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2] 1946년 10월 경북 항쟁

김근성(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

 

우리가 10월 항쟁을 주로 대구를 앞에 붙여서 ‘대구 10월 항쟁’이라 부르거나 추모제 등의 행사 역시 대구에서 주로 진행된다지만, 항쟁은 비단 대구만의 일은 아니었다. 사실 대구 항쟁은 10월 초에 끝이 나지만, 그해 12월까지 약 3개월의 시간은 이남 각지에서 특히 농촌 지역의 차지였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운다는 말이 있듯, 축적된 민중의 분노는 대구를 기점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그러면 이제 각지 항쟁의 전개 과정을 소상히 알아보자. 지역 구분은 항쟁 당시를 기준으로 하였다. 먼저 경북이다.

1) 달성군

달성군(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은 원래부터 대구와 가까운 지역이었기에 대구시민들과 비슷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10월 2일 대대적인 항쟁이 발생하자 그날로 불똥이 튀었다. 현풍(玄風)면에서는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의 주도 아래 3~4천여 명의 군중이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지서 내 경관 12명 중 4명이 유치장에 갇혔고, 소총 3정이 탈취되었다. 군중은 면장의 집과 우익인사의 집도 파괴하였다. 이렇게 현풍면 일대를 장악한 시위대는 자치단체까지 만들며 10월 4일 진압되기 전까지 활동하였다. 현풍의 이런 모습을 두고 당시 그 지역 민청 간부였던 박진목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이때 시골집에 있었는데 군중들이 모여들고 대구로 응원을 간다고 야단들이었다. 경찰관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겁을 먹고 있었다. 달성군 현풍을 중심으로 여러 청년들이 찾아와서 무슨 큰 혁명이나 성공한 듯이 의기충천하여 날뛰었다.”

논공(論工)에서는 오후 1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의 집을 공격해 파괴하고는 경관 5명 중 2명을 끌고 갔다. 10월 3일 저녁이 되어 경찰이 지원을 나왔으나 시위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옥포(玉浦)에서는 오후 4~5시경에 시위가 벌어졌는데, 대구에서 트럭 2대를 타고 온 시위대가 경찰서를 공격하였다. 경관들은 탈출했으나 지서장은 납치되었고 무기고의 소총과 탄약도 몽땅 털렸다. 월배(月背)에서는 오후 대구에서 트럭 3대를 타고 온 시위대가 지서를 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전화선을 잘랐다. 경관 3명이 납치 및 폭행당했으며, 소총 2정과 탄약이 탈취당했다. 시위대는 경찰지서 벽에 ‘미군 반대’라는 벽보를 붙이기도 하였다. 다음 날 새벽 1시에는 60여 명의 주민이 면장과 지주들의 집을 파괴했다. 구지(求智)에서는 10월 3일 50여 명의 군중이 경찰지서로 몰려갔다. 경찰들이 도망가자 지서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지서장의 숙소를 파괴하였다. 시위는 이틀 후인 10월 5일 진압되었다. 하빈(河濱)과 다사(多斯)에서는 10월 3일 군중들이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의 집을 습격하여 경관 4명과 우익인사 1명이 살해되었다.

이렇게 10월 초순 동안 달성경찰서 관내 9개 지서 중 8개 지서, 5개 파출소 중 3개 파출소가 점거되었으며, 경찰관 6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경관 사택을 포함하여 107호의 가옥이 파괴되어 피해액은 약 1,500만 원에 달했다. 그리하여 10월 6일 미군정은 계엄령을 대구뿐만 아니라 달성군, 경주군, 영일군까지 확대한다.

