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장>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에 임하여 노동운동의 총노선을 쇄신하고 총전선을 구축하자!
2014년 11월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그 원래의 목적과는 별도로, 이후의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위하여, 노동자계급의 조직화의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조합이 이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모든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지지하고, 자신을 모든 계급의 전위적 투사이자 대변자로 간주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조합 외부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열악한 임금을 받고 있는 직업, 예를 들어 예외적으로 불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여태껏 저항력을 빼앗긴 채로 있는 농업노동자의 이익에 대해 주의 깊게 대처해야만 한다. 노동조합은 그 목표가 결코 좁디좁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억눌리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의 전반적인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확신을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주지 않으면 안 된다.”(맑스, <노동조합 – 그 과거, 현재, 미래>)
- <혁신과 단결>을 외친다는 것의 정치적 의미
(1) 사상 초유로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가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는 ‘그 자체만으로’ 지금까지의 간선제 선거에 비해 우월한가? 단언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민주노총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간선제라는 형식 때문에 비롯된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위기는 간선제라는 형식 때문이 아니라 간선제라는 현재의 형식 속에서, 바로 그 형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문제다.
(2) 간선제라는 노동자 대의 체제를 가졌다 하더라도, 운동의 지도자들이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임무, 변혁적 임무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실천하고 투쟁하고 있다면 그 형식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누가, 누구의 이해를, 어떻게 계급적으로 대표하고 실천하는가가 핵심이다. 맑스의 말처럼, “조합원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원래의 목적을 넘어서 “노동자 계급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지니며, “모든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지지하고, 자신을 모든 계급의 전위적 투사이자 대변자”임을 자각하고 “억눌리고 있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을 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에 우리의 <혁신과 단결>의 과제 모든 것이 달려 있다.
(3) 그렇다면 현재 치러지고 있는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는 무용한가? 실제 6억 이상이나 드는 선거비용의 문제, 수만 명이 동원되는 선거 관리의 비효율성과 인력 낭비, 부정선거 시비와 심각한 분란의 우려, 선거 결과에 불복할 우려 등을 들어 직선제 선거에 부정적인 입장들이 제출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우려를 상쇄시킬 수 있을 만큼 직선제가 정치적 의의를 가지려면 어떤 선거가 돼야 하는가?
(4)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가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직선제라는 선거를 통해 노동운동의 근본적 정치적 <혁신과 단결>을 도모하는 계기가 될 때이다. 조합원들이, 더 나아가 미조직 노동자라 할지라도 한국의 노동자들이 이 선거에 정치적 관심을 가지거나 참여를 할 때이다. 용광로 같은 정치 토론이 벌어질 때이다. <혁신과 단결>의 과제에 대해 고민하고 주체적, 능동적으로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거 투쟁의 장에 뛰어 들 때다. 이번 직선제를 계기로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불신을 열망과 확신으로 되살릴 수 있는 거대한 투쟁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운동의 정치적 강화와 재편을 위한 교두보를 만들어내야 한다.
(5) 현재 직선제 선거를 둘러싸고 민주노총의 캐치프레이즈는 <혁신과 단결>이다. 각 선거진영들은 <혁신과 단결>이라는 큰 구호 아래 그것을 위한 저마다의 방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현재 조직률이 낮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민주노총은 사실상 총노동의 집결체라는 대표적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혁신과 단결>이라는 과제는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전체의 <혁신과 단결>의 과제이기도 하다.
(6) 민주노총의 <혁신과 단결>의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것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민주노총으로 표현되는 기존 노동운동 노선이 혁신이 절실하게 필요할 만큼 낡아빠지고 후진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단결의 과제가 제기되는 것은 노동운동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혁신의 대상들, 분열 조장자들이 혁신과 단결을 제기하는 모순적 상황, 혁신과 단결을 제기하되 한국 노동운동의 근본적 혁신과 단결의 과제를 역사적,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협소하게 제기하는 우리 운동의 정치적 지체 상태를 타파해야 한다.
