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진영 해체의 트로이 목마인 신고전파 경제학과 사회주의 내응자

사회주의권 해체에 부르주아 경제학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는 주장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냉전시대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조하나 보크만, 홍기빈 옮김, 글항아리)이라는 책에서는 신자유주의에도 ‘좌파’가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와 우파가 아무리 상대적 개념이라 해도 그렇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주장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장시복 교수가 (비판을 담아) 비평을 써서 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 장시복 교수는 먼저 이 저서가 다음과 같이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신고전파가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추진된 급격한 시장경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신고전파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왜곡·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장시복 목포대 교수, “신자유주의 안에 사회주의의 피가 흐른다?”, 프레시안, 2015.04.24.)

신자유주의는 보통 ‘시장근본주의’로 불리며 자본가들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가장 극단적인 착취이데올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우파적 기원이고 “좌파적 기원”도 있는데 그것은 사회주의권에서도 수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 여명기에 아담스미스, 리카도 같은 경제학자들을 고전파 경제학자들로 분류했다. 맑스는 이들의 진보성이 봉건제를 대신해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떠오른 자본주의가 초기 진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 고전파 경제학자들도 진보성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사실 레닌이 말한 맑스주의 원천의 3대 요소는 독일 고전철학,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와 함께 고전파 경제학이었다. 맑스주의는 이 3대 요소들은 근간으로 해서 이들의 이론적 한계나 오류를 극복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맑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뒤를 이은 부르주아 경제학을 속류경제학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심각하게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급대립이 첨예해지는 시기에 과학성을 상실하고 오로지 부르주아의 이해를 철두철미 대변하는 자본주의 변호론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맑스의 이 규정에 따르면 신고전파는 고전파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두 말할 것 없이 속류 중 가장 사악한 최속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다. 고전파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라는 봉건 구체제로부터의 억압과 족쇄의 탈피, 경제활동의 자유로서 진보적인 측면이 있지만, 신고전파의 경제활동의 자유는 자본일반, 특히 제국주의 시대에 착취와 식민지 지배로 점철된 독점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가장 반동적이고 사악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신고전파는 곧 신자유주의와 동일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 신고전파 및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시장근본주의’이기 때문에 자연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반공주의적이었다. 특히 1970년대 이후부터는 독점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한층 더 격렬하게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을 공격한 영국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니즘의 배경이 되는 이념으로도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좌파’라든가 “신자유주의 안에 사회주의의 피가 흐른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궤변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시장사회주의’: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투항노선

그런데 장시복 교수에 따르면 이 책의 원제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시장(markets in the name of socialism)”이다. 이렇게 원제를 확인해보니 이 책이 무조건 가당찮은 궤변만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 책이 주장하는 일면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 책은 시장사회주의 모형 자체의 작동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책이 아니라 ‘현실’사회주의의 새로운 사회주의 실험과 몰락 이후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고전파 사회주의’는 신고전파 이론을 사회주의에 적용하려는 일군의 학자들을 포함하며 대체로 시장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장시복, 같은 글)

이처럼 신고전파는 새로운 수정사회주의 노선과 결합(사실은 침투)하여 사회주의 진영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신고전파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다. 이 시장사회주의론은 ‘국가사회주의’라고 부정적으로 부르는 스탈린 시대의 기존 사회주의에 대비해 “새로운 사회주의 실험”이었다.

이른바 ‘좌파’ 정치세력들이나 대다수 ‘진보적’ 학자들은 스탈린 시대의 쏘련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비난하는데, 이는 국가일반,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무정부주의적 인식의 소산이다. 역설적으로 국가의 소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약화가 아니라 강화 속에서 준비된다. 제국주의의 간섭과 말살 정책과 사회주의 내부의 반혁명 세력들과 싸우고, 전 사회적 차원에서 계획경제를 관리하고 노동자 인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고 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 속에서만이 국가가 궁극적으로 소멸될 수 있다.

사회주의 ‘신노선’은 일찍이 유고와 헝가리의 시장사회주의로부터 출발했는데, “국가와 경제의 탈중앙화, 노동자에 기초한 경제적 민주주의,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로부터 이탈, 시장 역할의 확장”(같은 글)을 기본노선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과연 사회주의 혁명 노선이라는 게 있는가? 이 ‘신노선’은 고르바초프 시대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혁개방)를 내세운  ‘신사고’로 정점에 달했다. ‘신사고’는 부르주아 독재체제의 재생산 수단인 다당제 수용과 국유기업의 사유화, 무상복지체제를 붕괴시키며 쏘련 사회주의를 해체로 내몰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속에는 노동자도 인민도 없고, 민족도 없이 오직 올리가르히라는 러시아판 재벌의 부상과 관료들의 지배와  민족분열과 대립만 있었다.

