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4 1945년 5월 9일,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종전과 인민의 위대한 반파시즘 승리 70주년을 맞이하여

베를린입성

– 20154,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무적의 군대로 알려진 독일 나찌 군대의 핵심을 무찌른 적군(赤軍)의 손으로 첫 번째 사회주의 국가인 쏘련 국기인 적기(赤旗)가 베를린 제국의회(Reichstag)에 당당하게 내걸렸던 그 날은 인민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의 하나로 남아 있다.

194559일 새벽, 독일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했다. 일본 또한 쏘비에뜨 군대가 만주에서 일본군에 승리하고 나서 4개월 뒤에 (1945년 9월 2일) 항복하였다. 따라서 독일-일본-이태리와 그 동맹국들로 구성되어 있던 파시스트 제국주의 블록에 맞선 인민의 승리는 (편집자: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더 이상 입에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스 공산당은 자본주의에 의해 탄생한 파시스트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거나, 전투에서 장애를 입은 이들 그리고 지하에서 저항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민족해방투쟁을 이끌었던 전 세계 모든 공산당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무기를 들거나 선전물을 손에 들고 싸웠던 이들, 지하 감옥에서, 처형 부대 앞에서도 영웅적 태도를 견지했던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어린이들이 상당수 희생된 폭격에 의한 무수한 죽음,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 끔찍한 수용소와 집단 처형장에서 고통 받은 수백만의 사람들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절망적으로 벌어진, 인간 존재의 존엄이 철저하게 무너졌던, 차마 말할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진 모든 곳에 있었던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쏘련의 거대한 공적에 경의를 표하고 옹호한다

 

우리는 쏘련의 거대한 공적에 경의를 표하고 옹호한다. 쏘련은 전쟁의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되었다. 1944년 여름, 서유럽에서 미국과 영국 군대가 독일 75개 사단과 맞섰을 때, 적군은 동유럽 전선에서 200개 사단을 묶어두었다. 쏘련은 전쟁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루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가히 충격적이다: 2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공산주의 청춘, 가장 젊고 유능하고 촉망받는 연령대였다. 반면 영국의 사망자는 37만 5천명, 미국은 40만 5천명이었다.

20여년의 사회주의 건설 기간에 쏘비에뜨 인민들의 거대한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졌던 기간시설, 공장들, 재화 대다수가 나찌 침략자들에게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그 수치는 어마어마하다: 1,710개의 도시가 파괴당했고, 7만여 마을과 소도시가 불탔고, 32,000개 산업체와 65,000 킬로미터의 철로가 일부 또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5,000여개의 소포즈(국영농장)와 기계-트랙터보급소(MTS), 수천의 병원, 학교, 고등교육기관, 도서관뿐만 아니라 98,000여 개 콜호즈(협동농장)가 약탈당했다.

스탈린이 지도자로 있는 쏘련이 나찌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쏘련의 방어 기반을 형성하고 조직하는 것에서 노동자 계급의 쏘비에뜨 권력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앙계획 경제와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인한 이점들 때문이었다. 노동자 계급과 함께 인민 대중의 선도적 역할 때문이었다. 혁명적 노동자 전위로서 공산당의 역할 때문이었다. 이는 현재와 미래의 혁명 운동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10월 혁명 이후 벌어졌던 내전이 종식되고 나서 20여 년 동안에, 의식적으로 계획된 사회-경제적, 문화적 발전, 사회주의 건설의 진로를 따르는 거대한 성과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쏘련의 수호는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쏘비에뜨의 영웅적 행위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산이다. 그 유산은 쏘련에서 자본주의 복고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5월 9일을 부당하게 이용하고, 수백만의 공산주의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강탈하고 과연 누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쏘비에뜨의 성과물을 만들어냈는지를 은폐하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중심인물인 푸틴의 정부 같은 통치 체제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적 진실을 옹호하고,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으로부터의 교훈을 강조하려 한다.

그리스공산당은 인민의 저항을 이끈 위대한 그리스민족해방전선(EAM)의 개시자이자 조직가이며 주요한 사람들을 제공하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스의 민족해방운동, 그리스인민해방군(ELAS)의 무장 투쟁은 유고슬라비아의 민족해방운동과 더불어 점령당한 국가에서 대중 투쟁의 하나로 나타났다. 모든 민족해방 운동, 빨치산 부대, 그들의 영웅적인 무장투쟁은 수백 개의 적 사단을 잡아 두게 했다. 그들은 점령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훨씬 더 성숙하고 준비된 과업에 대처하기 위해 역사로부터 영감을 받고 배운다.

그리스공산당은 노동자 계급, 가난한 인민층 그리고 특별히 젊은 남성과 여성들에게 호소하면서 그들에게 진리와 진실을 찾아내고 국제적 또는 국내적 전쟁, 특정한 나라들에서의 파시즘나찌즘의 부상과 지배를 부른 이유를 밝혀내기를 요청한다.

자본주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국가 간 연합과 모든 종류의 공식 기구는 인민들의 반파시스트 승리의 상징이기 때문에 194559일에 대해 진심으로 극도로 혐오한다.