2) 고령군

고령군에서는 10월 2일부터 5일까지 400여 명의 시위대가 고령군 안을 순회하며 시위를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성산(星山), 다산(茶山), 오곡(午谷), 쌍림(雙林) 등 4개 경찰지서가 시위군중 50~100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10월 3일에는 고령 지역 민청원 수백여 명이 오후 8시경 경찰서를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고령경찰서 본서에 전해졌다. 이에 경찰서장 최이준은 민청 간부들과의 회견하고 타협을 시도하였다. 이 자리에서 민청은 ① 군민에게 1인당 매일 식량 4홉 지급, ② 추곡수집은 하곡수집보다 과하게 하지 말고, 대지주에게만 실시, ③ 비민주적 관공리의 반성 및 사직, ④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보장, ⑤ 건국을 위해 투쟁하다 불행히 투옥된 애국자들의 석방 등의 5개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최이준이 자기 능력으로는 불가하다고 말하여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민청 간부들은 일단은 돌아갔으나 그날 밤 경찰서를 다시 찾아와 군수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다. 또한 군민에 대하여 1인당 식량 2홉씩 5일분을 즉시 배급하고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군이 저장하고 있는 쌀의 양이 부족했기에 이마저도 수포가 되었다. 한편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이런 상황을 참다못한 일부 민청원과 시위 군중은 괭이와 낫을 들고 10월 4일 오전 1시경 경찰서를 공격하였다. 서 내의 경찰이 8명밖에 없었음에도 최이준은 시위 군중을 직접 만나 절충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시위 군중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라져 경찰서를 포위한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결국 10월 6일 응원 경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시위대는 철수하고 말았다.

3) 성주군

성주군에서는 지난 8월 26일 군청 직원 2명이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등 정치 탄압이 이뤄지고 있었다. 또한 성주경찰서장 윤운섭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다가 탐관오리 식으로 무능한 인사와 운영을 일삼으며 민중의 불만을 샀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성주군에서는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민청의 주도로 10월 3일 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11시 민청 책임자 이용희와 민청 간부 한종수가 이끄는 3~4,000여 명의 시위대는 성주경찰서를 포위하고는 농민조합과 민청 간부를 선두로 500여 명을 경찰서 안으로 들여보냈다. 시위대는 윤운섭에게 ① 서장 이하 전 경찰의 파업, ② 무기 사용 금지, ③ 무기고 열쇠 인계, ④ 경찰서의 이양 등 4개 조건을 요구하였다.

윤운섭이 이를 거부하자 군중은 그를 포함한 경찰 간부들을 관사에 감금하였다. 또한 20~30여 명의 경찰을 폭행하고 유치장에 가둔 후 10월 4일 오전 1시 40분경 유치장 주위에 휘발유를 뿌리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때마침 충남에서 온 응원 경찰들이 난입하면서 시위는 진압되었다. 한편 성주경찰서의 각 지서들은 10월 4일 오전 1~3시 사이에 모두 습격받아 점령되었다. 또한 10여 명의 경찰이 구타당했으며, 지서장과 지주들의 집이 파괴되었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10일까지 부녀동맹 위원장 고봉녀와 간부 도영원을 포함하여 주모자 2명과 혐의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4) 칠곡군

칠곡군에서는 10월 2일 오후 9시부터 1~2천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10월 3일 새벽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경찰서를 습격한 시위대는 경찰서장 장석한, 수사주임 이지동 등을 비롯한 여러 명의 경찰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머리로부터 밑으로 몸이 반으로 갈라졌으며, 얼굴이 심하게 난자당한 채로 눈과 혀가 잘린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민중의 엄청난 분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위대는 왜관과 김천을 잇는 교량 2개를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한편 10월 3일 오전 2~3시에는 칠곡(漆谷, 지금의 대구광역시 칠곡지구), 인동(仁同), 석적(石積), 약목(若木), 북삼(北三) 등의 경찰지서가 습격 및 파괴되었다. 또한 경관, 관공리, 부유층의 가옥 50여 채도 파괴되었다. 약목의 경우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대구 항쟁의 소식을 듣고 봉기하여 그곳의 경관 3명을 지서 내 기둥에 결박시킨 후 낫과 도끼로 난자해 살해했다. 군중 측에서도 시위 도중 7명이 사망하였다. 이외에도 대구에서 내려온 40여 명의 시위대를 주축으로 하여 신동(新洞), 지천(枝川)의 경찰지서도 파괴되었다.

5) 군위군

군위군에서는 10월 2일 조선인민당, 민청, 부녀동맹, 농민조합 등을 주축으로 1천여 명의 군중이 군위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인원 대부분이 대구로 응원을 나가 있던 터라 서 내에 경관이 얼마 없었던 경찰서는 쉽게 군중에게 넘어갔다. 이 일로 경찰서는 파괴되고 소총 27정, 권총 2정, 실탄 1,200발이 탈취되었다. 경찰서장 이혁춘과 군수 오광진은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오히려 폭행당해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시위대는 서장과 군수에게 권력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그 사이 두 사람의 집을 포함하여 다른 경찰관의 집, 군청 창고 등도 파괴되었으며 전화선도 절단되었다. 10월 4일에는 자정부터 오후 7시까지 군위경찰서 관하 8개 지서 모두가 3~400여 명의 시위대에 의해 큰 피해를 보았다. 이후 충북에서 응원 경찰이 당도함으로써 시위는 진압되었으며 수십여 명이 체포되었다.

