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인민의 역사인식을 확립하자(일본 활동가집단 사상운동, 야마시다 이사오)

일본 제국주의 패배 이후  70년의 오늘날 의미

전쟁법안 성립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2016년 6월 15일)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

(일본 활동가집단 사상운동, 사회주의 이론 연구)

서론

2015년은 일본 제국주의 패전 후 70년 발자취에서 새로운 역사적 반동으로 새겨졌다. 그것은 일본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베 정권은 부르주아 헌법 원칙인 입헌주의 규범을 침범하고 사실상 쿠데타로 최종적으로 해석개헌(편집자: 해석개헌이란 일본 제국주의 패배 이후 만들어진 평화헌법 조항을 바꾸지 않고 해석만 달리해 개헌효과를 내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변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을 완성했다. 60여 년 전, 극작가이자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에 덧붙인 4행시로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 떠오른다.

저기 저것이 하마터면 세계를 온통 지배할 뻔했었지!

다행히도 민중들이 저것을 제압했어. 하지만 난

자네들이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어.

저것이 기어 나온 그 자궁이 아직도 생산능력이 있기에.

ㅡ 베르톨트 브레히트. 전쟁교본 中

아베 신조는 분명 노동자와 인민의 적이다. 그의 뒤를 후원하고 있는 거대 자본은 그가 필요했고, 자본은 전쟁하는 국가의 담지자로 그가 정치 전면에 부상하도록 했다. 일본 헌법의 주요 3대 원칙인 “국제 평화주의”, “기본적 인권”과 “국민 주권”은 일본을 전쟁하는 국가로 만드는 데에 족쇄가 되어버렸다. 군수 생산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아베 정권의 “성장 전략”과 그것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이제 우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언급했던 “자궁”을 보아야 한다.

많은 인민들이 전쟁 법안을 보고 놀랐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으며 행동을 취하였다. 국회 앞에 12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던 8월 30일 행동을 포함하여, 노인들과 젊은이들, 남성과 여성, 특히 어린 아이를 동반한 여성들, 학생, 교수와 지식인들이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다. 운동은 대규모로 확산되고 고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전쟁 법안을 반대하고 방지하는 전선에 서 있어야 할 근로인민과 노동조합 지도와 대중 행동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법안 합법화가 이루어진다면, 왜 일본 인민은 그것을 막는데 실패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라는 우려는 종종 전쟁 법안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근거가 된다. 그러한 위기감이 전쟁법안의 바로 그 성격에 대한 실질적인 비판이 될 수 있을까? 전쟁법안 반대 운동 중에는 아베 정권이 주장했던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에 의한 “위협”론으로 이용될 수 있는 주장도 있다. 그들은 말했다. 아베 정권에 의한 헌법 무시는 “북조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베 정권에 의한 헌법의 무시는 군사적인 팽창을 해 나가고 있는 중국과 같다.” 등. 여기에서는 분명 70년 역사와 부활된 일본제국주의 현실이 “전쟁을 하지 않았던 일본” 및 조선과 중국에 반대하는 “일본이라는 평화적 국가”라는 식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다양한 여론 조사에서 볼 수 있는 전쟁법안 반대, 일-미 안보조약 지지, 오키나와 미군기지 정착 인정이 공존하는 여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오류와 무책임으로 뒤덮인 “8월 14일 아베 총리 담화”(전후 70년) 이후 아베 정권은 어떻게 지지를 회복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과거”에 대한 불완전한 청산, 역사 인식에 대한 왜곡, 일본제국주의의 현 상황(status (in) quo)에 대한 인식 부족, 그 결과로 계급지향적인 투쟁이 부족한 상황 등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이제 98년이 지났다. 2년 지나면 100주년이 된다.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하게 됐을지라도 10월 혁명으로 발전되었던 20세기 현대 역사의 새로운 지평선은 여전히 인류역사의 발전 방향을 규정한다. 부르주아와 그들의 도구들, 언론은 전 세계 사회주의 체제 붕괴를 선전하기 위해 합창하며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지만 그들은 전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다. 자본은 자신의 목적(이윤)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전쟁을 추구함으로써 생존한다. 지난 4반세기 경험은 그 자체로 호소력 있게 말하고 있다.