그들은 당시의 내용을 왜곡하고 머릿속에서 역사적 진실을 뒤집는 것으로 인민의 기억 속에서 그날을 지우려고 한다. 이것은 독점 자본과 나찌-파시스트 괴물의 긴밀한 연관과 부르주아 계급과 사회민주당의 주된 책임을 은폐하기 위한 반공주의-반사회주의 선전(propaganda)의 일부분이다. 유럽연합은 이 같은 조직화되고 비열한 운동의 최전선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왜곡과 반공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노동자 계급, 인민층, 과학자들, 지식인들, 역사왜곡과 반공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이에 저항할 의무가 있다. 그로부터 생기는 역사적 지식과 과학적 결론을 이해하는 모든 이들은 독점자본 독재의 철의 구조와 제국주의 전쟁의 공포에 반대하는 인민과 청년의 계급의식과 투쟁의 승리를 위한 필수적인 원천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이러한 현상들을 낳고 육성하는 지형의 근원을 깨뜨릴 수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 경쟁, 자본주의 공황, 쇠퇴하고 있는 노쇠한 자본주의의 엄청난 곤경을 심화시킴으로써 인민들과 젊은 세대들에 대한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위대한 공산주의 지식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파시스트 국가들에서 자본주의는 파시즘으로써만이 살아남고, 파시즘은 오직 최고로 사악하고, 뻔뻔스럽고, 불쾌감을 주고 기만적인 자본주의 형태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파시즘을 배양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의식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누군가가 자기가 반대하는 파시즘에 대하여 명확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러한 진실이 실천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

 

그리스공산당은 인민들과 공산주의 운동의 영웅적 투쟁으로부터 역사적 진실과 가장 중요한 교훈을 강력하게 방어하는 것에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혁명운동의 투쟁으로부터 전략적 결론을 형성함에 있어서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활용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혁명운동의 실수와 약점을 용기 있게 드러낸다. 현실을 꾸며대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지 않다. 기회주의의 특성인 이상화(idealization)나 실수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호 비판 및 자기비판과 그리스공산당과 혁명운동의 적들의 중상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구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의도와 목적은 기회주의의 접근과는 정반대다.

한 세기적인 가치가 있는 경험, 인민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들과 희생들로 그리스공산당은 나찌파시스트 세력과 같은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독재에 반대하는 부단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생겨났으며, 기회주의자들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신자유주의 정책 같은 운영 형태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독점자본이 사용하는 형태의 하나이다. 그것은 또한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소유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방어한다. 특히 자본주의 공황, 빈곤, 실업과 통치하는 부르주아 계급 당의 쇠퇴 상황에서 부르주아는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채우기 위한 요새를 강화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찌 당을 활용한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이른바 “연대”로 부르주아 활동을 이용하는 파시즘은 실업자, 파산한 소부르주아 층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대중적인 세력들에게 올가미를 던진다.

그리스공산당은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가 자신들이 확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의회주의와 합법성을 폐지하거나 우회한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인민에게 폭로한다. 파시즘의 이해가 그것을 요구하고 그들이 필요한 존재라고 판단하면, 그들은 국가와 그 밖의 모든 형태의 폭력과 억압, 일체의 정치적 및 노동조합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적, 정치적 쿠데타를 감행하고 자기들이 만든 법을 보류시킨다.

그리스공산당은 노동자 권리와 인민의 성과물을 방어하기 위해,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은 독점자본과 자본주의 착취와 자본가 권력에 맞서는 투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파시즘 투쟁은 자본주의 독재의 의회주의 형태를 구하려고 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동맹자들과 기회주의 세력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노동자 계급 권력의 목표는 확고한 책임이 있어야 한다. 부르주아 권력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인민의 세력으로서, 반독점반자본주의 방향을 가진 사회적 동맹으로서 인민 동맹의 목표는 그 방향이나 내용이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방식만이 그 전망을 지키는 인민의 투쟁일 수 있다.

제국주의 전쟁은 제국주의 내부 모순의 심각한 첨예화로 발발했다. 20세기 동안, 세계는 두 차례나 세계적인 제국주의 전쟁의 화염에 휩쓸렸다.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 둘 다는 제국주의 내부의 모순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세계의 재분할을 위한 투쟁으로 인해 발발했다.

이러한 모순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 위기(1929-1933)와 맞물려, 쏘련의 존재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해졌다.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그 모순은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대립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직전이나 직후, 두 개의 제국주의 블록들, 파시스트 진영과 비파시스트 자본주의 국가들의 목표는 모든 인민들에게 등대였던, 최초의 노동자 사회주의 국가인 쏘련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이해 때문에 벌어진 수백 개의 국지전뿐만 아니라, 두 번의 세계적인 제국주의 전쟁은 전례 없는 만행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행위들로 이뤄진 수천의 대량 살인 범죄를 포함하여 인간성에 반하는 소름끼치는 제국주의 범죄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은 1차 대전을 능가했다. 그것은 2,194일 동안 지속됐고 2천 2백만 평방킬로미터 이상에 걸쳐 전개됐다. 1억 1천만 명 이상이 정규군에 속한 사병이었다. 전쟁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5천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리스에서 사망자는 405,000명에 달했다(그리스-이탈리아 및 그리스-독일 간 전쟁에서 기아, 사형집행, 전투로 인한 사망. 대다수는 테쌀로니카(Thessalonica) 등지에서의 강제수용소에서 수천 명이 몰살당했다).

독일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독일은 다시 강력한 제국주의 권력이 될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은 쏘련을 물리치기 위해,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 권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프랑스와 영국이 제공한 직접적인 지원 덕분에 독일의 거대한 경제적 군사적 권력이 확보됐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다. 독일의 첫 번째 군사 행동은 그들 국가들에 의해 허용됐다. 그 국가들의 금융 독점체들은 독일이 재무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과 계속해서 협력했다. 그들 정부는 그러한 행위를 묵인했다. 기업체와 함께, 가톨릭교회, 사회 민주주의, 보수당과 이른바 중도의 다른 부르주아 정당들은 히틀러와 무쏠리니를 지원했고, 전쟁 이후에 줄곧 독일 전범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비밀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다.

