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국제공산당이 주는 교훈 오늘날 노동자들은 코민테른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1 (하르팔 브라르 Harpal Brar)

하르팔 브라르(Harpal Brar)

2019년 10월 27일

맑스-레닌주의 영국공산당(CPGB-ML)

번역: 김규상(캐나다 교포)

* 이 글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맑스레닌주의적 혁명적 전통에 대한 극심한 편견과 왜곡, 심지어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는 그리스공산당(KKE)조차도 분파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편견과 왜곡에 동참하고, 이를 무분별하게 번역 소개하는 상황에서 국제공산당의 혁명적 전통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글이다. 분량상 우리는 두 번에 걸쳐 나눠 실을 것이다.(편집자 주)

2019년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창당 100주년을 맞아, 2005년 <벨기에국제공산당세미나>에서 발표된 연설문을 다시 쓰기로 했으나, 영어로 된 사본을 찾을 수 없었고, 원본을 게재한 <벨기에노동자당> 웹페이지도 삭제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프롤레타리아연합> 소속 동지가 동료회원 중 한 명이 번역한 연설문을 브라르 동지에게 보내주었다. 너무 기뻐 영어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들 또한, 아이티 동지들의 웹싸이트에서 발견한 프랑스어본을 번역한 연설문이었을 뿐, 영어원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스페인어를 영어로 재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들 상당수가 정확히 애초 쓰인 대로가 아닐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원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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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국제공산당의 경험, 그리고 그것이 가진 지금 우리 투쟁과의 관련성에 대해 발언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또한, 국제공산당과 제1, 2차 국제당 간의 차이점들에 대해 언급하라는 요청도 받았습니다.

그러한 방대한 주제를 짧은 연설에서 제대로 담아내기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전 이 자리에서 이들 세 조직들의 주요 특징과 그 성과를 간략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들 세 국제당들은 지난 노동계급운동의 이론적, 조직적, 정치적 발전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고찰해야할 것입니다.

1913년 레닌은, 1848년 <공산당선언> 이 출판된 이후의 세계사를 세 기간으로 구분했습니다. “이후 세계사는 세 기간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1) 1848년 혁명부터 빠리꾜뮨까지, (2) 빠리꾜뮨부터 1905년 러시아혁명까지, (3) 1905년 러시아혁명 이후까지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레닌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맑스주의가 출현한 이후 이들 세계사의 위대한 기간들을 통하여 맑스주의는 매번 새롭게 확인되고 새로운 승리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사상으로서의 맑스주의는 향후 다가올 세계사 속에서 훨씬 더 큰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칼 맑스 사상의 역사적 운명>)

이런 날카로운 예측은 4년 후 명확히 확인됩니다. 10월혁명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1919년에 코민테른이 창설되었던 것입니다.

3(공산주의) 국제당

“제1 국제당은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투쟁의 기초를 닦았다.”

“제2 국제당은 수많은 나라에서 (혁명)운동이 광범위하고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위한 토양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제3 국제당은 제2 국제당의 성과물들을 거두었고, 당내 기회주의적, 사회배외주의적, 부르주아 및 쁘띠부르주아적 쓰레기들을 걷어냈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시행하는 것에 착수했다.” (<제3국제당과 그 역사적 위상>, 레닌, 1919년)

코민테른이 설립된 것은 1919년이었지만, 1914년 11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그 설립목적을 분명이 밝혔습니다.

“제2 국제당은 죽었고, 기회주의가 장악했다. 기회주의 타도! 기회주의를 숙청한… 제3 국제당 만세!” (<사회주의국제당의 지위와 임무>)

코민테른 제1차 전체회의에서는 혁명적 공산주의 원칙들을 분명히 수립하고,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의 시대이자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 시대에서의 맑스주의 이론을 강조했으며, 사회배외주의와 중도주의(centrism)와의 단절 필요성과,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차이점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코민테른 제2차 전체회의(1920년 7-8월)에서는 <국제공산당 가입을 위한 21개 조건들>을 채택했는데, 여기엔 개량주의, 사회평화주의 및 중도주의와의 단절, 의회그룹에 대한 엄격한 통제, 당출판물들을 당에 확실히 종속시킬 필요성, 대중조직 속에서의 끊임없는 활동,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 반혁명세력에 대항하는 모든 쏘비에트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 민주적 중앙집중제와 강철 같은 조직규율, 합법/비합법 사업의 결합, 군대 내에서의 선전선동, 농촌지역에서의 사업, 정기적인 회원 숙청작업, 국제공산당 결정사항들이 가진 의무적 성격에 대한 인정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제2 국제당과는 달리 코민테른은 전 세계 노동자들을 피부색이나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단결시키기 위한 일관된 목적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국제공산당은 사실상 백인들로만 구성돼있던 제2국제당의 전통과 영원히 단절한다. 국제공산당의 임무는 전 세계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 대오 안에서 백인, 황색인, 흑인들, 즉, 전 세계 노동자들은 형제자매처럼 단결되어있다.”

