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속하기에 비속하게 보는, 반레닌주의 비평가들에 대하여 – 오발탄이 되어 버린 변혁재장전의 기회주의 재장전
(2015년 11월 27일)
변혁재장전에 실린 <레닌주의 논쟁 – 신화를 벗겨내고 남은 유산>(찰리 포스트(Charlie Post), 번역자: 김민재)이라는 번역 글은 레닌주의 신화를 벗겨낸다는 명목으로 레닌주의 사상 전체를 왜곡한 뒤, 레닌주의를 껍데기만 ‘남은 유산’으로 만들어 레닌을 속물 맑스주의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 사상의 정수와 실천 그리고 러시아 혁명을 심각하게 왜곡, 타락시키고 있다.
그런데 레닌주의 비속화(卑俗化)는 반(反)레닌주의의 비평가들이 가진 비속함에서 나온다. 이들은 레닌주의를 올바르게 정의할 기본적인 사상적 능력이 없을뿐더러, 운동의 사상적 통일과 실천적 발전 보다는 트로츠키주의자들 내부의 저열한 논란과 분산성과 분열주의, 개인주의, 무규율을 정당화하려는 협소한 분파주의, 기회주의적 의도로 이 논쟁을 하고 있다. 여기서 이 번역 글 전체를 다 인용할 수는 없지만, 이 번역 글은 문장 대부분이 모호한 말과 횡설수설과 레닌주의에 대한 기회주의적 왜곡과 날조로 가득 차 있다. 변혁재장전이 이 글을 번역 소개하면서 별다른 이견이나 비판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은 변혁재장전의 입장이라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로써 변혁재장전이 다시 장전하여 쏜 것은 변혁의 무기가 아니라 기회주의 오발탄으로 확인된 것이다.
파쇼 권력의 공세가 우리 사회를 동토로 만드는 엄중한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운동의 원칙을 견결하게 고수하고 과학적인 변혁 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 더욱 더 절실한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비속화1. 민주집중제 왜곡
이들이 레닌주의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보자!
《볼셰비키들은 하나의 권위있는 중앙 지도부가 모든 당 조직들의 입장과 활동을 결정하는 “민주집중제”를 개척했다.》(찰리 포스트, <레닌주의 논쟁 – 신화를 벗겨내고 남은 유산>, 인용자: 이후 인용문에서 따로 언급이 없으면 이 번역 글이다.)
이것이 레닌주의 조직노선의 정수인 민주집중제인가? 볼셰비키당에서 실현된 레닌주의 민주집중제 핵심은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다. 이는 다수파에 대한 소수파의 복종과 동시에 소수파에 대한 존중을 포함하고 있다. 통일된 입장을 결정하기 전에는 치열하고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러나 통일된 결론이 나오면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실천해야 한다. 소수파들은 통일된 실천을 하고 나서 그 실천 이후에 검증 속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다시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항상 옹호하는 조직 내 다른 강령을 가진 조직 내 조직으로서의 분파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은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2. 볼셰비끼가 성공한 근본적인 한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앙집중화와 가장 엄격한 규율이라는 것이 부르조아지에 대한 승리의 한 본질적 조건”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레닌은 이러한 강철 같은 규율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성에 의해서, 그리고 혁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 곧 전위의 끈기와 자기희생 및 영웅적 행동에 의해서이다.
둘째, 일차적으로는 가장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 뿐만 아니라 비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도 연결을 갖고 가장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그리고 당신들이 원한다면 어느 정도는 융합할 수 있는 전위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셋째, 이 전위가 발휘하는 정치 지도력의 올바름에 의해서, 곧 전위의 정치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에 의해서인바, 이것은 가장 광범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경험으로써 그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 이들 조건의 창출은 올바른 혁명이론에 의해 촉진되며, 역으로 이 혁명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대중적인,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과 밀접히 연관될 때에만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레닌의 이 주장을 요약하면, 철의 규율은 억압과 강요, 협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위 스스로의 투철한 계급적 자각과 자유의지가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중운동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속에서 지도력이 검증되고 인정받아야 하며, 실천 운동 속에서 대중적 힘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이는 올바른 혁명적 이론과 혁명적 기풍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스탈린은 민주집중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주장하는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취와 유지는 단결되고 강철 같은 규율이 있는 강력한 당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당내의 강철 같은 규율은 의지의 통일이 없이는, 모든 당원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행동 통일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물론 당내에서의 의견 투쟁의 가능성이 이 때문에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강철 같은 규율은 당내에서의 비판과 의견 투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한다. 더욱이 이것은 규율이 ‘맹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강철 같은 규율은 자각적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각적 규율만이 참으로 강철 같은 규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 투쟁이 끝나고 비판이 충분히 되고 결정이 채택된 후에는 모든 당원들의 의지의 통일과 행동 통일이 필수적 조건으로 되는데 그것이 없이는 통일적인 당도 당내의 강철 같은 규율도 생각할 수 없다.》(스탈린, <레닌주의의 기본에 대하여>)
이처럼 참된 규율은 위로부터의 강압과 맹목적 복종에서 나올 수 없다. 각성한 활동가들의 의지와 사상과 투쟁이 집결한 공동체인 당내에, 강력한 단결과 강철 같은 규율이 없다면 어떻게 거대한 물리적 폭력으로 무장한 지배계급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볼셰비키가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근본적인 한 조건’과 정반대로 이들은 분열과 분리, 일탈, 분산성과 무규율과 무정부주의, 사상적 빈곤과 타락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집중제를 “하나의 권위 있는 중앙 지도부가 모든 당 조직들의 입장과 활동을 결정하는” 것으로 비속화 시키고 레닌주의를 왜곡했다. 물론 이들은 ‘하나의 권위 있는 중앙 지도부’, 즉 당 중앙위원회가 권위를 가지게 되고 규율을 집행할 수 있기까지 혁명에 헌신하고 모범을 창출하고, 사상적 무장과 올바른 실천 등으로 참된 지도력을 획득하는 전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비속화2. 사상과 실천의 분리
