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 사회주의 배반자 고르바초프에게 맞서 싸웠던 공산주의 전사 니나 안드레예바를 추모하며

지난 7월 24일 볼셰비키전연방공산당(VKPB) 서기장이었던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안드레예바(Nina Alexandrovna Andreyeva)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안드레예바를 추모하는 공산주의 동지들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쏘비에트 인민들은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사회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리고 니나 안드레예바가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투쟁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배반자 고르바초프는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최종 폐기하기 위해 부르주아 사고의 일종인 ‘신사고’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 부르주아 ‘신사고’는 페레스트로이카(쇄신)와 글라스노스트(공개성)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정치적 본질을 은폐했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가 계속될수록 그 반노동자적, 반사회주의적 본질이 점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8년 3월 13일 니나 안드레예바는 “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글을 쏘비에트 러시아(Sovetskaya Rossiaya)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반공산주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의혹을 품고 있는 쏘련공산당 내부와 쏘련 인민들에게 엄청난 파급을 미쳤다. 심지어 세계 전역에도 쏘련 내부의 정치적 논란이 알려졌다.

당시 이 글은 쏘비에트 공화국, 지역, 시군 신문 937개에 연이어 실렸다. 공장과 군대 신문에도 수없이 실렸다. 이 글은 쏘련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했다. 이 글과 관련해서 수천 통의 편지가 ‘프라우다’ 신문과 ‘쏘비에트 러시아’ 신문에 실렸는데 그 중 80%는 이 글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20%는 반대하는 것이었다.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는 두 주 동안 이 주제만 가지고 격렬한 토론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당신은 고르바초프 편이냐 아니면 니나 안드레예바의 편이냐”는 식으로 편지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안드레예바를 당에서 축출하고 ‘쏘비에트 러시아’ 신문을 압수수색하며 탄압했다.

안드레예바의 포문을 시작으로 해서 쏘련 공산당 내부에서 자본주의 복귀에 반대하는 투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1988년 3월 18일-20일 사이에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주의와 공산주의 이상을 위한 단결이라는 전 연방적 기구가 창립됐는데, 안드레예바는 그 창립을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11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볼셰비키전연방공산당이 창립됐다.

맑스레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러시아 올리가르히(재벌)의 대변자이자 자본주의자 옐친이 권력을 잡았다.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는 쏘련 해체에 대해 77.3%의 인민들이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옐친은 불법적으로 쏘비에트 해체 시도를 가속화 하여 마침내 1991년 12월 최종적으로 쏘련 해체를 선포했다.

1993년 9월 21일에 옐친은 최고인민회의(쏘비에트 의회)를 해산하고 상하양원제의 새로운 헌법구성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투쟁에 최대 10만 여명의 인민들이 참여하기도 했는데, 옐친 도당은 무차별적 학살만행을 자행하여 공식통계로만 187명이 사망하고 437명이 부상당하는 ‘모스크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와 다르게 이 사건에서 2천명 이상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피로 얼룩진 쏘련 사회주의 전복과 러시아 공산주의 운동”,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의 사상> 2호, 2011년 4월 참고)

그런데 쏘련 공산당 내부의 저항과 다수 인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쏘련 해체를 가속화 시키고 옐친도당이 권력을 잡고 쏘련을 해체시켰는가?

쏘련의 해체를 낳은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약화와 당의 수정주의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강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포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스탈린 사후 후르시초프 시기부터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쏘련 공산당도 상층부는 심각하게 관료주의로 오염되고 기층 당원들 내에서도 수정주의와 자본주의 복귀에 맞서 투쟁하는 사상적, 조직적 구심이 부재했다. 게다가 고르바초프가 “레닌주의로 복귀하자”는 구호로 쏘련 내부 모순을 해결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도 미약했다. 심지어 안드레예바의 글도 “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고르바초프의 연설문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자체를 전면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글은 쏘련 사회주의의 실질적 건설자인 스탈린에 대해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서구 부르주아 정치적 경향을 비판하고, 당시 대중문화에서도 나타나는 스탈린 혐오주의, 청년들 상당수에게 나타나는 역사의식 부재와 제국주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 등이 반공주의적,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폭로하며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질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우리는 역사적 문서가 된 니나 안드레예바의 “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를 앞에서도 소개한 2011년 <노동자의 사상> 2호에서 [보론1]으로 소개하였다. 우리가 알기로는 아마도 이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해서 소개한 글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수정주의의 영향으로 반스탈린주의를 내세운 반맑스레닌주의적 사조가 전 세계적으로 유포되면서, 공산주의 운동은 유로 꼬뮤니즘으로 타락하고, (범)무정부주의적 사조가 창궐하였다.