제2차 전체회의의 중요성은 기본헌장(constitution)과 조직 내 규율들을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분량의 주요 의제들에 대한 테제들을 정립했다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엔 의회주의, 조합주의, 농업문제, 민족문제 및 식민지문제 그리고 공산당의 역할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레닌의 제3 국제당 가입조건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 어떤 나라의 공산당에서도 그러하듯이, 국제당은 기회주의를 배격해야 했고, 국제당내 각 당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정치활동을 위해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기 위한 투쟁을 가차 없이 벌여야 했습니다.

1914년까지는 페이비언주의자들(Fabians, 역주: 페이비언주의는 1884년 시드니 웹, 버나드 쇼 등 저명한 지식인들 중심으로 구성된 영국의 페이비언협회가 주창한 이념으로 혁명적 수단이 아니라 의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자고 주장)이나 볼셰비키들 등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경향들이 같은 국제당의 일부가 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잘못된 경향이나 기회주의적 경향일지라도, 노동계급운동 안에서의 경향들로서 늘 대접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4년 세계대전부터는, 그리고 10월혁명 이후엔 더더욱, 이러한 경향들을 반대편 진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헨더슨(Henderson, 역주: 아서 핸더슨은 노조 관료 출신으로 영국 노동당의 지도적인 정치가이다)이 영국의회에서 전설적인 제임스 카놀리(James Connolly, 역주: 아일랜드 노동당 창당의 주역으로 1916년 4월 24~29일 더블린에서 영국 지배에 항거하는 대중투쟁과 부활절봉기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혁명가이다)의 처형에 갈채를 보내고, 샤이데만(Scheidemann, 역주: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가로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기도 했다)과 노스케(Noske, 역주: 독일사회민주당 정치가로 1919년-20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방장관을 지낼 때, 베를린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가 독일에서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를 살해하고, 러시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이, 10월혁명에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콜차크(Kolchak, 역주: 콜차크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 반혁명 분자들인 백군의 지도자로 “서방의 꼭두각시”로 불리며 제국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러시아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하다가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다)와 데니킨(Denikin, 역주: 1918년-20년 러시아 내전 당시 남부러시아 백군 사령관으로 반혁명을 지휘했다)의 백색방위대 편을 드는 마당에, 사회민주주의를 단지 노동계급운동 내의 잘못된 경향으로만 여기고 그들과 연합을 모색하는 것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일찍이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으로 전향하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적임을 스스럼없이 밝힌바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노동계급의 치명적 적으로 간주하고 맞서 싸워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반동적인 노선을 택한 대중조직들을 배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계급적 적이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절대 상대하지 말라거나 또는 타협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혁명적 당 내에서 그리고 혁명적 국제당 내에서의 극도로 혁명적인 순결성을 주장했던 레닌 자신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의를 이끌어 가는데 유용하거나 기여를 할 수 있다면, 반동분자와도 함께 일을 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다음은 1918년에 프랑스의 군주제옹호자들과 협약을 체결하는 문제에 관해 레닌이 한 말입니다.

