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적도서 ‘어머니’를 읽고

– 김지혜(활동가)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거나, 시국이 집권세력에 불리하게 돌아갈 때마다 나오는 뻔한 카드가 하나 있다. 바로 여론몰이용으로 쓰는 간첩단 (조작)사건과 진보진영에 대한 침탈이다. 지난 7월 인문·사회과학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사이트가 국가보안법의 침탈을 당했다. 서울경찰청 소속 보안수사팀은 ‘계급,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노동, 투쟁’ 등의 단어가 들어간 파일들을 복사했는데, 압수도서의 목록을 보니 현재 서점 및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과 노동조합의 회의 자료들뿐이다. 그 중에는 막심 고리키의 대표작 ‘어머니’(하서출판사, 김준곤 번역)도 포함되어 있다. 풍문으로 들은 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는 ‘어머니’가 왜 이적도서가 되었을까?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심정으로 ‘어머니’를 읽었다. 1900년대 러시아의 지옥 같은 공장생활을 묘사하며 ‘어머니’는 시작된다.

지옥 같은 삶

“하루하루는 공장 생활과 함께 흘러가 버린다. 기계는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의 힘을 사람들의 육체에서 빨아먹고,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사람들은 자기 무덤을 향해 한 걸음 더 옮겨놓고 있었지만 그들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휴식의 즐거움과 답답한 선술집에서 맛보는 기쁨을 알고 있으므로 만족하는 것이다.”

어머니 펠라게야 닐브로나는 항상 참고 살았다. 아니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결혼도 강압적인 남편에 의해서 하고, 늘 술에 취한 남편에게 맞거나 혹은 맞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인간이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주변의 다른 여자들의 삶도 비슷했다. 남자들은 늘 어울려 술 마시고 싸우고 분해서 울다가 아침 사이렌에 맞춰 공장으로 일 하러 나갔다. 그리고 휴일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갔다. 더러운 개울물이 흘러가듯 단조로운 삶은 반복되었지만 누구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한탄만 할 뿐, 어째서 삶이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가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앞에는 아들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얼굴로 이야기하는 아들의 말이 모두 다 공감이 되어 그녀의 가슴은 아들을 자랑하고 싶은 감정으로 꽉 차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생활을 바르게 이해해 주고,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머니를 동정하고 있다. 어머니를 동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들 파벨은 다른 청년들과 어울려 분탕질하는 대신 책을 보며 공부하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온 젊은 남녀들과 어울려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동네에서 골칫거리로 소문난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만족스런 마음과 혼란스런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들이 젊다는 점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 때문이었다. 진실을 알게 될수록 두려운 마음이 같이 생겼다.

눈 뜨는 사람들

“삶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어요. 보세요, 이렇게 아저씨가 허물없이 저희 집에 오게 된 것도 생활의 한 단면이잖아요. 한평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우리의 생활을 조금씩 단결하도록 하고 있어요. 적당한 시기가 오면, 모든 인간은 단결하게 될 거예요! 삶은 지금은 우리에게는 부당하고, 괴로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그 쓰디쓴 의의를 깨닫게 해 줄 겁니다.”

파벨과 그의 동지들은 공장의 근로조건에 대해 날카롭고 분명하게 묘사한 전단을 뿌리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단결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와 남부 러시아에서 있었던 파업소식을 전했다. 또한 신문-러시아 사회민주당 기관지-발행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즈음 소택지 기금사건으로 공장 노동자들이 분노하였는데 집회에서 파벨의 발언으로 노동자들은 동요하였다. 그 일을 계기로 파벨은 헌병대에 잠시 끌려가고 파벨을 대신해 어머니가 유인물을 공장으로 나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누구도 늙은 여인이 유인물을 나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마음은 아들과 그 동지들의 활동에 대한 이해로 점점 가득차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같은 반역자를 모두 가엾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심장은 몇 개가 있어도 모자라요.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때가 되면 자식들도 자신의 밥벌이를 시작해서 그들 또한 지루하게 그러한 생활을 계속해 가지요. 인간의 이성을 묶은 쇠사슬을 끊는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힘에 알맞게 그 일을 시작한 셈이에요.

…저는 농민들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킬 겁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깨닫기만 한다면 자신들의 길을 알아서 개척할 수 있을 겁니다.”