이들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고, 그 근거로 혁명적으로 실천을 했지만 카우츠키 이론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며 심각하게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
《혁명가들에게, 이론과 실천의 균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회민주주의이다. 독일을 포함하여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950년대 초반까지 표면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충성을 유지했지만 그들의 실천은 이미 1차 대전 10년 전에 그들의 이론으로부터 벗어났다. ….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은 특히 1914년 이전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실천적으로는 혁명적 조직과 전략의 혁신가였지만, 그들의 이론은 칼 카우츠키로 가장 잘 대표되는, 사회민주주의의 “정통 맑스주의” 경향 주류 내부에 머물렀다. 21세기 혁명가들이 해야 할 일은 이 괴리를 인식하고, 역사적 발전의 관점에서 레닌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혁명적 실천에서 그들이 이룬 약진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과연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포함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950년대 초반까지 표면적으로라도 맑스주의 원칙을 견지했는가? 뒤에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인용하면서 상세하게 말하겠지만, 이미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는 엥겔스 사후에 혁명적 원칙을 상실한 베른슈타인주의가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 수정주의와 싸우던 카우츠키조차도 맑스주의 원칙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심각하게 동요했다. 1900년대 초에도 동요를 거듭했는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기회주의로 완전히 타락한 제2인터내셔널 시기는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러시아 혁명을 반대하는 지배계급의 편으로 완전히 넘어 갔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8년 말과 1919년 초에 노동자 혁명을 파괴하고 혁명 지도자들을 암살하는 반동적 행위를 저질렀다.
그런데 과연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맑스주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단순히 실천적으로 이론에서 벗어난 것인가?
카우츠키를 비롯한 각국 사민주의 정당들의 타락은 맑스의 혁명적 사상을 이탈하고 배신하면서 시작됐다. 특히 국가권력의 문제가 혁명의 근본원칙이라는 맑스주의 사상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내에서 점진적인 개혁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개량주의 사상이 이들의 타락의 원천이다. 이것이 결국 사회민주당들로 하여금 혁명을 회피하게 하고 의회주의로 치닫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제2 인터내셔널로 결집한 대다수 사민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는 노동자 계급의 국제주의 사상을 완전히 버리고 애국주의, 국가주의로 변모해서 자국 부르주아 국가의 편을 들었다. 여기에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카우츠키를 비판했던 것처럼, 제국주의가 단순히 농업지역을 병합하려는 의도로부터 비롯된다든가 독점 자본 간에 평화적 카르텔이 형성될 수 있다든가 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제국주의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카우츠키가 러시아 혁명에 대해 반대해 싸웠던 이론적 근거 중 하나는 무엇인가?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경제주의자들’이 자연발생성 이론에 굴복한 것처럼, 카우츠키를 비롯한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속류화된 ‘생산력’ 이론을 전개하며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신들이 범한 반노동자적 범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스탈린은 이들의 ‘생산력’ 이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전쟁을 내전으로”를 선언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그 당들은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걷어치우고 “조국 방어 전쟁”이라는 정반대의 구호를 실천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이 구호를 바꾼 결과 수백만의 노동자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거나 어느 누가 변절하였다거나 노동계급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다 당연히 일어날 대로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인터내셔널이 원래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이기 때문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 때에 존재하던 “생산력의 수준”에서는 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죄”는 “생산력”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카우츠키 씨의 “생산력 이론”이 “우리에게” 정확히 설명해 주는 바이다.》(스탈린, <레닌주의의 기본에 대하여>)
이처럼 스탈린이 인용한 기회주의자들의 생산력 이론은 1905년 러시아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는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가 주도해야 하고,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는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고 자본주의를 더 발전시키고 노동자당은 철저한 야당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기회주의를 낳았다. 이것이 멘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을 반대하고 반혁명 세력에 투항한 원인인데, 카우츠키와 제2인터내셔널 당들 역시 자본주의가 저발전한 국가에서 혁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러시아 혁명을 반대하고 반혁명 진영으로 투항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민주당들이 실천은 잘못됐으나 1950년대 초반까지 이론은 표면적으로 맑스주의를 유지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에서 출발하여 이들은 마침내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은 특히 1914년 이전 레닌과 볼셰비키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레닌주의와 볼셰비키의 역사를 날조한다.
