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게임으로 위장한 그리스 국민투표, 벼랑 끝 전술 뒤에서 반민중적 긴축 협상이 타결될 수 있다
(2015년 6월 30일)
그리스 시리자(급진좌파연합)와 치프라스 총리는 의회 결정을 통해 국제금융 약탈기구인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IMF)가 제시한 긴축안을 담은 구제금융 안을 7월 5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했다.
시리자와 치프라스는 여우처럼 아주 약았다. 이미 그리스 노동자 민중은 국제 트로이카와 국제 독점자본 언론의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 사태) 및 국가파산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긴축 반대를 공약한 시리자와 치프라스를 선택했다.
시리자와 치프라스는 이번 구제금융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선택한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열망을 받아 안고 긴축협박에 맞서 단호하게 싸워 나갔어야 한다. 그러나 시리자와 치프라스는 국민들에게 재차 국가파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구제금융안을 반대하느냐, 구제금융안을 수용하느냐를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민주적 결정 과정으로 포장해 있지만 사실은 기만이고 국민겁박에 다름 아니다.
마치 이는 노동조합 지도자가 자본의 제시안을 제 손으로 합의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있으니까 민주적 결정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총회를 통해 조합원들이 그 제시안을 수용하거나 반대하거나를 결정하라는 기만술책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이미 기만적인 안 자체를 합의한 채 총회에 부친 지도부의 모습을 보고는 집행부가 단호한 투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체념 속의 가결이 요구되는 것이다. 설사 조합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부결을 시킨다 하더라도 집행부는 이미 투쟁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전면파업으로 나아가려 하기 보다는 재협상에 나서서 이전 제시안 보다 약간 덜 불리한 내용으로 협상을 마무리 한다.
7월 5일 국민투표에서 그리스 노동자 민중이 시리자와 치프라스의 투쟁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여 패배주의에 빠져 구제금융안 수용 투표를 하면 치프라스는 사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리자와 치프라스는 국민들이 구제금융안을 수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자기들을 정당화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 노동자 민중이 시리자와 치프라스가 투쟁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제금융안 반대 투표를 하면 치프라스는 재협상에 나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예를 든 노조 지도자의 사례처럼, 시리자와 치프라스는 애초부터 긴축 자체의 반대가 재협상의 주요 목표가 아니었다.
시리자는 이전 신민주당-사회당(ND-PASOK) 연립정부가 합의했던 모든 긴축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트로이카와 추가로 반민중적인 긴축협정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 이에 맞서 그리스공산당과 전노동자투쟁전선(PAME)은 지난 6월 23과 26일 연이어 시리자의 긴축 협정안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을 전개했다.
시리자는 구제금융을 연장하고 반민중적 조치를 합의하려 한다
그리스가 디폴트(채무 불이행)과 국가 파산 사태를 맞느냐, 유럽연합 탈퇴(그렉시트)냐를 가르는 극단적 상황이지만, 여전히 국제금융기구와 시리자 치프라스의 타협의 여지는 남아 있다. 국제금융기구나 시리자 둘 다 이를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기만적인 중재는 물밑에서 시작되고 있다.
국제금융기구 전 총재인 스트로스 칸이 그러한 흐름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IMF는 그리스를 비롯한 재정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해 실수를 저질렀으며 나는 그 실수에서 내가 져야할 책임을 기꺼이 질 준비가 되어있다. IMF는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 오해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 상황의 심각성을 과소평가 하였다. 우리의 처방은 부적절했고, 처참한 파국으로 몰았으며 지나치게 엄격하였다. 그리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완결되지 않은 유럽통화 통합에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또한 거기에 있다.”(목수정 기자, ‘막다른 골목’ 그리스, 누가 그리로 몰았나 그리스 총리가 던진, ‘국민투표’라는 최후의 승부수, 오마이뉴스, 15.06.29)
현재 그리스 부채가 3천200억 유로(약 400조 원)에 달한다. 그런데 그리스가 이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되면, 그리스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려준 채권국이나 국제금융자본도 동시에 천문학적 손실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 위기가 채무연쇄를 통해 유럽과 전 세계로 번져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시리자 정부의 국민투표안 발표 이후에 국제금융 시장은 요동쳤다. 제국주의 국가와 세계 독점자본은 그리스의 위기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으로, 유럽 전반으로, 더 나아가 세계전반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BIS)은 2011년 3월 14일 유럽 국가 부채 공황 이면의 몇 가지 진상을 밝히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 독일 은행들은 5,690억 달러를, 프랑스 은행들은 3,800억 달러를, 영국 은행들은 4,310억 달러의 계좌를 (해외에: 편집자) 각각 보유하고 있다. 영국은 아일랜드에 2,250억 달러, 스페인에 1,520억 달러 계좌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는 “그리스에서 920억 달러를 물려 있다.” 베네룩스 주요국(Benerux-led group, 편집자: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은 스페인에 1,800억 달러 계정을 가지고 있고, 스페인 은행들은 포르투갈에 1,090억 달러 계좌를 가지고 있다.“(프레드 골드스타인, 『궁지에 내몰린 자본주의』, 「첨단기술 시대의 일자리 파괴, 과잉생산과 공황」, 노동자의사상 제6호, 2014년 1월)
2011년 통계수치이지만, 그리스를 비롯해서 전 세계적인 부채위기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더 심화되고 있으므로, 일부 채무를 갚았다 하더라도, 채무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그리스 내정에 간섭하여 국민투표 찬성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그리스 국민들이 구제금융 찬반투표에서 ‘찬성’에 투표할 것을 촉구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해서는 안된다”며 “여러분(그리스 국민들)은 질문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예(Yes)’라고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김혜미 기자, 뉴욕 증시, 그리스 위기 악화로 급락..다우 2년래 최대 EU “그렉시트 검토한 적 없어..국민투표 찬성해달라”S&P, 그리스 국가신용등급 CCC-로 한 단계 하향, 이데일리, 2015.06.30.)