“1918년 2월에 독일의 제국주의 날강도들이 방위력을 갖추지 못하고 무기력했던 러시아에 침략군을 보냈을 때, 국제적 혁명이 완전히 무르익기까지 러시아의 희망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국제연대뿐이었고, 이에 나는 프랑스 군주제옹호자들과 그 어떤 ‘협약’일지라도 체결하기를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행동으로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충복이었지만 말로라도 볼셰비키들을 동정했던 프랑스 육군대위 사둘(Sadoul)은 프랑스 장교 드 루베르삭(de Lubersac)을 내게 데려왔다. ‘난 군주제옹호자요. 나의 유일한 목적은 독일의 패배요’라고 드 루베르삭은 내게 선언했다. ‘당연하오…’라고 난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독일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철로를 폭파할 준비를 갖춘 프랑스의 폭약전문장교의 지원을 받기 위한 협약을 드 루베르삭과 체결하는 것을 절대로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계급의식이 깬 노동자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협약’의 예다. 우리는 양측 모두 상대방을 기꺼이 목매달아 죽일만한 사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프랑스 군주제옹호자와 악수를 했다. 그렇게 잠깐 동안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탐욕스런 독일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우리는 똑같이 탐욕스런 또 다른 제국주의자들의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이용했고, 그리하여 러시아혁명과 국제사회주의혁명의 이익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러시아와 그밖에 다른 나라들의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을 강화시키고 전 세계 부르주아계급을 약화시켰으며, 어떤 전쟁에서도 필요한 정당한 전법으로서, 방향을 선회하여 다수의 선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급속히 성숙하기를 기다리는, 당연하고도 타당한 기동전을 사용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제국주의 상어들의 분노에 찬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쏟아 부은 온갖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군대가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바로 그 똑같은 종류의 협약을 독일제국주의 강도들과 체결하기를 단 일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가장 진보적인 요소들로서만 구성된 국제적 조직과 함께 함으로써, 그리고 노동계급의 당과 함께 함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혁명을 위한 최고의 전략전술을 개발할 수 있는 공개토론장을 제공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능한 최고의 전략전술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당신이 실제로 그것들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있는 곳이면 그 어디라도 찾아가야하고, 투쟁에 조금이라도 실질적 보탬이 된다면, 마땅치 않은 세력들일지라도 연합함으로써 진보적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일상적 투쟁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조직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라기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공산당이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노동귀족과 교활한 노조지도부들에 대한 레닌의 강력한 경고가 있었던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반동적인 노동조합과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레닌이 말해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이란 책자에서 레닌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철저히 반박합니다.

“러시아보다 더 발전한 나라들에서 노동조합들 내의 반동적 성향은 러시아보다 훨씬 더 뚜렷이 나타난 바 있다…. 서구에서는… 직업별조합이나,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무자비하고 남의 것을 탐내는 쁘띠부르주아 ‘노동귀족들,’ 그리고 제국주의적 생각을 가진, 제국주의에 타락한 자들이,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세력으로 커나갔다….”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에 물든 구제불능의 노조지도자들을 전부다 완벽하게 낙인찍고 노동조합에서 몰아낼 때까지… 가차 없는 투쟁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일정정도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없으며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대중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대중의 이름을 걸고 ‘노동귀족들’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있고, 노동계급을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 기회주의 및 사회배외주의 지도부들과 투쟁하고 있다.”

“이렇게 가장 초보적이고 가장 자명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독일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 최고지도부의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에서 철수하고, 노조에서의 사업을 거부하고, 새롭고 인위적인 형태의 노동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봉사라고 할만한, 용서받지 못할 실책이다.”(제6장, 1920년)

통일전선 전술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여타 부르주아지의 하수인들이 퍼뜨린 소문과는 달리, 코민테른과 모든 공산당들은 공산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기회주의에 맞서 독자적으로 싸우면서도, 자본주의를 뒤집어엎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서 폭넓은 통일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제3차 전체회의(1921년) 기간 중에 코민테른은 모든 노동계급 조직들로 이루어진 통일전선을 구축하도록 하기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제2 국제당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경멸적인 태도로 거부했습니다.

1933년 독일에서 파시즘이 대두하기 이전까지도 이러한 노력들은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1914년에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도망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반혁명적 성향으로 돌아섰고, 이후 매시기 결정적 사태에 부딪힐 때마다 노동계급이 아닌 부르주아지의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코민테른, 특히 조제프 스딸린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여 분파적 노선을 걸었으며, 사회민주주의를 배척하고 독일파시즘이 승리하도록 도와줬다고 비난합니다.

그런 비난의 근거로 그들이 집요하게 인용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스딸린이 1924년 9월에 한 말, 즉, “사회민주주의는 객관적으로 볼 때 파시즘의 양면 중에 온건한 쪽을 대표한다”는 발언이고, 다른 하나는, 1929년 7월 국제공산당 최고위원회 제10차 전체회의의 평가서에 언급된 말, 즉, 몇몇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적 독재체제에 대항해 싸우는 대중활동을 마비시키는 도구로서, 부르주아지를 점점 더 이롭게 한 사회파시즘” 성향을 띠게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코민테른이 내린 이런 결론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점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인 브라운(Braun)과 세버링(Severing)이 집권한 독일정부가, 베를린에서의 노동계급의 역사적 노동절 시위를 금지시킨 것에 반발하여 시위를 진행한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았다는 사실이 말해줍니다.