레닌은 일찍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1년 가을 집필 시작 2년 1월 완료)에서 엥겔스의 주장을 인용하여, 경제투쟁, 정치투쟁과 더불어 이론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는 레닌의 유명한 말은 바로 이론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맑스의 주장을 왜곡하여 이론과 강령의 중요성을 왜곡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노동자의 대의』가 “현실 운동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한 다스의 강령들보다 중요하다”는 맑스의 금언을 의기양양하게 내세울 때 그것이 얼마나 박자를 못 맞추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론적 혼란의 시대에 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맑스의 이 말은 고타 강령에 관한 그의 편지에서 따온 것인데, 이 편지에서 그는 원칙을 정식화하는 데 절충주의가 허용되는 것을 신랄하게 질책하고 있다. 맑스는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연합의 필요성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면 운동의 실천적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 협약을 체결하되, 원칙을 거래하거나 이론적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고 쓰고 있다. 맑스의 생각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의 이름으로 이론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나라(한국)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는 맑스의 문구를 풍문으로 듣고 맑스 주장을 완전히 왜곡하면서 이론 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실천투쟁이라는 명목 뒤로 숨는다.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문장은 맑스주의 인식론의 본질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맑스는 포이어바흐가 관념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을 옹호했지만,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와 실천과 결합하여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고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소박한 인간학적 유물론에 머물러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맑스는 이론에 대비하여 실천의 중요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한 것이 아니라, 혁명적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론과 실천은 어떻게 통일되는가?
《이론이란 모든 나라의 노동 운동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다. 물론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용 없는 것으로 될 것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실천이 혁명적 이론으로써 자기의 길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떨어질 수 없는 연결 가운데서 이뤄진다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위대한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이, 오직 이론만이 확신과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주위의 사건들의 내적 연관에 대한 이해를 운동에 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론이, 오직 이론만이 실천으로 하여금 계급들이 현재 어떻게, 어디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계급들이 가까운 장래에 어떻게, 어디로 움직이게 되겠는가 하는 것도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스탈린, <레닌주의의 기본에 대하여>)
그런데 기회주의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볼셰비키의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결국 레닌주의 사상이 카우츠키주의 사상과 다를 바 없다고 극도로 왜곡, 폄하하고, 레닌과 볼셰비키를 비난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는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1914년 이전에 레닌이나 볼셰비키 당의 다른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조직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적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볼셰비키의 조직상의 실천은 전쟁 이전의 나머지 사회민주주의 조직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상의 혁신은 볼셰비즘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론화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레닌은 그저, 사회주의 정치와 조직 모두의 문제에서, 전쟁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에 대한 꽤 충실한 지지자였다.》
볼셰비키 당 조직론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사회민주당 2차 당대회에서의 당원 자격 논쟁, 그리고 이 논쟁을 이론적으로 평가, 정리한 <일보전진, 이보후퇴>(1904년 2월-5월에 집필, 5월 발간) 등으로부터 정립, 발전되었다. 특히 레닌은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자치주의, 무정부주의, 무규율주의 같은 이후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주의의 특징이 되는 소부르주아 당사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볼셰비키 당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 당시에 아직 혁명적 맑스주의자로 국제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카우츠키를 비롯해 로자 룩셈부르크도 초중앙집중주의, 자코뱅주의라며 레닌의 당사상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의 논쟁에서 멘셰비키 편을 들었다. 레닌은 여기에 맞서 논쟁을 하며 맑스주의 당 사상을 옹호, 발전시켰다. 저들은 1914년 이전에 레닌과 볼셰비키의 실천만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데 과연 민주집중제없이 올바른 실천을 할 수 있었겠는가?
레닌은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1905년 6월-7월 사이에 집필)에서 당강령과 전술을 더욱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그런데 과연 “1914년 이전에 레닌이나 볼셰비키 당의 다른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조직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적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증거는 거의 없”는가? 그리고 혁명적 이론 없이 “볼셰비키의 조직상의 실천은 전쟁 이전의 나머지 사회민주주의 조직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는가? 이러한 기회주의적 주장은 혁명적 사상 없이도, 혁명적 실천이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송두리째 폐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민주당들의 기회주의적 실천도 개량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상과는 괴리된 실천 때문인 것으로 왜곡하여 기회주의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레닌이 <일보전진 이보 후퇴>에서 수행한 기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현재 이들 기회주의자들에게도 적절하게 적용된다. 기회주의의 본성은 같기 때문이다.
《강령에서의 기회주의는 당연히 전술에서의 기회주의 및 조직에서의 기회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레닌, <일보전진 이보 후퇴>)
비속화 3. 분열과 무규율의 옹호
그런데 이들은 궁극적으로 왜, 무엇을 위해 레닌주의와 볼셰비키를 이토록 왜곡, 매도하는가?