- <혁신>의 과제
(1) 한국 노동운동을 혁신해야 한다는 과제는 하루아침에 제기되지 않았다. 역사적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지면상 이유로, 이 글의 목적상, 혁신의 역사적 뿌리를 찾기 위해서 현대사 전체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칠흑 같은 반동의 어둠을 뚫고 1980년 오월 광주 항쟁, 19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면서 1980년대는 변혁의 시대였다. 상승일로에 있던 한국 노동운동의 중대한 전환점은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격변과 해체, 1991년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 이와 함께 현실 사회주의에 조성된 극도의 난관(제국주의 봉쇄의 강화와 고립의 심화, 생산력의 정체 등)과 함께 왔다. 자본과 권력은 기세등등하여 “역사의 종언” 운운하며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떠들어댔다. 미친 듯이 노동자민중을 공격했다.
(2) 이때를 전후로 한국 노동운동에는 청산주의와 패배주의가 창궐했다. 맑스레닌주의 사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학습 열풍은 사그라졌다. 대중적으로도 노동해방이라는 열망이 사그라졌다. “운동이 전부이고 그 목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베른슈타인식 수정주의는 운동이 나아가야 하는 근본 목표를 상실하도록 했고, 운동을 눈앞의 협소한 이익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 결과 단결과 연대, 투쟁, 해방의 기치가 점점 더 사라져갔다.
(3) 이른바 노동운동의 위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더 큰 위기는 위기를 과학적 사상으로 진단하고 변혁적으로 돌파할 주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 결과 위기를 부르짖는 위기론자들이 노동자 중심성을 폐기하고 시민사회론을 떠들어 대며 노동운동 위기를 조장하고 더 심화시켰다. 이들은 맑스주의 위기 운운하며, 노동자들의 과학적, 계급적 인식을 가로막고, 자본주의 모순을 인식하고 극복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부르주아 잡사상을 유포하기 시작했다.
(4) 노동운동 전반에도 이러한 비과학적이고 반노동자적 사상이 스며들었다.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노동자 민중의 해방된 세상을 만드는 전망을 상실한 갈 길 잃은 운동은 결국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타협과 중재, 교섭만을 통해서 매사를 해결하려는 노사협조주의 노선을 횡행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합의주의, 우리사주제, 경영참가론 같은 정책 대안론이 전면적으로 대두됐다. 정책 대안론은 현실주의 노선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투쟁을 포기하고 양보를 거듭하며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릎 꿇게 만드는 비현실 노선에 불과하다는 것이 수많은 노동자 투쟁에서 입증됐다. 개량 없는 개량주의인 것이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론, 기본소득제, 경제민주화 노선은 독점자본주의 지배 체제 자체를 타파하는 목표 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모순을 해결한다고 하는 몰계급적인 노선이다.
(5) 최근 들어 자본에 의해, 소부르주아 학자들에 의해 <21세기 자본>이라는 피케티 ‘열풍’이 조성되고 있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이라고 해서 은연중에 맑스의 19세기 <자본>이 현재 자본주의를 해명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피케티 노선이야말로 별로 색다른 것이 아닌 낡은 것이다. 피케티는 불평등한 분배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이미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은 분배구조의 모순은 “항상 특정한 사회의 역사적 전제조건들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생산 및 교환관계의 필연적 결과”(엥겔스, 반듀링론)라며 21세기 듀링이라 할 수 있는 피케티 같은 분배론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적소유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착취관계와 그것을 폭력적으로 비호하는 국가권력과의 투쟁 없이 분배만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공상적일뿐더러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하고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회피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변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피케티 열풍은 이러한 의도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6) 여기서 우리는 우익 청산주의 말고 ‘급진’ 정치 세력으로 포장하여 우리 운동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 좌익청산주의 정치적 경향에 대해 독자적으로 언급해야만 한다. 무상체제와 실업의 일소, 여성의 획기적 권리 신장, 파시즘 분쇄, 민족문제 해결은 쏘련과 동유럽 등 사회주의 체제의 거대한 성과였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한때 구가했던 복지체제는 그 나라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인 동시에 쏘련 등 사회주의의 거대한 성취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쏘련 사회주의 체제를 전망으로 해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물질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쏘련 등 사회주의 체제는 전인미답의 길을 가면서 무수한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고, 난관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좌익 청산주의자들은 이를 극단적으로 과장, 왜곡하여 쏘련 등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해체를 환영한다.”, 쿠바와 북은 “타도해야 하는 반동 착취체제”라며 중상하고 있다. 이들의 반쏘 반공주의 노선은 현실 사회주의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고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관념을 심어줌으로써 대중들의 정치적 전망을 가로막는다.
