 무상분배 구호뿐만 아니라 보상 없이 부동산과 교회 토지의 몰수라는 구호를 주장했던 유일한 당이었다. 당은 오로지 전쟁 과정에서만이 혁명적인 방식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실행할 수가 있었다. 당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농민 대중들의 혁명적 결의 자체를 바탕으로 삼았다.

1936년 10월 7일 공산주의자인 농업부 장관8)의해 공포된 법령은 프랑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공화국의 지역에서 다음과 같이 농업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였다. 토지의 경작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토지조사와 함께 4,860,386헥타르의 토지가 가난한 농민과 농업노동자들의 소유가 되었다. 더욱이 기술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신용 대부와 종자들을 지급함으로써, 농업부 장관은 가장 철저한 물질적 지원을 했다.

농민들과의 밀접한 동맹을 위해 노력하면서, 공산당은 농민들의 절대 다수가 아직은 토지를 집단적으로 경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였다. 그러므로 토지의 강제적인 집산화와 무정부적인 모험주의 정책을 전파했던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완강하게 격렬한 투쟁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공산당의 이 일관된 정책과 실질적인 작업 덕택에, 전쟁 초기부터 중대한 해를 입혔던 이들 농민의 적들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은 강화되었고 확고해졌다.

그러나 농민 대중들과의 이 동맹이 강화됐다고 해서, 동맹의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들 때문에 스페인의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의 일부뿐만 아니라 도시의 하위 중간 계급 일부를 끌어들일 필요 역시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지도하에 전체 인민의 광대한 투쟁전선을 확립할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인민전선을 민족전선으로 변화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인민전선의 사회적인 기초를 확장시키기 위한 공산당의 노력과 인민전선 정책이 이루어졌다.

우리 당은 인민대중들과 군인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서 인민 전선 내에서 다른 당들과 조직들과 달랐던 당의 입장을 그들에게 설명했기 때문에, 우리 당은 아주 성공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당은 다른 당들과 조직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획득하였고 그들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가리키고 대중들이 열망했던 길을 수용하도록 할 수 있었다.

청년 사회주의자와 청년 공산주의자의 결합은 인민세력들의 통일의 강화와 투쟁을 위한 우리의 기회의 확장을 위해 아주 특별하게 중요하였다. 통일사회주의 청년은 우리의 인민들의 대의에 충성스럽고 헌신적이었던 수만 명의 자기희생적인 전사들을 그 운동에 제공하였다.

반란 바로 초기부터, 공산당은 우리에게 특히 강력한 적에 맞서 투쟁을 하기 위한 잘 무장된 군대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이해하였다. 이 인식은 쏘비에뜨 러시아의 내전에서의 경험과 쏘비에트에 반대하는 외국 군대가 개입한 경험에 의해 강화되었다. 개입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전쟁이 여전히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 우리는 스딸린 동지가 볼셰비끼 당의 8차 전당대회에서 말했던 그의 연설을 통해 배웠다.

“우리가 진정한 노동자와 농민군 – 주로 농민군, 엄격히 훈련된 군대 – 을 창조하여 쏘비에뜨 공화국을 방어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죽든지 둘 중 하나이다.” (Histo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B.], p. 235.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공산당이 창설한 5연대는 인민들에게 정치적으로 믿을 수 있고 잘 훈련된 군사력을 제공하는 목표를 가진 우리 노선의 실현을 위한 기초였다. 구 군대에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졌던 광범위한 대중들이 군대에 대한 적개심에서 벗어나 강력한 군대의 창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 5연대의 사회적 구성, 조직, 규율, 전투력, 영웅적 자질은 가장 강력한 논거로 입증되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외부의 반동들에 대한 성공적인 투쟁의 가능성은 완전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5연대는, 우리의 내전을 민족 혁명전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 부족 때문에 스페인이 군인들의 국가가 아닌 유격대(partisans)의 국가였고 과거 군대는 항상 인민의 이익에 반대하여 행동했다는 “근거”를 가지고 군대의 창설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였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이론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공화국의 정당들과 단지 낡은 군대의 잔재를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군 지도자들의 계획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공산당은 이 모든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인민의 정규군 창설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인민의 정규군의 창설 뒤에 5연대는 해체했다. 5연대의 7,000명의 전사들이 인민군대의 핵이자 정신이었다. 5연대 출신들 수천 명이 인민군대의 탁월한 지휘관이자 정치위원이었다.