《분명히, RSDLP는 1912년 이후에는 “모든 실질적인 목적들을 위해”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소수파인 대부분의 멘셰비키는 다수파의 지도력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레닌과 지지자들은 그들이 그저 “당대회 민주주의”(RSDLP 프라하 당대회의 민주적인 결정을 시행하는)를 방어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소수파는 생각이 다를 때 공개적으로 다수파에 반기를 드는 것까지 포함해서 자유롭게 당원 자격을 유지하고 계속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실천적으로는 RSDLP를 분리시켰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다수파로서의 권리 행사를 분리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당 이론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심지어 실천적으로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1917년 2월과 3월에 서로 계속 만나서 함께 행동하고자 했으며, 분열은 RSDLP의 기층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들은 당내 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다수파의 지도력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자유롭게 당원 자격을 유지하고 계속 참여할 수 있”는 느슨하고 규율 없는 당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 다를 때 공개적으로 다수파에 반기를 드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속에서 당적 결정이 나서 강력하고 통일된 실천이 이뤄져야 하는 시점에 “다수파에 반기를 드는” 행위라면 용납할 수 없는 규율위반이자 무정부주의다. 이는 당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러한 느슨하고 규율 없는 당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이와 관련한 “당이론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볼셰비키가 올바른 원칙을 가지고 통일을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과 멘셰비키와 무원칙하게 절충하려 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이들은 레닌이 2차 당대회를 전후로 하여 멘셰비키 등 기회주의와 싸우며 고도로 정치적 통일성을 발전시키고 조직적인 철의 규율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트로츠키가 1917년 볼셰비키당에 합류하기 전까지 멘셰비키에 가담하기도 하면서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였던 것처럼, 볼셰비키 당원칙을 강조하기 보다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자의 통합, 즉 무규율과 무원칙, 절충주의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레닌주의와 볼셰비키당 원칙을 왜곡하면서 이를 통해 1921년 전과 1923년 이후 당원칙이 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1921년 전에는 볼셰비키 당이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당이었는데, 1923년 이후에는 이와 달리 볼셰비키 당 내에서 당의 통일성과 철의 규율을 강조하면서 “활기찬 토론이 있었던” 당내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관료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위에서 소개한 바 있는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1920년 4-5월에 집필)에서 레닌이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근본적인 한 조건’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레닌이 이 글을 집필한 시기를 볼 때도 1921년 전에는 볼셰비키당이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당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조작인 것이다. 또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모두를 포함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21년 이전에 언제나 “민주적 집중주의”의 민주적 측면을 강조했다.》는 주장 역시 조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레닌주의”의 외피를 쓴 조직적 형태는 1924년 레닌의 죽음 이후에 발명된 것이다.》라는 이들의 주장도 순수하게 발명된 조작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당이 짜리즘을 분쇄하고 혁명을 성공시키고, 국제 제국주의의 무력 침략 전쟁과 반혁명분자들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겠는가?
볼셰비키화가 레닌 죽음 이후에 발명된 것이라면 레닌은 볼셰비키당의 창건자이자 조직가가 아니게 된다. 볼셰비키화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맑스주의 사상을 원칙으로 해서 짜리즘과 내부의 기회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면서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발전시킨 혁명 사상과 조직 원리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보전진 이보후퇴>,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등에서 보듯 레닌주의가 성립, 발전됐던 초기부터 볼셰비키화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리고 1905년 혁명 이후의 반동기에 소환주의, 청산주의라는 양 극단의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을 하였고, 철학적으로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년 출간)에서 마흐주의와의 투쟁으로 맑스주의 유물론을 발전시키면서 볼셰비키는 사상적으로 고양되고 실천적으로 단련됐다.
마침내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무규율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레닌주의를 설파하고 나섰다.
《레닌이 독창적이고 유용한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상당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레닌이 세 가지 핵심 이슈 — 개량주의(“기회주의”)의 뿌리,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전략, 그리고 제국주의-독점 자본주의 이론 — 에 대해 엄청난 이론적 약진을 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이 세 가지 이론들 중에 독창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리(인용자: 이 번역 글에서 주장의 근거로 주로 인용되는 <레닌 재발견: Lenin Rediscovered>의 저자인 라스 리를 말한다.)가 일관되게 주장했듯이, 레닌은 평생 동안 이론적으로 일관된 카우츠키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리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것도 아니다. 트로츠키는 1938년 카우츠키에 대한 부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의 코민테른 역사학이 마치 레닌이 거의 청년 시절부터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자로 간주했고 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던 것처럼 보여주려고 시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거짓입니다. 거의 세계대전 시점까지, 레닌은 카우츠키를 맑스와 엥겔스의 대의의 진정한 계승자로 여겼습니다.”》
레닌이 1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이론적으로 일관된 카우츠키주의자로 남아 있었다.”는 주장은 레닌주의에 대한 파렴치한 날조다. 레닌이 <맑스주의와 수정주의>(1908년 3월 후반과 4월 3일 사이에 집필), <제국주의론>(1916년 1월에서 6월까지 집필, 1917년 중반 출판), <국가와 혁명>(1917년 8월-9월 집필, 1918년 출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1918년 11월 집필)에서 카우츠키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맑스주의의 정치경제학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레닌의 이론이 독창적인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들은 이론의 ‘독창성’에 대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주워 담은 것이거나, 자고 일어나서 하루아침에 발명한 것이거나, 혹은 아무런 역사적, 이론적 토대 없이 진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레닌은 일찍이 맑스주의가 아담스미스, 리카아도 같은 고전파 정치경제학, 헤겔과 포이어바흐 같은 독일 고전 철학, 프랑스의 위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철학의 역사와 사회과학의 역사가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에는 폐쇄적이고 경직된 교의, 즉 세계문명의 큰 길에서 벗어나 발생했던 교의라는 의미에서의 ‘종파주의’(sectarianism)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와 반대로 마르크스의 천재성은 인류의 선두에 선 지성들이 이미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의 교의는 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사회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들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가르침의 연속으로서 출현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적 교의는 전지전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괄적이고 조화로운 것이며 어떤 형태의 미신이나 반동 또는 부르조아적 억압의 옹호와는 화해할 수 없는 총체적 세계관을 인간에게 부여해준다. 그것은 독일의 철학, 영국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에 의해 대변되는, 즉 인간이 19세기에 산출한 최상의 것에 대한 정당한 계승자이다.》(레닌,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요소>)