6) 의성군

의성군에서는 10월 3일 오전 9시경 5천여 명의 군중이 민청원들을 선두로 하여 의성경찰서에 나타났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대구에서 온 시위대원, 의성군 인민위원회 위원, 조선인민당원, 농민조합원, 교원, 민청 간부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시위대는 김진영, 박종건 등 20여 명의 대표를 보내 경찰서장 유시목을 향해 ① 파업 동참, ② 사표 제출, ③ 민청에게 치안 인계 등의 조건을 들며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에 유시목은 ① 폭동화 금지, ② 경관과 그 가족들의 안전 보장, ③ 유치장 개방 금지 등의 조건을 제시하여 확약받은 후 경찰서를 내주었다. 시위대는 군수 이종기에게도 ① 파업 선언, ② 유임 금지 등의 조건을 내걸어 서약받아낸 후, 서장과 군수의 집을 수색하여 얼마나 식량을 가졌는지를 확인하였다. 군중들은 새로운 8.15를 맞이하자며 시민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즈음에는 의성군 내의 각 면사무소와 경찰지서들도 완전히 시위대에 접수되었다.

10월 4일 대구의 치안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시위대는 태도를 바꿔 유시목에게 계속 경찰서에 나와 일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지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말 것을 청원하였다. 이후 10월 5일 아침 응원경찰대가 도착하자 시위대는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의성군의 10월 항쟁은 이렇게 종료되는 듯하였으나,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10월 16일부터 군중의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이 시위에서 군중은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오지의 경찰지서 세 곳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곳의 경관 11명을 폭행하고 우익인사의 집을 부수고 창고를 약탈하다 시위대원 1명이 살해당했다. 18일이 되자 새로운 응원 경찰이 내려와 시위대 126명과 이들과 결탁한 관리 6명을 체포하였다. 체포를 면해 도망친 젊은이들은 훗날 야산대(野山隊)로 활동하며 경찰에 계속 맞섰다고 한다.

7) 선산군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대구로부터 내려온 사람이 없었음에도 자생적으로 봉기가 발생하였다. 항쟁을 이끈 사람은 당시 선산군 민전 사무국장이자 선산군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상희와 민청 간부 김정수 등이었다. 이중 박상희는 독재자 박정희의 친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항일운동을 활발히 벌인 독립운동가였고,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등의 구미지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공산당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박상희와 김정수의 지도로 군중 2천여 명은 10월 3일 오후 9시경 적기가를 부르며 구미경찰서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장 백철상에게 경찰이 무능하므로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에 백철상이 굴복함으로써 경찰서는 시위대에게 점거되었다. 시위대는 백철상을 비롯한 경찰들과 우익 인사들을 유치장에 감금하고, 경찰서의 간판을 떼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어 자치활동까지 벌였다.

시위대는 이 밖에도 구미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그곳의 양곡 135가마를 탈취하고 서류를 불태웠다. 또한 서장과 경관, 면장 및 면 직원, 소방대장과 부대장, 지주, 우익 인사들의 집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이런 와중에 수사과장 박학림이 10월 3일 오후 8시경 탈출하여 도보로 대구의 제5관구경찰청에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대구에서 경찰이 오기도 하였으나 지역민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10월 5일에는 미군이 이끄는 미곡수집 부대가 선산을 떠나려 하자 군중이 몰려들어 돌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이 부대는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2명을 죽이고 구미면에 도달했는데, 군중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었음을 알고 총을 내놓으라 요구했으나 소총 5정을 회수하는 데 그쳤다. 한편 선산 남쪽의 낙성(洛成)에서는 군중 2,000여 명이 죽창, 농기구, 몽둥이를 챙겨 하곡수집소를 습격해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10월 4일, 대구의 소식이 들려오자 시위대의 태도는 바뀌어 경찰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10월 5일에는 경찰들을 석방하여 근무를 할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박상희의 경우에는 일부 과격한 자들이 감금한 사람들을 처단하자고 했을 때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0월 6일 오전 6시 15분경 경기도에서 온 응원경찰대에 의해 항쟁은 진압되었다. 이때 박상희, 김광암(농민조합 위원장), 장달수(민청 간부) 등이 도주하다가 경찰의 총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또한 3명의 주동자와 150여 명의 동조자가 체포되었다. 경찰의 조사 결과 경찰과 우익인사를 포함하여 40여 명을 암살하려는 계획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8) 김천군

