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3 제주민중항쟁 72주년 – 이제 정말 분단적폐를 청산할 때다

이용주(학원강사)

“제주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이승만/당시 대통령)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라.”(조병옥/당시 경찰청장)

“제주도의 전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신성모/당시 국방부 장관)

차마 어떤 수식으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이 잔혹무도하기 짝이 없는 당시 권력자들의 발언은, 미군정과 이 땅의 반동세력이 한반도 남단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내건 ‘레드헌트’구호의 발현이다. 소위 이 레드헌트의 실험장으로 선정된 곳이 다름 아닌 제주도였다. 이곳은 분단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고통이 한반도 남단의 어느 지역보다 절절했고, 그로 인해 민중들의 의식이 진보적이었고,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발생한 4 · 3 제주민중항쟁은 미군정의 학정과 그것의 영속화를 의미하는 단선단정의 추진이라는 상황 속에서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 감행되었다. 즉, 학정의 노예로 굴러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인가 하는 극히 좁은 선택지 중에서 남달리 의지가 굳은 제주 민중은 기꺼이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제주도 민중이 자신의 처지에 심각한 불만을 느끼게 된 것은 쌀 공출 등으로 인해 생긴 생존권적 요구와 함께, 정치적 권리마저 빼앗겼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열정을 불태웠다. 9월 15일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작으로 각 지방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거기에서 선출된 대표위원이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해방된 조국의 지방자치기관을 자기 손으로 만든 제주 민중은 스스로 치안을 유지하고 옛 일본인 재산을 접수함과 동시에 일본군에게서 몰수한 군량미를 빈민에게 무상분배하는 등 애국적 시책을 폈다. 이렇듯,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후 제주도 전역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정부로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의 실시, 도민 생존권과 치안의 확보를 위한 일제 잔류군과의 투쟁 등으로 도민의 적극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 무렵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미국은 즉각 민중이 그때까지 이룩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성취물을 도로 빼앗아 가는 일에 돌입하였다. 미국은 점령 초기에 일본인의 사유재산권까지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려다 민중의 반발에 직면하자, 여러 가지 법령들을 내세워 모든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체의 권리행사를 금지시키고,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체의 소유, 지배권이 미군정청에 귀속된다고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 이후 귀속 재산의 접수, 관리, 처리 과정은 민중들의 저항을 총칼로써 분쇄하고, 식민지 시대에 기득권을 행사했던 민족반역자와 친미적 인사에게 반민주적인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실현되었고 이는 결국 미국 독점자본의 이익과 직결되었다.

이로 인해 제주도의 경제 사정은 1946년에 들어서 더 심각해졌다. 위에서 약술했듯, 제주도의 경제 상황은 대일교육의 불법화 및 도 승격, 그리고 여기에 따른 모든 무역통상형태의 붕괴와 북으로부터의 원료 공급의 두절에 의한 공업 및 농업 생산고의 감소 등의 문제에 의해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이 결과 도민들은 칡뿌리와 해산물, 톳과 보릿겨를 섞어 만든 이른바 ‘톳밥, 돼지사료인 전분찌꺼기 등으로 연명해 나가야 했다. 이러한 때 미군정의 공출, 즉 곡물 수집 강행은 도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6년 중반에 이르러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였는데, 이때 제주에서는 36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제주도의 제주농중, 오현중, 제주중 교양과정 학생들 천 수백 명은 1947년 2월 10일 읍내 관덕정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양과자부터 막자” 는 슬로건을 내걸고 양과자를 절대 배격하자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 중대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3,400명의 학생들은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공항 활주로에 불을 붙이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결국 미군정 중대에 의해 시위는 통제되었지만, 이후에도 양과자 반대운동은 제주도 전역의 학생들에게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1947년 3월 1일, 역사적인 3 · 1 만세항쟁의 정신을 받들어 제주 민중은 분단된 조국의 해방과 완전한 통일독립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은 극에 달했고, 그로 인해 가두시위 도중 초등학생인 어린이가 경관이 탄 말에 채어 소란이 발생하고 군중들이 주위로 몰려든다. 당시 사망자 한명을 제외하곤 모두 등 뒤에 총탄을 맞았다고 하였다. 명백히 불필요한 과잉 진압이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으며,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이 제주로 몰려와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고문하였다.