이들의 망상에 가까운 ‘독창적’ 주장대로라면, 맑스는 독창적인 주장을 하나도 하지 않은 표절의 대가며, 맑스주의는 표절로 완성된 짜깁기 절충주의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맑스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이기 때문에 맑스주의 사상의 본질에 대해 폭넓게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이 레닌이 청년 시절부터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자로 간주했다고 하면서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이 그렇게 주장한 출처를 인용문에서 밝히지 않아 그 정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카우츠키의 기회주의 사상과 실천의 본질과 원인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레닌은 그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카우츠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속류화한 사람으로보다는 기회주의자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베른슈타인(Bernstein)과 논쟁을 벌인 인물로 특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14년-15년 사이의 가장 위기에 처했던 시기에 카우츠키가 어떻게 사회배외주의를 옹호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잡하고 혼란스러운 판국에 빠뜨렸는가를 살펴보려할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그리고 실제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다. 즉 카우츠키가 프랑스 밀레랑(Millerand)과 조레스(Jaurés)와 독일(베른슈타인)의 가장 대표적인 기회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선명하게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기 바로 직전까지 그는 눈에 뻔히 보이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1901년에서부터 1902년까지의 슈트트가르트(Stuttgart)에서 간행되었고,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견해를 옹호했던 마르스주의 잡지 『여명』은 카우츠키와의 논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1900년 파리에서의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에서 그가 제시한, 즉 기회주의자들에 대해 내키지 않아 하며 제시한 회피하는 듯한 결의와 타협적인 태도를 ‘탄력성있는’(elastic) 자세라고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에서 간행된 카우츠키의 서한들을 읽어보면 베른슈타인에 대항하여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의 편에서는 그래도 역시 동요를 보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회주의자들과 벌인 그의 논쟁에서, 그 문제에 대한 정식화와 그것을 다루는 태도에서, 그리고 카우츠키가 최근에 행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배신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그가 국가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기회주의로의 체계적인 편향을 가지고 있음을 현재는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특히 중요하다.》(레닌, <국가와 혁명>)
기회주의자들의 공통의 특성이지만, 카우츠키의 최대의 오류는 국가문제에 대한 회피였다. 카우츠키는 맑스, 엥겔스가 1871년 파리꼬뮌의 경험을 평가하면서 밝힌 “기존 국가기구를 그대로 인수해서 사용할 수 없다.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핵심 원칙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교황에서 맑스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가 되었다.
물론 레닌은 카우츠키에 대해 1900년대 초기에 조직문제에 있어서의 오류를 인식했지만, 카우츠키 노선의 반동성에 대해 집중포화를 쏟아 부은 것은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전후해 카우츠키와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 배신이 대중적으로, 실천적으로 명확해진 다음이었다. 문제는 “현재는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트로츠키처럼 그 배신을 언제 알게 되었냐고 따지는 것보다, 맑스주의 교황이라 불릴 정도의 정통 맑스주의자였던 카우츠키가 언제, 어떻게 철저한 기회주의자로 타락했는지를 인식하고 이를 폭로, 타격하는 것이다.
“거의 세계대전 시점까지, 레닌은 카우츠키를 맑스와 엥겔스의 대의의 진정한 계승자로 여겼”다는 해석학적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1900년대 초부터 맑스주의의 원칙을 확고하게 옹호하지 못하고 동요하다가 이후 맑스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가 되었던 카우츠키주의의 사상적, 역사적 뿌리를 분석해 들어가서 기회주의를 분쇄하는 것이 실천적 교훈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들은 레닌의 이론이 ‘유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기회주의의 사상적 근원뿐만 아니라, 물질적 기원까지 폭로했다. 레닌은 수십억 노동자 민중에게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을 폭로하고 평화를 위해서는 제국주의 체제를 분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레닌은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과 착취, 수탈을 당하고 있었던 식민지·반식민지 민족들에게 해방의 영감과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레닌이 제시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노동자 농민의 동맹에 대한 사상, 민주주의 투쟁의 중요성에 대한 사상, 민주주의 혁명과 새로운 단계에서의 중단 없는 혁명 사상, 당의 전략 및 전술, 쏘비에트 사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 등은 전 세계 혁명세력들에게 ‘유용’한 것을 훨씬 넘어 진리의 등불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심지어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조차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고, “레닌은 독점체들, 금융자본과 세계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1902년 카우츠키의 주장을 분명 반복”했으며, “레닌의 <제국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완전히 독창적일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하다. 레닌은 <자본론>은 물론이고, 힐퍼딩의 <금융자본>과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홉슨의 제국주의 관련 저작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인 동시에 ‘초제국주의론’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항구적인 평화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으로 위무하려는 극히 반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카우츠키와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폭로이기도 하다. 독점체들과 독점체를 대변하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불균등한 발전과 식민지 재분할 갈등으로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촉발되어 제국주의 전쟁이 촉발되었다는 레닌의 주장과 “일국적 금융자본의 상호경쟁 대신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착취를 도입하게 될 가능성”을 운운한 카우츠키의 주장이 어떻게 “독점체들, 금융자본과 세계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1902년 카우츠키의 주장을 분명 반복”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산업’자본주의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레닌은 이에 대해서도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유착으로 독점자본이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카우츠키의 주장을 반복했다고 할 수 있는가?
