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꽃짐 -어느 여순동이의 입을 빌려 쉰 다섯해를 노래하다/쑥부쟁이에게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등(김해화 시인)
김해화 시인
아버지의 꽃짐 -어느 여순동이의 입을 빌려 쉰 다섯해를 노래하다
가을 모후산
쑥부쟁이에게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대성골 연가
아버지의 꽃짐 -어느 여순동이의 입을 빌려 쉰 다섯해를 노래하다
총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캄캄한 산으로 사라졌습니다
날이 밝자 사라진 이들의 눈빛을 닮은 사내들이 끌려가고
이름이 같은 이들이 불려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피투성이의 거리를 발 적시며 도망나온 처녀와
이름을 숨긴 사내가 만나 혼인을 하고 내 어미아비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낮과 밤의 주인이 바뀌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편이 갈리고
밤사람들을 따라간 아버지는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람의 이름을 배워 부르기 시작한 날부터
어머니는 입밖에 내어서는 안될 이름 하나 내 가슴에 묻어주셨습니다
잘나고 똑똑헌 사람들은 그때 다 산으로 갔지야
세상에 남은 잘난 놈은 암도 없그만
할머니는 밤마다 아랫목에 고봉밥 한 그릇 묻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설흔 다섯해였습니다
할머니의 상여에는 길고 긴 기다림이 함께 실려 나갔습니다
시월 마지막 날 할머니의 제삿날이면
고봉밥 한 그릇이 젯상에 더 올려졌습니다
사돈을 맺지 말라는 집에서 태어나
사랑한 여자 하나 없이 홀로 푸르러지다가
사돈을 맺지 말라는 집에서 태어나
사랑한 남자 하나 없이 홀로 꽃피어 있던 여자를 만나
어미아비가 되어 이제 내 나이 쉰이 넘고
억새꽃처럼 머리 희어졌습니다
해마다 시월이 오면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웅웅웅웅 울려오는 가슴앓이
그 이름을 지닌 사내의 자취를 찾아
바람처럼 반란의 산하를 떠돌았습니다
어머니는 일흔 넘어 스스로 눈을 닫아 세상을 보지 않은 채
선모초 꽃처럼 희디희게 여위어가십니다
또 아침이 오는군요
새벽에 길을 떠나 모후산을 오르다가 돌아보는 땅
밝아오는 세상을 짊어지려는 남도의 언덕들이
엎드려 쓰러진 사내들의 등을 닮았습니다
그 등허리마다 희고 붉고 노랗게 피어오른 가을꽃들
왜 죽창이 아니라 꽃인가요 부르짖으려는데
가슴 속에서 날아오른 이름이 언덕에 핀 꽃잎에 가서 맺힙니다
그곳에 계셨군요 아버지
반란의 땅 남도의 언덕마다
아침을 향하여 지고가야할 세상을 꽃 피워 짊어지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당신이 버리고 간 증오가 내 가슴에만 남아 있었군요
당신이 다 풀어버리고 간 한이
내 삶에만 맺혀져 있었군요
풀어버리라고 풀어버리라고
산으로 오르는 내 발길 꽃피워 붙잡으시는 아버지
그래요
한 번도 입밖에 내어 부르지 못해
가슴 속에서 꽃씨가 되어버린 당신의 이름 세상에 날려보내고
이제 당신의 꽃짐을 받아 내가 집니다
한 목발 한 목발 아침세상을 향하여 짊어지고 가서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의 나뭇청에 부리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총칼을 겨누지 않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서로 아끼고 섬기는 세상
그런 아침세상을 이루겠습니다
-여순 55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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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모후산
쫓고 쫓기며 한 시대를 보낸 상처
총칼 맞은 대꼬챙이에 찍힌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에만 단풍 드는 산
다리 끌고 산 몬당 넘어간 사내
피 묻은 발자국처럼
모후산 단풍에서는
비린내가 나네
-여순추모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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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에게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와룡마을 스물넷 학선은 산으로 들어간 뒤 행방불명 되었다
강촌마을 열일곱 복순은 경찰에게 총 맞아 죽었다
복다리 사수꾸리 식구 다섯 명이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오산리 열다섯 연임은 산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운용리 이름 모를 열두 명은 진압경관에게 총살되었다
왕대마을 열세 살 만호는 진압경관의 총을 맞아 죽었다
신전리 네 살 삭심이는 어머니와 함께 토벌대에게 총 맞아 죽고 불태워졌다
육철 낫으로 아사리 밭 밀어붙여
길을 내고 굴바구골 석굴 앞에 가 봤드만
사람 흔적 없고 멀구만 주렁주렁 헙디다
아짐 잡수라고 따 왔소
멀라고 따 왔다냐
요런거시라도 따 묵고 살게 놔 두재
모구산 등성이로 길이 살아있습디다
사람이 댕갰능가 짐승이 댕갰능가는 몰라도
길 따라 더 깊고 높은디로 안 갔겄소
아즘찬케 그랬으먼 얼마나 좋겄냐
그가 아는 세상 모든 집집이 불길에 휩싸이고
그가 아는 세상 모든 길마다 총부리 겨누어지고
더는 달디 단 먹을거리가 되지 않는
때알나무 찔구나무 꾸지뽕나무들이 가시 돋아
그 사람을 산에 가둬버렸다네
산에 갇힌 사람은 山사람 되고
산에 숨지 못한 산 아래 사람들은 죽은 사람 되었지
돌 맞아 죽고 몽둥이 맞아 죽고
대꼬챙이 찔려 죽고 칼 찔려 죽고
미제 총 맞아 죽고 손가락 총 맞아 죽고
동네 사람들은 불에 타 죽어 재만 남은 동네
쑥부쟁이 피고 지고 예순 두 세월
아랫목에 고봉밥 묻어 두고 山사람 기다리던
할머니는 죽어 산으로 가고
서울로 가 소식 끊긴 왕발이 형
나는 더 이상 고봉밥 한 그릇의 기다림을 지니지 않지만
해마다 쑥부쟁이 꽃이 피면
그 사람의 산을 오르네
가을 모후산 어느 골짜기에 감겨있다 풀려 나오는지
머리 허연 할머니, 상머슴 왕발이 형 두런거리는 소리
길은 산 너머로 이어지고
아버지 보다 더 나이 먹은 나는
가슴이 메어 산을 넘을 수 없네
山사람은 산 사람 아닌가요?