고리키가 이 글을 쓸 당시는 1905년 ‘피의 일요일’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당시의 러시아는 짜르 전제제도 하에서 부르주아지, 지주, 헌병 등이 한 패가 되어 민중의 대다수인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유행하며 러시아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의 흐름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한 인텔리 계층 및 선진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매 투쟁들마다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희망찬, 험난한 미래

“사람들이 갈 길에는 아직 많은 슬픔이 있어요. 사람들은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거구요. 하지만 이 모든 고통과 피는 내 가슴과 머릿속에 있는 희망에 비하면 그 가치가 얼마 되지 않아요.

민중이 사랑으로 어우러지는 바로 그 때를 앞당기기 위해 인간을 증오해야 할 일도 생기는 거야. 삶의 발전을 방해하고 인간을 돈으로 팔아넘기며, 그 돈으로 자신의 안위와 명예를 사려는 놈은 해치워 버릴 필요가 있어. 정직한 사람들 앞에 유다가 떡 버티고 서서 모두를 배반할 날을 꼽고 있는데도 그 놈을 해치워버리지 않는 한, 나 자신이 유다가 되고 말 거야!…… 그게 바로 삶인 걸 어쩌겠나. 나도 지금의 삶을 거부하려 했지. 이러한 생활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어. 놈들의 피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을 테니까. 놈들의 피로는 무엇 하나 창조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피가 큰 비처럼 대지를 적시는 날. 진리는 훌륭하게 성장해 갈 것이고 놈들의 썩은 피는 흔적도 없이 지워져 갈 거야…… 만일 필요하다면 난 죄를 뒤집어쓰고 또 그래야 한다면 나 자신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자기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될 때도 있지. 그러니까 모든 마음을 완전히 내던지고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두어야 해. 사업을 위해서 생명까지 버린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야!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한 사람들은 혁명만이 이 탈출구 없는 지긋지긋한 삶의 해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이 결코 쉽거나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 하나의 희망-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것임을 스스로 다짐한다. 어머니는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따듯한 시각으로 아들 파벨과 그의 동지들을 바라보면서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점점 공감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활동들을 하게 된다. 어머니는 일생을 인내하는 삶을 살았고, 헌병들에게는 ‘할멈’이라고 불리며 모욕당하지만 아들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알고 나서는 점차로 혁명가로서의 모습을 갖춰간다. 이 소설은 어머니라는 인물의 사상적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다. 펠라게야 닐브로나는 처음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표면적 모습이나 행동에 대한 판단만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 행동의 이면에 대한 이해와 혁명에의 열정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어머니는 혁명사상을 접한 뒤로 변증법적으로 변화·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오해

“그런 자들은 결국 쓸모없는 바보들이니까요. 경관, 헌병, 그리고 첩자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지만, 그놈들도 우리와 똑같이 피를 빨아먹히고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못 받고 있어요! 어찌보면 같은 처지죠! 그런데도 서로 칼날을 겨누게 하여 공포에 눈이 멀게 되고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지고 짓눌러서 피를 빨아먹은 끝에 서로가 맞부딪쳐서 서로를 두들겨 패도록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을 무기나 곤봉이나 돌과 같이 취급해 버리고 ‘이것이 국가이다!’라고 떠들어 댄다구요.”