영국 공산주의자 라자니 팜덧(Rajani Palme Dutt)이 한 말에 따르면, “약간의 어폐가 있고 비교 자체가 부적절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그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제1차세계대전중에 레닌이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의… 타락을 묘사하며 ‘사회적 배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명백한 목적을 가졌던 것에 견줄만하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는 “몇몇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 지도부 일부가 파시즘과 매우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례로서 헝가리, 벨기에, 핀란드 등의 사회민주주의 지도부들과 나찌와의 긴밀한 유대관계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렇게 쓰고 나서 팜덧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사회민주주의 극우파 중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들의 행동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파시즘세력과 더불어 전투적 노동계급에게 타격을 가하고 파시즘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을 무력화하는 등 부르주아계급의 도구인 듯이 행동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또, 늘 그래왔듯이,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치적인 실수였다.”

이런 식의 논쟁은 팜덧이 즐겨 써먹는 방법으로서,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 맞는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실수’라는 것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지식인이자 공산주의자로서 팜덧은 코민테른의 분석이 옳았다고 분명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흐루시초프 식의 수정주의로부터의 엄청난 압력을 받은 나머지 이에 굴복하여, 그런 올바른 성격규정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견해는 팜덧의 책 여러 곳에서 완전하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212쪽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의 … 기본 노선은 자본주의와의 협력, 파시즘 의회와 불법조직 용인, 전투적 노동계급을 방어하기 위한 조직에 대한 금지, 그리고 경찰력 등 주된 공격수단을 좌파에게 들이대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점점 커져가는 파시즘의 증오의 심각성이 확연해져갈 무렵인 “1932년 여름에서처럼, 파시즘의 공세를 막기 위해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를 모두 포함하는 노동계급의 통일전선을, 상층 지도부 및 하층 모두에서, 무조건적으로 옹호”했던 사람들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통일전선을 거부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였습니다.”

1932년 4월 세버링(Severing, 역주: 사회민주당 우익적 분파의 지도자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정치인) 은, “사회민주당은 히틀러의 나찌당원과 정부의 책임을 공유하기를 강력히 원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당 기관지 <전진>은 동일한 신문지면에 쓰기를, “나찌가 다수파가 되기 전에 권력을 잡도록 하락한 것은 정치적 선견지명이다”라고 했습니다.

오직 공산주의자들만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여 1932년 4월 28일 당 기관지 <붉은기>에 “우리는 히틀러가 정부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을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수파였던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자력으로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파시즘세력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제국주의자들과 협력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1923년 7월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은 국제공산당 확대최고위원회에 파시즘에 대해 보고하면서 말하기를, “역사적으로 볼 때 파시즘은, 러시아에 촉발된 혁명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서유럽 및 동유럽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내려진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1918년 11월 독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을 무장력으로 진압하며 지도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더 나아가, 혁명적 투쟁을 방해하기 위해, 그리고 나찌가 권력을 잡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던 통일전선을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좌절시키기 위해, 온갖 방해책동들을 다 늘어놨습니다.

흐루시쵸프식 수정주의의 영향과 압력을 받은 팜덧은, 일면 훌륭하다고도 볼 수 있는 <국제당노래>(The Internationale)란 자기 책에서, 코민테른과 스딸린을 분파주의라고 고발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헝가리 사회민주당은 1921년 12월 22일 러시아 백색반군들과 공식비밀조약을 체결하고 합법성을 얻는 대가로 반군들에게 헝가리의 협력과 지원을 약속했으며, 이후 비합법 공산당의 활동과 당원명부를 수록한 보고서를 경찰에 넘겨주는 하수인으로 일했다.”

“벨기에노동당 의장이었던 헨리 드만(Henri de Man)[그는1928년 논란이 됐던 ‘맑시즘을 넘어서’라는 연설에서 ‘사회주의 기초로서 계급이해 대신에 정의감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며, ‘맑시즘은 죽었다! 사회주의만세!’라고 주장했다]은, 독일의 벨기에 침략 후에, 나찌의 하수인이었음이 밝혀졌다. 1940년 그의 마지막 임무는 벨기에노동당을 해산하는 것이었다.”