(7) 변혁적 목표를 상실한 지금의 우리 운동 내에는 대중추수주의, 현상추수주의, 경험주의, 노동자주의, 실리주의, 타협주의, 관료주의, 경제주의, 조합주의 등 온갖 해악이 창궐하고 있다. 혁신은 혁신의 필요성을 가져다 준 이러한 낡은 것들을 떨쳐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국 운동의 혁신은 낡은 사상, 비과학적이고 몰계급적인 개량주의, 수정주의 사상을 혁파하는 사상의 혁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맑스레닌주의의 변혁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한국 노동운동의 혁신은 사상적 혁신으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이로부터 변혁적 총노선을 다시금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 <단결>의 과제
(1) 단결의 과제 역시 사상의 혁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단결의 과제는 이번 직선제 선거에서 제기되는 ‘통합지도부 구축’, ‘연대연합’으로 해결할 수 없다. 과연 사상의 혁신과 운동의 재편 전망 없이 기존 인물들의 상층 선거연합으로 우리 운동에 놓인 단결의 과제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이는 대증요법, 절충주의에 불과하다. 아니 더 나아가 오히려 이러한 방식은 단결이 제기되는 현실 즉 분열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타협과 술수, 책략으로 단결을 해야 하는 과제를 회피하게 할 수 있다. 운동의 분열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정치적 단결의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2) 노동자 계급 단결의 최고 형태는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로 압축되는 노동자 국제주의이다. 그런데 이 노동자 국제주의는 일반론으로는 승인되나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는 오히려 기각되고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실은 민족주의, 배외주의, 인종주의, 차별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힘이 가하는 압력에 밀리거나 그 영향을 받아서 제국주의의 침략공세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하는 세력들이 운동진영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3) 미 제국주의는 쏘련과 동유럽 붕괴 시도에서도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라는 그럴싸한 구호를 내건다. 이른바 <색깔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제국주의는 한 국가 내부의 반란군을 육성하여 <민주주의>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내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최근에는 홍콩에서 제국주의는 <민주주의 투쟁>을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후원하기도 한다. 자국의 노동자 민중 탄압을 합리화 하고 인권 유린에 침묵하거나 동조해 왔던 제국주의 언론들은 갑자기 ‘자유언론’으로 둔갑하여 언론 조작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한다.
제국주의와 싸우지 않는 <민주주의 투쟁>이 역사적으로 있었던가? 다양한 정치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들 국가에서 <민주주의> 세력들의 핵심 동력은 제국주의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고, 이들은 결국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러한 가짜 민주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 국제주의인 것으로 심각하게 착각하는 반(反)국제주의자가 우리 운동 도처에 있다. 제국주의가 건네준 ‘남의 깃발’을 자기 깃발로 착각하고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4) 노동자 국제주의는 타국의 자결권을 침해하는 제국주의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분단 현실에 적용될 때,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이념인 반북주의로 나타나면서 미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한미일 동맹의 반북 봉쇄를 용인한다. 심지어 신판 반공주의인 ‘종북주의’ 용어의 창시자가 바로 운동진영 내부라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5) 운동진영 내부의 NL과 PD의 대립, 이것은 사실 민족민주‘혁명’ 노선과 민중민주‘혁명’ 노선의 대립이었다. 둘 다 그 방식과 경로는 다르지만 변혁노선의 문제였기 때문에 비적대적 모순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격변 이후에는 양 진영 대다수 세력들이 변혁노선을 상실했다. 결국 변혁의 방식과 경로를 둘러싼 분열은 극단적으로 후퇴하여 양 진영의 편향을 더 고착화 시키고 분열을 심화시키는 상태로 만들었다. 이른바 통일운동 진영과 계급운동 진영의 대립과 갈등이 그것이다. 계급문제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포함하는 민족문제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 양 진영은 현실적으로 대립함으로써 한 쪽에서의 몰계급성, 다른 한쪽에서의 경제주의 편향을 심화시키고 있다.