맑스는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하고 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인류는 잉여생산물에 따른 사유재산제가 성립한 이후로 그 형태에 관계없이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다. 물론 그 국가는 가진 자들의 국가이다. 그러면서 국가가 국민을 지켜준다는 교묘한 이데올로기 선동을 통해 가진 자들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죽도록 두들겨 팼다. 그런 국가의 손과 발 역할을 하는 사람들 또한 피지배계급인데도, 애국심에 눈이 멀어 혹은 먹고 살기 위해 자기가 하는 짓이 자기 계급을 갉아먹는다는 것조차 모른 채 쓸모없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여러분! 이 지구상에는 유태인이나 독일인, 영국인이나 타타르인 등 가지각색의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일은 믿지 않아요. 단지 두 종류의 인간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사이가 좋아질 수 없는 두 개의 종족, 즉 부자와 가난뱅이입니다. 인간은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여러 가지 다른 말들을 구사하지요. 그러나 부자인 프랑스인, 부자인 독일인, 부자인 영국인들이 노동자들을 어떤 식으로 다루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 놈들이 모두 노동자들에게는 도둑놈들이고, 목구멍에 뼈다귀라도 처박아 주고 싶은 놈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한편에서 보면, 프랑스의 노동자도, 타타르나 터키의 노동자도 역시 우리들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개새끼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메이데이 행진을 계획한 파벨과 동지들은 공장노동자들과 주민들의 대열의 선두에 서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인터내셔널의 외침을 전하고 있다. 어떠한 인간을 아는데 있어서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인종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결국 그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유지하느냐, 즉 다른 이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착취자인지 아니면 다른 이를 먹여 살리며 살고 있는 피착취자인지가 중요하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족쇄를 푸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행진에서 파벨은 붉은 깃발을 올리며 ‘노동자 만세! 사회민주당 만세!’를 외치고 군중들은 열광한다. 곧이어 경관들이 나타나 욕설과 폭력으로 행진을 해산시키고 파벨을 포함한 여러 명을 연행해 가지만, 어머니는 남아 아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하며 잡혀간 이들을 외면하지 말 것을, 밝게 빛날 새날을 향해 나아갈 것을 외친다. 한 손에는 부러진 깃대의 토막을 짚고서.

어머니는‘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들은 벌써 보답을 받고 있어요!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삶을 찾아 냈어요. 온 정성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이 이상 대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우리를 찾아와서 언제나 똑같은 것을 이야기해요. 인간에 대한 모욕에 관해서 말이에요. 그 모욕에 사내의 영혼이 몽땅 들어있어요. 그 모욕에 눈알이 뽑혀서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사람처럼 말이예요’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거요? 그런 못된 장난기로 주인에게 돈을 물 쓰듯 쓰게 하기 위하여 매일매일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다가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니오.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건가요?’”

이제 어머니는 감옥에 들어간 아들을 대신해 다른 지역을 다니며 신문을 전하고,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수감된 동지의 탈옥을 돕는다. 점점 기도를 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어머니는 모욕당했던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꿔야 하고 그것은 기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행동으로 바꿔야 함을 아는 것이다.

올해 맨부커상 수상으로 유명해진 ‘채식주의자’(한강 지음, 창비출판사)는 구조의 잔인한 폭력과 모욕 앞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대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잠깐만, 그런데 그것을 대응이라 할 수 있는가? 자기 파괴의 결과는 무엇인가?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폭력적인 사회 일반의 상식에 맞서 육식을 거부하고, 속옷을 안 입고 다니며, 점점 사람들과 괴리된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당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자체가 주변인들에게 불편과 안타까움을 자아낼 뿐, 애초에 폭력의 주체인 구조 자체에는 어떠한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구조가 바라는 것 아닌가? 다른 말로 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구조는 개인에게 끊임없이 폭력과 모욕을 가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혼자 조용히 삭히길 바라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알고 있다. 아들과 그 동지들의 활동은 헛된 것이 아니며, 펠라게야 닐브로나 자신의 활동 또한 진짜 인간으로서의 삶을 향한 한 걸음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선두에서는 강탈당한 관의 덮개가 쭈굴쭈굴해진 리본을 단 채로 허공을 둥둥 떠내려가고, 기마경관들이 그 옆을 흔들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보도를 걷고 있었다. 관은 빽빽하게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어머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군중은 모르는 사이에 그 수가 늘어나서 거리를 가득 메웠다. 군중의 뒤에서도 잿빛의 기마경관 모습이 높이 보였으며, 그 양 옆에는 경관들이 칼에 손을 얹은 채 걷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어머니의 눈에 익은 스파이들이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모두의 얼굴을 탐색하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그의 유지를 잊지 맙시다. 우리는 일생을 걸고 우리 조국의 모든 재액의 근원이며 조국을 짓누르고 있는 악의 무리, 즉 전제정치를 매장할 무덤을 끊임없이 파도록 합니다!