한국에서는 쏘련 해체를 전후로 이러한 반맑스레닌주의, 반스탈린주의적 (범)무정부주의가 창궐했다. 이들 청산주의 사조들은 쏘련 해체를 ‘스탈린주의’ 탓이라고 역사를 단순화 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다. 쏘련 사회주의 해체의 내적 원인은 후르시초프 때 시작하여 고르바초프 때 정점에 달한 반스탈린주의를 내건 수정주의적 사조들 때문이었다.

쏘련 사회주의의 흥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수정주의와 쏘비에트 해체에 맞서 싸우고 쏘비에트 복귀를 위해 투쟁하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직접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다.

한국의 자칭 ‘사회주의자’들과 일단의 ‘진보파’들은 쏘련이 해체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 원인에 대해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사구시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 대신에 마치 만사형통 ‘종교적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반스탈린주의’를 천편일률적으로 외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과 문필조작조차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기도 한다.

쏘련이 해체되는 1990년대 초라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국제 정보에 어두워 그러한 인식에 갇혀 있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태 그때와 똑같은 수준의 인식에 머물러 있다면 순진무구한 동심 세계라면 모를까 진보적 정치활동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적 인식이 된다.

니나 안드레예바의 “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에서는 당시 반공 자유주의 연극이나 영화,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서 나타난, 레닌이 병에 걸려 사망하기 전에 스탈린이 레닌을 고립시켜 권력을 장악했다든지, 키로프 암살 배후에 스탈린이 있다는 식의 주장의 가당찮음을 폭로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3류 소설 풍문 수준의 주장들이 ‘사회주의’ 문헌에서도 종종 출현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공’을 사실상의 국시(國是)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 백색테러 국가에서 국가보안법을 등에 업고 조장된 반쏘반공, 반북주의를 자신의 모토로 하고 있는 한국의 자칭 ‘사회주의자’들, 전혀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자유주의자들’, 이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를 발췌해서 소개하겠다.(우리의 번역 글에는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주가 달려 있지만 이 발췌본에서는 주를 제외했다.)

 

 

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

 

니나 안드레예바

(쏘비에트 러시아, 1988년 3월 13일, 2쪽)

번역: <노동자의 사상> 2호 [보론1],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1년 4월

 

나는 오랜 심사숙고 끝에 이 편지를 쓸 결심을 했다. 나는 화학자이고 렌쏘비에트라는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 기술연구소 교사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한 학급을 맡고 있다. 사회적 냉담과 지적 기생상태 이후 오늘날, 학생들은, 점점 더 혁명적 변화의 열기에 휩싸이고 있다. 자연스럽게, 페레스트로이카와 그것의 경제와 이데올로기적 측면의 방식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글라스노스트, 개방성, 비판이 금기시 되는 성역의 소멸,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중의식의 감정적인 열기는 또한 서방 라디오 방송에 의해 여러 가지 수단으로 또는 사회주의의 본질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동포 자신에 의해 ‘즉흥적인’ 문제들을 자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주제가 다뤄지고 있지 않은가! 대화는 다당제, 종교적 선전의 자유, 조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는 문제, 출판에서 성적인 문제들의 광범위한 토론의 권리, 문화의 분권화된 리더십 필요, 의무적 군대 복무의 폐지 등등에 대해 이뤄지고 있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는 조국의 과거에 대해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우리 교사들은 정직, 지식, 확신, 문화적 견문, 가장 논쟁적인 문제들과 이 요구에 더해서 정직, 지식, 확신, 넓은 문화적 지평, 진지한 심사숙고와 심오한 인식 말고도, 요구되는 가장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사회과학부 직원뿐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모든 교육자들도 필요한 것이다.

페테르고프 공원은 우리가 학생들과 함께 즐겨 산책하는 곳이다. 우리는 눈 덮인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유명한 궁전과 조각품들을 감탄하며 보면서 논쟁한다. 논쟁한다! 젊은 영혼들은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장차 진로를 결정하는데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젊은 열정에 가득 찬 질문자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들이 살고 있고 개혁해야만 하는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형성하고, 그들이 우리 역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무엇을 염려하는가? 여기에 단순한 예가 있다: ‘대조국 전쟁’과 그 전쟁에 참가했던 인민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많은 것들이 써지고 이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 전에 우리 기술연구소에 있는 학생기숙사 중 하나에서 쏘련의 영웅이자 퇴역 대령인 V.F. 몰로체프와의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다른 문제들 중에서도, 군대에서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 퇴역군인은 자신은 결코 어떠한 억압도 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 전쟁 발발부터 종전까지 같이 겪었던 많은 사람들은 중요한 군대 지휘관 등등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몇몇 학생들은 이 대답을 듣고 실망했다. 대화의 화제가 된, 군대 억압의 문제는 몇몇 젊은이들 사이에 증폭되었고,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무색케 했다. 이와 같은 예는 흔하다.