자본주의 위기와 빈곤이 자동으로 대중들을 급진적인 입장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파시즘이 획득한 대중적 기반을 통해 알 수 있다. 반대로 특정한 상황 하에서 대중들은 반동적인 대중 운동의 출현에 대해 계급적이고 정치적 의식에서 후퇴하거나 왜곡된 방향으로 이끌릴 수 있다.

일본이 만주를 공격했던 1931919일 첫 번째 군사 행동이 시작됐다. 몇 년 뒤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공격했다.

1936718,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에 맞서 프랑코 파시스트군사 행동이 부상했다. 그렇게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고 나서 내전은 1939년 봄 파시스트의 승리로 종결됐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파시스트 세력에게 막대한 규모의 군사와 무기 원조를 제공하면서 이러한 사태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또한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들인 영국, 프랑스와 미국의 위선적인 입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불간섭”과 파시스트 위험과 전쟁에 대한 “완화”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스페인 인민들에게 필수적인 전투 수단을 허용치 않았고, 프랑코와 그 동맹세력들을 도왔다.

사회민주당 정부 역할의 특징적인 사례는 (레옹 블룸(Leon Blum)이 그 정부의 수상으로 있었던) 프랑스 부르주아 인민전선 정부였다. 그런데 그 정부는 스페인 인민에 반대하여 공세를 취하고 있던 프랑코를 정치적으로 지원했다. 동시에 프랑스 부르주아와 그 당들과 가톨릭교회가 파시스트 조직(‘불의 십자가(‘Croix-de-Feu)’ 등)을 만들어 내고 강화하고 무장했던 그 시기에 파시스트 조직들은 방해받지 않고 남아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프랑스에서 인민전선(Popular Front) 정부는 프랑스 항구에 정박했던 스페인 군함을 프랑코에게 넘기고, 항구 사용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 금을 받았다.

반대로, 스페인 인민들에게 실천적인 방식으로 대응을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와 세력은 쏘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 진영이었다. 쏘련은 독일과 이탈리아 잠수함의 매복을 뚫고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무기, 식량, 의약품과 의류를 바다를 통해 공급한 주요 공급처였다. 쏘련은 또한 군사 전문가와 장교들을 제공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인 수백 명의 그리스인들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국제 의용병들은 특별한 기여를 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스페인 인민들 편에서 싸웠다.

1936년 11월 25일, 독일과 일본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맞서 반공주의 군사 협력 조약인 “반(反)-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다. 이와 나란히 1938년 3월 12일에 미국,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묵인했는데, 1년 뒤인 1939년 4월 12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1938년 9월 29일에는,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로 양도하는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협정은 한편으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수상인 체임벌린(Chamberlain)과 달라디에(Daladier)와 다른 한편으로는 히틀러와 무쏠리니 사이에 체결되었다. 체임벌린은 실제로 뮌헨 협정은 우리 시대에 평화를 보증하는 협정이라고 말했다.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은 쏘련과 체결한 전시에 군사 원조 협정을 거부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체결했던 상호 원조 협정은 인정받지 못했고 독일에 대항해 영국과 프랑스가 선포했던 전쟁은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가짜 전쟁 (Phoney War)”으로 알려졌다.

 

쏘련에 맞서 최전선에 섰던 나찌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는 반파시스트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쏘련의 부단한 노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사실은 그 국가들은 쏘련을 해치는 정책을 계속해서 취했다.

비파시스트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일이 가능한 속전속결로 쏘련을 공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숨돌릴 틈을 얻기 위해, 쏘련 지도자들은 1939년 8월 23일 구실을 만들어 쏘련의 모든 적과 이 협정을 체결했다. 그들 중에서 기회주의 국가들은 거짓말과 왜곡으로 진실을 쉽게 뒤집으려고 했다. 그들은 뮌헨조약과 반히틀러 전선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들을 포함하여 쏘련의 모든 예전의 평화를 찬성하는 노력들의 실패 이후에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승인되었던 사실을 숨긴다.

특히 폴란드에 관해 그들 국가들은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하기 3개월 전에, 쏘련이 전시에 상호원조협정을 제안했는데, 폴란드 정부가 그것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독일이 폴란드 영토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전진시키고 위협을 가했을 때조차 쏘비에뜨 군대가 영토 내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들은 1939년에 적군(赤軍)이 그 지역에서 철수했던 폴란드의 지역들이 쏘련의 영토였고, 그곳이 러시아의 혁명적 인민에 반대하여 맹렬한 전투를 벌인 뒤인 1918-1921년에 반동적인 폴란드 정부에 의해 점령되었던 지역이라는 것을 은폐한다. 폴란드는 10월 혁명에 대항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하기 위해 국제적인 제국주의 군사 개입이라는 “우호적” 상황을 부당하게 이용하였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Molotov-Ribbentrop Agreement)”은 21개월의 귀중한 평화를 보증했는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독일 공격에 비춰 전쟁 대비를 하는 데에는 아주 소중한 협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협정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그 협정을 위반했을 때까지 지속됐다. 독일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바르바로싸(Barbarossa)”라는 유명한 군사작전으로 쏘련을 침공했다. 쏘련을 수개월 안에 점령하여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박살내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살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단지 히틀러만은 아니었다.