(6) NL 진영은 의회주의 정치세력화에 경도되고 부르주아와의 야권연대에 집중하면서 변혁성과 자주성을 상실한 의회주의 정치 세력화에 경도되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이른바 ‘좌파’ 진영은 변혁적 정치세력화를 외치고 있으나 상대적인 헌신성과 투쟁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현안에만 집중하는 협소한 인식과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한일 군사협정,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연기와 고(高)고도미사일방어(공격)체계(THAAD·싸드) 구축 시도 등에 대한 대응은 이른바 ‘반제자주진영’이 전담하는 과제가 되었다.
(7) <(가칭)직선제 승리, 민주노총 혁신, 총파업 투쟁을 위한 민주노총 선거대책모임>으로 선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좌파’ 후보 진영에서 공개 제출한 <노동자 선언>에서는 주로 노동자 현안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룰 뿐, 이 땅을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후 ‘좌파’ 선거대책모임 정책공약(10월 31일)에서는 <민주노총을 바로 세우는 3대 정치-연대전략> 중에서 [정치연대 2]에서 반전-반제국주의 평화운동 강화 항목을 따로 제출하고 있다. 그러나 반제국주의 투쟁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반론으로 반제를 내거는 것만으로 이 투쟁 과제를 제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없다. 먼저 이를 주요 과제로 인식하고 실천해야만 한다.
또한 여기서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반제투쟁은 제국주의의 주타격 대상인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는 미제국주의가 자기들의 핵독점과 북 체제 붕괴를 위해 만들어낸 <조어>에 불과하다. 사태의 본질이 그럴진대, “미국핵도 문제고 북핵도 문제다”는 이른바 ‘좌파’가 평소 견지해왔던 양비론 입장은 실제로는 미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북 인권>문제 역시 보편적 인권 문제로 포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북을 붕괴시키기 위한 제국주의 전략의 일환이다. 결국 이른바 ‘좌파’의 일반론적인 반제국주의 요구는 북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 즉 반북주의로 인해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제국주의에 직간접적으로 봉사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좌파’ 세력들이 노동자 투쟁에서 보이는 상대적 헌신성과 투쟁성이 분단, 제국주의 즉 ‘민족문제’에 대한 통일적 인식, 실천과 결합될 때 우리 운동의 수준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8) 이처럼 우리 운동의 중차대한 단결의 과제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통일적으로 인식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모든 세력과 역량을 집중 재배치하여 공동 실천해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은 우리 운동 진영 내부의 편향성을 극복하여 계급적 자각과 인식을 높이고 단결의 기풍을 강화하도록 할 것이다.
(9) 레닌은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 투사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럴 때만이 노동자 계급이 편협한 계급이기주의를 뛰어 넘어서 민중의 호민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태도는 노동자 계급과 여타 민중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중대한 고리이기도 하다. 노동자 계급에게 민주주의는 민중과 함께 완전한 해방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교두보와 같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보장, 파업권 확립, 공무원의 정치 활동의 자유를 포함하는 사상과 결사의 자유 전면 보장, 국가보안법 등 반민주 악법의 철폐 등 민주주의 투쟁이 철저하게 진행되면 될수록 노동자 해방은 앞당겨질 것이다.