그러나 군대의 창설과 함께, 새로운 과업이 공산당에게 주어졌다. 필수적인 예비군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어야 했고, 또한 사회당, 무정부주의자와 공화국 당들 지도자들의 일상적인 공격과 음모에 반대하는 군대의 정치적인 통일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경제 조직에 관하여 당이 추구했던 노선은 우리의 동맹세력들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이용할 필요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전쟁의 불가피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쟁은 정부의 수중으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인 자원들의 집중을 요구하였다. 농민, 쁘띠부르주아, 부르주아의 일부분과의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약화시키지 않고 이러한 목표가 어떻게 달성되어야만 했던가? 이 때문에, 공산당은 모든 산업에 영향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주요 산업들, 주로 군수산업뿐만 아니라, 운송 체계(철도, 해운, 자동차 운송) 같은 반혁명의 반란과 연관된 소유자들이 남겨둔 기업들만으로 국유화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기초적인 경제 단위들의 조정을 지지하였고, 그 때문에 최고경제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와 카바렐로주의자들(Caballero-ites)9) 사이에서 대단히 유행하는 작은 공장들의 몰수와 “집산화” 같은 행위에 대하여 싸웠다. 공산당은 경제생활의 발전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인 역할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동맹들을 밀어내지 않고 국가의 모든 자원들을 철저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을 지속했다.

공산당은 강력한 인민 정부와 모든 난관과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정부의 수립을 위해, 스페인 인민들의 승리에 관심을 가지고 국가의 모든 진보적인 세력들과 자원들을 결집시키고 활용할 수 있는 정부의 수립을 위해 싸웠다. 공산당은 민족 독립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회계층의 사람들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이 발휘될 수 인민 정부를 위해 싸웠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이 지도적인 역할을 보유할 수 있는 정부를 위해 싸웠다.

공산당은 낡은 국가기관들을 파괴하고 인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기구들을 설립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인 통일의 부족과 사회민주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과 공화국 정당 지도자들의 음모와 파괴 행위 때문에, 승리를 보장하는 단호한 정책에서 가장 필수적인 수단들인 그러한 강력한 인민 정부와 그러한 국가기관은 달성될 수 없었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을 위한 대중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필요성에 관하여 스딸린 동지가 공식화했던 전술 원칙의 거대한 중요성을 고려하였다. 우리의 동맹자들, 예를 들어, 바스끄와 까딸로니아 민족주의자들,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동요하였다. 그들은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공산당은 오랫동안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동맹들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동자계급의 이 동맹들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동맹의 동요는 특히 전쟁의 최종 단계에서 증대하였다. 심지어 인민전선의 좌익 한 일부는 가장 힘든 순간에 인민전선을 떠나버렸다. 그것이 스페인 혁명이 패배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스페인 내전은 대중들과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교훈이었다

 

우리의 정책노선과 전술노선을 결정할 때, 우리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스딸린 동지가 공식화한 레닌주의의 전술적인 원칙을 고려하였다:

“수백만 명의 정치 교육을 위해서는 선전과 교육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대중들 스스로의 정치적인 경험이 필요하다는 진실은 고려해야 하는 절대적인 원칙이다.” (J. V. Stalin, Remarks on Timely Themes, p. 20, Russ. ed.)

특히 민족 혁명전쟁 기간 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대중들에게 엄청난 경험을 제공하였다. 이 위대한 투쟁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지도계급으로서 힘과 역할을 인정받았다. 농민대중들은 노동자계급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동맹과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보았다.