김천군(지금의 김천시)에서는 10월 3일 오후 4시경 500여 명의 군중이 김천경찰서로 몰려와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계엄령이 떨어진 대구의 소식을 들었는지 태도가 점점 온건해졌으며, 나중에는 간부들이 자기들의 면목이라도 세워달라고 호소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10월 4일 오후 국방경비대가 도착하면서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김천의 항쟁이 미약했던 것은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 항쟁 이전에 좌익 지도자들이 모 사건으로 인해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는 점, 우익의 세력이 더 강했다는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9) 영천군

영천군(지금의 영천시)은 10월 항쟁을 통틀어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지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천은 미곡수집이 한창일 적에도 극성스러운 곳이라 농민들의 원한이 높았다. 자료에 따르면 수집에 응하지 않았다고 농민들을 불러내어 두 줄로 세우곤 뺨을 때리게 했다거나, 실적이 부진한 농민들을 트럭에 태워 유치장으로 데려간 뒤 끌고 갔던 ‘운임’과 유치장에 묵게 한 ‘숙박료’까지 받아먹었다고 한다. 당시 영천군수였던 이태수의 경우에는 미곡수집령을 위반하면 엄하게 벌하겠다고 직접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영천은 소작률이 60%일 정도로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갈등도 심했었다. 여기에 관료들과 경찰, 지주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반민족행위를 하던 자들이었으니 그야말로 지역민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영천의 항쟁은 10월 3일부터 일어났다. 이날 대구에서 왔던 시위대원들과 영천군 인민위원회가 결합하여 영천읍에서 시위를 벌였다. 임장춘(영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임대식(임장춘의 동생), 이상문(민청 의장), 박학덕(교육자) 등이 이끄는 상인과 학생들을 포함하여 인근 면의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최소 수천 이상의 군중이 읍내를 포위하여 통신망을 제거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습격했다. 경찰서는 군중에게 접수되었고 경찰서장과 15명의 경찰이 살해되었다. 또한 우체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 출장소, 지주와 부자들의 집 등 300여 채의 건물도 파괴 혹은 전소되었다. 관리들도 공격 대상이 되어 19명이 살해당했는데, 특히 가혹한 미곡수집을 강행하여 원성을 샀던 이태수가 빠질 수 없었다. 그는 사저에 있다가 군중이 몰려오자 대피했는데, 결국 붙잡혀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생화장을 당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소문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시위 도중 시위대 측에서도 20여 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10월 4일까지 영천읍을 장악하였다가 미군 부대가 도착하기 직전인 오후 2시 30분경 철수하였다.

영천읍에서의 항쟁 이후 봉기는 면 단위로 파급되었다. 화북(華北)면 자천동에서는 10월 3일 시위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들어와 선동하였고, 면 인민위원장과 몇몇 농민들이 주동하여 청장년층과 소작농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켰다. 군중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꽹과리를 울리며 장터에서 시위를 벌인 후 30여 명씩 짝을 지어 면내를 돌아다녔다. 이들은 지주이자 영천의 핵심적인 우익인사였던 정도영의 집을 습격해 불태웠고, 경찰 2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악덕 지주로 지목된 자들을 창고에 가둔 후 며칠 동안 면을 자치적으로 통제하였다. 봉기는 같은 면의 지천리로 옮겨붙어 이곳에서도 역시 비슷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곳에서는 경찰지서의 서류와 비품들을 불태웠고, 친일 인사 양주언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금호(琴湖)면에서는 10월 2일 지역민들이 면 소재지로 집결해 면사무소와 경찰지서, 면장의 집 등에 방화했다. 면내에 있는 신대리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농상계 직원으로 활동하고 공출 수령까지 감행했던 구장 이영우가 살해되었다.