(10) 노동운동 내에 팽배한 협소한 경제주의와 조합주의는 이주노동자와 국내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의 단결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국내노동자가 국가주의에 빠지지 말고 노동자 국제주의 관점으로 먼저 굳건하게 이주노동자에게 단결의 손을 내밀 때 노동자 단결의 초석이 마련될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의 과제는 먼저 정규직 노동자가 조합주의에 사로잡히지 말고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단결의 손을 내밀 때 단결의 단초가 마련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되기>로 목표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화 투쟁 또는 직고용 쟁취 투쟁 과정에서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팽배해 있는 조합주의와 관료주의를 척결하고, 정치적 각성을 통해 노동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을 근본적인 운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최근,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있어서 반노동자적인 직권조인을 일삼은 대공장 정규직 노조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비판이 있어야 한다. 각 선거 진영은 원론적으로 비정규직과의 단결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에서 이에 대한 분명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 공황과 전쟁의 시대, 총노선 쇄신으로 당면 총전선 구축
(1)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혁신과 단결을 외치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연합후보 입장에 경도된 듯이 보인다고 심각하게 왜곡하기도 한다. 협소한 인식에 사로 잡혀 있다 보니 이처럼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2) 위에서 제기한 바처럼, 우리 운동의 총노선을 쇄신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면한 총전선을 구축해 들어가야 한다. 특히 박근혜 정권의 파쇼적 공세에 맞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총전선을 시급하게 구축해 들어가야 한다. 국정원을 비롯한 권력기관을 총동원한 대선 부정선거, 간첩 조작, 내란음모 사건, 통합진보당 해체 공작, 감시와 통제, 사찰, 민주주의 파괴 등 파쇼 공세에 맞서야 한다. 특히 세월호 학살은 그 자체로 끔찍한 정권의 파쇼적 진면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베와 서북청년단 재건 움직임은 파쇼 체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준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3) 세월호 학살에 맞서 진실을 규명하는 투쟁은 전선이었다. 이 전선이 약화되자 정권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총공세에 나서고 있다. 노조 파괴, 연금개악, 사유화, 규제완화, 통상임금 공격, 연장근로수당 삭감 및 노동시간 연장 기도, 시간선택제일자리, 복지후퇴 등 총공세에 나서고 있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 <국가개조>라는 명목 하에 추진하려던 반노동자 반민중적 조치를 다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권은 총공세를 취하고 있는데, 노동자 민중은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대응에 그치고 있다.
(4) 공무원연금 개악을 신호탄으로 국민연금 개악, 대학 구조조정, 전면적 복지 후퇴, 임금삭감과 각종 세금 인상 등 전면적인 긴축공세가 쉴 새 없이 함께 몰아치고 있다. 정권과 자본은 “한정된 복지 재원을 좀 더 어려운 이들한테 써야 한다”며 공무원연금 개악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복지재원은 한정돼 있지 않다. 부자감세, 법인세 감세, 자본에게 제공되는 공적자금,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해서 보유한 막대한 사내유보금, 전쟁 살인 무기 수입 비용 등을 복지재원으로 충당하면 얼마든지 복지 재원을 마련하고 늘릴 수 있다. 좀 더 어려운 이들한테 써야 하기 때문에 공무원 연금을 삭감한다는 말도 가증스러운 거짓말이다. 공무원들과 전체 노동자들, 더 나아가 국민들을 분열시키려는 고도의 사기 논리에 불과하다.