한편,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프랑스를 공격했는데, 프랑스는 저항전 없이 6월 25일에 점령당했다. 그리고 독일이 유럽 대부분의 나라를 점령했을 때, 영국 부르주아 계급의 전술은 변화됐는데 체임벌린(Chamberlain)대신에 처칠이 영국 수상이 되었다.(1940년 5월 10일) 나중에 미국은 또한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한 뒤에, 독일-일본-이탈리아 추축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다른 것은 제쳐 놓고, 일본 독점자본의 이해는 극동에서 미국 독점자본의 각각의 이해와 충돌했다.

(1941년 7월 12일) 쏘련을 포함했던 “반파시스트 협정”이 창설되고 나서 3년 뒤인, 1944년 6월 6일에, 노르망디(Normandy, 편집자: 영국 해협에 면한 프랑스 북부지방) 상륙작전과 함께 추축국(the Axis, 편집자 주: 제2 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국에 대항한 나라들)에 대항하는 유럽에서의 두 번째 전선이 개시됐다! 이것은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와 쿠르스크(Kursk)에서 적군(赤軍)의 영웅적인 행위 이후에 벌어졌는데, 그때는 전황(戰況)이 “추축국”에 불리해졌을 때였다. 또한 1944년은 적군이 쏘련 밖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추격하고 유럽의 점령국들을 해방하기 위한 준비를 했던 시기였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적군이 베를린에 단독으로 입성할지도 모른다고 당연히 두려워했다.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적대가 반나찌-반히틀러 동맹이라는 틀에서도 약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제국주의는 결코 자신들의 전략적인 목표의 전망을 놓치지 않는다. 전쟁 상황에서 제국주의 계급들과의 어떠한 일시적인 동맹도 계급 기준을 희석시키는 쪽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그리스공산당은 침략자에 맞서는 저항 행동을 촉구했다

 

19401028,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전쟁을 선포하고 알바니아(Albania) 영토를 통해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릭스버그-메탁사스(Glixbourg-Metaxas) 독재는 이 정부에 지지를 보내고 묵인했던 부르주아 당들의 승인과 함께 영국과 협력하여 부르주아 권력임을 표명했다. 핀두스 산맥(Pindus Mountains)의 전투에서 그리스 인민들의 동원과 그들의 영웅적인 투쟁이 이 침공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

처음부터 그리스공산당은 메탁사스 독재에 의해 수천 명 당원들이 구속되고 추방당하는 심각한 타격을 당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침략자들에 저항하는 행동을 촉구했다. 1940년 11월 2일에 출판됐던 최초 공개장에서,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니코스 자하리아디스(Nikos Zachariades)는 그가 구속된 아테네에 있는 교도소에서 “노동자 계급을 위한 결과물이자 오늘날 고투(苦鬪)의 성취는 일체의 외국 제국주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민중의 문화로, 노동의 세상과 자유의 세상으로 된 새로운 그리스가 되어야만 하고, 될 것이다”라고 역설하면서 그리스 인민에게 이 투쟁에 전력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서 니코스 자하리아디스의 다른 두 편지에서 그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정확하게 규정짓고 인민군대가 쏘련의 지원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인민 스스로 영토 방어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이 두 편지는 니코스 자하리아디스에게 알리지 않고, 반역자가 교도소 당국에 전달했기 때문에 한 번도 출판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리스공산당의 “구 중앙위원회”는 니코스 자하리아디스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바로 처음부터 투옥된 공산주의자들은 전선에서 싸우기 위해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메탁사스 독재(Metaxas Dictatorship)가 거부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독일 점령자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전해졌다.

1941년 4월 27일, 독일군은 아테네로 진입했고 그리스는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라는 삼중의 점령 상태에 놓였다. 부르주아 정계의 일부는 점령자들과 공개적으로 협력을 선택했다. 또 다른 이들은 왕실과 같이 어마어마한 양의 국가 비축 금(金)을 가지고 (카이로, 런던) 해외로 도망쳤다. 다른 일부는 그리스에 머물었는데 장래의 전망에 대해 기회주의적 태도로 관망하며 투쟁을 멀리하고 있었던 반면에, 그리스민족해방전선-그리스인민해방군(EAM-ELAS)과 그리스공산당에 맞서는 공격을 위해 점령자들과 협력하면서 동시에 점령 반대 투쟁을 했다.

그리스공산당은 점령자들에 맞서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석방됐던 극소수 공산주의자들과 감옥에서 탈출했던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삼중 점령과 부르주아 권력이 인민들 사이에 패배주의와 무저항을 조장했던 난관 속에서도 저항운동을 발전시키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스공산당은 근본적인 선동자였고 그리스민족해방전선(EAM)을 지도하고 남성과 여성을 충원해 주었다. 그리스공산당은 이 투쟁에 가장 뛰어난 유소년들을 충원해 주었다. 저항운동 초기에, 그리스노동자민족해방전선(EEAM)은 (1941년 7월 16일) 점령이 시작된 뒤에 즉각적으로 결성됐고 1941년 9월 27일에 그리스공산당은 그리스민족해방전선(EAM)을 창설했다. 그리스민족해방전선(EAM)과 그 조직들(그리스인민해방군(ELAS), 범그리스통합청년조직(EPON), 그리스단결(Ethiniki Allilegi), ETA, 인민투쟁방위조직(OPLA), 그리스인민해방해군(ELAN))은 노동자 계급과 인민 층의 거대한 다수를 결집시켰다.

그리스민족해방전선은 인민의 저항과 기아로부터 인민을 구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그리스인민해방군(ELAS)은 아주 중대한 무장투쟁을 발전시켰다. 새로운 권력의 근간은 해방구(지방정부, 인민재판)에서 만들어졌다. 인민의 문화적 지배권은 이러한 상황에서 번성했다. 1944년 3월 10일, 해방구를 운영했던 중앙정치기구인 인민해방정치위원회(PEEA)가 형성됐다.