대창(大昌)면에서는 군중이 10월 2일 밤 30여 명씩 몰려다니며 곡식 창고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 우익 인사들의 집을 불태웠다. 북악(北安)면에서는 인민위원장의 지도로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면장 서형석을 살해했다. 군중은 면장의 집은 물론이고 부면장의 집까지 불태웠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면 서기 성재모 등을 살해하고 친일파와 우익 인사들의 집을 파괴했다. 고경(古鏡)면에서는 항쟁이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동부에서는 주민들이 경찰지서를 점령하고 우익인사를 때려죽였다. 서부에서는 경찰지서를 불태우고 지서장을 살해했으며, 구장과 친일 인사들의 집을 부수었다. 임고(臨皐)면에서는 영천읍에서 온 시위자들의 선동에 힘입어 거의 모든 주민이 면 소재지로 집결했다. 군중은 당시 면장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당시의 면장이었던 이병갑의 집과 경찰지서에 불을 질렀다. 면사무소까지 점령한 후에는 공격 계획까지 세워 일제강점기부터 공출했던 면 서기 김규익을 살해하고 친일 인사 정만용의 집과 대지주 이인석의 정자를 불태웠다.

자양(紫陽)면에서는 10월 3~4일 영천읍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1천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지서를 불태우고 지주 정형식과 경찰 1명을 살해했다. 신녕(新寧)면 역시 영천읍의 시위대가 좌익 청년단원들과 함께하여 지서, 면사무소, 우체국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통신망도 절단하고 경찰 5명을 붙잡아 유치장에 감금하였다. 이후 청년들의 지휘 아래 면내 24개 리의 주민들이 공회당에 집결하였는데 공회당 앞거리가 꽉 찰 정도였다고 한다. 시위대는 면사무소, 지서, 교회, 국민학교 등에 불을 지르고 우체국 앞에 임시 경찰지서를 만들어 경찰과 우익 인사들을 심판하였다. 이 과정에서 목사 손해조와 서기 나산도 등 5명이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다. 청통(淸通)면에서는 10월 4일 신녕면에서 시위대 30여 명이 넘어오자 면 서기 금도헌의 주도로 마을 주민 다수가 봉기에 참여했다. 이들은 면장 이종문을 지서에 감금한 후 불태워 죽였고, 마을 유지 박동성과 일제강점기 당시 수리조합장이었던 박이수 부자도 살해했다. 이외에도 우익인사들의 집을 습격하고 친일파와 지주를 구타하였다. 화산(花山)면에서는 다른 면에 비해 항쟁 강도가 약했으나 청년을 포함한 30여 명의 군중이 경찰지서와 지주들의 집을 방화하였다.

영천군의 항쟁은 10월 5일 응원경찰대가 내려오고 미군 부대까지 동원되고서야 간신히 진압되었다. 10월 8일 기준으로 전소 가옥 200여 채, 파괴 가옥 약 1,000호로 피해액은 약 10억 원에 달하였다. 또한 경찰서 본서와 각 지서에 보관되어 있던 무기들도 모조리 탈취되었다. 이 일로 인해 12월 8일까지 약 6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0) 경산군

경산군(지금의 경산시)에서는 10월 2일 시위대가 경산경찰서로 모여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경찰이 거절하자 2천여 명으로 불어났고, 시위대 일부는 경관 몇 명을 끌어내어 폭행하기도 했다. 그날 밤 경찰서장 관사가 군중에 의해 박살이 났고, 이에 경찰은 미군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10월 3일 미군이 출동함으로써 시위대는 경찰서로부터 물러났고, 오후부터는 100여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18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한편 경산군 자인(慈仁)면에서는 10월 2일 6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지서를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시위대가 900여 명으로 불어나자, 2명밖에 없었던 지서 내 경찰들은 가지고 있던 무기만 넘겨주었다. 이후 3일 오전 경찰이 추가 동원되면서 이곳의 시위는 종료되었다. 이외에도 10월 3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에는 하양(河陽), 청천(淸泉), 안심(安心), 압량(押梁), 고모(顧母), 진량(珍良), 용성(龍城) 등 7개 지서가 300~700여 명의 군중으로부터 습격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한편 하양의 경우에는 민청이 지서를 점령하고 며칠간 지역을 통제하였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11) 청도군

청도군에서는 민청 위원장의 지휘 아래 10월 1일 군중들이 청도경찰서에 몰려가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민청 위원장은 이날 대구에서 벌어진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파업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이 시위에서 경찰은 발포하지 않았고, 시위 군중도 경찰서를 점거하지 않고 평화롭게 집회를 이어갔다. 훗날 이 점에 대해 미군정 보고서는 경찰 지도부와 판사가 공산주의자(프락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공권력이 복구되면서 40여 명이 체포되었다.