일본 헌법은 전(全)세계 반(反)파시즘 세력들의 지원을 받고 2천만 아시아 인민과 3백십만 명 이상 일본 인민의 희생에 기초하여 수립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 없는 세상을 목표로 하여 사회주의 깃발을 들고 계속 투쟁해나갈 것이다.

1. 전후 역사의 전환점으로서의 201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인 2015년, 역사 인식의 측면에서 2차 세계대전을 끝장내게 했던 것에 관하여 전 세계는 두 개의 주요 흐름으로 나뉘어 있다. 러시아-독일 전쟁을 통해 2천만 명 인민이 희생되면서까지 파시스트 지배로부터 전 세계를 해방시켰던 쏘련 역사를 물려받은 러시아와 아시아에서 일본군국주의에 의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끝장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국은 역사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행동했고 미국, 유럽, 일본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 나찌 독일에 반대하는) 승리 70주년 기념식이 5월 9일 모스끄바에서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시진핑 중국 주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영남,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를 포함한 20개 국가와 지역/국제 조직의 지도자들이었다. 하루 늦게 도착해 “무명용사들의 무덤”에 헌화한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을 제외한 미국, 유럽과 일본 지도자들은 초대에 불참했다.

또한 베이징에서는 일본에 대항했던 중국인민 전쟁, 그리고 파시즘에 대항했던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7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식이 9월 3일 개최되었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최룡해, 한국 대통령 박근혜, 한국 출신 UN 11대 사무총장 반기문 등을 포함한 49개 국가와 11개 국제조직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모스끄바와 베이징의 축하 기념식에 한정적인 수의 참석자가 있었던 것은 전쟁 70년이 지난 지금 국제 정치의 현주소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끝장내기 위해 파시즘에 맞섰던 투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 차이가 있음도 드러났다.

그것이 정당한 의례 절차였을지는 몰라도, 베이징 기념식에 정상급 지도자들이 참여하지 않았던 미국과 유럽은 지역 외교관들을 기념식에 참석하게 함으로써 최소한의 외교적인 의례만을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은 어떤 대표자도 참석시키지 않으면서 오히려 UN 사무총장의 참석에 대해 불평하는 무례함을 저질렀다. 이는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념을 하는 해에 아베 정권은 반헌법적 전쟁 법안 제정을 강제로 밀어붙였으며, 반파시즘 투쟁 승리를 통해 형성된 전후 세계 질서 틀을 부정하고 그것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였다. 아베는 부르주아 헌법 규범인 입헌주의를 짓밟았고, 감히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베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전쟁 책임을 결국 무시하겠다는 것이고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집단자위권 행사를 배경으로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주도권을 아시아에서 부활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꿈을 부활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혼자 힘으로 그것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세력 재조정을 위한 미제국주의의 군사적 재편성에 호응하면서,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지렛대로 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특별한 이익을 추구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것이 전쟁 법안을 강제로 제정하려 했던 아베의 진정한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2. 전쟁법안의 준비와 제정 그리고 그 배경

전쟁 법안에 반대하는 투쟁 개요와 미래 투쟁 방향성과 관련하여, 전쟁 법안 폐기뿐만 아니라 입헌주의 회복 역시 주장되어왔다. “입헌주의”의 기본적인 핵심 중 하나로 헌법은 인민이 국가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지 인민이 국가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하여 많은 말들이 있는 반면 입헌주의가 어떻게 수립되었는지, 그 배경과 역사, 그리고 지금 회복되어야 하는 헌법이 어떤 헌법인지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나 토론은 없다. 이 점에 대해 깊이 있게 고려되지 않아야만 하는가?