물론, “기술분야 학생”이 사회과학의 이론적 문제에 날카롭게 흥미를 가지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일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테러리즘”, “인민의 정치적 노예상태”, “창의성 없는 사회적 무기력 상태”, “우리의 정신적 노예화”, “전반적인 공포”, “천박한 자들의 권력지배” 등등에 대한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만으로 자주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이행기 동안의 역사가 꾸며졌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 허무주의 감정이 자라나고 있고, 이데올로기적 혼란, 정치적으로 기념비적 사건에 대한 인식전환 그리고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잡식성의 사례가 나타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때때로 우리는 1917년 혁명 이후에 우리나라의 삶을 이른바 “비인간화” 했던 것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때가 왔다는 주장을 듣는다.

2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긴급한 과제는 “젊은이들이 계급적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우리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변화의 계급적 본질을 포함하여, 국제적, 계급적 이해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러한 역사관과 현재관은 요즘 자주 보게 되는 잡담과 첨예한 공상소설에 기초한, 정치적 비사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기사들을 읽었고 다시 읽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 방향 상실 말고, “1930년대에 쏘련에서의 반혁명”의 폭로, 파시즘과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에 대한 스탈린의 책임에 대한 “비난”, 혹은 다양한 세대와 사회적 집단에서의 “스탈린주의자들”의 수에 대한 대중적 “집계”에 대한 폭로로 젊은이들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레닌그라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세르게이 키로프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좋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아 왔다. 그러나, 첨부한 영화장면 사진의 내용은, 몇 부분에서 영화장면과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몇 가지 모호함을 주었다. 그 중 하나는 그 영화장면 사진은 사회주의를 건설해 왔던 인민들의 격정적 분출, 삶의 기쁨과 감정의 고조를 정신적인 열광을 보여주려 했으나, 나레이터가 말한 내용은 억압과 무지 등등을 언급하는 것이다.

아마도, “비난자”에 관심을 돌리려는 당 지도자들의 호소는 나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주의 건설의 다른 단계에서의 진정한 성취물에 대해 일사불란하게 새로운 “폭로들”을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무의미한 행위 중에서 미하일 샤트로프의 연극은 주목할 만하다. 26차 당대회가 개최된 어느 날, 나는 “붉은 잔디 위의 푸른 말들”이라는 연극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레닌의 비서가 미완성 조각상과 레닌을 혼동하면서, 찻주전자의 물을 레닌의 이마에 쏟아 부으려 하는 에피소드에서 젊은이들이 흥분했던 반응을 기억한다. 그런데, 몇몇 젊은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등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피켓을 미리 준비해 왔다. “브레스트 평화”에서 레닌은 극작가와 감독의 의도에 따라 트로츠키에게 무릎을 꿇는다. 이것은 작가의 관점을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에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연극에서 더 나아갔다. 물론, 연극은 역사적 논문이 아니다. 그러나 심지어 예술 작품에서 진실은 다름 아닌 작가의 입장에 의해 제공된다. 정치적 주제들에 관해 언급하는 극적인 작품이면 특히 더 그렇다.