“좀 더 어려운 이들한테 써야 한다”며 연금 개악을 정당화 하려는 저들의 거짓말 뒤에서 노동자 민중들은 끔찍한 가난에 시달리다 죽어나가고 있다. 송파구 반지하방에서 집세와 공과금 70만원을 남기고 자살한 세 모녀 사건, 홀로 사는 노인이 장례비 100여 만 원과 전기, 수도 요금을 따로 남기고 시신을 수습할 사람들을 위해 국밥값을 남기고 난 뒤 자살한 사건 등 슬프고도 참혹한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한 쪽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과 부자들이 누리는 주체할 수 없는 부와 행복은, 다른 한 쪽에서 절대 다수 민중의 참상과 불행을 야기하는 직접적 원인이다. 맑스는 <자본론>의 유명한 한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쪽 끝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의 빈궁 · 노동의 고통 · 노예상태 · 무지 · 야만화 ·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
극단적 불평등, 찢어지는 가난, 실업은 바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급기야 죽음으로 몰아가는 원흉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생을 끝내려는 순간까지 이웃을 배려할 정도로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 왔던 우리의 착한 민중들은 빈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며 죽어나가고 있다. 이 분노스러운 죽음의 행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최근 공무원연금 개악 시도는 전면적인 긴축공세의 일환이기 때문에 저들의 분열공작에 맞서 전체 노동자들이 같이 싸워야 한다. ‘사회적 타협’이 아니라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를 위한 투쟁을 한국 사회의 빈곤과 (청년)실업, 복지 문제 전반으로 확대제기하면서 공세적으로 싸워야 한다. 국가는 바로 자본가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자본에게는 수십, 수백조 원을 쏟아 부으면서도 노동자 민중으로부터는 서푼도 안 되는 복지재원조차도 강탈해가려 하는 것이다. ‘한정된’ 복지 재원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한정된’ 계급적 성격이 무엇이냐가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5) 군사독재 시절의 내란죄를 부활시켜 통합진보당 해체 공작에 나서는 정권에 맞서 운동 진영 전체가 하나 되어 싸워야 한다. 분파주의를 넘어 대단결의 정신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일련의 공격과 해체 공세를 막아내야 한다. 통합진보당 해체에 맞서 운동 진영 전체가 굳건하게 손잡고 단결하는 것은 우리 운동의 분열상을 막고 실천적으로 단결하는 중대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공세를 막지 못한다면 파쇼진영은 자신감을 가지고 공세를 전면 확대할 것이기 때문에 이 투쟁은 정세적으로도 중요하다.
(6) 이처럼 자본과 정권의 총공세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분산시키고 위축시키기 위해 감시통제 체제가 강화되고 있고, 국가권력은 파쇼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노동자들이 세월호 진실 규명 투쟁에 조직적으로 나서서 대정부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 파쇼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사수해야 한다. 반노동자적, 반민중적 조치에 맞서야 한다.
제국주의 전쟁 위협에 맞서야 한다. 수십조에 달하는 전쟁 파괴 무기비용을 노동자 민중의 복지에 사용할 것을 요구하며 싸워야 한다. 전쟁과 살육 대신 평화와 생명을, 무기를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 것을 외쳐야 한다.
총체적 부정선거와 간첩조작, 인권유린과 국민감시와 통제 및 사찰, 프락치 공작과 내란 조작 등 파쇼 통치의 소굴이자 국가조작원인 국가정보원을 해체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공황과 전쟁의 시대,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 전선>이라는 단일한 기치 하에 노동자와 민중진영이 총전선을 구축해서 강력한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7) 새로운 지도력은 총노선의 쇄신과 총전선을 구축하는 가운데 만들어질 수 있다. 새로운 지도력으로 절망과 도탄에 빠진 노동자 민중에게 승리의 전망과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새로운 지도력은 기존 지도력이 자기비판과 반성을 통해 혁신되면서 나타날 수도 있고, 주어진 역사적 임무와 당면 과제에 철저하게 부합하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끝으로 진정한 계급의식은 어떻게 형성될 것인지에 대한 레닌의 심오한 말을 인용해보겠다. 자,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들이 구체적인, 게다가 항상 절박한(당면한) 정치적 사건과 사례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에 걸쳐 그것들 각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과 유물론적 평가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될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의 주의, 관찰력, 의식을 배타적으로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선적으로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리려는 자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자기 인식은 이론적 인식만이 아니라, 아니 더 올바르게 말하자면 이론적 지식보다는 정치 생활의 경험에서 생겨난,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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