12) 경주군

경주군(지금의 경주시)에서는 10월 3일 군중들이 4명의 경찰을 폭행했으며, 10월 4일에는 민청원과 학생들이 150명씩 무리를 짓고는 경주읍을 휩쓸며 공공건물과 경주경찰서를 비롯한 관내 3개 지서를 파괴했다. 경찰들은 서장과 몇몇 경관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도주하였다. 이후 미군 정찰대원 8명이 경주에 도착했을 때 시위대는 우익단체 본부와 경찰서를 점령한 상태였다. 시위대는 미군을 보자 해산하였고, 이후 미군이 주둔하였다. 하지만 이날 오후 5시경 농민조합원들을 주축으로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경찰서 주위에 다시 모였다. 미군은 이들도 해산시켰으나, 시위대는 외곽지대를 다니면서 그날 밤 지서 4곳을 파괴하고 경관들을 공격하였다. 미군정 보고서는 이런 시위대의 행동이 자신들의 주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략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영천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500~700여 명의 군중은 경주 남산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치기도 했으나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아화(阿火)리에서는 10월 6일 숫자 미상의 군중들이 지서를 습격해 경관을 납치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는데, 대구에서 경찰이 충돌하였으나 협상을 통해 사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안강(安康)읍에서는 10월 5일 미군 보안대가 시위대로부터 소총을 압수하였다. 이후 10월 10일 다시금 시위가 일어나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면장을 폭행했는데, 대구에서 온 경찰이 진압 과정에서 발포하여 소녀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경주군 조사에 의하면 이곳의 피해는 상해 인원 56명, 가옥 일체 전소 5호, 가옥 파괴 90호(이중 완파 8호), 가산 일체 소각 141세대였고, 피해 금액은 총합 4,847만 원에 달했다. 이중 내남(內南)면의 피해 금액만 3,700만 원에 달했는데 그만큼 이 지역의 항쟁이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10월 6일 대구의 계엄령을 이곳에서도 확대 적용하였다.

13) 영일군

영일군(지금의 영일군과 포항시)의 포항읍에서는 10월 3일 청년 700여 명이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여기서 시위대는 현지 군정장관에 ①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건설하자, ② 우리는 굶주리고 울부짖는 인민을 구해야 한다, ③ 우리는 이 나라가 반역자의 나라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등의 내용이 담긴 서신을 제출하였다. 결국 이날 밤 포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0월 5일에는 영일군 기계(杞溪)면에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몽둥이와 창을 들고 시장에 모여 우익 지도자 김기열과 한국인 전도사 안강복을 살해하였다. 또한 이들은 기계지서를 불태우고 관청과 사택을 폭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서의 경찰들이 도주하여 포항에 연락했기에, 10월 6일 오전 1시 30분경 응원 경찰이 도착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때 주모자 중의 1명인 권태일이 붙잡히고 나머지 주모자들은 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강동(江東)에서는 10월 5일 200여 명의 군중이 지서를 습격하여 경관들을 구타하고 동쪽에서 1km 정도 떨어진 언덕으로 끌고 갔다. 미군 헌병이 출동하고서야 시위는 진압되었고 경찰들은 구조되었다. 강동 부근과 이웃 안강(安康)에서는 10월 9일부터 20일까지 600여 명의 군중이 지역을 지배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우편국장이 300여 개의 사제 수류탄을 군중에게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이후 대구로부터 50여 명의 응원 경찰이 도착하여 무기를 압수하고 국민학교 교장과 교사를 포함한 120여 명을 체포하였다. 우편국장과 국민학교 교장 등이 시위에 참여했음을 고려할 때 이 지역에서는 주민들은 물론이고 지역 유지까지 참여 및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구룡포(九龍浦)에서는 10월 6일 2천여 명의 시위대가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으로 지서장 사택을 포함한 많은 건물을 폭파했는데, 무장한 우익들이 경찰과 합세하여 시위를 진압했다고 한다.

