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지배가 참혹한 죽음을 낳았다! 자본지배를 끝장내서 죽음의 행렬을 종식시키자!
사진 출처: 허환주 기자
(2016년 6월 15일)
죽은 아들을 봤습니다. 머리털이 피에 붙어…(울음) 20년을 키운 어미가 아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이…(울음) 우리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지나갈 때, 뒤통수만 봐도 우리 아들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울음) 뒤통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짙은 눈썹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보니, 우리 아이가 입고 나간 옷이 맞았습니다… (울음)…
죽은 당일 날도 종일 굶어가며, 시키는 대로, 쫓겨 다니며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잘못해서 죽은 거라니..(울음) 불쌍하고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아이 유품인 갈색 가방을 병원에서 받았습니다. 아이 가방은 학교 다닐 때 검사한다고 열어본 이후 처음 열어봤습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사발면이 들어있나요? 여러 가지 공구들 사이에는 숟가락도 들어있었습니다. 비닐에 싸여있는 것도 아니고…(울음) 그 사발면 용도는 한 끼도 못 먹었으니 그거라도 먹으려고 했던 거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규정을 어겼다고 하는데 무슨 규정을 어겨가면서 무슨 일을 했나요? 시킨 것은 저들인데 규정을 어겼다고 해요.(허환주 기자, “죽은 아들, 20년 키운 어미도 못 알아보겠더라”, 프레시안, 2016.05.31. 기사 뒤에 실린 구의역 희생자 어머니의 발언)
참혹한 죽음이다. 이보다 더 절절하고 비통한 절규가 있을 수 있는가? 마치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에서 제국주의 전투기로부터 폭격을 당하고 사지가 잘려나간 자식을 안고 울부짖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듯하다. 그런데 이 애끊는 상황은 전쟁터의 참혹한 장면이 아니다. 지난 5월 28일 구의역에서 고장난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가 20살 청년 노동자가 중대재해로 참혹하게 사망한 사건이다. 짙은 눈썹과 벗어 놓은 옷가지를 통해서만 20년 키운 사랑스런 아들의 얼굴을 겨우 알아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식의 시신은 망가져 있었다. 게다가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일하다가 참상을 당한 아들의 유품 속에는 사발면이 들어 있고, 숟가락은 공구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죽은 청년 노동자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20살 청년 노동자가 중대재해로 죽어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자본과 언론은 이 참혹한 죽음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 위해 고인을 매도하고 나섰다. 희생자 어머니는 아들의 황망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울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 용기내서 나왔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세월호 가족들은 국정원과 국가권력이 개입해 있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자식들의 의문의 죽음 앞에서 애도를 하고 비통한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청와대로 행진해가고 몇 년을 목숨 걸고 투쟁했다. 그런데 무엇이 희생자 어머니가 자식의 죽음 앞에서 “울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 용기내서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가?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면,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만은 밝히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억울하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비참하게 죽어갔던 자식의 죽음을 매도하는 언론과 자본에 맞서 죽은 자식의 한을 풀고 명예를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자본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회사는 지킬 수도 없는 규칙을 만들어놓고, 우리 아이의 과실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서울메트로 설비처장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찾아와서 (출동) 보고를 안 한 우리 아이의 과실이라고 했습니다. 전자운영실에 보고를 안 하고 작업하면 전철이 평소 속도로 달려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규정을 어겨가며 혼자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이 중대 재해 사고에 대해 메트로 설비처장은 개인 ‘과실’로 몰아가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 사고 원인이 된 외주화 현실(언론은 메피아라고 하지만)에 대해 처음에는 “자세히 몰랐다”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미 2013년 성수역, 2014년 독산역, 2015년 강남역에서 해마다 스크린도어 정비 노동자 사고가 발생했었다.
심지어 조선일보, TV조선과 MBN 등은 작업자의 개인 과실로 이 참사를 몰아가려고 시도했다.