이런 탄압은 1948년에 접어들어 더욱 잔혹성을 띠었다. 유엔 조선감시위원단의 입국 및 단선단정을 반대하기 위해 궐기한 2 · 7 구국투쟁의 일환으로, 2월 중순 광범위한 제주 민중은 안덕면의 모래벌판에서 단독선거 반대 집회를 가졌다. 그때 테러집단이 경찰과 합세하여 공격해 왔고, 분노에 휩싸인 민중들은 돌멩이와 몽둥이로 맞섰고 붙잡힌 경찰지서장을 무장해제한 후 인민재판에 부쳤다.

이 투쟁 직후 조천면 일대에는 경찰에 의한 집중적인 탄압이 가해지면서 다수 주민이 체포되었다. 압제자들은 남녀 구분 없이 감방에 섞어놓고, 부녀자가 보는 앞에서 남자를 발가벗겨 생식기를 흔들어 돌리게 하는 등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으며, 잔혹한 고문으로써 청년의 생명을 빼앗기까지 했다.

이런 가공한 탄압에 직면한 제주 민중은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 무장봉기의 깃발을 올렸다. 행정의 말단기구까지 유격대 조직이 만들어지고 민중의 자위적 투쟁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대응해 압제자들도 예전에 없던 규모로 경계망을 넓히고 ‘주모자 소탕’ 작전을 집요하게 펼침으로써 쌍방의 힘에 의한 대결은 점점 더 불가피한 것으로 되었다.

5 · 10 단독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은 쌀 배급표를 무기삼아 선거인 등록을 강요했으며 거리에서는 백주대낮에 살상테러가 빈번히 벌어졌다. 당시 ‘한국여론협회’의 여론조사에 따르더라도 91% 가량의 주민이 이런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등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거 당일인 5월 10일에는 미 해군함정이 한반도 남쪽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면서 협박성 무력시위를 진행했다. 비상계엄령까지 발효된 상황 속에서 미공군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하늘을 날고, 거리거리마다 헌병들이 순찰을 다녔으며, 뒷골목 입구에까지 무장경찰이 상주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치러진 5 · 10 단독선거를 어느 누가 정상적인 선거행사로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천인공노할 음모에 맞서 제주 민중이 궐기했다. 좌익세력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제주 민중을 무참히 학살하도록 배후조종한 미군정 및 이승만 세력과, 분단을 강요하고 한반도 남단을 저들의 잉여상품을 팔아치우는 시장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깨려는 제주 민중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강이 만들어진 것이다.

드디어 역사적인 4월3일, 350명의 유격대가 제주도 12곳의 경찰지서를 공격하는 것을 시발로 4 · 3 제주민중항쟁은 그 막을 올렸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투쟁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한 후 통행증제를 실시하고, 4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으며,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타 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경비대가 폭동 발생의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을 계속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익렬의 거부로 초토화 작전의 시행이 불가능해지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이리하여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미군정장관의 거부로 즉각 파기되었다.

5월 1일 오전 12시경 제주읍 외곽 오라리가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 명에 의해 기습당해 12채의 민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평화협상을 깨려는 미군정의 비밀지시로 5월1일 우익 청년단체가 제주읍 오라리를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미군정은 이를 유격대의 소행으로 돌리며 경비대로 하여금 유격대를 공격하게끔 한 데에 따른 것이다.

이후 8월15일, 미국의 하청권력으로서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소위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에 따라 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실제적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미군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미국이 4 · 3 항쟁에 대해 명백히 사냥 대상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보고서에서 한국군, 경찰 및 우익단체의 토벌을 ‘레드헌트’로 명명하고 있다.