입헌주의는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여명기에 수립되었다. 인민 권리 확보,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권력 분산, 권력 남용 방지와 권력에 대한 상호 감시는 이 철학의 핵심이었다. “인민 권리 확보”는 자본주의 발전을 장려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자유의 보장(자본을 위한 자유!)”을 중심에 놓았다. 우리는 최소한 이 정도까지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입헌주의 해석에 관한 주제는 이제 충분할듯하니 앞으로 더 나아가 보자. 우리가 이제 인식해야 하는 것은 입헌주의가 자본주의 체제 유지와 삶의 연장을 위한 장애물로 여겨질 정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헌법에 대한 민주당 수정 초안(2012년 4월 27일에 채택)에 거의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자본주의는 인민들을 강탈하고 억압하기 위해 어떠한 정치적인 형태도 내어주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전(全)역사를 통해 그것은 증명되었다. 1930년대에 확립된 파시즘 지배는 그 전형적인 예였다. 만약 여러분들이 입헌주의 회복, 입헌주의 파괴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자본주의 기초에 관하여 주장한다면, 그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60년 전에 “저것이 기어 나온 그 자궁은 아직도 생산능력이 있다.”라고 말해 관심을 끌었던 바로 그 자궁이다.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자궁이다.

헌법을 수정하는 절차를 피하면서 집단자위권 행사를 승인하기 위한 각본, 즉 헌법을 파괴하기 위한 비밀스런 계획은 사전에 이미 일본과 미국 정부가 준비해 왔다. 일본 민주당 노다 요시히코 정부 시기였던 2012년 8월, 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CSIS))는 아미티지-나이 3차 보고서, “미-일 동맹: 아시아에서 안정을 확고히 하는 것”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시대착오적인 헌법이 완화된다면 자위대는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다 요시히코 수상은 핵발전소들을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올바르고 책임감 있는 접근이다.
  • 미국은 일본의 정책 변화, 즉 방위 산업의 무기 수출과 기술 수출을 장려해야 한다.
  • “도모다치 작전”(편집자: 도모다치 작전은 2011년 도호쿠 지방 지진으로 발생한 일본의 재해 피해 복구 작업을 돕기 위한 미국 공군의 구호 활동 작전을 말한다.)에서 미군과 자위대는 집단자위권 금지 조항에 대해 주의하지 않고 행동했다. 집단자위권을 제한하는 것은 동맹의 장애물이다.

‘아미티지-나이 3차 보고서'(편집자: 아미티지 보고서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던 보고서로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과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가 미·일동맹에 대해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다. 2000년과 2007년에 각각 1·2차 보고서가 발간됐다.)는 헌법 수정절차와는 관계없이 전쟁을 포기하는 9조항을 확대 해석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베 정부는 이 각본을 받아들였다. 이후 과정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연표로 모아지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미군과 자위대 사이의 군사 합동 훈련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법안에 앞서 훈련을 포함해 꾸준히 기정사실화하는 과정이 있었다. 의회(Diet) 심의는 그러한 기정사실을 비준하기 위한 형식일 뿐이었다.

2012년 12월 : 제2차 아베 정부가 출범했다.

2013년 1월 : 아베는 상원 총회에서 96조항의 진전된 수정에 대한 생각을 발표했다.

2013년 2월 : 아베의 사설 자문 단체인 “안보의 합법적 발전의 재건에 관한 자문위원회”(Anpo Hosei Kon)가 설치되었다.

2013년 11월 : “국가 안보위원회(미국 안전보장위원회의 일본판) 설립법” 법안이 통과되었다.

2013년 12월 : “특정비밀보호법”이 제정되었다.

2014년 5월 : 자문위원회가 “집단자위권 행사의 허가”를 제안했다.

2014년 7월 : 내각이 “집단자위권 행사의 허가”를 결정했다.

2014년 10월 : “2+2” (미-일 안전보장 자문위원회, SCC)에서 개정된 “미-일 방위 협력을 위한 지침에 대한 중간보고서”를 제출했다.

2015년 4월 : 내각은 전쟁 법안을 인정했다.

“2+2”는 “지침”을 개정했는데 지침은 전쟁 법안을 미리 포함하고 있었다.

2015년 5월 : 안보 장관 통합 간부회는 군대 조직을 포함하여 “평화와 안보의 합법화와 관련된 법안에 관한” 하나의 계획을 비밀리에 만들었다. 그 계획은 나중에 의회(Diet) 협의에서 일본 공산당이 폭로했다.