왜 사고가 났는가? 중대재해 위험이 있는 스크린 도어 정비 작업을 하면서도 1인이 정비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력충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주화로 인해 지하철 유지 보수가 분리돼서 작동되는 상황에서 메트로 전자운영실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지하철 ‘경영 효율화’를 앞세워 비용절감을 위해 인력을 감축하고 외주화를 단행한 것이 직접적인 사고의 원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자 어머니는 저 황망한 상황에서 이러한 자본의 책임을 면피하고 희생자에게 전가하려는 상황을 폭로하려고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나섰던 것이다.
새누리당 김장수 정책위원장은 “기업은 정규직이 과보호되면 중소기업이 먹을 게 없다. 보수 정당에선 이런 이야기를 분명히 해야 한다”며 “이것이 일자리 문제의 해결책이다. 이에 대해선 내년 대선 때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져야 한다”(신종훈 기자, 與 워크숍서 터진 색깔론 “구의역 사건, 좌파 기득권 탓…자본과 상관없어, 민중의소리, 2016-06-10)며 책임을 정규직 탓으로 돌렸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역시 지난 8일 원내대표 회의에서 “19살 비정규직 젊은이의 비극 뒤에는 철밥통처럼 단단한 정규직 보호가 숨어있었다”며 이 사고를 노동법 개악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구의역 사고 직후인 6월 1일 남양주 지하철 공사현장에서는 4명이 숨지고 10명이 중경상을 입는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 사고도 명백한 인재(人災), 즉 자본에 의한 살인이었다. 시공사인 포스코 건설은 공사현장의 안전 관련 문건을 사고 이후에 조작했다. 안전시설은 애당초 없었고, 현장 안전 감독 책임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가스 누출 경보기와 환풍기 등 안전시설 역시 하나 없었다.
그리고 지난 8일 서울 역삼동 한 공사장에서는 방수작업을 하던 하청업체 일용직 노동자가 또다시 중대 재해로 사망했다. 지난 5월 27일 여수산단에서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작업 중 독가스에 4명이 질식되어 그 중 1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여수산단에서는 이러한 폭발 사고가 매년 2-3회 발생한다고 한다. 2003년 3월에는 여수산단 대림산업 폴리에틸렌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하청업체 노동자 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대량 정리해고가 자행되고 있는 조선소에서도 역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 스크린 도어 청년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 산업에는 6만 명 정도의 고교 실습생들이 대거 투입되고 있는데, 지난 2011년 12월 17일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는 한 공고 실습생은 평일 주 5일간 하루 10시간 30분씩 근무에 잔업, 특근을 합쳐 최대 70시간 정도를 과도노동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쓰려져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청년 노동자가 뇌사 상태가 될 무렵 전남교육청에서는 “전남지역 63개 특성화고 학생 4,149명이 산업현장에서 실습생으로 근무하고 있다”(홍갑의 기자, 기아차 광주공장 현장실습생 쓰러져 의식불명, 2011.12.21.)고 발표했는데, 이들 청년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임금체불을 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노동자 살해는 계급지배의 산물
허환주 기자는 ‘조선소 잔혹사’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조선소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참혹한 죽음에 대해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다. 대다수 언론이 자본을 위해 복무하며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일삼는 상황에서 허환주 기자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중대재해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사는 길더라도 충분하게 볼 가치가 있다.
4.13 총선을 이틀 앞두고 울산에서 비보가 전달됐다. 하청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올해 들어 현대중공업에서 발생한 세 번째 사망 사고였다.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블라스팅 공장 내에서 작업하다 사달이 났다고 현장 노동자들은 이야기했다. 이날 공장 내 총 100개의 작업등 중 27개가 꺼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이것은 죽음의 끝이 아니라 과정에 불과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뒤, 다시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도 이틀 연달아…. 굴착기에 끼어 사망(18일)하고, 지게차에 깔려 숨졌다(19일). 역시나 어이없는 죽음들이었다. 2016년 4월이 지나기도 전에 올해만 5명의 노동자가 죽은 셈이다. 이중 3명이 하청 노동자였다.
