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혁명가이자 노동운동가 이재유 선생의 삶과 투쟁을 돌아보며
공공운수노조 전국민주우체국본부 전 본부장 이중원
* 이 글은 지난 11월 14일 <항일혁명가ㆍ노동운동가 이재유 선생 81주기 추모 노동운동 토론회 이재유 선생의 삶과 노동운동의 혁신과제>에 제출된 토론문입니다.
1. 생애 – 운동의 시작
1930년대 “당대의 최고 혁명가” 이재유선생을 만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재유 선생은 일제 식민지 병합이 시작된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 함경북도 삼수군에서 태어났다. 생애의 시작이 일제 식민지 지배 비운의 역사의 시작과 같다. 어쩌면 일제에 항거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그에게 운명지워진 삶일 수도 있을 것이다.
1919년 3.1 민족해방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어난 최대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당시 15세를 맞이한 이재유선생도 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초상이랄까?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식민지 조국의 운명과 피폐한 민중의 삶과 마주하면서 그 암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18세 되던 해 개성으로 상경, 21세 되던 1925년 송도고보에 편입해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길을 가게 된다. 1926년 말 동맹휴학 건으로 퇴학 처분당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노동운동과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
1927년 사립 일본대학 전문부에 입학, 동경대 신인회가 조직한 노동학교 등록,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공부하게 되고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1928년 8월 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1930년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고 1932년 12월 말 만기 출옥하게 된다. 아마도 이 시기가 선생의 사상적 성숙과 노동운동에 대한 학습의 시간이고 이후 출옥해 경성트로이카 방식의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어 갈 역량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짧은 생애, 조공 재건과 경성트로이카
이재유선생은 1945년 8.15해방을 불과 1년 남짓 앞둔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당시 나이 만 40세였다. 1942년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수감되고 고문 후유증과 각기병으로 고생하다 그만 옥사한 것이다.
1936년 12월 조공 재건 경성준비그룹 관련 체포되어 1938년 7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1932년 12월 말 출옥 후 다음 해인 1933년 7월 조공 재건과 경성트로이카 활동을 본격 시작한 것이니 기간은 다시 구속되게 되는 1936년 12월 25일까지 불과 2년 6개월여에 불과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구속과 탈출을 반복했으니 실제 활동 기간은 더 짧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조선 반도 전체를 흔들 만큼에는 못 미치겠지만 면면한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데는 이재유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 재건 경성트로이카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이재유 선생을 “당대 최고의 혁명가”라 부르고 후일 “조선의 체 게바라”라고 불리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 1930년대 국내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
1929년 전 세계에 몰아닥친 세계 대공황과 일제에 의한 1932년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1919년 3.1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소위 ‘문화통치’가 사라지게 된다. 식민지 지배 방식이 파쇼적 폭압 통치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그나마 면면히 이어져 오던 민족 독립을 위한 합법, 반합법 단체의 활동들이 위축되거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자연 지하화하게 된다. 이를 일면 에서는 “적색노동운동”, “적색농민운동”하면서 비하하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반제민족해방을 지향하던 전래의 진보적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이 극심한 탄압을 받고 지하로 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간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민족단체 중심의 사회개량 운동 정도만이 독립운동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되던 때도 있었으니 얼마나 일제하 국내 민족해방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는지를 이해할 만도 하다.
아마도 대부분이 반북 반공적 인식에 기초한 분단 역사 인식 프레임이 반세기 넘게 지배하다 보니 이러한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 중심의 독립운동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점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만주 중심의 민족해방운동과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외에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이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기층 계급 속에서 면면히 유지되어왔다는 점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5. 이재유 선생의 활동
이재유 선생은 민중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성과 희생의 자세로 한 생을 살았다.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일본에 도일하여 본격적인 진보사상과 사회주의 운동, 노동운동을 학습, 실천하고 짧은 생애 중 10년 이상을 감옥에서 살았다. 고난과 역경을 자초해 꿈이자 이상이었던 조국의 독립과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온몸을 내 던져 사신 혁혁한 활동가, 혁명가이다. 누가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지금이라도 1930년대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무단통치 시대에 억압과 폭력, 착취에 맞서 투쟁한 운동 세력이 건재했고 그 시대를 앞장서서 이끌어 간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재유선생의 활동이 겉으로 회자되는 몇몇 이야기 차원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기희생과 헌신을 넘어선 조국의 운명과 민중에 대한 깊고 뜨거운 사랑이었던 같다. 그러니 당대 유행했던 파벌투쟁이라거나 헤게모니를 위한 비본질적 차원의 활동을 배제했던 것 같다.