“핀란드의 바조넨(Varjonen)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무장 형제단’(Brotherhood in Arms) 이라는 파시즘조직의 회원이었으며, ‘우랄산맥까지” 정복과 약탈 행진을 해야 한다고 설교하고, 여러 차례 독일에서 히틀러를 만났으며, 휴전 후에는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브라운-세버링 독일사회민주주주의정부는, 1932년 자기들의 공식문서에서, ‘우파보다 좌파들을 더 많이 죽게’했다고 자랑했다.” (1964년, 210쪽)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이라고 성격 규정하는 것은 전혀 틀리는 바가 없고, 노동계급운동 내의 기회주의적 요소를 몰아내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레닌이 생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말로만 사회주의자이며 행동으로는 제국주의 또는 배외주의자란 의미에서) 사회배외주의자 또는 사회제국주의자라고 불렀다면, 1920년대, 1930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일컬어 (말로만 사회주의자이며 행동으로는 파시스트란 의미에서) 사회파시스트라고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현실 속에서의 그들의 실체였던 바, 그들은 파시즘지배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팜덧은, 이 문제에 대한 국제공산당 최고위원회의 입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회민주당원들이 파시스트가 아니었다는 게 아니고, “그런 입장 때문에 공산주의의 적들에게 손쉬운 무기를 제공하여…, 적들이 수백만의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에 대해 고의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퍼뜨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민주당원들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을 해소하고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한 시점에, 오히려 그들을 궁지로 내몰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국제공산당 최고위원회는, 공산주의자가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을 만나면 그들 면전에 ‘사회파시스트’라고 소리 지르라는 식의 지침을 내린 적은 없습니다.
  • 일부 대중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부르주아 언론매체나 교육제도를 이용한 무자비한 선전전을 통해 부르주아 사상과 문화에 흠뻑 젖어있을 때, 처음엔 공산주의자들이 표현하는 진실도 충격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야만 대중들은 진실을 이해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고 보다 굳세게 자신들의 계급이익 추구하며 투쟁할 것입니다.
  • ‘계급에 대항하는 계급’이라는 ‘좌파적’ 구호를 잘못 내거는 오류를 범했다고 알려진 1928년의 동일한 전체회의 기간 중에 국제공산당은, 노동계급이 파시즘과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여 관심을 기울일 것, 그리고 그런 위험에 대항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직들로부터 노동자대중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노동계급이 주목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1924년의 동일한 연설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온건한 파시즘”이라고 규정했던 스딸린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반동적 노동조합 조직인) <암스테르담연합>의 규모는 1,400만 이상의 노동자 조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럽에서 이들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의 뜻에 반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독재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다. 그것은 레닌주의로부터의 일탈이고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혁명과 공산주의를 위해 수백만 노동자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고, 그들을 반동적 노동조합 관료주의의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아니면, 최소한, 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호의적인 중립의 태도를 취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코민테른의 노선과 스딸린 자신의 노선 모두는,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반혁명적 제국주의의 하수인을 낙인찍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의 영향 하에 있는 수백만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진영으로 끌어오는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노선이 올바른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올바른 노선으로 나찌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승리는 올바른 노선으로만 이루는 것이 아니라 힘의 균형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일부르주아계급의 힘과 사회민주당의 지원은 강력했고, 따라서 당시 독일공산당이 이끌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이들을 극복하는 것은 무리였음이 판명되었습니다. 독일공산당의 노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공산당에 대한 대중들의 신망이 해가 갈수록 커져갔다는 것입니다. 독일부르주아계급이 서둘러서 파시즘 지원에 온힘을 기울여야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급속도로 발전하던 혁명적 상황에 때문에 독일정부는 파시즘에 구원을 요청했고, 민주적 권력인 양 걸쳐 입던 모든 허울을 단번에 벗어던졌던 것입니다.