… 사실 현대중공업 관계자의 ‘왜 우리만 그렇게 비판하느냐’는 말은 사실 반은 맞는 말이었다. 노동부 집계로 2014년 한 해 동안 일하다 죽은 노동자가 1850명이다. 보수적으로 잡은 통계에서도 하루에 5명이 죽고 있다. 현대중공업 그룹에서 2014년 한 해 동안 13명이 죽었으니 전체 사망자 수에 비하면 ‘조족지혈’일지도 모른다.
매년 산재 사망자수는 줄어들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2014년 한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사망자 수(357명), 1991년 걸프전 때 미군 사망자 수(382명)보다 약 5배나 높은 수치다. 이라크전 종전 때까지 사망(총 4412명)한 미군 사망자 수(1년 평균 490명)보다 3.6배나 많다.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사망(총 2346명)한 미군 사망자 수(1년 평균 180명)보다 10배나 많은 수치다.
물론 전체 인원 대비 사망 비율을 봐야겠지만, 사망자수로만 본다면 전쟁터 병사 못지 않게 위험한 삶을 한국 노동자들은 살고 있는 셈이다. 말 그대로 ‘산업 역군(役軍)’이다.
올해 최소 2만 명 이상 해고되는 하청 노동자들
주목할 점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이런 죽음이 몰려 있다는 점이다. 공개된 노동부 통계자료에는 1850명의 죽음에 ‘등급’이 매겨져 있지 않다. 누가 더 많이 죽었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다른 여러 수치와 통계로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많이 죽고 있다는 사실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중소 사업장일 경우, 하청업체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들 사업장에서의 사망률은 대형 사업장에서보다 높은 게 사실이다.
조선소도 마찬가지다. 노동부 자료를 보면 2014년 조선업종에서 37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했다. 이들 중 3분의 2 이상이 중소 사업장에서 일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수백 명의, 아니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조선업 불황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 길거리로 쫓겨나고 있다. 2014년 12월 말 4만1059명이었던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은 2016년 3월 말 기준으로 3만3317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1년 3개월 사이 7742명이 사라진 셈이다. 이 수치는 매일 업데이트되고 있다. 죽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감사해야 할까.(허환주 기자, 조선소 구조조정? 비정규직만 잘린다! [기자의 눈] 죽거나, 잘리거나…전쟁터 같은 일터, 프레시안, 2016.05.03.)
물론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이라크인들의 숫자는 최소 50만 명에 달하는데 비해, 미군 병사의 죽음은 최소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국주의 전쟁에서 미군 병사의 죽음보다 5배가 높은 1,850명이 기업 살인으로 사망했다고 한다면 이는 전쟁과 같은 양상이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은 실제적인 전쟁은 아니지만 이처럼 목숨을 걸고 일하다가 중대재해로 희생당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이것은 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자행하는 계급 전쟁이다. 이런 일들은 조선소뿐만 아니라 전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의 최우선적인 희생자들이 되고 있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죽을 수밖에 없는가?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위험에 처한 것은 전체 산업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1500여 명의 업무상 사고 산재 노동자와, 사고를 당하지 않은 1500여 명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전화 인터뷰한 2007년 연구가 있다. 1년 미만으로 고용계약을 맺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노동자보다 업무상 사고로 산재보상을 받을 위험이 2.87배 높았다. 