14) 영덕군

영덕군에서는 10월 4일 안동과 포항으로부터 다수의 민청원이 집결하였으나 이것이 경찰서 습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또한 이날이 장날인지라 영덕군 인민위원회, 조선인민당, 남로당(남조선로동당), 민청, 민주부녀동맹, 농민조합 등은 치밀한 봉기 계획을 짰지만, 경찰의 검문이 심하여 10월 9일로 거사를 미뤘다. 당시의 계획은 10월 4일을 기하여 동북 3개면은 동로군, 남부 2개 면은 남로군, 북부 2개면은 북로군, 경찰서와 군청이 있는 영덕면은 본부선봉군으로 각각 봉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덕군의 좌익은 그 세가 다른 지역에 비해 강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미뤄졌던 전면적 봉기는 194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터진다.

10월 4일의 전면적 봉기는 불발되었으나, 달산(達山)면에서는 부분적으로 항쟁이 발생하였다. 이곳에서는 달산국민학교 추계운동회가 열려 군중의 집결이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봉기한 군중은 오후 3시경 운동회를 관람하고 있던 면장, 관공리, 우익 인사들을 납치하여 구타하였다. 그리고 달산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면 소재지인 대지동 일대를 거쳐 대서천 상류의 주응동, 옥산동에 이르기까지 면사무소, 경찰지서 등을 파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면장 신태순이 살해되고,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 정원석을 비롯하여 25명이 다쳤다. 우익 인사들의 집도 20여 채나 파괴되었다. 이후 진압이 일어났을 때 우익들이 경찰에 협조하였으며, 치안이 회복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15) 안동군

안동군(지금의 안동시)은 예전부터 좌익과 우익의 세가 비슷하였고, 항쟁 이전에는 좌우익 간의 충돌로 인해 좌익 인사가 많이 검거된 상태였다. 또한 항쟁 소식을 먼저 접한 경찰이 10월 3일 선수를 쳐서 시위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십여 명을 예비 검속하였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10월 항쟁 당시 안동에서는 10월 6일 밤 8시에 노동자들이 산발적인 형태로 집회를 개최하는 데에 그쳤다.

16) 예천군

예천군에서는 10월 3일 봉기가 일어났다. 이날 오후 3시 군내 민청원 전원이 민청 사무실에 모여 논의 중이라는 정보를 들은 경찰이 경관을 파견했는데, 이때 충돌이 발생했으나 경찰 몇 명이 부상하는 수준으로 그쳤다. 이후 오후 7시경 천여 명의 군중이 예천경찰서를 공격하였는데, 경찰들이 사격으로 대응하면서 다음 날 오전까지 교전이 발생했다. 이때의 교전으로 군중 측에서 사망자가 여럿 나온 것으로 보인다. 10월 4일에는 인근 문경경찰서에서 이씨 성을 가진 수사과장이 경관 20명을 이끌고 용궁(龍宮)면에 은신한 천여 명의 군중을 찾겠다고 나섰다가 반격당했다. 이 일로 수사과장은 하복부에 관통상을 입었다.

미군이 도착하는 10월 5일까지도 예천군의 치안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이후 미군이 도착했음에도 항쟁은 계속 이어졌다. 10월 6일에도 경찰서에 대한 공격이 시행되어 5명의 경찰이 다치고 125정의 소총이 탈취당했으며 경찰 막사도 불에 탔다. 군중 측에서도 사망 5명과 부상 20명을 냈다. 경찰은 미군의 존재에도 자신들의 신변에 위험을 느꼈고, 항쟁 발생 일주일 후에도 군 외곽지대에는 경찰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예천의 항쟁으로 경찰은 9명이 중상을 입고 3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우익단체의 간부 1명이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살해되었다. 군중도 최소 15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보이며, 주모자를 비롯한 165명의 용의자가 검거되었다.

17) 상주군

상주군에서는 언론에 따르면 항쟁이 없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10월 3일 시위대가 상주경찰서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경찰 5명이 폭행당하고 생매장당했다. 한편 함창((咸昌)읍에서는 10월 6일 6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의 공세로 진압되었다.