팜덧의 말을 빌리자면 파시즘은, “계급적 모순이 격화된 나라들에서 발생했던 바, 혁명적 상황이 잠재했지만 사회주의혁명을 승리로 이끌어낼 만큼까지는 혁명적 노동계급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곳에서, 사회민주주의 지도부들이 혁명을 가로막고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노동계급 대다수를 장악할 수 있었던 곳에서… 그리하여 그 결과, 신뢰를 잃은 자본주의체제가, 겉으로는 과격한 구호를 외치지만 실상은 배외주의자이거나 인종주의자였던 온갖 선전꾼 모리배들을 이용해먹을 수 있었던 곳에서 발생했다. 그런 모리배들은 사실상 대자본가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는데, 이들 자본가들은, 환멸감을 느끼고 실의에 빠진 중산층, 그리고, 노동자들 중에서 가장 후진적인 분파들을 주요 기반으로 해서, 반동적인 ‘대중운동’을 이끌어내려고 했고, 그리하여 조직화된 노동운동에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대자본가들 중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반동적인 분파들로 구성된 테러독재를 구축하는 길을 닦고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923년 7월의 국제공산당 확대최고위원회도 파시즘의 성격에 대해 유사한 사전분석을 했다. 즉, 파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이태리에서 처음 목격된 바, 그곳에서 부르주아계급은, 처음엔 개량주의적 사회민주당원들이 장악했던 공장들을 노동자들이 잇달아 장악하자, 그에 맞서 노동계급조직들에게 깡패 같은 공격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최고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점진적 해체와 부르주아국가의 분열상이자, 그 썩어가는 모습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파시즘의 가장 강력한 뿌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제국주의 전쟁과 그 전쟁이 격화시키기고 가속화시킨 자본주의경제의 혼란으로 인해, 중소부르주아계급의 대부분과 소농민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들이 품었던 희망과는 반대로, 자신들의 생활형편, 특히 이전에 누렸던 생활안정이 파괴되어간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들 사회계층의 다수는 개량주의적 사회주의가 급진적 사회개혁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결국 실망만을 안겨주었다. 개량주의적 당과 노동조합 간부들에 의한 혁명에 대한 배신이… 그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자체에 대해 절망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박약한 의지, 쏘비에트러시아 바깥의 프롤레타리아계급 절대다수가 용인함으로써 초래된 배반으로 빚어진 투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본주의적 채찍 하에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노예화하도록 한 지겨운 노역 등으로 인하여, 잠시나마 열광에 빠져있던 이들 중소부르주아계급과 지식인들은, 과감한 사회개혁을 강력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노동계급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실제 행동을 요구했지만 모든 정당들의 행태에 실망한 많은 프롤레타리아 세력들도 마찬가지 상태였다. 또한 파시즘은, 전쟁이 끝나고 직업을 잃은 군장교들 등… 모든 사회계층에서의 불만세력, 처지가 악화된 사람들, 그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구식 부르주아국가기구들은 부르주아계급들이 원하는 안정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항하는 특별한 계급투쟁 군대를 창설하기로 작정했고, 파시즘은 그런 군대를 제공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전체회의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간명한 정의를 내렸는데,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배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의 노골적인 테러독재”라고 했습니다.

코민테른도 독일공산당도, 이론적 분석을 통해서든 실제 활동으로든, 히틀러의 권력장악을 돕진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독일의 부르주아계급, 영국, 프랑스, 미국을 포함한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부르주아계급, 그리고 독일사회민주당의 협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심지어 1932년 11월의 선거 때까지만 해도 노동계급의 전체 투표수는 1,320만에 달했고, 나찌가 얻은 투표수는 1,170만 표에 불과했습니다. 그 전년도에 비해 나찌 표는 200만 이상 감소했습니다. 같은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표는 50만이 감소했으나, 이와 반대로 공산당 표는 50만이 늘었습니다.