이 수치는 나이, 노동시간, 교대근무 등 다른 위험요인의 영향을 보정하고도 남는 위험이었다. (Im et al., Am. J. Ind. Med. 55:876–83, 2012)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조선산업 노동자의 산재 사망만인율(산재보험 적용 노동자 만 명 중 산재 사망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원청과 하청 노동자로 나누어 비교한 연구가 있다. 200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원청노동자의 사고사망 만인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사내하청 노동자의 사망률은 그다지 낮아지지 않았다. 원청과 사내하청 노동자의 사고사망만인율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2009년에는 원청 노동자 만명당 0.82 명이 산재 사고로 사망할 때, 하청 노동자는 2.07명이 사망했다. 사망 위험이 2.5배가 넘는 것이다. (박종식,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이슈페이퍼, 2013)
2010년의 2차 근로환경조사 자료를 활용하여 원청 노동자 3천여 명과 하청 노동자 700여 명의 건강 상태를 비교한 연구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청노동자는 원청 노동자보다 일하다 다칠 위험이 두 배 높았다. 게다가 질병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위험은 원청노동자보다 3.56배나 높았다. (Min et al. Am. J. Ind. Med. 56:1296–1306, 2013)
비정규직 노동자가 더 많이 다치고, 더 많이 죽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불안정한 고용 구조 자체가 위험을 더 키우기도 한다. 6월 1일에는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에서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크게 다치는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모두 하청노동자였다. 놀랄 만한 소식도 아니다. 특히 복잡한 다단계 하청 구조로 이뤄진 건설 현장에서는 화재, 폭발 등 대형 사고의 희생자 대부분이 하청,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건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특히 건설업에서의 복잡한 다단계 하청 구조가 화재와 폭발 사고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복잡한 고용 구조 속에서 제대로 된 소통이나 조율이 어렵기 때문에, 화재나 폭발 위험이 있는 작업들도 한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특히 하루 단위로 고용되는 임시직 노동자들은 해당 작업장의 위험 요소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 교육이나 주의가 더 필요하지만, 이들에 대한 교육은 더 무시된다. (Ji-eun Park, Myoung-hee Kim. NEW SOLUTIONS, Vol. 24(4) 483-494, 2015)
오히려 임시 노동자에게 더 위험하고, 더 강도 높은 노동이 전가된다. 하청 단계를 거칠수록, 더 낮은 비용으로 작업을 해치우려는 압력은 커지고, 결국 비용으로 귀결되는 작업장 안전수칙은 무시된다. 더 위험한 업무를 떠안은 노동자들일수록, 스스로를 보호할 정보도 없고, 함께 대항할 여력이나 조직도 없다.(최민 기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비정규직이 더 많이 죽는 이유 있었다 [불안정노동자가 죽는다 1] 사고와 산재 사망, 오마이뉴스, 16.06.10)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은 명백히 계급지배의 산물이다. 초과이윤 확보를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자본이 ‘위험의 외주화’를 하고, 이는 원청이 안전관리 책임을 외주사로 전가하게 되면서 한층 더 노동자들을 위험한 작업에 노출되게끔 한다. 게다가 불안정한 고용 구조 자체가 위험을 더 키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일련의 참담한 죽음과 중대재해는 기업살인이다. 자본과 국가는 노동자에 대한 기업살인 공모자들이다. 필시 또 다시 새로운 비통한 죽음을 대거 양산하게 될 비용절감을 위해, 이윤확대를 위해, 그리고 이러한 자본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국가권력은 규제완화, 파견법 개악을 하고 자본의 산업경쟁력을 더욱 더 높이기 위해 ‘기업활력제고특별법’을 제정하려 한다. 박근혜 정권은 청년 실업 대책이 비정규직 확대라면서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떠밀고 있다.
다음 기사는 비정규직 실태를 제법 잘 폭로하고 있다.