이고르는 감옥에서 병에 걸려 출소한 후 죽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농담을 던지며 어머니와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의 죽음을 많은 동지들이 슬퍼했지만 그는 그냥 가버린 것만은 아니다. 그에 대한 동지적 존경, 그의 사상활동에 대한 추억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활동이 죽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군중이 몰렸으나 그것조차 기마경관은 해산시키고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책을 읽으며 눈물이 흘렀다. 아직도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싸늘하게 계신 백남기 열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설속의 군중들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라!’고 외쳤고, 현재의 민중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외친다.

반란, 사회주의, 정치

“어머니는 전에 듣기만 해도 자기가 벌벌 떨었던 반란, 사회주의, 정치라는 말을 보통 서민의 입으로부터 듣는 기회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그런 말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우스갯소리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한결같은 의문이 감추어져 있었다. 또한 증오심에 차서 토해낼 때에는 공포까지 깔려 있었다. 막혀 있는 어두운 삶 위에 느리기는 하지만, 넓은 파문을 일으키며 동요가 퍼져나갔고 잠자고 있던 사상이 눈을 떴다. 그날그날의 사건에 대한 습관적이고 안정된 태도가 흔들려왔다.”

어머니는 파벨의 재판이 언제 있을지 기다리지만, 그 재판의 결과가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본인 또한 이런 활동을 하다 잡혀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영웅적이고 밝은 것을 그 한 몸에 가득 안고 있는 것 같아 조용한 기쁨과 희망이 넘쳐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점점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혁명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당시 레닌은 국외에서 사회민주당을 지도하는 상황에서, 신문을 혁명 사상의 주된 보급수단으로 이용했었다. 어머니의 활동은 신문을 각 지역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혁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우리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는 사유재산제의 적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제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서로 무기를 들게 하며 타협할 수 없는 이해의 대립을 만들어 냅니다. 그 대립을 감싸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거짓말하고, 모든 사람들을 거짓과 위선과 증오를 가지고 타락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인간을 자신의 돈벌이 도구로만 보는 사회는 반인간적인 사회이고, 그런 사회는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위하여 인간이 육체적·정신적으로 노예화되는 모든 방식과 싸우고, 사리사욕으로 인간이 타락하는 방식과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싸워 나갈 것입니다. 우리 노동자는 거대한 기계에서부터 어린애의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노동으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싸울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간단합니다. 그건 ‘사유제산제를 타도하라! 모든 생산수단을 민중에게!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 노동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재판이 열리고 많은 이들이 모였다. 파벨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밝혔으나 재판관은 ‘짧게 얘기하라’ ‘요점만 말하라’며 사무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피고인들은 재판관을 조롱하거나, 굳은 의지를 내보이기도 하고 또는 진술을 거부하였다. 결국 유형에 처해졌으나 재판과정을 통해 시장, 귀족 단장, 지방 원로가 판사 및 재판관들과 한통속이라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재판이 끝나고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아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그의 발언을 인쇄하여 다른 지역에 배포할 것을 제안하고 어머니는 또다시 혁명 활동의 길에 나섰다. 그 길에서 첩자로 인해 붙잡히고, 온갖 모욕과 구타를 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다와 같이 피를 흘려도, 진리의 불을 끌 수는 없는 거야……”

러시아는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결국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확장을 막고 종전을 앞당길 수 있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아래 사유재산이 철폐되고 무상주거,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을 실현시켰다. 비록 외부 자본주의 세력과 내부 수정주의 세력의 공격으로 그 마지막은 안타까웠지만, 혁명 이후 보였던 소련의 모습은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없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던 사회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어도 몰려오는 감동으로 열이 올랐다. 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은 재미없다 했던가?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씌어졌는데, 어머니의 잔잔한 심리 묘사와 더불어 상황의 긴박함으로 인해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파벨의 집에 헌병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숨죽이며 보았고, 펠라게야 닐브로나가 몰래 신문을 전달하는 장면은 두근두근 거렸다. 파벨과 안드레이의 사랑에 대한 대화에서는 가슴이 아팠으며 동지들 간의 장난스런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늘 속으로만 얘기하며 주변을 살피고 조용히 살던 삶에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동지로 인정해 달라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자부심이 느껴졌다.

현대 문학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 중 하나는 ‘반전’이다. 소설 ‘어머니’에도 반전의 내용이 있다. 어쩌면 필자에게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반전을 밝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어머니의 나이는 마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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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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