나찌의 당선가능성이 떨어지고 공산당의 당선가능성이 오를 조짐이 보이자 독일부르주아계급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폴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은 나찌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구제해서 결국 권력을 차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태가 그러함에도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공산당의 거듭된 요청을 묵살했습니다. 공산당이 1932년 7월,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인 1933년 1월, 그리고 제국의회 방화사건(역주: 히틀러와 괴링이 파시즘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독일 의회 방화사건을 일으킨 뒤에 코민테른의 소행으로 몰아간 희대의 조작사건이다) 후인 1933년 3월 등 결정적인 시기마다 나찌즘에 대항하는 전국적 통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사회민주당과 노조연합 지도부에게 직접 제안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독일사회민주당 의장 오토 웰스(Otto Wels)는 제2 국제당이 히틀러를 모함하는 ‘악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최고위원회에서 사임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 노조 지도부는 나찌와 협력할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며 나찌 ‘혁명’이 1918년 혁명의 성공적 연장이며 공동의 적은 공산주의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웰스는 히틀러가 조직한 메이데이모임에 노동자들이 참여하도록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1933년 5월 17일에는 제국의회 내 사회민주당 전체가 (공산당 지도부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정부결정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고 만장일치 환호성으로 히틀러 찬양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나찌에 협력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커녕, 사회민주당원들은 나찌감옥이나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사회민주당원들이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고백한다지만, 그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나찌독일노동전선> 의장 로버트 레이(Dr Ley)는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10월혁명 20주년을 맞이하여 게오르기 디미뜨로프(Dimitrov, 역주: 불가리아 출신의 공산주의자로 국제공산당 지도자가 되었다.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유명한 반파쇼 인민전선을 제창했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파시즘 세력, 전쟁,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진영과 평화세력,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또다른 진영 사이의 역사적 분리선은, 쏘비에트연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그어졌다. 다만, 쏘비에트권력에 대한 형식적 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거 20년간 실제로 존재했던 쏘비에트연방에 대한 태도에 의해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독일사회민주당은 늘 제국주의의 충복이었고, 공산주의와 쏘비에트연방에 대한 끔찍한 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전쟁 중에 나찌독일이 쏘련을 침공할 당시 쏘련은 서방제국주의자들과 동맹관계였음에도, 독일사회민주당은 그들의 반공산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1941년 7월 최고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북극해에서 흑해에 걸친 전장에서 세계최강국들의 군대(나찌독일과 쏘련 군대) 간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신속한 승리를 거둔다면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서 무적강국이 될 것입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양측 모두 전력을 소진하는 경우라야, 미국식 민주주의의 힘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지배적인 요소로 전환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어 갈 무렵 노동계급의 혁명을 파괴하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반동세력을 지원하고,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항하여 주도적으로 공세를 취하는 등, 독일사회민주당이 노동계급을 무장해제 시키는 과정에서의 역할은 단지 독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국제적으로도 벌어진 바, 공산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사회민주당은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 젖혔습니다.

이런 일이 이태리와 프랑스에서도 발생했는데 더 많은 사례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프랑스에서는 188명의 사회주의자 의회 대의원들 중 110명이 마샬 필리페 페뗑(Marshall Philippe Pétain)에게 특별권한을 주게 하는 투표를 함으로써 파시즘 비시(Vichy) 정권이 수립되도록 했습니다.

팜덧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파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일어난 사회주의혁명의 후진성이 초래한 결과다. 당시의 객관적 조건상 결정적 해결책으로서 오직 사회주의혁명을 필요로 했지만….., 당시 노동계급운동은 강력하지도 충분히 준비되지도 못했고, 개량주의 때문에 분열되고 마비된 상태였으며, 그 결과 주도권을 자본주의 진영에서 장악하도록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파시즘은, 당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유산됐기 때문에 생겨난 잔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의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사회민주주의를 일컬어 ‘사회파시즘’이라 특징짓는 것이 맞는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공산당과 독일공산당은 파시즘 권력의 부상을 막기 위해 단일통일전선 노선을 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틀러 세력이 권력을 잡은 후 자신들에게 협조했던 사회민주주주의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자,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오랜 기간에 걸쳐 노동계급운동에 배신행위를 해온 것에도 불구하고, 1935년 여름에 있었던 국제공산당 제7차 전체회의에서는,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약간 누그러뜨리면서,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의 이해관계와의 일치점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 허사였습니다. 예전에 국제공산당 제6차 전체회의의 결정사항들에 대하여 분파주의라며 고발했던 중상모략가들은, 입장을 180도 바꿔, 파시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통일을 도모하는 코민테른더러 우경화되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사실 국제공산당은 창립 이후 줄곧 그런 통일을 추구해왔는데 말입니다.

노동계급의 통일을 추구하면서 국제공산당은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1935년 8월 코민테른 제7차 전체회의에서의 발표에서 디미뜨로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제공산당은, 모든 노동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필수적 조건으로서 단 한 가지 조건 외에는 그 어떤 행동통일에 관한 조건도 부과하지 않는다. 그 조건은, 파시즘에 반하는, 자본주의공세에 반대하는, 전쟁 위협에 반대하는, 계급적 적을 반대하는, 그런 행동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문제였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결코 자본에 반대하여, 계급의 적에 반대하여 투쟁할 뜻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종국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뒤집어엎기 위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오에 합류하기보다는, 차라리 파시즘 권력이 부상하는 것을 도왔던 것입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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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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