수천 명의 새로운 인민들이 노동자 계급의 중심과 스페인 인민들 출신으로부터 부상했는데, 그들의 영웅적 행위와 능력 덕택에 그들이 고위 지휘관의 80%와 중간 지휘관의 90%를 차지했다. 산업과 농업에서 수만 명의 남성과 여성, 청년들이 지금까지는 스페인에 알려지지 않은 생산력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의하여 생산의 중심부들이 적들에 의한 주요하고 끊임없는 공중 폭격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인 작업을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창조적인 열정을 과시하였다.

대중들의 대의,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다음과 같은 우리의 가장 큰 군사작전들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마드리드의 방어는 무능한데다가 이후에는 배신을 했던 지휘관들의 실수들을 만회해주었던 인민들의 의지와 힘을 보여준 가장 결정적인 증거이다. 더 결정적인 증거는 수천 명의 전사들이 마지막 몇 주 동안 최소한의 보급품도 없이 싸웠고 대중들이 침략하는 적의 모든 길을 차단하면서 영감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레반트(Levant)의 들판과 언덕을 요새화된 지역으로 변화시켰던 레반트 지방의 방어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전쟁의 가장 큰 전투 중의 하나였던 에브로 강(Ebro) 전투를 이것의 증거로서 인용해야하는데, 이 전투에서 수천 명의 전사들, 군인들, 지휘관들과 정치 위원들은 지옥의 불 아래에서 4달 이상을 견고하게 버텼고 노동자계급의 불굴의 능력과 그들의 창조적 능력의 증거로써 다시 한 번 더 복무했던 모범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전쟁에서, 대중들은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과 새로운 정세 하에서 투쟁의 지속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식을 획득하였다. 대중들은 혁명적인 통일의 중요성을 파악했으며, 그들은 전체 인민의 투쟁에서 지도를 떠맡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과업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들은 농민과의 견고한 동맹의 중요성을 이해하였다. “불간섭 정책”과 함께 쓰라린 경험을 한 후, 그들은 자본주의적인 지배의 형식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중요성과 본질적인 성격을 이해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이 민주주의가 단지 대중들을 기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과 이 민주주의가 단지 자본가 반동들의 지배 계급들이 그들 스스로를 은폐하는 연막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그들은 직접 자기 눈으로 무정부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인민 혁명 실현의 첫 번째 만남에서 붕괴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을 패배로 이끈다는 것과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이 스페인 인민들의 이해를 배신했던 것처럼,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배신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대중들의 완강하고 영웅적인 투쟁에서, 그들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멍에로부터 해방으로 가는 길은 혁명 투쟁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노동자계급을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으로 뭉치게 하는 바로 그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적인 투쟁 경험으로부터, 그들은 역시 사회주의 나라로부터 자본주의 국가를 분리시키는 깊은 심연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힘든 투쟁의 날들 동안, 사회주의 사상이 대중들의 의식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사회주의 사상이 자기들 편에 섰던 가장 헌신적인 벗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페인 노동자들이 깊고 지칠 줄 모르는 애정으로 “쏘련”과 스딸린 동지라는 이름을 말하는 이유이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 농민들과 지식인들은 처음으로 혁명적인 당의 역할을 이해하였다. 그들은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당의 일상적 노고를 보았고, 그들은 이 당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하고 확실한 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당으로서 이 당을 인식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일상의 과업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이 당에 합류했던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이 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이 당을 전폭적인 확신을 보냈던 이유이다.

수고하는 대중들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 때문이며, 그것을 기초로 해서 그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던 공산당의 지도 때문이다.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대중정당이 되었던 것은 바로 공산당이 대중들을 교육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스딸린 동지의 탁월한 말들을 따랐다.

“우리 지도자들은 단지 한쪽 측면에서 사물, 사건과 인민들을 바라본다. 위로부터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시야는 다소 제한적이다.”

