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소, 우리는 더욱더 혁명을 열망하고 있소!
최순실과 우병우 논란에서 보듯, 박근혜 권력은 봉건말기 부패상과 타락상을 보이고 있다. 파렴치함 역시 그에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다. 반동성도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노동자 민중의 적개심도 하늘을 찌르듯 올라가고 있다.
통상적인 “불가피한 공권력 행사였다”는 권력 본연의 상투적 대응 수준을 훨씬 초월해서 물대포 살해에 대해 정권이 내미는 오리발을 보라!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백남기 농민을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살상 물대포를 막아선 노동자에 대해, 저들은 ‘빨간 우비’가 가격했다고 선정적으로 보도하며 뻔뻔하게도 살인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 노동자는 기자회견에서 당시 쓰러진 백남기 농민에게 계속 가해지는 물대포 직사를 보며, “그 광경은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이 보였다”고 증언했다. 지금 제기되는 병사 논란, 부검 시도, 빨간 우비 논란 역시도 그 광경은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이 보인다. 권력이 언론과 합세해 쳐놓은 게임과도 같은 황당한 거짓 프레임을 과감하게 벗어나 학살 정권 타도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제 노동자들의 투쟁도 점차 강화되고 있다. 철도 등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화물연대도 파업에 돌입했다. 현재는 파업 철회 소식이 들리지만, 경찰과의 극렬한 대치, 파업 파괴 비조합원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분신 시도, 잠정합의에 대한 격렬한 저항을 볼 때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분노가 얼마나 뼈에 사무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화물연대 파업,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대응”
“화물차량 물류이동을 방해하거나 파업에 불참한 차량을 파손하는 등 불법행위가 발생하면 법에 따라 엄정히 대응하겠다”
황교안 총리와 경찰청 관계자의 발언에서 보듯, 저들은 화물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파업’이라고 명명을 했다. ‘개인 사업자’들이라며 노동자성을 한사코 부정했던 저들이 오로지 탄압과 매도의 필요에 의해서만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권력이 봉건말기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배후에는 엄연히 재벌이라는 독점자본이 있다. 거대 자본의 집결체인 전경련(자유와 창의 교육원, 원장 송병락)은 최근 ‘문답으로 이해하는 시장경제 원리 99’라는 책을 출간했다. 거기에서 전경련은 최저임금 동결 기도, 공기업 사유화 공세, 정규직 과보호 공세를 통한 노동시장 유연화, 영리의료법인 도입, 출산과 육아의 개인적 책임으로 전가, 법인세율 인하, 농업 보호 정책 폐기, 환경규제 완화 요구 등 반사회적인 요구를 했다.
“공기업의 민영화가 중단된 데는 국내에서 좌파의 선전이 성공적으로 먹혀들고 있으며”라는 주장에서 보듯 전경련은 공기업 민영화가 바로 재벌로의 사유화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탐욕을 “좌파의 선전”으로 악의적으로 매도하는 재벌집단과 박근혜의 상투적 언사, 사고, 가치관이 하나라도 다를 게 있는가? 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재벌은 자신의 반동적 모습대로 권력을 창출한 것이다.
이번 노동자정치신문에서는 수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고 글들을 우선적으로 소개하고 싶다.
“성과-퇴출제 폐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몰아치자! 공공운수노조 파업투쟁 중간보고와 의견”은 현재 진행 중인 공공 노동자 투쟁을 전체 노동자 투쟁, 백남기 열사 투쟁, 싸드배치 반대 투쟁 등 총전선과의 연관 속에서 박근혜 정권 타도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신장애인과 정신보건법”은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대표 이정하 동지의 기고 글이다. 이정하 동지는 ‘조현병 당사자’로 자신이 겪은 끔찍한 경험과 우리 사회 정신장애인에 대한 야만적인 폭력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현재 본인 의사에 반해 강제 감금돼 있는 장애인은 2012년 수치로 6만 1128명이나 되며, 정신 장애인 중에는 수십 년 동안 기약 없이 강제 입원해 있는 장기수들도 많다.
정신보건법은 정신장애인을 강제 감금하고 인권유린을 자행하게 하는 법의 이름을 가장한 야수와 같은 폭력이다. 그녀는 이렇게 처절하게 고발하고 있다.
