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저작읽기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 혁명적 정치활동의 정수는 무엇인가

세미나 안내
일시: 2020년 3월 16일 19시 30분(격주 월요일 진행)
장소: 남영동 사무실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 93-45 4층(남영역이나 숙대입구역 인근)
문의: 010 3398 0248

우리는 이번에 맑스주의 저작 중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제국주의론》, 《국가와 혁명》과 함께 레닌의 3대 주요 저작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저작입니다.
레닌의 이 저작은 레닌이 당시 존경했던 러시아의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체르니셰프스키의 동명 소설과 같은 제목이기도 합니다.
레닌의 이 저작은 약어로 왓(What)으로 불리기도 했고, 1980년대에 전위정당 건설과 관련해 전정신(전국적 정치신문)을 수단으로 하자는 주장으로도 빈번하게 인용됐습니다.
레닌의《무엇을 할 것인가?》는 철저하게 논쟁의 산물입니다. 그러다보니 신랄합니다.
청년 레닌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신랄함, 날카로움, 맑스주의 사상에 대한 투철한 옹호정신이 글 전반에 걸쳐 펄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 맑스주의 위기가 우리사회에 팽배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레닌 당시에도 맑스주의 위기 운운하며 ‘비판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에 의해 “점증하는 빈곤, 프롤레타리아트화,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 등의 사실은 부정되었다. ‘궁극목표’라는 개념 자체는 파산선고당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사상은 말할 것도 없이 반박당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원칙적 대립은 부정되었다. 계급 투쟁 이론은 다수의 의지에 의해 통치되는 엄격한 민주주의 사회에는 마치 적용될 수 없는 것인 양 부정되었다”라고 레닌은 주장합니다.
레닌의 이러한 주장은 베른슈타인주의로 대변되는 개량주의가 팽배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진보진영과 이를 어설프게 모방하는 러시아 진보진영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에도 말할 나위없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들 개량주의자들은 사회주의라는 궁극목표를 부정하고 사회적 대화 운운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 이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큰 목소리를 냅니다. 이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건 두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그런데 이들 개량주의자들이 부정하고 싶어도 “점증하는 빈곤, 프롤레타리아트화,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라는 현상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은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신문 기사 제목처럼 일터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비통한 현실입니다.

가난에 시달리다 절망에 빠진 일가족들의 동반자살 소식과 청년들의 고시원 자살과 실업, 빈고, 병고, 고독고에 시달리는 노년의 참상도 매일 같이 우리주변에 벌어지고 있고 이들 대다수는 언론에서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계급과 무관한 코로나 같은 전염병의 창궐에서조차도, 종교생활의 특수성을 예외로 하면, 가난한 사람들, 노약자, 빈곤한 마을, 집중된 공간에서 일을 강요당하는 노동자들, 집단 감금된 정신장애인들한테 더 만연하고 코로나로 인한 생활상의 참상과 고통도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등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참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고 심지어 날로 더 깊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모순의 합당한 표현인 계급투쟁, 계급적대를 부정하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정치적 목표를 부정한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미래를 부정함으로써 현실에 체념하거나 안주하게 하는 현 지배적 인식에 종속된 적들의 사상과 인식에 불과합니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에서 팽배한 경제주의자들을 주요 비판대상으로 이 글을 씁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맑스주의 이론을 경시하고 맑스주의 총체성이 아니라 협소한 관점으로 노동자주의, 현장주의자들 등이 존재하는데 러시아에서도 경제주의자들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전국적 정치활동이 부정되고 당건설이 지체됩니다.
레닌은 먼저 이론을 경시하는 이들이 “사상의 경직화 등등에 반대하는 목청 높은 문구들이 이론적 사상 발전과 관련된 무기력과 무사태평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며 “범유럽적인 현상, 즉 특히 저 악명높은 비판의 자유란, 한 이론을 다른 이론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전일적이고 깊이 있는 이론 일체로부터 벗어날 자유이며, 절충주의와 무원칙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특히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를 보면 당시 ‘범유럽적 상황’이라는 것이 동시에 21세기 ‘범한국적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 ‘불의 시대’라는 짧은 혁명적 시대를 마감하고 청산주의 시대가 도래한 한국적 상황이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혁명적 이론없이 혁명적 실천도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문장, “실천 활동의 가장 협소한 형태에 매몰되는 것이 기회주의의 최신 유행 설교와 얼싸안고 있는 시기”라고 하는데 이 또한 맑스주의 사상 학습을 게을리하고, 아니 맑스주의 사상 자체를 낡은 것으로 부정하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한국사회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레닌은 자생성에 매몰되어 정치투쟁에 기권하고 협소한 시야에 사로잡힌 경제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며 혁명적 활동의 요체를 제시합니다.

“노동자들이 전횡과 탄압, 권력 남용이 행해지고 있는 – 그것이 어느 계급에 관계된 것이든 – 각종의 모든 사례들에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관점에서가 아닌 바로 사회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이 될 수 없다. 노동자들이 구체적인, 게다가 항상 절박한(당면한) 정치적 사건과 사례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에 걸쳐 그것들 각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해 유물론적 분석과 유물론적 평가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될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의  주의, 관찰력, 의식을 배타적으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우선적으로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리려는 자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자기 인식은 이론적 지식만이 아니라, 아니 더 올바르게 말하자면 이론적 지식 보다는 정치 생활의 경험에서 생겨난,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노동자가 사회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주, 성직자, 고급 관리, 농민, 학생, 부랑인 등의 경제적 본질과 그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각 계급 및 계층이 자신들의 이기적 의도와 본 ‘마음’을 은폐할 때 흔히 사용하는 문구와 갖가지 궤변들을 분석해야만 한다. 또한 어떤 제도와 법률들이 누구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는지, 또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분석해야만 한다 … 이러한 전면적 정치 폭로는 그 자체로 대중의 혁명적 활동성을 고양하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민에 대한 경찰의 야수 같은 대우, 이교도 사냥, 농민에 대한 구타, 추악한 검열, 병사들에 대한 학대, 이제 막 시작된 가장 순수한 문화 사업에까지 가해지는 탄압 등등에 대해 왜 러시아 노동자는 아직까지 별다른 혁명적 활동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가?”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과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을 인식하고, “정치 생활의 경험에서 생겨난,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를 해야 한다는 레닌의 명제를 어찌 정치적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말로 축소시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광대하고 웅장한 주장이지 않습니까?
레닌은 왜 이 같은 명제를 제시했을까요?
레닌은 노동자 계급이 정치 생활을 통해 총체적 인식을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레닌은 노동자들이 이 사회에 맞서 투쟁하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을 넘어 새로운 진보적 사회의 전망을 제시하고 또 실제 운영하는 중심 계급이어야 한다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현대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생산물을 만드는 것으로 이미 주요 계급이지만 이것만으로 새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실제 진보적으로 운영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레닌의 이 명제에 비해 오늘날 우리 운동의 현실은 얼마나 협소하고 초라하기까지 합니까?
이래서는 저들 부르주아 계급과 그 주구들이 아무리 타락하고 추악하고 파렴치하다손 치더라도 새 사회를 건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레닌의 저작을 통해 “혁명적 이론없이 혁명적 실천도 없다”는 명제의 정수를 실감하는 기회를 가지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21세기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같이 모색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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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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