무엇이 이렇게 아베를 재촉하고 있는가? 그것은 경제와 사회가 깊이 병들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쇠퇴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는 상황이다. 국민총생산(GDP)은 20년이 넘도록 증가하지 않고 있다. 인구 감소가 멈추지 않고 있다. 정부는 GDP 대비 200% 이상 예산 적자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1945년 패전 직후 시기들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며 “선진국” 중 최악의 수준이다. 예산 적자가 왜 그 정도까지 늘어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수년 동안 자본주의가 수명 연장을 위해 취했던 방법들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결코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 총량은 300조엔(1달러를 120엔으로 했을 때 미화 2조 5000억 달러)을 능히 넘어섰다. 언제까지나 만족하는 법이 없는 일본 경제단체연합회(經團連, 게이단렌)는 법인세 인하를 요구했다. 자본의 탐욕은 끝이 없다.

경제단체연합회와 긴밀히 작업하면서, 아베 정권은 무기 생산을 확장하겠다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는 “성장 전략”의 중추로 국가의 군국주의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아래의 간단한 연표를 통해 경제단체연합회 소속의 방위생산위원회 60개 회원 기업들과 아베 정권 간의 밀접한 협력을 볼 수 있다. 경제단체연합회는 무기 수출에 관한 특별부서와 국가 주도의 대규모 합작 개발 등을 설치하며, 지역에서 생산된 무기 수출 금지 입법과 같은 로비를 일본 정부에 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한 요구에 기초하여:

2013년 12월 : “국가 안보 전략”이 입안되었다.

2014년 4월 : “무기 수출에 관한 3개 원칙”은 “방어 장비 이전에 관한 3개 원칙”으로 개정되었다. 그러고 나서 방위 연구와 합작 개발에 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와의 협정이 성공적으로 체결되었다.

2014년 6월 : “방위성 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이 제정되었다. 소위 양복조가 중심이 되는 “작전 계획 부문”은 제거되었고 제복조의 “통합 참모 본부”에 권력 권한이 집중 되었다. 전통적인 시민의 통제는 약화되었다.

2015년 9월 : 경제단체연합회 집행위원회는 정부가 무기와 같은 방어 장비의 수출을 국가 전략으로써 장려하게끔 노력하는 동시에, “방위산업정책 집행을 위한 추천서들”을 채택했다.

2015년 10월 : 방위장비청이 1,800명의 직원으로 발족했다.

방위 예산은 3년 연속 증가했다. 2016년 회계연도 예산 요구액은 5조 1,000억엔(1달러를 120엔으로 했을 때 미화 420억 달러)이었다. 국가의 군국주의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적”의 존재에 대해 강조해야만 한다. 단순히 “안보 환경이 변하였다”라고 반복해서 말할 수는 없다. “방위안보법”에 관한 상원 특별위원회의 심의가 최종단계에 도달했을 때, 아베 신조는 여론 흐름을 인식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협”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마침내 진정한 의도를 드러냈다.

이제 전쟁법안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아베 신조를 정권에서 끌어내릴 필요가 생겼다. 나는 그것이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베 신조가 서 있고 지원을 받고 있는 그 “자궁”, 즉 다국적 거대 자본의 존재를 우리 투쟁이 직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정확히 전쟁 법안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놓치고 있었던 관점이었다.

3. 전쟁 법안 반대 투쟁의 교훈

전쟁법안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행동은, 중앙 수준에서는 12만 명의 인민들이 8월 30일 의회 건물 앞에 집결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이는 “전쟁반대 1천인 위원회”, “해석 헌법으로 9조항 파괴 반대! 집행위원회”, “전쟁 하는 국가로 개조 중단! 헌법을 방어하고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공동센터!”의 3자로 구성된 “전쟁과 9조 파괴 반대 총결집행동실행위원회”가 이끌어 냈다.