“강제 입원된 정신병원 그곳에서 너무나 많은 사연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적나라한 비인간성을 온몸으로 겪었다. 환자들은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고 제약회사와 정신병원의 수입원과 생체실험용 마루타 또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적도서 ‘어머니’를 읽고”는 노동자의 책 국가보안법 탄압 당시 이적도서로 압수당한 고리끼의 어머니에 대한 서평이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어도 몰려오는 감동으로 열이 올랐다. 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은 재미없다 했던가?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씌어졌는데, 어머니의 잔잔한 심리 묘사와 더불어 상황의 긴박함으로 인해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파벨의 집에 헌병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숨죽이며 보았고, 펠라게야 닐브로나가 몰래 신문을 전달하는 장면은 두근두근 거렸다. 파벨과 안드레이의 사랑에 대한 대화에서는 가슴이 아팠으며 동지들 간의 장난스런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늘 속으로만 얘기하며 주변을 살피고 조용히 살던 삶에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동지로 인정해 달라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처럼 국가보안법은 우리에게 다시금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문학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국가보안법과 그 낡은 칼을 휘두르는 권력이 얼마나 반문명적이고 시대착오적인지를 진보적 인류 앞에서 보여주고 있다.
서평 마지막 반전이 재미있다. 어머니의 나이는 40세이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어머니의 이름은 펠라게야 닐브로나다. 러시아에 파벨과 닐브로나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전태일과 이소선이 있다.
국가보안법은 낡았지만 시퍼렇게 살아서 기승을 부린다. “감옥으로부터의 편지”는 국가보안법 탄압으로 한국사회 최고 장기수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는 인도 정치학자 이병진 동지의 감옥 서신이다. 2009년 이명박 정권 하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이병진 동지는 8년 형을 받고 박근혜 정권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17년 9월에야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있는 모든 양심수들, 노동자 투쟁으로 구속되어 있는 모든 양심수들을 석방시켜야 한다. 감옥 밖 우리의 몫이다. 구속된 모든 동지들의 건투를 빈다.
1991년 쏘련 해체 직후인 1992년 신지호는 <고백>,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로 운동을 청산하고 권력에 투항하는 항복문서를 발표했다. 그 무렵에는 앞다퉈 청산주의를 고백하는 투항자가 넘쳐 났다. 안전기획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선처를 구하는 집단적 투항 사건도 있었다. 청산주의자들의 고백 행렬 이후 20년 여년이 훌쩍 지난 2016년 다시 新고백 행렬이 일어나고 있다.
“개량이라는 비판을 두려워 말자”(윤현식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 “개량의 시대”(한석호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가 그렇다. 이 글에 대한 열화와 같이 뜨거운 반응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의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 대 초 당시의 고백 행렬은 운동을 청산하는 자들의 항복 선언이라면, 2016년의 신고백 행렬은 민주노총 주요 간부, 진보정당 간부, 노조 지도자, 활동가들의 투항 선언문이다. 그러나 양자는 자본주의의 발전상에 대한 압도와 이른바 중산층 이론의 수용,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 구 쏘련 및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전면 부정, 이로 인해 나타나는 진한 반북·반공주의를 공유하고 있다.
2016년 신고백자들은 총파업과 가두투쟁 등에 대한 혐오, 정권 퇴진 투쟁에 대한 반대, 사회적 합의주의 유포, 정규직 양보론 등을 유포하며 전열을 흐리고 노동자 계급의식을 마비키고 타협과 굴종을 설파하고 있다.
기회주의, 개량주의자들의 때 아닌 신고백 행렬은 어쩌면 물때를 제대로 만났는지 모르겠다. 정권과 자본에 대한 대중적 분노의 상승, 계급투쟁의 점차적인 상승을 막는 것이 역사적 고비 고비마다 저들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정치신문에서 “노동운동 내에 침투한 오열(五列)을 척결하지 않고 적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현실은 타협이 아니라 타도로 나아가고 있다 – 강신준의 사회적 교섭 주장의 비현실성과 반노동자성‧반민중성”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러한 신고백 행렬을 폭로하고 있다.
정세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그럴수록 권력과 자본에 대한 투쟁과 운동의 전망을 가지고 혁명적 정치사상을 사수하는 투쟁의 병행이 절실하다. 학습하며 투쟁하고, 투쟁하며 학습해야 한다.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그렇소, 우리는 더욱더 혁명을 열망하고 있소! 당신은 자본주의를 철폐하지 않고 이 죽음과 고통의 행렬을 끝장낼 다른 방도가 있는가? <노/정/협>
2016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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