“레닌의 <제국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만약 이것이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의 5가지 지표를 가지고 하는 주장이라면 이는 악의적 매도에 불과하다.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밝힌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5가지 지표는 그야말로 기본적인 지표에 불과하다. 레닌 스스로도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측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분할이 러시아 혁명과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의 성과로 신식민지 지배로 바뀌었다고 해서 침략과 억압과 지배라는 제국주의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에는 미제국주의와 유럽연합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체제는 전 세계를 상대로 제국주의 침략 전쟁과 지배, 착취와 수탈을 일삼고 있다.
맑스가 자유경쟁 자본주의 단계에 자본의 집적 및 집중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레닌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인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현대자본주의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 밝혔다. <제국주의론>은 맑스주의의 창조적 계승과 발전의 모범이었다. 레닌이 그러했듯이, <제국주의론>을 21세기 자본주의의 최신 현상에 맞춰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임무를 가진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레닌을 위조하고 날조한다는 것은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
비속화4. 레닌주의에 대한 비하, 날조와 기회주의 트로츠키주의 옹호
이들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이론을 왜곡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이론이 특별히 독창적이거나 정확했던 것도 아니다. 1917년 이전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러시아 혁명의 목표는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였다. 봉건 절대주의 러시아에서 의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취약한 러시아 자본가계급이 이 혁명을 이끌 것이라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레닌은 오직 스스로의 조직에 의존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급진적 민주주의 혁명만이 비사회주의적인 과업 — 짜르 체제를 타도하며 민주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제헌의회를 조직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8시간 노동일을 확립하는 — 을 실행할 일시적 혁명정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과업을 성취한 후에, 혁명정부는 민주적 자본가 정권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이었다.》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기 당시의 레닌과 볼셰비키가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통해 ‘일시적 혁명정부’를 세우는 과업을 성취한 후에, 혁명정부가 “민주적 자본가 정권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이었다.”라는 이들의 주장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주장을 파렴치하게 날조하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레닌과 볼셰비키의 주장은 멘셰비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당시에 레닌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우리의 슬로건은, 오로지 민주주의적일 뿐인 변혁의 틀을 직접 넘어설 수 없는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당연히 인정하면서도 주어진 이 변혁을 앞으로 밀고 나간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장 유리한 형태를 이 변혁에 부여하려고 노력하며, 결국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공적인 향후 투쟁을 위해 민주주의 변혁을 최대한 이용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제 정부의 저항을 힘으로 분쇄하고 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농민 대중을 자기 진영에 결합시키면서 민주주의 변혁을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힘으로 쳐부수고 농민과 소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주민 가운데 반(半)프롤레타리아적 분자의 대중들을 자기 진영으로 결합시키면서 사회주의 변혁을 완수해야 한다.》(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과연 레닌이 “민주적 자본가 정권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이었다.”라는 주장이 가당키나 한 주장인가? 러시아 황제체제를 분쇄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통해 저항하는 전제정부 세력을 분쇄하고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힘으로 쳐부수면서 철저하게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사회주의 변혁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의 <중단 없는 혁명 전략>이었다. 당시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은 짜리즘이라는 봉건 황제체제가 철폐되지 않았고, 지주 토지의 몰수와 분배처럼 혁명의 객관적인 성격이 민주주의 변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혁명의 성격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레닌과 볼셰비키는 틀렸고 오직 트로츠키만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1917년,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혁명은 스스로를 짜르 체제의 분쇄, 토지 개혁의 시행, 8시간 노동일, 혹은 자본주의적 민주공화국의 설립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대신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자본주의 임시 정부를 전복하고 평의회(소비에트)에 근간을 둔 노동자 국가를 세웠으며 자본주의 사유재산권을 뿌리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러시아 혁명의 결과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론과 전략이 아니라 한때 멘셰비키였던 반대자인 트로츠키의 이론과 전략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른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 옳았다는 것이다. 먼저 1917년 혁명이 “자본주의적 민주공화국의 설립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는 이들의 주장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1905년 혁명에서 “자본주의적 민주공화국의 설립으로 제한”하려 했던 것과 1917년 혁명 상황은 달랐다는 말이다. 이 주장 역시 레닌과 볼셰비키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자본주의적 민주공화국’으로 날조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황당한 것은 1917년 상황을 1905년 혁명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1917년 새로운 단계와 조건에 부합하는 상황을 가지고 훨씬 전에 이미 그 주장을 했다고 하는 것은 오만과 사기에 불과하다. 트로츠키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이론과 전략’이 항상 범하는 심각한 오류는 운동의 발전 단계를 주관적 의지로 뛰어넘으려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혁명의 객관적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로 보고, 이 혁명의 성사와 노동자 농민의 독재로 민주주의 혁명을 공고하게 유지, 발전시켜 사회주의 변혁으로 나아가려 한 반면, 이들은 이 혁명의 단계를 조급하게 건너뛰려 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했다면, 농민들과 동맹 파기로 혁명은 성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사 혁명이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금방 파괴됐을 것이다. 이들은 1917년 혁명이 “자본주의 사유재산권을 뿌리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도 황제나 교회, 지주의 토지는 몰수됐지만, 대다수 농민들에게는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토지분배 조치에 머물렀다. 만약 혁명 직후에 사회주의 조치인 토지 집산화를 했다면 토지 소유를 열망하는 농민들 대다수는 혁명권력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토지 집산화는 러시아 혁명 뒤인 10년 뒤에나 가능했다. 그때에도 부농과 중농 일부가 토지 집산화에 격렬하게 저항함으로써 토지 집산화를 열망하는 빈농과 격렬한 계급투쟁이 벌어졌다. 1917년 혁명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럴진대 “예언자” 트로츠키의 황당한 주장대로 1905년 혁명에서 그러한 조치가 취해졌다면, 그 예언은 파멸을 부르는 저주의 예언이 됐을 것이다.