그 기구는 (1944년 4월 30일) 코리샤데스(Koryschades)에서 그 본부를 보유하고 있었던 “국가평의회(National Council)”를 구성하기 위해 (1944년 4월 23일) 점령 상황에서 선거를 조직했다. 여성들과 18세 이상 젊은이들이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약 180만 명이 투표를 했다. 1936년에는 100만 명이 투표에 참가했었으나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민족해방전선의 활동 덕분에, 독일이 인질로 체포했던 사람들을 예외로 하면, 독일 공장들에 보내져 노동을 한 노동자는 한명도 없었다. 그리스민족해방전선 덕분에, 그리스인민해방군이 8개에서 12개의 독일군 사단을 그리스에 잔류하게끔 하는 동안, 쏘련에 반대하는 전투에 투입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그리스민족해방전선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쳤다. 카이스아리아니(Kaisariani), 쿠르노보(Kournovo), 아크로나프필리오(Akronafplio), 콕키니아(Kokkinia), 하이다리(Haidari), 아이스트라티스(Ai-stratis), 몬노덴드리(Monodendri), 파블로스 멜라스(Pavlos Melas) 캠프는 이러한 희생이 발생했던 극히 일부의 장소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민족해방전선과 그리스인민해방군이 인민을 위한 아주 약간의 급식시설과 빵부스러기를 지급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의 정당한 대의명분에 복무하기 위해 제국주의와 무장투쟁에 돌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시리자(SYRIZA)가 정치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옹호하고 나토, 유럽연합,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기구들과 동맹을 계속해 나갈 때, 그리스민족해방전선 투쟁의 증명으로써 정부에 대한 우세를 보여주는 것은 시리자에게는 도발이고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리스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전략으로부터의 결론

 

이러한 인민 대중 투쟁은 최종적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 투쟁에 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공산당은 저항투쟁의 결과로써 그리고 인민투쟁의 결과물로써 노동자 계급 권력획득이라는 문제를 전략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충분하게 제기하지 못했다. 그리스공산당은, 적어도 주체적인 요인이라는 견지에서는, 노동자 권력에 대한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과정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스공산당은 전쟁과 파시즘-나찌즘에 반대하는 투쟁을 노동자권력을 위한 투쟁과 분리시켰다.

“협력자들”의 군사조직에 반대하여 또 다른 정치적 군사적 충돌을 별도로 하면, 어쨌든 그것에 계급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민족해방 요소들과 인민투쟁의 계급적 내용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그리스인민해방군과 그리스민주민족연맹(EDES)과 국가와사회해방(EKKA) 같은 반 히틀러 친영국 조직들 사이의 군사대립에 의해 확인되었다. 영국과 지속적인 갈등은 또한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중동에서 반파시스트 군사 기구(ASO)에 대항하고, 인민해방정치위원회(PEEA)와 그리스민족해방전선-그리스인민해방군(EAM-ELAS)에 대항하는 그리스 부르주아 정부의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투쟁으로 이어졌다.

(1943년 2월 2일)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완패한 후에 특히, 영국과 랠리스(I.D. Rallis)가 이끄는 부역 정부를 포함한 그리스 부르주아 계급의 사고와 행동은 그들이 어떻게 전후/점령 후 사태 전개를 통제할 수 있을지,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에서 부르주아 권력을 지킬 수 있을지에 집중됐다.

이러한 이유는 분열된 부르주아 계급과 대중적 신망을 완전히 상실한 부르주아 정치권력이 그리스공산당이 이끄는 강력한 무장인민 투쟁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근본적인 선택은 뿌리 깊은 계급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민주민족연맹(EDES)과 치안대(Security Battalions) 설립을 지지했는데, 그 부대는 그리스민족해방전선-그리스인민해방군(EAM-ELAS)이라는 무장된 인민운동에 대처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점령 정부가 만들었다.

1944년 4월에 부르주아 세력은 카이로에 있는 그리스 정부와 함께 중동에서 그리스 군을 만들어서 영웅적인 반파시스트 군사 기구(ASO)에 반대하는 억압을 자행했는데, 그것은 그리스 장교, 군인과 선원 등 2만 명의 반파시스트 전사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것이었다. 1944년 12월 영국과 부르주아 국가에 반대하는 무장투쟁 같은 아테네 인민의 영웅적 투쟁은 이러한 현실과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에 대한 필요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스공산당이 노동자 권력의 획득을 위한 무장인민 운동의 투쟁을 전진시킬 수도 있었던 기회를 잡지 못했던 더 깊은 이유는 자기 전략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I, 코민테른)의 전략에서 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다. 혁명의 성격과 관련하여 공산주의 인터내셔녈의 방침 전반, 독일에서 파시즘 권력의 부상 이후에 다가오는 전쟁의 성격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입장 전반에 걸친 이데올로기와 전략적 통일에서의 문제점들이 그리스 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해산(1943년 5월)은 통일을 둘러싼 문제와 그 문제와 상관없이 그것이 유지되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둘러싼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의 조건에서 모든 공산당들에 대한 통일된 과제로써,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과 외국 점령자와의 투쟁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통일된 방식으로 공산당의 혁명 전략을 갈고 다듬는데 있어서 중심이자 잠재적 중심인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상실하도록 했다.