이 가공할 만행에 대응해 ‘인민유격대’는 5 · 10 선거가 다가오자 그것을 파탄시키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공세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관련 인사들이 살해되었고, 각종 시설이 습격당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함께 도민들도 5 · 10 선거를 거부하거나 선거 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선거일이 되자 더욱 강화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 · 10 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었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 · 10 단선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이 영웅적 투쟁에 놀란 이승만 세력과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여남은 유격대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론을 고수하던 유재흥 부대는 곧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1949년 3월 12일부터 4월 12일 간의 한 달 동안 2,345명의 ‘유격대’를 죽이거나 다치게 만들었고 1,608명의 민간인을 잔혹하게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즉, 유재흥 부대는 ‘선무’라는 탈의 뒷면에 도민 대학살이라는 본 모습을 감췄던 것이다.

11월 13일, 애월면의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25명이, 다른 한 마을에서는 50~60명이 학살되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11월 17일 이승만이 법적 근거가 불확실한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대학살이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부터 노인네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 곳곳에서 마을이 불탔고, 한 마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2000년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출범한 제주 4 · 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 · 3사건위원회)에 신고된 것만 보더라도, 100명 이상이 희생된 마을이 무려 45곳이고, 제주읍 노형, 조천면 북촌, 표선면 가시마을은 4백여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찔러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바다에 수장했다. 심지어는 산에 올라갔다고 하여 아내나 부모 형제 자식들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도 자주 일어났다. 인간의 잔인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주민집단학살이 여러 달 동안 계속된 것에는 고립된 섬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10월에 해안만 봉쇄된 것이 아니었다. 제주 지역 언론사 편집국장 등 언론인들이 총살되고 체포되었다. 그와 함께 언론이 통제되었다.

여순봉기는 세계 곳곳에 뉴스를 타고 알려졌는데, 제주도에서의 학살은 육지 사람들조차 알기가 어려웠다. 이런 가공할 탄압의 결과로, 유격대는 거의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동 종식’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되었고,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었으며, 대부분의 군경이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제주도 유격대는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남한 지역의 모든 유격대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정전과 동시에 파란만장했던 항쟁의 대열은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다.

이렇듯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근본적인 맥락에서 볼 때 제주항쟁에서 여순봉기로, 입산유격투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봉기는 민중이 처한 당시 현실에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일어났고, 봉기에 참여한 무장세력이 대거 유격대로 전환함으로써 본격적인 유격전의 막을 올리는 결정적 계기로 되었으며, 이에 따라 무장항쟁의 전진속도는 당시 남로당 등이 기록했던 것보다 상당히 빨라지게 되었다. 이런 양상은 지역적 무장봉기의 발생이라는 새로운 정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상당 부분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유격전은 반복적인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 이승만 정부를 정치적으로 패퇴시킴으로써 승리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으며, 세월이 문제였을 따름이지 민주화 투쟁, 통일운동, 반미운동의 성과로 그 진실이 계속 밝혀지고 있고, 위대한 민중항쟁으로 그 성격규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위대한 제주민중항쟁 발발 72주년을 맞아,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한반도 남단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 및 기무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지는 변혁의 과정을 달성하고 이 토대 위에 북 사회주의와의 연방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노자 간의 계급적 대립이 분단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조건에서, 통일운동 진영만의 구호처럼 되어 있는 ‘우리민족끼리’는 그 자체로 계급적이고 변혁적인 요구이다. 왜? 이는 본지에서 상술한 제주민중항쟁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고비마다 민중의 정치적 진출을 억누르고자 군부쿠데타를 배후조종하고 광주 등에서의 학살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자주적 통일의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는 이 땅의 실질 지배자, 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 투쟁이 성공하는 결정적인 열쇠를 노동자 민중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 내의 각종 오류와 혼란을 하루빨리 극복하고,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의 넋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변혁의 기치를 움켜쥐고 나아가자. 4 · 3 제주민중항쟁 72주년, 이제 정말 분단적폐를 청산할 때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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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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