《사회 민주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위하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부르주아지 및 소부르주아지와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이로부터 비록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임무일지라도 현재로서는 절박한 그러한 임무들을 잊고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반동적인 일이 될 것이다. 전제 정부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자들에겐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임무이지만, 이 임무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모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고 반동에 봉사하는 것과 다름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사회주의자들에겐 절대적으로 과도적이며 일시적인 임무에 불과하지만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에 이 임무를 무시하는 것은 그야말로 반동적인 짓이다.
구체적인 정치적 임무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 1898년의 독일의 사회 민주주의자가 공화제라는 문제를 특별히 최우선적인 것으로 제기하지 않은 것은 경악도 비난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당연한 현상이다. 1848년에 독일의 사회 민주주의자가 공화제의 문제를 뒷전에 젖혀 놓았더라면 그는 완전한 혁명의 배신자였을 것이다. 추상적인 진리란 없다.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것이다.》(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레닌의 이러한 강력한 경고는 곧바로 혁명의 단계를 건너뛰려 하고, 구체적 상황 앞에서 일반론을 제기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해당되는데, 이는 “그야말로 반동적인 짓이다” 물론 레닌은 역사의 단계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역사에서 이 두 변혁의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요소들이 서로 뒤얽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유럽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에 일련의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적 시도들이 없었겠는가? 또한, 유럽에서의 미래의 사회주의 혁명에는 민주주의라는 의미에서 보완해야 할 것이 여전히 남아 있지 않겠는가?”라며 도식을 경계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이미 1906년부터 노동자계급이 농민층의 도움을 받아 짜르 체제를 전복할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부르주아-민주주의’ 과업에 국한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했었다. 여기서도, 1917년에 볼셰비키의 실천은 레닌과 카우츠키의 전략적 전망과 단절한 것이 사실이지만, 레닌이나 그 어떤 볼셰비키 지도자도 ‘민주적 독재’ 이론을 명시적으로 폐기한 적은 없다.》
레닌의 혁명적 현실주의의 구체성이나 풍부함에 비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얼마나 오만하고 요란하게 변죽만 올리고 있는가? 레닌은 당면 민주주의 혁명의 성사와 철저한 심화, 이를 통한 중단 없는 변혁에 필요한 원칙과 조건, 전략 및 전술에 대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반해, “예언자” 트로츠키는 아직 성사되지 않은 민주주의 혁명을 앞에 두고 “‘부르주아-민주주의’ 과업에 국한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했었”다고 공치사를 하고 있다.
1917년 2월 혁명 뒤에 레닌이 유명한 4월 테제를 들고 나와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에게로”라고 외친 것은, 그 동안의 전략적 전망과 단절, 즉 혁명에 있어서의 단계론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단계론을 제대로 적용한 것이다. 2월 혁명 이후에 짜리즘이 붕괴되었고, 이후 들어선 부르주아 임시 정부가 “빵과 토지와 평화”라는 민중의 열망을 배신했기 때문에, 새로운 단계에 맞는 변혁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만든 가장 큰 신화는 레닌이 1905년의 단계론을 폐기하고 ‘연속혁명론’을 수용했기 때문에 트로츠키가 볼셰비키에 가담했다는 주장이다. 이 거짓말과 달리 레닌은 1917년 혁명 이후 1년 여 뒤인 1918년 11월에도 역사발전의 단계에 대해 일관되게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전체농민과 함께 행진해 가는 한, 우리의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극히 명확했었다. 우리는 1905년 이후로 수백, 수천 번 그것을 말해왔었고, 결코 역사적 과정상의 이 필수적인 단계를 건너뛰려거나 혹은 그것을 포고령으로 폐지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 그러나 10월 혁명의 오래 전, 즉 우리가 권력을 장악하기 오래 전인 1917년 4월에 우리는 인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설명했었다. 나라는 전진하여 나가고, 자본주의는 발전했으며, 파멸은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혁명은 이제 이 단계에서 멈출 수 없으며, 그것은(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주의로의 전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 지친 나라를 구하고 전진시키며 근로피착취인민의 고통을 경감시키려면 그 이외에 아무런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혁명 이후 레닌의 이 주장에서 볼 때도, 트로츠키의 궤변은 레닌과 볼셰비키를 깔아뭉개고 희화화하는 것으로, 1917년 혁명 전까지 기회주의 활동을 하던 트로츠키의 행보를 정당화, 합리화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1917년 2월 혁명 뒤에 혁명의 대세가 볼셰비키에게로 향하자 10월 혁명 고작 두 달 전인 8월에야 발 빠르게 볼셰비키라는 혁명선에 승선하고는, 17여 년 동안의 기회주의 행보를 세탁했던 것이다. 17여 년 동안의 기회주의 행보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 사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잉태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볼셰비키 입당과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문제와 노동조합 논쟁 등에서 당과 러시아 혁명 자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기회주의, 모험주의 행보를 계속했다.