놀이공원에서 근무하는 600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 정직원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매년 2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노조 측은 전했다. …서울에 살다 지난 3월 경기도 안산으로 넘어와 건설 현장에서 하청 업체 비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 모(25) 씨 역시 혹독한 현실 앞에 놓였다…. 그는 이어 “자재를 옮기러 3m 높이의 석고에 종종 올라가는데 옆에 안전봉은 없고 몸에 걸친 안전띠가 전부이다 보니 불안할 때가 많다”며 “임시 계단에 틈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발이 빠져 추락할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하루 11시간 이상 주말이나 휴일까지 반납하며 일을 계속하고 있으나 선배들을 보면 퇴직금은 꿈도 꾸지 못한다.(김기용·김광일 기자[청년 비정규직] “오늘도 제자리네요”…달리고 달려도 비정규직, CBS노컷뉴스, 2016-06-10 04:00)
이처럼 청년 비정규직의 실태를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는 이 언론기사는 전문가를 통해 청년 비정규직에 대한 대안을 내놓고 있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의 비정규직은 좋은 일자리로 이동하는 경우가 1%에 불과하다”며 “결국 위험 속에서 비정규직의 늪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규직이 직장 안에서 여러 직업훈련과 제도프로그램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반면, 비정규직은 상대적으로 그런 기회가 부족하다”며 “비정규직의 업무능력을 개발하고 그들의 인간관계(소셜 네트워크)의 폭도 넓힐 수 있도록 사업장과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같은 기사)
비정규직이라서 저임금 감수, 불안정 노동과 위험한 노동에 시달린다면 그 대책은 바로 정규직이다. 과학적 이해가 필요하지 않고 조건반사적으로 비정규직이라서 문제가 되면 그 대책은 정규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회학 교수라는 작자는 “정규직이 직장 안에서 여러 직업훈련과 제도프로그램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키워나”간다면(물론 이도 필시 현실을 과장하는 것이지만), “비정규직의 업무능력을 개발하고 그들의 인간관계(소셜 네트워크)의 폭도 넓힐 수 있도록 사업장과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대책이다. 여전히 비정규직 상태를 감수하라는 말이다. “위험 속에 비정규직의 늪에 빠져 있”는 노동자들이 “달리고 달려도 비정규직”으로서 “오늘도 제자리” 비정규직 신세를 감내하라는 것이다.
노동자 살해하는 자본주의 계급지배를 분쇄하자
엥겔스는 일찍이 24세의 나이인 1845년에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라는 명저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들의 참담한 실태와 그 배후의 부르주아 지배에 대해 생생하게 폭로했다.
광부들이 호소하는 다른 질병들은 주로 각종의 심장질환들인데, 특히 심장 확장과 염증, 심낭염, 기관지염, 동맥경화 등의 증세들을 자주 호소한다. 이러한 온갖 질병들은 특히 광부들에 심하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의 틀림없이 과도한 육체적 긴장에 기인한다. 많은 광부들 역시 고통스럽고 위험한 질병, 특히 천식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 어떤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광부들이 40세가 될 무렵이면 이러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얼마 못가서 더 이상 작업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종종 이러한 질병의 결과는 30세경부터 보이기도 한다. 습기찬 환경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특히 폐병으로 고생한다. 스코틀랜드의 몇몇 지역들이 경우 20-30세 밖에 되지 않은 젊은 광부들이 폐를 비롯한 다른 열병에 특히 감염되기 쉽다. 광부들이 광범위하게 걸리는 병은 ‘진폐증’(black spittle)이다.
… 오직 광산 소유주의 이윤에 대한 탐욕만이 이러한 질병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만약 광산 소유주들이 환기시설을 설치하기만 한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 저 불행한 광부들이 겪어야 하는 위험은 지금까지의 서술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광업은 영국의 그 어떤 산업보다도 많은 치명적인 재해를 만들어내고 있다. 석탄광산의 경우 특히 끔찍한 재해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르조아지에게 있다. 석탄광산에서 자주 발생하는 탄화수소 가스는 공기와 직접 접촉하게 되면 폭발한다. 어쩌다가 불꽃으로 인해 가스가 폭발하면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된다. 몇몇 광산들의 경우 그러한 폭발사고는 거의 매일 발생한다. 1844년 9월 28일 더램 지역의 하스웰 광산(Haswell Colliery)에서는 한꺼번에 9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유해가스인 탄산가스도 석탄광산에서 발견된다.