극작가 샤트로프의 입장은 프라우다와 쏘비에트 러시아신문에 출판된 역사학자의 평론에서 철저하고도 논리정연한 방법으로 분석되어 있다. 나는 내 의견을 표명하고자 한다. 나는 샤트로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을 수용하는 것에서 실제로 일탈했다는 사실에 분명히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대를 다루면서, 그는 사회 진보에서의 주관적인 요인을 절대화하고 계급과 대중들의 행동으로 나타난 객관적인 역사법칙을 명백하게 무시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과 볼셰비키 당의 역할은 여기서는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펼치고 있는 행동들의 “배경”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들을 분석하는 맑스레닌주의 방법론에 기대 있는 비평가들은, 샤트로프가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샤트로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반대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역사적 공헌이 없었다면 오늘날 쏘련에서 개조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 작가는 계속해서 트로츠키와 키로프의 암살범으로 스탈린을 비난하고 레닌이 병에 걸렸을 당시의 “차단”에 대해 스탈린을 비난한다. 그러나,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려는 노력 없이, 역사적 인물에 대해 편향된 비난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비평가들은 샤트로프는 작가로서 자신의 모든 주장이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나는 그의 평가와 논지의 논리가 1935년 파리에서 출판된 보리스 수바린의 책의 주제와 매우 가까웠다는 인상을 받았다. 샤트로프의 연극에서는 혁명과정에 관한 레닌주의의 반대자들이 제기해왔던, 혁명과정에서의 레닌의 역할과 당 내부 투쟁 의 각각의 단계에서 당 중앙위원회 성원의 상호관계가 무엇인지를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레닌에 대한 샤트로프식 “새로운 독해”의 본질이다. 나는 “아르바트의 아이들”의 작가인 아나톨리 리바코프 역시 일부 장면은 이민자 출판물에서 샤트로프가 빌려 왔던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그것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작품을 읽지 않고, 나는 이미 몇 가지 출판물에서 그 작품을 칭찬하는 반응들에 대해 읽었다. 그러한 조급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것은 무대에서의 공연을 위해 조급하게 준비된 것임을 알았다.

프라우다 신문은 2월 전원회의 직후에 “새로운 집단을 따라서”라고 제목을 달고 우리의 연극계를 이끄는 인물들 8명이 서명했던 서신을 출판했다. 그들은 샤트로프의 최근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을 지연할 가능성에 대해 경고했다. 신문들에서 이 연극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가 나오자 이러한 우려가 나온 것이다. 몇 가지 이유로, 그 서신의 저자들은 “조국이 경애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의 반열에서 샤트로프의 작품을 비판하는 비평가들을 배제했다. 어떻게 이것이 “폭풍 같고 열정적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들을 토론하고자 하는 그들의 소망과 일치할 수 있는가? 이는 그들 말고는 누구도 자기의견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지금 사회과학의 그야말로 모든 문제들에 대한 수많은 토론이 일어나고 있다. 고등교육기관의 교사로서 나는,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이데올로기 교육과 정치교육, 그들의 도덕적 건강성과 사회적 낙관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과 대화하고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 그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많은 결점과 편향성이 우리에게 축적돼 왔고, 무엇인가 분명하게 정정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중 몇 가지를 특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요제프 스탈린에 대한 태도 문제를 살펴보자. 내 견해로는, 현재 활기찬 노동,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기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쏘련 인민들의 전 세대에 걸쳐 전례가 없는 공적과 관련되어 있는 시기, 가장 복잡한 이행의 시기의 매우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라기보다는 주로 비판적인 공격에 대한 모든 강박관념이 스탈린 개인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를 위대한 권력의 반열에 들게 한 산업화, 집산화, 그리고 문화혁명은 “개인숭배”에 대한 억지 공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모두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스탈린주의자’들을 참회하도록 집요하게 요구할 지경에 이르렀다. 만일, 그러고자 한다면 누구든지 ‘스탈린주의’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폭풍과 맹공격”의 시대가 “인민의 비극”으로써 묘사되어 린치를 가하는 소설들과 영화들에 대한 칭찬들이 쏟아지고 있다. 역사적 허무주의를 기초에 세우기 위한 비슷한 시도들이 때로는 성공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비판이 쏟아진 어떤 영화는 전례 없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관객 다수에게 아주 무관심하게 받아들여졌다.[안드레예바는 여기서 탱기즈 아부라제의 반스탈린주의 영화인 ‘참회’를 언급하고 있다. -다른 영어번역 글의 편집자 주]

젊은 질문자와의 길고도 솔직한 대화로부터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와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에 대한 공격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도덕적 대의뿐만 아니라, 사회적 토대까지 공격한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공격들의 교두보를 확장하려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나라의 경계 너머에만 있지 않다. 오래 전에 이른바 “반스탈린주의”라는 민주적 슬로건을 내걸었던, 서방에서 전문적인 반공산주의 슬로건에 동조해서, 10월 혁명에 의해 전복된 계급의 후예들이 여전히 살아 번영하고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그들 선조들의 물질적 사회적 손실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과 마르토프 그리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다른 부분, 트로츠키와 야고다의 정신적 동조자들, 그리고 네프맨과 바스마치의 후손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쿨락(부농)의 정신적 계승자와 관련돼야 한다(표도르 단과 율리 마르토프는 레닌의 정책을 반대한 러시아사회민주당의 멘셰비키 우파의 지도자들이었다. 겐리흐 야고다는 1930년대에 스탈린의 치안부대장이었다. 네프맨은 신경제정책(NEP) 하에서 번성한 기업가들이었다. 바스마치는 1930년대 중앙아시아의 쏘비에트 통치에 저항한 지방의 성원들이었다. -다른 영어번역 글의 주]…..