18) 문경군

문경군(지금의 문경시)은 우익이 강세인 지역이었고, 항쟁 이전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경찰에게 검거되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항쟁의 강도가 약했다. 또한 10월 3일 항쟁의 정보를 먼저 들은 경찰이 엄중한 경비를 펼친 탓도 있었다. 다만 10월 4일 산양(山陽)에서 군중 50여 명이 지서를 공격해 파괴하였다. 이 일로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19) 영주군

영주군(지금의 영주시)에서는 10월 3일 경찰서장과 좌익 대표가 회담을 가졌으나 결렬되었다. 10월 4일 영주경찰서는 지서의 무기를 회수하고, 최소 병력만 외곽지대에 남겨둔 후 모든 병력을 본서에 모았다. 그리하여 읍내에서는 봉기가 없었으나, 10월 5일 아침 시위대는 이산(伊山)면, 단산(丹山)면, 문수(文殊)면 등의 각 지서를 습격하였다. 문수면에서는 지서장과 면장의 집이 파괴 및 약탈당했고, 교회당과 우익 간부의 집들도 약탈을 피하지 못했다. 또한 풍기(豊基)에서는 이날 1,500여 명의 군중이 산에서 내려와 경찰지서를 습격했으나 경찰의 사격으로 인명피해를 냈으며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한편 같은 날 800여 명의 군중이 읍 외곽의 산 뒤쪽에 모였으나 경찰에 의해 해산당했고, 오후에는 2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서에 몰려왔으나 서장의 설득 끝에 역시 해산하였다. 이후 주동자 6명을 포함하여 122명이 체포되었는데,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영주경찰서에 갇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20) 봉화군

봉화군에서는 10월 3일 천여 명의 군중이 봉화경찰서 인근 산에 모여 습격을 도모했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경찰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당했다.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경찰 3명 부상에 그쳤다. 훗날 붙잡힌 5명의 주동자를 조사하니 시위대가 각 면에 들어와 무기를 들고 동참하지 않으면 때려죽일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후 용의자 50여 명의 검거되었다. 한편 경찰의 엄중 대비하고 있을 적에 예천처럼 외곽지대에는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들은 자기 자신들의 안위만 지켰던 셈이다.

21) 청송군

청송군은 가혹한 미곡수집령 때문에 대량 아사가 발생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 비해 항쟁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미약했다. 10월 4일 대구의 시위대로부터 지령받은 숫자 미상의 군중들이 청송경찰서를 습격했다. 주로 민청원으로 구성된 이 시위대는 경관 몇 명을 폭행 및 납치했으며, 경찰서와 공공기관, 무기고를 파괴 및 방화하고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진보(眞寶)에서는 10월 6일 군중들이 면사무소를 파괴했으나 다음 날 응원 경찰이 도착하자 진압되었다.

22) 영양군

영양군에서 항쟁이 일어났다는 신문 기사나 보고서는 없다. 하지만 이 지역은 군수가 한국민주당 출신이었음에도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각 면을 통치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증언에 따르면 10월 항쟁 당시 이곳에서도 주동자와 가담자가 있었다는 대목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영양군 역시 근처 지역과 유사한 항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경북 대다수 지역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의 양상은 그 지역의 정치 사회적 배경, 민중이 느낀 분노의 정도, 경찰의 대응 등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김상숙은 자신의 저서에서 경북의 10월 항쟁 상황을 5가지로 분류해 각 지역을 비교하였다.

(1) 공격형 권력 장악 지역 : 달성, 영천, 칠곡, 성주
(2) 협상형 권력 장악 지역 : 군위, 선산, 의성
(3) 권력 미장악 교전 지역 : 경주 일부, 영일, 포항, 예천, 상주, 경산, 고령
(4) 산발적 항쟁 발생 지역 : 영주, 봉화, 영덕, 청송, 김천, 문경, 영양, 안동
(5) 경찰과의 협상으로 항쟁에 제어된 지역 : 청도 일부, 경주 일부, 칠곡 일부, 고령 일부

(이후 계속)

* 이 글은 연구자 정해구의 『10월 인민항쟁 연구』(열음사, 1988), 언론인 정영진의 『폭풍의 10월―대구 10.1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이데올로기』(한길사, 1990),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김상숙의 『10월 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돌베개, 2016)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이 기사를 총 120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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