“그와는 달리, 대중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사물, 사건과 인민을 바라본다. 나는 다음과 같이 감히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시야도 역시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다. 그 문제의 정확한 해결을 위해서 이 두 경험은 통일되어야 한다. 오직 그러한 경우에는 지도가 정확할 것이다.”(J.V. Stalin, Mastering Bolshevism, p. 56. Workers Library Publishers, New York.)

(1931년 4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초기에, 우리 당은 조직적인 확고함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명확함이 부족했기 때문에 스페인 전역에 분산되어 있는 집단들의 연합 수준 이상이 아니었다. 당은 일상 투쟁에서 성장했고, 분파주의로부터 점차 스스로 벗어나서 1935년경에는 당원이 2만 명이나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무장 투쟁에 적극적 참여, 노동자계급 세력들을 통일하려는 당의 노력, 스페인의 진보적인 세력 전체를 – 폭력적인 독재의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던 – 반동에 맞서는 인민전선 대열로 끌어들이는 당의 전위적 역할, 이 모든 일은 수천 명의 지지자들을 당원으로 합류하도록 고무했으며, 그 결과 장군들이 도모한 반란 전날에 당원은 100,000명이 되었다.

무장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당은 사태의 전개 동안, 가령 그것의 성격과 범위를 고려했을 때 전례가 없었던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과업들과 조직적인 과업들을 해결해야했다. 전쟁은 군대, 산업, 현장, 국가기구, 노동조합과 현재의 당 활동을 위한 당의 간부들을 필요로 하였다. 전쟁은 새로운 정세를 이해하며 대중의 진정한 지도자와 안내자가 될 수 있었던 신뢰할 수 있고 능력 있는 간부를 필요로 하였다.

공산당은 전선에서의 무장 투쟁 속에서, 배후에 있는 인민의 적들, 이른바 제5열(Fifth Column)9)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범죄적인 반혁명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성장하고 단련되었다. 당은 무정부주의의 모험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성장했고 강화되었다.

스딸린 동지는 우리들에게 당의 통일과 사상적 순수성을 지키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의 대오에서의 모든 일탈에 반대하는 무자비한 투쟁을 수행하였다. 우리는 전쟁이 불러왔던 모든 시험을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까지 당의 규율을 강화하였고 우리 대오 내에서 강철 같은 통일을 확립할 수가 있었다.

새로운 유형의 당에 관한 레닌과 스딸린 동지의 가르침은 스페인 공산당이 (공화국 영토에서만) 300,000명 이상의 당원을 보유하게 하고, 당의 오류를 교정하고 비판과 자아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이 되도록 했다. 우리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또한 위대한 스딸린 동지로부터 혁명적인 대담함, 적의 음모에 대한 경계, 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확고함, 정세에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변화에 직면했을 때의 유연성을 배웠다.

우리 당은 가장 광범위한 대중들의 권위와 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마드리드(Madrid)와 테루엘(Teruel)10)과 에브로(Ebro)11)의 전투의 날들 동안 인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용기와 영웅적 행위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인민들은 공산당이 단지 당 자체를 올바르게 지도하고 가르치는데 한정했던 것이 아니라 모범으로서 진로를 이끌었던 것을 보았다. 당은 대중에 대한 당의 자기희생 정신과 용기를 어떻게 의사소통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였다. 끊임없는 투쟁을 하는 동안, 당은 항상 대중들과 가장 가까운 결속을 유지하였다. 그것이 바로 공산당이 스페인 인민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이다.