오늘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 트로츠키주의 특유의 대담한 날조 정신으로 ‘계급협조주의’라는 어이없는 비방을 일삼으며 파쇼권력에 맞서는 투쟁을 방해하고 있다. 한국에서 변혁의 객관적인 단계는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 이전처럼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가 아니다. 봉건지배체제와 이의 경제적 토대인 지주-소작관계가 폐지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독점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한국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말한다면 그야말로 시대착오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 물질적 조건과 주체역량의 심대한 괴리라는 모순적인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 같이 맹목과 독선에 사로잡힌 종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변혁을 외치면서도 그 변혁으로 가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식과 이행의 특수한 경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시즘을 부정하고 파쇼권력을 분쇄하는 사활이 걸린 당면 정치 투쟁의 의의를 부정하고 대중적 분노와 열망을 외면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은 독점자본을 위해 폭압을 자행하는 파쇼 권력과 이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광범위한 분노와 투쟁으로 표출되고 있다. 파쇼 권력 하에서 군사독재 시절의 내란음모가 부활하고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진보정당이 폭력적으로 해체당하고 진보정당 국회의원과 활동가들이 장기 수감당하는 고초를 겪고 있기도 하다. 급기야는 한 농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 정권이 총연맹을 비롯한 산별 중앙과 지역본부 등 8개 단위를 사상 유례없이 동시에 침탈하고,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을 테러분자로서 척살 대상으로 취급하는 강도와 같은 파쇼 국가 테러 체제가 작동되고 있다.
파쇼권력의 광기어린 공세가 가중되는 시점에 민주주의 투쟁을 더욱더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진행해야 한다. 더군다나 한국의 노동계급 운동이 경제주의, 조합주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로서의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계급 역관계를 전환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전투정당을 건설하고 변혁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파쇼 권력의 분쇄는 파시즘이 독점자본의 가장 폭력적인 테러독재 체제임을 감안할 때 이 투쟁이 철저하게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변혁은 앞당겨질 것이다.
비속화5. 껍데기만 남은 ‘레닌주의 유산’, 사실상의 반(反)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기회주의자들이 레닌에 대한 신화를 벗겨낸다는 명목으로 레닌주의와 볼셰비키를 비방, 날조하고 나서 이제 레닌주의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이들은 레닌주의에 남은 것은 <국가와 혁명> 등에서 밝힌 의회주의를 반대하고 기존 국가권력을 분쇄해야 한다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국가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기 보다는 “노동계급 스스로의 조직화”라는 표현 뒤에 숨어서 무정부주의와 소부르주아 개인주의를 옹호하려 한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경험한 우리는 목적론을 명확히 거부하고 노동계급의 스스로의 조직화와 활동을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중심에 놓는 맑스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이, 1914년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혁명적 진영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실천적으로는 이런 맑스주의와 단절했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레닌 사후 쏘련과 국제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이자, 쏘련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파시즘을 분쇄했던 스탈린을 파시즘과 동류에 넣음으로써 이들의 종파주의는 극에 달한다. “목적론을 명확히 거부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여기서 이를 “노동계급의 스스로의 조직화와 활동”과 대비시켜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이 역시 당의 지도력의 발휘, 철의 규율과 당적 단결과 통일을 부정하는 논리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레닌이 이론적으로 카우츠키주의와는 단절하지 않았다는 비방과 날조를 통해서 말이다.
이들은 “레닌주의에서 가장 변치 않는 유산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고유한 실천에 대한 연구와 이론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고임금 숙련 금속 노동자인 이들은 노동강도 강화, 탈숙련화, 그리고 임금을 둘러싼 수많은 전투와 민주적 사회적 권리를 위한 정치 투쟁을, 종종 그들의 노동조합이나 당 지도자들의 희망사항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이끌었”던 것이라고 한다. 레닌주의의 혁명적 사상이 고작 “노동조합이나 당 지도자들의 희망사항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이끌었”던 투쟁들에 불과한 것인가? “레닌주의는 1923년 이후 희화화된 ‘민주집중제’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이들 기회주의자들이야말로 민주집중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레닌주의 사상 전체를 비방, 날조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무규율, 무원칙, 사상적 빈곤함, 분열주의와 종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레닌주의에 대한 비속한 반대자들과 달리 맑스레닌주의는 레닌주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맑스주의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레닌주의는 일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이며 특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전술이다.》(스탈린, <레닌주의의 기본에 대하여>)
그리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레닌주의를 왜곡, 비방하면서 자신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자처하는 지금,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과학적, 변혁적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세력들은 자신들을 맑스레닌주의자로 자처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인가? 맑스레닌주의인가?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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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주의의 부활의 지체의 다름아닌 원인들 중에 하나가 저런 오발탄(이범선의 소설명이기도 한)같은 것들이 떠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참 풍미했던 어떤 주의의 이면 너무나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