1941년-1944년 기간에 개최됐던 그 시기의 문제가 있는 전략은 (1934년)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CC) 6차 전원회의 결정,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차 대회) 결정과 1935년 그리스공산당 6차 대회 결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전략노선은 “인민 통치와 사회주의”의 강령적 선언에서뿐만 아니라, (1942년) 2차 전국회의에서 표명됐다. 그리스공산당 지도부의 잘못된 정치노선은 레바논과 카세르타(Caserta) 협정처럼, 이 기초 위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협정은 또한 부르주아 권력과 타협하는 특징이 있었다.

자본주의 서방에서 좀 더 일반적으로, 공산당은 제국주의 전쟁이나 민족해방 투쟁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을 형성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운동의 전략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일련의 나라들에서 반파시스트 민족해방 성격 안에서 억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전망이 자본주의 야만성에 대한 유일한 대안의 해결책이라는 것과 같은, 권력의 문제를 의제화 했어야 했다.

전쟁은 많은 나라들 내에서 계급 모순의 중대한 첨예화라는 특징이 나타나는 상태를 만들었지만, 적군이 제공하는 결정적인 지원과 인민 운동에 전반적인 지원 덕분에 반파시스트 투쟁만이 중부와 동유럽 나라들에서 부르주아 권력을 전복할 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역사를 다시 쓰려는 기도

 

특히 (1989-1991) 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반혁명의 승리 이후에, 강력하게 통합된 운동의 규모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체제의 성과물을 은폐하기 위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기여를 지우려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 대중적 방식으로 젊은 세대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허위 선전으로 그들을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반공주의는 1989-1991년 반혁명이 초래한 패배에서 벗어나려는 인민을 방해하기 위하여 자본권력이 벌이는 전 세계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활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국주의 중심 세력들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과 정맥에서 발생했고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일부 광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본질 그 자체로부터 나타난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반대로 쏘련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근절하고,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에 가담하게 하려는 동기를 철폐했다. 쏘련만이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행위에 참가한 유일한 국가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쏘련에서 자본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고 이 때문에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반혁명 세력의 희망을 되살렸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다.

그들은 인류에 대한 범죄가 추축국(the Axis) 권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부르주아 국가 정부에 의해서도 역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숨긴다.

미국은 그렇게 해야 할 어떠한 군사적 필요도 없이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해서 가장 거대하고 끔찍한 그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

(1945년 2월 13-19일) 미국-영국 제국주의 세력이 드레스덴(Dresden) 폭탄을 투하한 것은 전쟁 결과에 어떠한 군사적 중요성도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가장 전형적인 범죄 중 하나였다. 폭탄은 도시를 돌 더미 폐허로 만들었고 1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부르주아 진영은 쏘련을 중상하기 위해 추악한 거짓말과 위조를 한다

 

반공주의 “중심 세력들”은 저항을 “테러리즘”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한 것에 대한 본보기로 나찌 부역자들을 처벌한 것으로 발표한다. 부르주아 진영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에게 반대하여 유혈적인 난동을 저지르는 것으로부터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치안대(Security Battalions)”를 만들고 점령자들에게 부역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주장한다.

반공주의 중심 세력들은 쏘련을 중상하기 위하여 추악한 거짓말을 위조하고 나찌의 비방도발을 이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의 특징적인 사례는 이른바 “카틴 숲 학살”로 불린다. 다른 나라들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정부와 조직들은 1941년 가을 이후에 나찌가 점령한 지역에서 폴란드 장교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쏘련을 비난한다.

나찌 선전상, 괴벨스(Goebbels) 자신이 일기장에서 독일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했는데, 발견된 총탄은 독일제였으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쏘련에 대한 중상모략 선전을 계속하기 위한 지시들을 내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제국주의자와 기회주의자 허위선전(propaganda)은 심지어 쏘련 인민들이 쏘련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가한 테러 때문에 싸웠고 저항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비이성에 가까운 반공주의이다. 쏘비에뜨 인민 대다수가 보여줬던 거대한 참여의 물결, 영웅주의와 희생은 오직 의식적인 참여와 훈련의 결과로만 될 수 있었고 바로 그 결과였다.

테러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었고, 생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수천 개 공장과 기업들을 서부지역에서 쏘련의 내륙지역까지 이전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 인민들이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독일군이 지역을 파괴했을 때 전쟁 와중에 그들 인민들은 파괴된 지역을 재건했다.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전선에서 싸웠던 남성을 생산에서 대신해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00만 명 이상의 여성들이 콜호즈(협동농장)에서 운전자와 정비사가 되었다. 100만 명이 전선과 빨치산 부대 투쟁에 참여했던 동안에 20만 명 이상이 생산단위를 책임지고 콜호즈의 책임자가 되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지지를 받는 부르주아 계급은 (1945년 2월 11일) 쏘련과 미국-영국 사이에 이른바 얄타에서 협정을 맺었던 “세계의 분할”에 대해 허위선전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생산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그랬듯이, 쏘비에뜨 지도자들, 적군과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 국제주의를 중상모략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 개입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1944년 12월과 1944년-1949년 사이의 인민무장투쟁을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투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민주군(DSE)의 투쟁이 그리스에서 계급투쟁의 이정표였고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1944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공 히스테리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유럽연합은 “인민 승리의 날”을 없애고, 5월 9일을 “유럽의 날”로 제정했다! 적군에 의한 독일군 추방과 그 나라들의 해방을 점령이라고 딱지를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대자들과 주로 적군으로 전향했던 독일군 탈영병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필연적으로 “국치(國恥)”로 간주되었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제2차 대전 동안 나찌와 결탁했던 발트 해와 우크라이나 국가들에서의 파시스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고 변호하려는 시도를 지원한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그들이 적군과 쏘비에뜨 권력에 반대하여 싸웠기 때문에 그들을 “민주 전사”라고 호명한다. 그리고 일명 “우크라이나 해방군”과 다른 유사한 조직으로 잘 알려진, 나찌 친위대(SS, 슈츠스타펠(schutzstaffel))가 파시스트 범죄를 저질렀는데, 유럽연합과 미국은 그들을 “애국자”와 “민주주의자”로서 젊은 세대에게 보이게 하려고 한다. 발트 해 나라들에서 공식 허위선전은 강제수용소를 “감화원 센타(reformatory centres)”라고 보이게 하는 정도까지 되었다.