그런께 쑥부쟁이 피대끼 살아계시기는 허는 것이재라?
바위 위에 주저앉아 환한 쑥부쟁이에게
나보다 더 어린 스물 네 살 아버지의 안부를 묻네
-여순 62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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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골 연가
시월 저물 즈음 아직 가을인줄 알고
대성골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은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이를 선녀라고 불렀습니다
그이는 나를 나뭇꾼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밤늦도록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불꽃과 함께 타오르던 시절 시월 한 밤
그러다가 시도 노래도 잉그락불도 가물가물
밤이 깊어서야 지리산 품에서 첫 잠이 들었습니다
꿈이라고 믿었습니다
텐트 곁을 지나가는 발걸음소리는 지친 행렬이 분명했습니다
인나지 마시오 살아남아야 씅께
일어나려고 애를 쓸때마다
귓가에 대고 누군가가 속삭였습니다
두런두런 수많은 말과 소리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날카롭게 내 안 어딘가에 새겨졌지만
그 말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말과 소리를 풀어내려고
남도 산하를 떠돌고 있습니다
갑자기 한 발 총소리 울리고
목 놓아 우는 사내의 울음소리
옆에서 자던 이가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벌써 사랑한다고 말해버렸으므로 부끄럽지 않은
그이 어깨를 다독이면서
꿈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인나보셔요 눈이어요 눈
일찍 일어난 그이 목소리가 환했습니다
밤새 내려 환하게 쌓인 눈 위로
환한 아침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 위에는 짐승 한 마리 지나간 발자국도 없어
안심하고 돌아본 산골
아직 지지않은 단풍잎은 핏빛
울긋불긋하던 산이 눈에 덮여가며 더 울긋불긋해져 가는 아침
그칠 줄 모르는 첫눈에 놀라 나는 산에서 나가자 하는데
눈 쌓인 산으로 깊이깊이 들어가자는 사람
산벚나무 흐드러진 꽃그늘 아래
나를 앉혀두고 내 손에 총 한 자루 쥐어주고
남꾼이 빈손으로 내려갑디다
묵을 것 구해서 꽃 지기 전에 꼭 돌아올거싱께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람시로
꽃잎 순식간에 함박눈 내리데끼 쏟아져불고
날 저물어도 남꾼은 안 돌아오고
갑자기 산 아래서 총소리가 들리는디 얼매나 놀랬는지
그런디 지금 우리가 이러케 눈부신 산을 나가게 생겼어요?
묵을 것도 잔뜩 있그만
앞이 안보이게 퍼붓는 폭설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대성골 등산로 더듬어 세석 가는 길
그 사람들 어디로 갔으까요 남꾼이 들려준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나보다도 더 어린 언니들
우리는 그이들 산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허는디
그이들 기다리락 허고 산 아래로 내려가서 돌아오지 않은 이들도 있겄재라
근디 나는 빨치산이라고 불르는 것보다
산사람이라고 불르는 것이 더 좋드라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산 사람
그렇습니다
사십년 지나 다시 찾아온 대성골
영원히 죽지 않고 산사람으로 살아계시는 전사들이시여
끝나지 않은 싸움
아무도 죽지 않고 패배하지 않은 민족해방의 싸움터 지리산에서
미제 75년 시월 열사흘
동지들의 정신과 무장을 우리가 받아 적들과 맞서 물러서지 않고
민족 자주 통일의 꽃 활짝 피워
동지들께 빛나는 승리의 기쁨을 바치리라는 맹세를 올립니다
-2019 통일애국열사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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