이 행동의 참가자는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과 학생들,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에게로 확산되었다. 이 행동은 열정과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어떤 사람들은 이 행동이 1960년대 일-미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투쟁만큼 열광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행동의 전선에 서 있어야 할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의식은 빈약하였다. 그 둘의 투쟁력의 차이는 분명하였다.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말한 의견이 있었다. “일-미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투쟁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그에 조직되고 동원된 인민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 투쟁은 “자발적으로 합류했던 독립적 시민에 의해 탄생되었고”, 그 “새로움”은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유형의 시민혁명”이라는 알 수 없는 의미의 평가와 무조건적 찬사들이 나타났다. 나는 이들이 “시민혁명”은 자본주의의 발흥기에 있었던 부르주아혁명을 의미한다는 기초적인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주제로 되돌아가자. 조직과 개인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이러한 종류의 평가의 기초에 있다. 만약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문제는 오히려 노동조합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조직이 본래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는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1960년대 일-미 안보조약에 반대했던 투쟁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할 여유가 없다. 그러나 1960년대 투쟁을 인용하는 이러한 말들을 들었을 때, 나는 1960년대 투쟁에 관해 그들이 얼마나 많이 경험하거나 공부했는가를 되물어보게 된다. 문학잡지, “Shin Nihon Bungaku”(“신 일본문학”) 1960년 8월 발행 판에 기고된 유치 아사오(Yuchi Asao)의 에세이, “〈질적 변화〉 담론에 관한 비평”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개정된 미-일 안보조약이 1960년 5월 19일(6월 19일에 효력이 발생하는)에 강제로 의회를 통과했을 때, 그 당시 시민들이 중심이 된 운동에 관한 과도한 평가와 기대가 있었다. 지금 역시 아주 똑같은 상황이다. 나는 독자들이 현재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1960년대 안보조약에 관한 투쟁에서, 당시 총리 기시 노부스케는 마침내 사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위기를 이케다 하야토에게 넘김으로써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지금 전쟁 법안에 반대하는 투쟁은 그러한 수준에조차 도달하지 않았다. 아베는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타케이 테루오(Takei Teruo)는 “일본 독자 주간 신문”(“Nihon Dokusho Shimbun”(“Japan Readers Weekly Newspaper”)) 1960년 7월 4일 발행 판에 “현대문학의 비평적 관점”을 기고했었는데,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제까지 활기찬 정치의 계절이었고 오늘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과 연관되는 사상의 계절을 창조해야 한다. 지금의 한 달 그리고 그 이전 1년 6개월의 과정은 일본 인민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유발하였고, 거기서부터 떠오른 참여의 거대한 에너지를 재촉하고 확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는 이론의 창조이다.”

패배 원인을 찾고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현존하는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의 일-미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볼 수 있었고 종종 시민운동 활동가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혁명의식은 “사상의 계절”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으며 사회기관으로 회복되고 통합되었다.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해체되었고 노동운동은 바로 그 기반부터 파괴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상황을 만든 가장 근본적인 요소였다. 의회 건물은 특별한 상징적 장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요 전장이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을 보고 즐거워할 여유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 관련해서 말하자면, 공동투쟁 조직 활동가들 사이에서 상황 인식과 운동이 어떻게 촉진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은 한동안 상실되어 버렸다. 분열이나 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 활동가들은 논쟁을 위해 다른 사상과 의견을 내놓는 것에 자기통제를 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를 위한 통일을 계속하려는 것에 그러한 자기통제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까?

문제는 광범위하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입헌주의를 방어하는 주장은 헌법 개정을 위한 “절차들” 한 가지로 약화되지 않았는가?

9조에 관한 논쟁은 “그것은 자기 방어를 위한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거나 자위대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으로 충분한가?

나는 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담론이 아베가 계속해서 지지했던 “중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협”에 의해 휩쓸리고 있는 것을 걱정했다. 거듭 말하자면 그것은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같은 국가들은 군국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만약 전쟁법안이 제정되면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같은 국가가 될는지 모른다.” 정도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의 분쟁이 어떻게 발생되었는가? 누가 1972년 일본과 중국이 했던 공동선언의 정신을 짓밟았는가? 그들은 바로 자민당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역사적 정권들이다. 그것은 역사인식에 있어 진실이었고 그것은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열도)에 있어 진실이다. 전쟁 패배 70주년 기념식이 있었던 8월 14일 연설에서 그는 대중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그의 왜곡된 역사관에 대하여 말했다. 그는 마치 “만주사변(1931년 리우띠아오후 사변(Liutiaohu Incident)” 이후 일본이 잘못된 길을 걸었고 전쟁의 길을 계속해서 걸었던 것처럼 설명했다. 그는 1904년 러-일 전쟁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전쟁이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단순히 지우지는 않았지만,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인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며 자기중심적인 역사관으로 날조했다.