최근 러시아와 경쟁 구조 내에서 유럽연합과 미국은 공개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의 사태전개에 개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정학적인 구도를 강화시키기 위해 파시스트를 지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나찌즘은 계급투쟁의 발전으로만 대항할 수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파시즘에 대한 인민승리 70주년에 경의를 표하며 그리스 노동자 계급과 연금 생활자들, 청년들이 나찌 범죄자 황금새벽당(Golden Dawn)을 단호하게 규탄하고 고립시키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라고 알려진 반동적 이론의 매개물이다. 그런데 그들은 민족주의로 무장한 유토피아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의 이상과 슬로건의 혼합물이다. 그들은 인민과 인류를 도살했던 파시스트 히틀러 정권과 점령군들과의 협력자였던 1967~1974년 군사 독재 치안대를 선례로 따르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와 인민운동에 반대하여 노골적인 반공주의와 증오를 조장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와 인민운동에 반대하여 범죄단체를 조직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국가 기관의 일부분과 특히 억압 세력과 범죄 네트워크와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일부 자본에 의해 지원받고 있다.

캐라치니(Keratsini) 출신인 34세 파블로스 피사스(Pavlos Fissas)의 살해자와 페라마(Perama)에 있는 그리스공산당원들과 간부들에 대한 공격은 황금새벽당의 진짜 범죄적인 모습을 드러내 주는 이민자, 상인, 노동자, 청년에 대한 일련의 범죄적 공격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에서 황금새벽당의 부상과 그 당의 영향력의 증대는 운동이 반자본주의 반독점 방향에서 정치 세력들을 재편성하지 못한 시기에, 수십 년 동안 부르주아 정치 체제의 기둥으로써 복무해온 당들의 급속한 영향력 상실과 함께, 깊고 장기적인 자본주의 경제공황 상황에서 벌어졌다.

황금새벽당은 공황의 진정한 원인과 인민의 권리에 반대하는 흉포한 공격과, 자신들의 파시스트 악선전(demagogy, 데마고기)을 위한 적절한 지원과 신봉자를 얻기 위해 필요한 유럽연합 등의 역할을 은폐하면서, 시리자 내 “좌파”에 의해 사용되었던 모호한 “양해각서 반대”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그들은 “도둑정치(kleptocracy)”, “사채업자(loan sharks)”, “장물 정치인(thieving politicians)”에 대한 잘 알려진 슬로건들을 사용했다.

게다가, 그들은 “당들은 꺼져라, 노조는 꺼져라”라는 반동적이고 혼란을 야기하는 슬로건에 의해 전개되는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고 전개하였다. 황금새벽당은 노동자와 인민 투쟁에 대해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조장된 반공주의와 증오로 강화된 존재다. 그들은 이민자 문제에 관한 부르주아 당들의 악선전(demagogy)과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적 관념이라는 “양 극단”의 반동적 이론으로 이익을 얻었는데,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과 간섭, 자본주의 시장의 불균등 발전과 국제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체제의 쇠퇴에 의하여,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동일시하고 “극단주의”와 “급진주의”에 대항할 조치를 요구하는 유럽연합의 지침에 의하여 배양되었다.

인민과 그 운동은 살인을 저지르는 공격과 관련하여, 황금새벽당을 이끄는 핵심과 실제로 그 결정을 시행하는 핵심 둘 다를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족에 빠져서는 안 된다. 누구도 대중 매체의 상당한 부분에 의해 황금새벽당이 도발적으로 조장되었고 꾸며졌으며 정치 체제의 개혁을 위한 다양한 계획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한 시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리자그리스독립당(SYRIZA-ANEL) 연립정부는 또한 다양한 의회주의 절차를 이용하는 것을 핑계 삼아 황금새벽당과 마주앉아 인내의 자세를 조장하고 있는 양당의 핵심으로써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한다.

황금새벽당과 나찌 활동은 시리자, 사회당, “포타미(POTAMI)” 같은 다른 정치세력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처럼, 이른바 입헌적”, “의회적그리고 민주주의적구호들에 대한 이론을 사용함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능의 개선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제압될 수 없다.

반동적인 부르주아 국가는 나찌즘의 뿌리와 가지를 근절할 의지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협조하는 반파시스트 전선이라 불리는 노동자인민 운동 동맹으로도 근절할 수 없다. 오직 독점자본 권력과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목표를 가진 계급투쟁의 발전, 즉 인민동맹만이 나찌즘에 대처할 수 있다. 대중투쟁과 인민과 청년의 결단력만이 최종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황금새벽당을 불법화하고 근절할 수 있다.

파시즘-나찌즘이라는 독극물에 맞서 교사,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폭로하고 학교, 청년과 사회에서 더 일반적으로 싸우고 항체를 만들어 낼 의무와 필요성이 있다.