… 이러한 개스의 해독은 오직 입구에서부터 막장의 작업지역까지 환기갱을 설치해서 광산의 환기상태를 개선함으로써만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부르조아지들은 이를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광부들이 광산용 안전램프를 사용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램프들은 빛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거의 쓸모가 없다. 광부들은 그 대신에 촛불을 사용한다. 따라서 폭발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부르조아지들은 광부들이 부주의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책임은 부르조아지들에게 있다. 만일 그들이 환기시설을 개선했다면, 광산에서 그러한 폭발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갱도의 천정에서는 석탄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천장 전체가 완전히 붕괴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광부들은 완전히 묻혀버리거나 팔다리가 으스러진다. 부르조아지들은 탄층이 아무리 얇아도 송두리째 채탄하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이와같은 재해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이밖에도 노동자들이 내려가는 로우프는 너무나 낡아서 종종 끊어지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불쌍한 광부들은 갱도의 막장에서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다,(엥겔스,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박준식.전병유.조효래 옮김, 두리, 293-296쪽)
이처럼 당시 영국 광산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각종 고통스런 직업병과 참혹한 죽음은 부르주아들이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추구하는데 눈멀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인 해를 끼쳤고 그것이 죽음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과실치사라고 부른다. 만일 가해자가 미리 자신의 행위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 행위는 살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사회에 의해서 자행되는 행위도 개인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명백히 살인이다. 비정상적으로 너무 일찍 죽음으로 가게 하는 상태에 수백 명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빠뜨리는 사회적 행위는 검이나 창에 의한 살인과 마찬가지이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생활필수품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살아가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빠져 버릴 때 이것도 사회의 살인행위이다. 사회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한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노동자들이 법률의 강제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살인행위이다. 이러한 사회의 살인 행위는 숨겨진 사악한 살인이며, 누구도 그 살인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형태의 살인이다. 살인자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살인이며 살인형태가 작위(作爲 Commission)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작위(不作爲 Omission)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희생자의 죽음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살인이다. 그러나 살인은 여전히 계속된다.(같은 책, 131-132쪽)
엥겔스가 이 책을 발행하고 나서 171년이 지났다. 이러한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부작위에 의한 살인행위는 엥겔스가 고발한 영국 자본주의 초기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의 상태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의 백혈병에 의한 사회적 살인으로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죽어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매일같이 중대재해로 노동자들이 기업살인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 기업살인은 “부작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희생자의 죽음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살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에 의한 “살인은 여전히 계속된다.”
인천지법 부천지원 형사1부(부장판사 이언학)는 27일 살인 및 사체손괴·유기·은닉 등의 혐의로 기소된 최모(35)씨에게 징역 30년을, 한모(35‧여)씨에게 징역 20년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학대를 통해 아들의 건강상태를 극도로 악화시켰고 부모로서 적절한 치료 등을 하지 않아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서 “작위에 의한 사망의 결과발생과 동등한 형법적 가치를 가진다”고 지적했다. 실제 아들을 살해하지 않았지만 살해한 것과 동등한 형법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무언가 안해서 죽게한 ‘부작위에 의한 살인’…법원 ‘경종’, 포커스뉴스, 2016-05-30)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필요성이 있다”고 판결했지만, 이윤추구를 위해 정작 안전시설을 갖추지 않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도 그 죽음을 방지하려는 마땅한 의무를 하지 않는 자본에게는 ‘경종’을 울리지 않는다. 그뿐인가? 자본주의 법률은 온통 자본가의 이윤과 소유권을 보호하는 법률이며,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단죄하는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엥겔스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얘기로 이 책을 끝내고 있다.