자본주의는 상품생산과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 노동력조차도 상품이 되는 사회다. 시장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이 기업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체제로 노동자의 잉여노동에 대한 무한대의 착취를 갈망하고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주의는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확립하여 사회 전체의 발전을 중심에 두는 계획생산 체제다. 중앙집중계획과 노동자와 인민 대중의 적극적 참여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중앙집중계획만을 강조하면 관료주의와 주관주의가 발생할 수 있고, 참여만을 강조하면 무정부주의와 기업과 기관, 지역 이기주의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중앙집중계획과 대중참여 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당과 국가, 당과 행정사업의 형식적 분리와 내용적 결합 및 지도는 레닌 시절과 스탈린 시절에도, 조선에서도 사회주의 건설과 생산관리의 발전을 위해  전략적으로 고민하는 주제였다.

조선에서는 이것이 청산리 방법과 대안의 사업체계의 모색으로 나타났다.(이에 대해서는 《 DPRK의 경제건설과 경제관리체제의 진화(1949-2019)》, 박후건, 선인출판사)

사회주의에서도 시장을 부분적으로 활용하고 특히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와 교역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장과 사회주의는 궁극적으로 같이 갈 수 없다. 사회주의는 상품생산과 시장의 절멸을 향해 나아간다. 이 ‘신노선’은 사회주의 경제계획을 포기한 자본주의 시장노선에 대한 투항론에 다름 아니었다.

두 학파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극적인 교류를 시작한다. 미국 학자들의 소련 방문 연구, 미국 정부의 동유럽 학자 연수 프로그램, 국제회의의 개최 등을 통해 신고전파 경제학을 매개로 한 두 학파의 초국가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제2장)(같은 글)

이처럼 스탈린 사망이 사회주의 경제학에서도 새로운 사조를 가져왔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스탈린 이후 이른바 경제적 ‘해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수입을 넘어서서 미제국주의 학자들이 직접 쏘련을 방문해 신고전파 이데올로기를 직접 전파하는가하면 미제국주의 정부가 동유럽 학자들에 대한 연수프로그램을 개최하고 국제회의를 통해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었다.

“두 학파의 초국가적인 교류”는 단지 국가 사이를 넘나드는 교류를 넘어 이념을 초월한 교류였다. 그런데 신고전파 사상은 실은 자기사상에 충실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수정주의는 독점자본주의 지배를 영속화 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반해 사회주의 수정주의 노선은 사회주의 강화가 아니라 부르주아 이념의 침투를 가속화 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이는 입증된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과 동맹”(같은 글)을 맺은 공산당은 사실상 사회주의 내부에 침투한 자본의 오열이었다.

1956년 제20차 쏘련공산당 대회와 1961년 22차 당대회는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을 명목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전위당 노선 대신 전인민당 노선과 전인민의 국가론으로 변모했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이행노선, 제국주의와의 굴욕적 타협노선인 평화공존 사상 같이 혁명적 맑스주의의 핵심 사상을 수정하였다.

이로써 일찍이 이러한 반스탈린 수정주의 노선을 걸었던 유고의 티토주의가 후르시초프 시대의 수정주의 노선과 만나게 되었다. 이른바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노선의 ‘해빙’이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격하 운동과 수정주의 노선 도입은 중쏘분쟁을 야기하고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격렬한 분쟁을 낳으면서 국제주의적 단결을 심각하게 해쳤다.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손을 내밀던 수정주의자들이 정작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는 칼을 내민 것이다.

경제 ‘해빙’은 중앙 집중계획을 약화시키면서 분권화와 자치라는 지방주의, 분권주의를 강화시켰다. 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대신 시장을 강화시키면서 지하경제과 국유산업이 아닌 개인 기업 중심의 2차 산업을 확산시켰다.

유고에서는 이 시장사회주의가 민족별, 지역별 이기주의와 대립을 조장하면서 민족적 갈등을 유발하고 급기야 1980년대에는 외채문제, 인플레이션, 실업 등 자본주의적 모순이 폭발하게 만들었다. 유고에서 주창하는 시장사회주의에서의 자치와 자주관리, 경제민주화는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기업의 작동원리에 사회주의라는 포장을 씌운 것에 불과했다.

중공업 우선정책의 약화는 확대재생산의 원천이자 소비재 산업발전의 견인차인 중공업 발전을 약화시키고 사회주의 경제의 안정적, 균형적 발전에 타격을 줬다. 흐루시초프 수정주의자들은 ‘개인숭배’ 비판을 명목으로 하는 중공업 우선 정책 폐기를 조선에도 강요하는 것을 넘어서 수정주의 추종세력들을 배후조종하여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956년 ‘8월 종파사건’이다.

부르주아 신고전파와의 직접적 교류는 경제적,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문화 침투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때부터 반스탈린을 내세운 반공주의 문학, 영화 등도 판을 치게 되었다.

1962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출간되자 제국주의 진영에서는 환호하며 1970년 솔제니친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단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스탈린시대의 계획경제를 지령경제, 명령경제, 관료경제로 비난하고 민주적 계획, 분산적 계획, 자치 등 수정주의 경제노선을 지지한다. 신고전파와 결합한 반사회주의 노선을 사실상 지지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신고전파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왜곡·변질된 것이 아니다. 신고전파는 사회주의 내 수정주의 내응자들의 안내를 받고 트로이 목마가 되어 사회주의권을 해체시키는 부르주아 착취사상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안에 사회주의의 피가 흐른 게 아니라 사회주의 안에 신자유주의의 피가 흘렀던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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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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