언론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선에 대해 적대와 혐오스런 감정을 의도적으로 부추겨왔다. 그것은 아베의 “전후 70년 담화”에서 보였던 역사 왜곡과 연결되어 있고, 대중의 인식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이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알아채지 못하게 우리 운동 안으로 들어왔다.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 책임은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조선인 고등학교들을 무상교육 체제로부터 제외시키는 등의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인권 침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금도 역시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전쟁 법안을 강행하는 아베 정권 하의 일본과 중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교·대조될 수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본의 침략과 전쟁의 근현대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고, 반전 평화사상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전쟁법안 제정 이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내에 투쟁 방향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일본 공산당은 전쟁법안 철폐와 헌법 회복을 위해 “국가적 연립정부”의 수립을 지지하고 있다. 관점이 2016년 상원의원 선거에서의 협력으로까지 갈 정도로 협소해졌다. 물론 우리가 선거에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민운동만이 의기양양하고 있지 않는가? 인민 의식이나 운동의 “질적 변화”는 무시되고 있지 않는가?

일-미 안보조약이 헌법 꼭대기에서 군림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나는 전쟁 법안에 반대했던 시민들 의식이 안보체제로 방향을 잡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80%가 일-미 안보조약을 지지한다. 오키나와의 새로운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에 관한 본토 거주민들의 인식은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소수에 머물러 있다.

입헌주의를 파괴했던 것은 전쟁법안이 아니었다. 헌법 개정을 시작하고 새로운 해석과 법률을 통해 사실상의 헌법 개정을 한 이후, 헌법에 있는 “국제 평화주의”, 사회적인 권리를 포함한 “기본적 인권”, “국민 주권”은 너덜너덜하게 훼손되었다. 의회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든지 간에, 노동현장, 학교, 일상생활의 장소 등에서 박탈된 권리들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결합하지 않고서 그들과 우리들 간의 권력관계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체제유지와 일본 제국주의의 생명 연장을 무릅쓸만큼 공격은 전면적이고 계급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4.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목표

9월 7일은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 98주년이 되는 날이다. 1991년에 쏘련은 해체되도록 강요받았다. 벌써 24년이 지났다. 사회주의 부활을 위한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세계는 ‘사회주의’로 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처럼 보인다. 불행히도 이것이 현실이다.

제국주의 권력 국가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내외적으로 갈등과 심각한 모순에 직면했음에도 그들은 노동자 계급 전체의 투쟁력과 조직력을 약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반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은 24년 내내 결코 멈추지 않았다. 즉, 시장 통제와 자원 몰수 의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정권은 내분에 휩싸였는데, 세계 사회주의 체제 제거를 틈타 지구상에서 쓸어버리기 위해 군사 침략을 당했다. 점점 더 전쟁이 집요해지면서 동유럽에서 북아프리카까지의 광대한 지역은 국가와 사회적 질서가 붕괴되는 혼란에 휩싸였다.

오바마 정권은 아프가니스탄에 14년 동안 배치되어 있는 군대를 2016년 말까지 완전 철수 시키겠다는 정책을 최근 철회하였다.

1990년 이후 벌어진 주요 전쟁을 열거해 보겠다. 일본이 자위대를 파견한 “재건 지원”이나 “연료공급”, “해적 소탕” 이나 평화유지군(PKO) 활동은 제외한 것이다. 아베 정권은 전쟁법안을 강행하려 했다. 전쟁법안을 통해 이제 미국 제국주의 침략의 전투 기계의 후원자로서 자위대를 지구 반대편까지 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대중 여론에 조심스럽게 넣다가 결국에는 공개적으로. 평화와 전쟁반대를 위한 우리 투쟁의 진정한 가치는 그때 정확히 시험받을 것이다.