 

유일한 대안은 사회주의공산주의이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70년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자본주의 야만성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론적 입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착취로부터 노동자 계급의 해방, 새로운 사회관계의 수립,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중앙계획, 사회적 생산과 사회 서비스 기구와 경영에 대한 노동자의 적극적인 참여이다.

지금까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와 지금까지 우리 당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자본주의 권력의 전복을 향해 나아가는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자 인민의 반란을 지도하기 위한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및 조직적 준비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의 경험은 완전한 준비는 비혁명적 상황에서 준비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다음과 같다.

최근 경제적 및 정치적 투쟁은 상황이 역동적이든 후퇴로 특징 지워지든 것과 상관없이 주요한 혁명적 정치 과제에서 분리될 수 없다. 노동자 권력의 목표는 깊고 장기화되는 경제 공황과 제국주의 전쟁, 나찌-파시스트 조직, 국가 폭력의 증대 등에 의해 공산당과 노동운동에 맞서는 공공연한 테러리즘 때문에 노동자 계급과 인민층의 생활조건의 악화에 대처한다는 미명 아래, 자본주의의 지형에서 어떤 과도기적인 정부 목표로 이탈해서는 안 된다. 최근 경제 위기는 시장의 분할과 에너지 자원의 통제와 수송로를 통제하기 위한 지정학적인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인민에 반대하는 공세가 증가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과 그들의 다양한 제국주의 동맹들 사이의 경쟁과 모순을 첨예하게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중동,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 기타 등등 지역에서 모순의 첨예화와 제국주의 간섭과 전쟁의 확대는 세계 도처에서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서 광범위한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을 훨씬 더 강화해가고 있다. 그리스에서 심각한 위험이 만들어지거나 조장되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즉,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군사 체계 참여, 유럽연합의 공세적 계획과 간섭, 제국주의 활동과 전쟁에서 그리스의 지정학적 역할을 강화하려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목표. 거듭되는 터키의 도발과 미국-나토의 용인과 지원으로 벌어지는 에게해(Aegean)의 혼란 지형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부단한 경쟁. 이스라엘 등과 군사협력의 발전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 부르주아 계급이 어떻게든 개입했거나 개입될 수 있는, 더 넓은 지역에서 일촉즉발의 많은 전쟁의 존재 등이다.

그리스공산당은 국내외적 조건을 고려하여 예를 들어, 동지중해, 발칸, 중동에서 형성된 다음과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와 인민 운동은 그리스 부르주아 계급이 의도하는 구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하며, 어떠한 가능한 다른 선택들을 따르지 말아야 하며, 스스로를 제국주의 전쟁제국주의 평화의 두 측면의 개요의 구조 내에서 부르주아 계급, 당들, 기구들의 여러 다른 입장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 계급과 인민층의 견지에서 그리스의 국경을 방어하고 주권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 권력을 전복시키는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 제국주의 전쟁, 즉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전쟁에 그리스가 개입된 경우에, 그리스공산당은 국내외 침략자 쪽 부르주아 계급을 완전하게 패배시키고, 실제로는 그것을 권력획득과 연결시키기 위해, 모든 형태에서 노동자 인민 투쟁의 독자적인 조직을 이끌어야만 한다.

그 발전들은 급격하게 변화될 상황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개량주의자들과 기회주의 영입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나찌-파시스트 범죄 위협에 반대하여 노동자 인민 운동을 강화할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전천후 당으로서 그리스공산당의 인내와 능력은 노동자계급의 동맹자들과 함께, 착취와 공황과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그 자신을 해방시키게 될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만의 최대 장점을 전면에 내세우게 하는 전제조건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공산당은 창당 100주년이 다가옴에 따라, 자신의 목표로 설정하고 당의 능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하고 전 작업장과 부문에서, 전체 마을과 도시에서 다음 과제를 수행하려 한다.

그리스공산당은 허위선전으로부터 초연하게 이 활동을 분리하지 않고 투쟁의 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착취적 사회관계의 폐지라는 노동자 계급의 영웅적 과업을 위해 투쟁한다. 어떠한 힘의 역관계의 구조 속에서 주요한 정치적 과제로 모든 경제적 및 정치투쟁을 결합시키기 위해 혁명적인 노동자 권력을 위해 투쟁한다. 반공주의 공세를 격퇴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우리는 인민들의 반파시스트 투쟁에 경의를 표하며, 그로부터 영감을 받고 배운다.

우리는 훨씬 더 긴박하게,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지속해 나간다.

그리스공산당은 당의 가장 뛰어난 아들딸들의 피를 바쳐 노동자 계급과 인민의 정당한 근거,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당의 헌신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낙관주의와 결단성을 가지고 진군한다.

21세기는 공산주의 운동이 소생하는 세기가 될 것이고 새로운 역동성과 승리하는 사회주의라는 우리의 확신은 깊고 과학적으로 정립되었다. 우리의 시대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대이다.

불리한 힘의 상관관계는 우리를 낙담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역전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서, 노동자 계급 속에서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은 앞으로 대결에 돌입하여 더욱 더 경험을 쌓고 더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우리는 앞으로 다음과 같은 오직 하나의 목표, 즉 시대의 도전을 충족시키고, 반인민 정치노선에 반대하여 싸우게 되고 자본주의의 야만성, 전쟁, 공황, 착취, 빈곤, 실업과 압제를 종속시키게 될 위대한 인민의 반자본주의 동맹을 건설하는 것을 발전시킨다.

과거 세대들의 투쟁과 헌신을 옹호하기 위하여, 노동자 인민의 승리를 통해 인민과 청년의 꿈과 당대의 요구를 위한 길을 닦고 실행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위하여!

 

 20154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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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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