스페인 공산당은 민족 혁명전쟁 동안 정확한 정치노선을 따랐다. 그러나 당은 오류들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우리 당 지도부의 주요한 오류는 (1939년 3월 5-6일) 마드리드에서의 반혁명의 반란 위협에 직면하여 당이 이것을 대중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반란이 이미 진행되었을 때, 공산당은 어려운 상황에 상응하는 만큼 용감하고 단호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은 항상 당의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하였고, 그것이 당의 명성을 높이고 대중들과의 결합을 강화시키는 사실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우리 당의 정확한 정치노선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인민들은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프랑코 정부는 부르주아와 지주들의 독재에 반대하는 사심 없고 열렬한 전사인 우리 당을 파괴하기 위해 이 사실을 이용하려고 했다. 당에 대한 끊임없는 타격에도 불구하고, 당은 대중들의 마음 속 깊이 살아 있기 때문에 당은 항상 살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세에서,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공포나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스딸린 동지의 다음과 같은 말들을 기억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성공적인 봉기 기간 동안 용기를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혁명의 성공적인 전진의 순간에서 뿐만 아니라 혁명이 후퇴하고 있는 기간 동안 어떻게 싸워야할지를 아는 사람, 프롤레타리아의 패배의 기간에 용기를 보여주고 당황하지 않는 사람, 혁명이 패배하고 적이 성공했을 때 경로를 이탈하지 않는 사람, 혁명이 후퇴하고 있는 기간에 공포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절망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J. V. Stalin, On the Opposition, p. 105, Russ. ed.)

레닌과 스딸린의 정신으로 교육받은 우리 당은 정치적 통일,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에 대한 충실, 이 일시적이고 힘든 기간을 극복하기 위한 확고한 결심을 유지하였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필연적인 승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였다. 이 모든 것은 공산주의자들을 단련시키고 그들을 노동자계급의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투사가 되게 만든다.

정세의 갑작스런 변화와 반동이 전쟁의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감추기를 원하는 정치 선전 어느 것도, 배고픔과 테러 어느 것도 공산주의자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겁에 질리게 하거나 위협할 수는 없다.

우리 당원들의 다수는 역시 새로운 정세에서 그들의 당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의 정치범 수용소(concentration camps)에서 일반 당원들은 투쟁의 새로운 시험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확고함과 자기희생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프랑코의 법정들은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지만, 프랑코의 법정은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참회”의 공개재판을 했던 것과 달리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단하나의 공개재판도 개최할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예심과 법정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에게 어울리게 흔들리지 않고 용감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정치범 수용소의 악명 높은 장소에 가두어진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은 당과 노동자계급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 동지가 기록한다.

“반동의 정책이 우리들에게 끔찍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가 처한 상태의 어려움을 이해할 것이다. 매일 투쟁은 우리가 있는 감옥의 바깥에서 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더 날카로운 형식들을 취한다. 우리의 적들은 우리들에게 강타를 날릴 모든 적절한 순간을 이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하고 있고 그들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간다. 바로 이날까지, 우리는 단 하나의 입장, 단 하나의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금지옥엽(the apple of our eye)처럼 당을 보호하고 좋은 결과들을 기록할 수 있다.”

“… 우리는 스스로 방향을 찾는다. 우리는 우리의 임기응변의 능력을 키운다.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극복했던 전위로써 우리들의 명예로운 입장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적들에 대항하는 일상 투쟁에서 그리고 우리 스승들의 저서를 연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벼린다.”

“우리의 지붕들은 조각나고 있다. 창문들은 유리가 없다. 문은 닫히지 않고 우리의 위장은 비어있다. 그러나 당신들은 우리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공통의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에서 반동의 승리는 우리의 인민을 전투로 몰아가는 원인들을 제거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것을 더 첨예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노동자계급, 농민과 인민대중은 더 좋은 날들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손 안에 공장과 토지를 가져 보았다. 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았고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운명의 주인이었다. 우리 인민들은 지주와 거대 자본가들 없이 살았고 그들은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투쟁은 새로운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이 새로운 정세에서, 대중들이 빼앗긴 것들을 다시 되찾기 위한 투쟁, 완전한 해방에 이를 때까지 모든 진전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투쟁을 위해, 대중들은 다가오는 전투들을 위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고(寶庫) 구성하는 전쟁과 혁명을 풍부하게 경험하고 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맑스-레닌주의의 가르침들에 의해 교육을 받았고 가장 혹독한 투쟁 속에서 단련된 공산당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와 지주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위해 자신들의 세력들과 노동자계급의 세력들을 재통합하기 위해 활동 중인 공산당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서 위대한 스승들인 레닌과 스딸린의 훌륭한 가르침들에 의해 더 잘 지도될 수 있는 당, 노동자계급을 맑스, 엥겔스, 레닌과 스딸린의 승리의 깃발 아래에서 승리로 이끌 당, 바로 스페인 공산당을 가지고 있다.노/정/협

 

편집자 후주

1) http://www.mltranslations.org/Spain/stalin.htm

2)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 호세 디아즈는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40년에 이 글을 썼다.