쏘련 붕괴 이후에도 벌어진 전쟁을 열거해보자면 :

  • 이란-이라크 전쟁의 다른 형태였던 1991년 걸프 전쟁
  •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인도적 개입”으로 나토(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벨그라드(유고슬라비아의 수도)에 폭격
  • 2001년 9.11 이후 “자발적 연합(Coalition of Willing)”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침략 전쟁.
  • 2003년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했던 이라크 침략 전쟁.
  • 2011년 이후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고 “아랍의 봄”을 이용하여 까다피 체제를 무너뜨리기, 나아가 시리아에서 반정부 세력을 지렛대로 하여 아싸드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책동.

이러한 것들로 권력에 공백이 생겼고, 그것은 IS(이슬람국가)가 형성되고 부상하는 기반이 되었다. 수많은 무고한 인민들이 죽었다. 엄청난 수의 난민이 유럽으로 모여들었다. 세계가 더 큰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제국주의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동안에 있었던 분쟁에 대해 말하겠다. 일본 대중 언론은 하나같이 러시아를 악마화 한다. 이는 ‘서방’ 세계에서도 일반적일 것이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에서 나토를 확장시키지 않겠다는 쏘련과 미국의 협약은 변화됐는데, 사실상 서독에 의한 동독의 통일이었다. 그 협상은 외교 문서에 명시되어 있고 러시아 정부에서 출판했다. 미국은 이 협약을 백지화 했다. 유럽연합이 동쪽으로 확장하는 것, 즉 제국주의 시장 지배를 위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의 확장은 전략미사일 방어망 설치와 나토 참가 촉진을 병행하면서 추진되었다.

쏘련 해체 이후, 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계속해서 “동쪽”에 남아 있느냐 아니면 “서쪽”에 참가하느냐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다. 그 시기 정부에 대한 인민의 불만은 내전과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민족적 쇼비니즘(배외주의)을 일으키는데 이용됐다. “동쪽”에 남아있었던 유고슬라비아 마지막 사회주의 연방은 미국과 동유럽 제국주의에 먹잇감이 되었다. 같은 일이 우크라이나에서 반복되었다.

1990년대 초, 대중 미디어는 “냉전의 종언”으로 평화로운 세계가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미국 빌 클린턴 정부(1993-2001)는 “평화배당금”으로 군사비를 감축하려 했으나, 결국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3년도 지속하지 못했다. 자본은 자신의 목표(이윤)를 위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그것을 “재앙 자본주의”라고 명명하며 “충격 독트린: 재앙 자본주의의 부상”(2007)을 집필했다. 이러한 정의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른다. 자본은 확실히 “재앙”에 “편승”한다. 우리는 거대한 동일본 지진이 발생한 후 “재건특별조달”에 달려드는 거대 자본 운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콘노 마사히로(KONNO Masahiro)의 “민다나오(Mindanao)”를 향해 가는 지진 이후의 재건” -재앙 지역에서의 보도를 참고)(“사회평론(Shakai Hyoron)”, 171&172)

자본은 이윤이 된다고 믿으면 적극적으로 “재앙”을 만들어낸다. 군산복합체의 통제는 역사적으로 미국 정부의 행동 방식을 규정한다. 민주당 정권이나 공화당 정권이나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자본에게 전쟁은 이윤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이고, 자본주의는 전쟁을 지속함으로써 생존한다. 그것은 지난 25년의 세계 역사를 되돌아보면 더 명백하다.

우리는 세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재건의 길을 추구한다. 우리는 전쟁 거부의 정신을 높이 하며 일본 헌법 서문과 9조의 비무장 정신을 높이 든다.

우리는 전쟁을 근본적으로 끝장내기 위한 투쟁을 필요로 한다!

오키나와 인민들이 실천하고 있는 비폭력 투쟁에 연대를 강화하자!

우리는 사회주의 미래를 개척하고, 전쟁 없는 세계에 대한 목표와 노동자 계급의식을 고양하는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2015년 11월 7일, 도쿄에서 열린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 98주년 기념 합동 집회의 슬라이드 발표”에서의 원래 연설 원고를 기초로 저자가 편집했다.)

(2016년 1월, 183호, 계간 “사회평론(社会評論”)

이 기사를 총 454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답글 남기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