 

최근 한 학생이 프롤레타리아의 지도적 역할과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은 진부한 개념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당혹스러웠다. 만일 그녀 혼자만 이렇게 주장했다면 괜찮다. 예를 들어, 존경받는 아카데미 회원의 최근 주장에서 두 개의 다른 사회적이고 경제적 체제 사이의 현재의 관계들은, 계급적 모순이 없어지고 있다고 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아카데미 회원은 평화공존이 단지 국제적인 영역에서 계급투쟁의 형태에 지나지 않기에 평화공존에 직접적으로 반대해 왔다. 그렇다면 왜 그가 수십 년 동안 써 온 것에 반대되는 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지 추측해 본다. – 그 평화공존이란 국제무대에서의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 형태일 뿐이다. 그 철학자는 지금 이 생각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점은 때때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도적 철학자의 임무란, 적어도 그의 책을 배웠고,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국제적인 노동자계급은 지금 자신의 국가와 정치기관과 더불어 국제자본에 대항하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논쟁의 중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계급과 사회 계층이 페레스트로이카의 힘을 이끌고 동원하는가? 이는 우리의 레닌그라드스키 라보치시 신문에 발표된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 작가와의 한 인터뷰에서 알 수 있었다.[프로하노프는 군대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보수적인 작가이다 -다른 영어번역본의 편집자 주]. 프로하노프는 사회적 의식에 대한 최근의 모습은 두 개의 이데올로기적 경향의 존재 혹은 그의 말에 따라, “양자택일의 탑들”로 특징지어졌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의 “전투에서 건설된 사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향에서의 시도이다. 비록 그가 이들 두 개의 “탑들” 사이의 상호적대의 중요성과 격렬함을 과장한다 할지라도, 그 작가는 “그들은 단지 사회주의 가치들을 패배시키는데 동의한다”고 정당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이데올로그들의 확신처럼 양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 서 있다.

먼저, 이미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드러났던 가장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경향은, 이른바 계급 계층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장 실제적이고 가장 “순수한” 휴머니즘의 대변자로서 지성적 좌파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가장하는 것이다. 이 경향은 프롤레타리아 집산주의에 반대하여 문화영역에서 현대화를 추구하고, 신을 찾는 경향, 기술적인 우상, 현대 자본주의의 “민주적인” 매력의 추구, 그리고 그 경향의 실제적 아부와 거짓 업적과 함께 – “개인의 자기가치”의 지지자들이다. 그 경향의 대표자들은 우리가 어떠한 사회주의 같은 것도 건설하지 못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역사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리더쉽과 진보적 인텔리겐차가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영토에서 수백만의 인민들이 기아와 유행병 그리고, 제국주의 군대의 공세로 죽었을 당시에, 그들은 “동물의 권리 보호를 위한 법 제정”을 요구했다. 또한 문화적 수준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유전된, 생물학적 자질이라는 이상한 본성을 주고, 초자연적 지성과 보전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즉 ‘자유주의 좌파 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은 사회주의 역사를 위조하는 경향을 형성한다.[안드레예바에 따르면, 이들은 스탈린의 범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작가들, 예술가들과 역사학자들이다. -다른 영어번역본의 편집자 주].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위대한 성취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조국의 과거 역사에는 실수와 범죄들만이 실제였다는 주장을 우리에게 침투시킨다. 역사적 진실의 완전성을 자처하면서, 그들은 사회발전의 사회정치적 특징을 윤리적 범주의 스콜라 철학으로 대체한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의 당 중앙위원회와 쏘비에트 정부의 모든 지도자가 열악한 역사적 도정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저질렀던 그의 실제적인 실수와 실수라고 불리는 것들 그리고 오류와 관련해 타협으로 해결하고 손상했던 것을 누가, 무엇을 위해서 필요로 한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세계 첫 번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라는 권위와 긍지를 무너뜨리려는 열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자유주의 좌파들”의 견해의 다른 특징은 공공연하거나 위장된 범세계주의 경향, 일종의 비민족적 “국제주의”이다. 혁명 이후에 무역대표단과 공장 소유주들이 페트로그라드에 와서, 트로츠키에게 “유태인으로서” 적군의 탄압에 대해 청원을 제기했을 때, 트로츠키는 “유태인이 아니라, 국제주의자이다”라고 했고, 따라서 그는 청원자들을 아주 당혹스럽게 했다는 것을 나는 어디선가 읽었다.