3) 불간섭 협약은 국제연맹이 스페인 내전에 대해 회원국들이 병력이나 군수 물자를 지원하지 않도록 결의한 협약이다. 1936년 8월 영국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수상과 프랑스 레옹 블룸(Léon Blum) 수상은 불간섭 위원회를 구성하고 협약을 기초했다. 이후 불간섭 위원회는 1936년 9월 스위스에서 1차 회의를 가졌고 9월 14일 2차 회의를 통해 협약을 확정했는데, 영국,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쏘련, 벨기에,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가 조약을 승인하였다.

불간섭 협약은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스페인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고 쏘련이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여 스페인 내전이 국제적인 대리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체결됐다. 그러나 불간섭 협약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파시스트 권력은 프랑코에 대한 대규모 군사 지원과 함께 직접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게르니카 폭격을 저질렀다. 무쏠리니 역시 5만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스페인 내전에 직접 개입하였다. 쏘련도 불간섭 협약이 실제적으로 무력화되자 스페인 내전에 개입해서 공화국 인민전선 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당시 ‘인민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제2차 국제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 프랑스 사회당 레옹 블룸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불간섭 협약을 이유로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개입을 자제한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프랑코를 정치적으로 지원했다. 불간섭 정책은 스페인 인민들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이 책자에 실린 “1945년 5월 9일,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종전과 인민의 위대한 반파시즘 승리 70주년을 맞이하여(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2015년 4월)에도 수록되어 있다.

4) 1헥타르는 3,025평이다. 따라서 100헥타르는 302,500평이다. 대토지 소유자들이 얼마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5) 스페인 북동쪽 끝과 프랑스·지중해에 인접한 지방

6) 스페인과 프랑스의 비스케이 만 및 피레네 산맥 서쪽 기슭에 사는 민족으로 독자적으로 바스크어를 사용하며 역사적으로 바스크 민족의 독립을 주장해왔다. 특히 바스코 민족의 상징이었던 게르니카가 1937년 파쇼 독일 공군에 의해 무참하게 폭격을 당하고 전쟁 후 프랑코 정부에 의해 극악한 탄압을 당했다. 현재에도 바스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7) 스페인 북서부의 대서양에 면한 지역

8) 스페인 공산당은 농업부 장관과 교육장관을 공화정 내각에 파견했다.

9) 카바렐로(Caballero)는 스페인의 기사를 일컫는다.

10) 스페인 내전 당시에 마드리드 전투에서 프랑코 진영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자신이 이끌던 4개 부대 이외에 “마드리드는 내응자(內應者)로 구성된 제5부대에 의해서 점령될 것이다”라고 자기 부대 이외에도 협력자가 있음을 시사한 이후에 유래되었다. 이후에 이 말은 아군 진영 내에서 적들과 내통한 첩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페인 내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곧바로 나아가려는 모험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이들은 투쟁 대오의 강철 같은 규율을 거부하고 일부 지역에서 무분별하게 토지 집산화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인민전선 정부와 충돌했다.

11) 스페인 내란 당시의 격전지로 스페인 동부에 있는 주이다.

12) 스페인 북부를 흘러서 지중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 카시크(Cacique) – 반(半)중세적인 스페인 촌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 실제로는 지주의 반동적인 정책의 최고 대리인들로 촌락의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지배자들이자 주인.

** 각각 노동총연맹과 전국노동자연맹(The General Workers Union and the National Confederation of Labor respectively).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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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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