몇몇 자료를 읽으면서 느꼈던 이재유선생의 활동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조국의 운명과 민중의 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로 비롯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 방면의 억압과 수탈은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대다수 민중의 삶의 피폐를 가져왔다. 결국 식민지로부터 해방 없이는 민중의 행복과 안온한 삶을 기약할 수 없었다. 당시 젊은 청년이자 지식인의 운명과도 같은 고뇌에 찬 길을 이재유선생은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서 조직과 투쟁의 선봉장이 되었다. 조국의 운명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전제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둘째, 일종의 현장주의이다. 사회 변혁운동을 하려면 기층 민중이 있는 현장에 가야 한다는 기본 관점으로 현재에도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몸은 현장에 있지 않으면서 말로 하는 행세식 운동이 상존한다. 당시 이재유선생은 현장을 특별히 강조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현장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고 자신도 현장에 착목해서 1930년대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빛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째, 계급운동인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분리시키지 않았고 통일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식이 매우 독특한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도 계급운동인 노동운동을 민족문제인 분단문제와 분리시켜 놓고 계급운동 위주의 노동운동을 사고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운동이란 세계와 구조에 대한 사실적 분석, 인식으로부터의 과학적 노선이 나온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일부 계급 모순을 절대시한 채 식민지 지배라는 광폭한 탄압의 현실에 눈감고 일부 임금인상이나 복지 처우개선에 몰두하는 노동운동의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식민지 지배 체제와 단절하지 않고 과연 노동자의 삶의 개선에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현실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완전한 자주독립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임금·복지 처우개선 중심의 노동운동은 결국 개량주의의 길로 가거나 체제 순응적인 자족적 노동운동에 머무르고 만다.
이재유선생은 민족문제 해결 없이 노동자와 민중의 삶의 근본적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정립과 함께 민족 노선, 계급 노선의 변증법적 일치를 방향으로 삼았다. 그러니 계급운동 중심의 협소함으로부터 연대·연합, 통일 전선 등 관점에서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운동의 주도권(헤게모니) 싸움에 연연하지 않았다. 운동도 사람이 하는 것인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되다 보면 주도권(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는 경향이 대두된다. 특히, 당시 국제당(코민테른)의 권위에 편승해 운동의 지도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운동 세력들이 많았다. 셋만 모여도 당을 만들고 윗선을 댈려고 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재유선생은 전체적 통합과 단결의 정신에 기초해 운동의 길을 밝혀 가고자 했다.
그렇기에 당 조직을 만들 경우에도 중앙에서 몇몇이 모여 선포식으로 만드는 것을 배제하고 현장에 기초해 현장 출신자들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만드는 방식을 선호했고 그렇게 구현하고자 했다. 그 전형적인 조직 및 활동 방식이 “경성트로이카”였다.
중앙의 권위에 입각한 상명하달식 사업 기풍이 아니라 참여 성원의 자발성, 자율성에 철저히 기초하고자 했다. 그러니 상층 주도권 싸움에 골몰할 이유가 크게 없었을 것이다.
경성트로이카는 조직 이름이면서 동시에 활동 방식을 이름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6. 마치며
지금에서야 이재유 선생을 만난 건 참으로 다행이다. 물론 일제하 독립운동사나 일제하 노동운동사 등 개괄서를 통해 접근한 바는 있지만 이렇게 선생의 생애와 삶과 천착해 공부해 본 시간은 처음이다.
암울했던 1930년대 당대의 사회운동, 진보 운동의 역사가 한 줄기 빛나는 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 노동자 민중의 해방 투쟁에 앞장서 헌신했던 이재유선생 덕분에 다시금 되살아 남을 느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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