트로츠키에게, ‘민족’의 개념은 “국제주의”와 비교해서 뭔가 열등함과 한계를 의미했다. 그리고 따라서, 그는 10월 혁명의 “민족적 전통”을 강조하였고, “레닌의 민족적 요소”에 대해 썼다. 그는 러시아 인민은 “어떠한 문화적 유산도 상속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후진적이고 비문명화 됐던” 것 같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경시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당혹스럽다. 레닌에 따르면, 슬라브 인민들은 “세 가지 러시아 혁명”을 성취했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투에서 인류의 전위에서 전진했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물론, 다른 민족들과 국민들의 역사적 공헌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완전한 역사적 진실 등등을 단지 있는 그대로 다시금 확인하려고 하는 말이다. 학생들이 나에게 왜 황무지 땅에 있는 수천 개의 작은 마을들과 시베리아가 버려지게 되었는지 물었을 때, 나는 이것은 또한 러시아의 민족 문화의 많은 기념물들이 돌이킬 수 없게 손실된 것처럼, 전쟁 승리와 전후 민족경제의 회복을 위해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방어적이고 애국의식 및 광적 쇼비니즘 기둥에서 위대한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부심의 아주 작은 표명을 기록하려는 노력을 평화주의적으로 씻어내 버린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또 다른 것은 지금 사회주의 “부정”의 관습은 전투적인 범세계주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새 성직자들이 스몰니의 정문이나 크렘린 담장 아래서, 그들이 분노를 품어서 우리의 눈에 거슬릴 때 겨우 이것을 알아차렸다. 또한 그들은, 앞서 언급한 현상에 대해, 국가의 기금 덕분에 졸업을 할 수 있었던 이들의 계급적, 국가적 배신이라기보다는 무해한 ‘거주’의 변화라고 보도록 우리를 훈련시켰다. 일반적으로, 몇몇 사람들은 “사회주의 폐절”을 일종의 “민주주의”의 선언이나 “정체된 사회주의”에 의해 번영하는 것을 막았던 재능 있는 사람들의 “인간의 권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만일 “자유세계”에서 요동치는 기업과 “천재”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양심적 거래가 정보국의 흥미를 끌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은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의 교육은 비공식 기구와 단체가 ‘신자유주의’와 ‘新슬라브주의’와 같은 사상 주변에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때때로 그들은 도발에 능숙한 극단주의적 지도자들에 의해 지배당한다. 최근 사회주의 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이들 비공식적인 조직의 정치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 조직의 지도자들은 종종 ‘권력의 분화’, ‘의회 체제’, ‘자유 무역’, ‘출판의 자유’에 기초할 것을 이야기한다. 최근 국내에서 진행되는 논쟁의 핵심은 사회주의 구조, 페레스트로이카에서의 당과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보인다. 이는 물론 경제, 정치, 사상에서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결론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사회-역사적 세계적 관점의 중요한 문제로부터 파생하는 것은 소비에트 사회의 정신적 발전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1917년 말 카우츠키에 의해 이 문제는 첨예해 졌다. 10월 혁명을 위한 팜플렛에서 그는 사회주의는 강철 같은 계획이라는 특성과 원칙,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이데올로기로 특징된다고 했다. 이는 멘셰비키 및 사회혁명당원과 다른 쁘띠 부르주아적 사상가들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과학적 프롤레타리아트 이데올로기의 최고 지도를 꾸준히 방어 했던 레닌과 동지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회주의 이념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의문들은 극도로 날카롭게 제기되어 왔다. 기회주의적 작가들은 도덕적 “정화”라는 변명으로 과학적 이념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글라노스트를 호도했고, 사회적 의식에서의 개혁을 객관적으로 방해하는 비사회주의적 다원주의를 확산시켰다. 이는 분명 젊은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학생 문제와 관련된 교사들이나 고등 교육기관의 교사들은 분명 이를 느낄 수 있다. 고르바쵸프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우리는 정신적 영역에 있어야 한다. 즉 이곳에서, 우리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다. 동지들, 우리는 어떠한 구실로도 우리의 원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에 서 있고, 앞으로도 서 있을 것이다. 원칙은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조국의 역사의 혹독한 전환점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지켜 왔던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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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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