국제금융약탈기구는 그리스 노동자 민중에게 자살 보다는 차라리 공포를 택하라고 협박하고 있다. 동시에 저들은 그렉시트(유로존 탈퇴)를 고려하고 있지 않으니 유로존 내에서 협상으로 해결하자고 회유도 병행하고 있다.
그리스 주요 채권국들도 마찬가지다.
<조시 어니스트 / 미국 백악관 대변인> “(오바마 대통령은) 협상 당사자들이 그리스가 유로존 안에서 성장의 길로 돌아오고 유지가능한 채무를 지도록 그리스의 개혁과 재정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윤민영 기자, 미국·독일·프랑스 “그리스사태, 유로존 안에서 해결”, 연합뉴스TV, 2015.06.30.)
독일과 프랑스도 이와 같은 재협상 입장을 이미 밝혔다. 그런데 “유로존 안에서 … 유지가능한 채무를 지도록” 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이는 채무 상환 기간을 유예하고 구제금융 규모를 일정 정도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미 제국주의 오바마는 그리스가 “성장의 길로 돌아오”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리스의 파국(파산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정치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을 피하고, 그리스의 성장, 독점자본주의의 정상화와 성장의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는 시리자에게 그리스 독점자본의 성장을 위해 구제금융안 연장을 해줄 테니 노동자 민중의 희생을 의미하는 긴축 양보안을 관철시키라는 노골적인 협박이다.
이에 맞서 시리자 치프라스는 그리스 국민들이 구제금융안을 수용하면 사퇴할 수도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마치 겉으로 봐서는 치킨 게임 같은 목숨을 건 모험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시리자의 목표는 구제금융안 국민 투표에서 반대가 나오면 제국주의와 국제 금융 독점자본에 맞서 긴축 전면 반대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유럽연합 탈퇴도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애초에 국민투표를 부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 공산당은 이와 관련해서 6월 30일 “7월 5일 국민투표와 그리스 공산당의 입장”(The referendum on the 5th of July and the stance of the KKE)을 발표했다. 그리스 공산당은 시리자 정부가 그리스 자본의 수익성을 증가시키고, 자본의 ‘성장’과 그리스의 유로존 내의 잔류를 목표로 트로이카와 가혹한 반노동자-반민중적 조치가 담긴 내용으로 협약을 체결하려 한다고 폭로하고 있다.
시리자 정부는 긴축 반대가 목표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그리스 독점자본의 성장을 위해 구제금융안을 연장하고 부채 규모를 줄이는 조건으로 재협상을 하려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 민중의 압력이 거세지면, 자신들이 이미 제시한 긴축안 일부를 재협상하기도 하겠지만, 이것이 이 협상의 반민중적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민주의 정당 시리자로서는 그리스 유럽연합 탈퇴와 국가파산은 그리스를 혁명적 상황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절대 연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리스 자본주의 국가와 독점자본을 위기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리스 노동자 민중은 시리자의 양보교섭에 맞서 싸워야 한다. 구제금융 국민투표의 기만을 폭로하고 싸워야 한다. 그리스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 민중은 이미 그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투쟁은 현재 박근혜 파쇼 정권의 구조개악 공세와 노조 파괴, 민주주의 파괴를 자행하는 우리에게도 변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교훈을 이끌어내는 ‘변혁’ 정치세력이 있다.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는 변혁을 공개적으로 외치고 당건설을 일정에 올렸으면서도 막상 그리스 사태를 마주하고는, 시리자와 같은 사민주의 세력을 반대하고 변혁을 주장하는 그리스 공산당에 대해 “독선적인 배타주의와 고립주의는 참다운 혁명세력이라면 취할 수 없는 무책임하고 기만적인 종파주의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박석삼, 유로존 탈퇴 기로에 선 그리스 좌파진영 반긴축 통일전선 구축해야, 변혁정치 3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6.01.)며 연립정권을 강권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이 사민주의 정권과 연립정권을 거부하고 긴축과 그리스 자본주의, 유럽연합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에게는 “독선적인 배타주의와 고립주의”이고 심지어 “무책임하고 기만적인 종파주의의 극치”인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공산당에 대한 극단적 분노를 표하고 있는 것처럼, 필시 러시아 2월 혁명 뒤에 그곳에서 활동했다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입헌민주당의 연립정권을 반대하고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변혁으로 진군했던 볼셰비키에 대해서도 똑 같은 비난을 가했을 것이 틀림없다.
격동하는 그리스 정세를 면밀하게 주시해야 한다. 그리스와 유럽의 경제 상황이 한국에도 필시 깊게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유럽연합 제국주의와 국내 독점자본과 싸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부터 정치적 교훈과 전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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