과거처럼 음성적으로 구석에서 진행되던 부자들에 대한 빈자들의 전쟁은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될 것이다. 평화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더욱더 날카롭게 분열되고, 적대심은 강화되고 있으며, 게릴라적인 작은 요소는 더 큰 주요한 격전으로 집결되고 있으며 얼마 안가서 조금만 자극을 줘도 거대한 눈사태를 일으키기에 충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택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이라는 전쟁구호가 이 산하에 울려펴지게 될 것이며, 그때는 이미 부자들이 주의해도 때가 늦게 된다.(같은 책, 350쪽)
정권과 언론은 구의역 사망 사건에 대해 앞 다퉈 추모를 하고 조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업살인법’ 제정은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가장 빈번하게 노동자들이 중대재해를 당하는 건설 현장에서 안전한 작업장,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건설노조에게 대대적인 공안몰이를 일삼고 있다. 건설 노동자들의 죽음의 방지자, 죽음에 대한 감시자들에 대한 탄압은 죽음을 방조, 비호하고 확산하는 국가와 자본의 공모에 의한 적극적인 살인행위다.
자본은 규제완화와 비정규직 확대, 노동법 개악처럼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권력의 비호 하에서 마음 놓고 노동자 살해를 계속하고 있다. 조선소 장기 호황 상황에서 죽거나 용케 살아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며 자본에게 엄청난 이윤을 안겨주던 노동자들은 조선소 공황이 닥치자 이제는 잉여 폐기물이 되어 무참하게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매일같이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운 좋게 살아 있으면 언제든지 잉여 노동력이 되어 사회적 살인을 당하고 난폭하게 축출당하고 있다. 이미 조선소에서 계약직 물량 노동자 등 수만 명의 하청 노동자들이 잘려 나갔는데, 박근혜 정권은 지난 6월 8일 조선업 구조조정 방안을 통해 앞으로 2020년까지 최대 8만 명의 노동자들을 추가로 정리해고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대량 구조조정은 조선소를 중심으로 건설, 철강, 금융권을 비롯해 전 산업으로 확산될 것이다.
수십만, 수백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삶이 파탄에 이르고 있고, 빈곤과 가정파탄, 실의 등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있고 또 죽어나가게 될 것이다.
엥겔스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그리고 맑스가 <자본론>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그 배후의 자본 지배를 폭로한 이래,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과 비참한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도로 발전한 현대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최후의, 최고의, 최신의 단계인 독점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산업자본주의 초기의 현상”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삶이 그때에 비해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비정규직의 확산과 노동자들의 일련의 죽음은 노동자들이 자본과 권력의 공세에 지속적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문제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투쟁에서도 그랬지만 민주노총은 현재로서는 자본과 권력의 공세에 맞서는 최고의 계급투쟁 참모부다. 그런데 민주노총 7월 ‘총파업’은 현재 상태에서는 개별 사업장들의 임단협 쟁점을 모으는 시기 집중 투쟁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이것을 총파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민주노총 총파업은 자본과 권력 공세의 핵심 고리를 포착해 들어가고, 단사, 연맹, 산별마다의 분산적 쟁점을 박근혜 퇴진 투쟁으로 집중시켜내고, 매 시기마다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가두투쟁을 강화하고, 민중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로써 제기하여 민중과의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정세가 고양됐을 때 폭발적으로 성사시켜낼 수 있는 것이다.
선진 활동가들은 이 투쟁에 최대한 복무해야 할 것이며, 여와 야의 협치, 즉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 정당 공동 지배 체제에 맞서 국회 내에서의 노사정위원회나 노사정협의체가 이 투쟁을 약화·교란시키는 것을 폭로하고 타격해야 한다. 조선업종 구조조정에 대해 마치 노동자의 대안인 것으로 유포되고 있는 산업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반노동자적 실체를 대대적으로 폭로해 나가야 한다. 일부 조선업종 노조에서 이러한 입장에 사로잡혀 양보교섭을 해나가고 있는 것을 준열하게 비판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업종 비정규직에 우선적으로 집중되면서 사무 일반직, 여성 노동자, 기장 등 정규직의 취약한 고리를 타격하며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자본의 대량 정리해고와 희망퇴직 공세에 맞서 계급적 단결과 공동투쟁을 성사시켜내고, 이를 위한 조직적 무기인 조선업종 원하청 단일노조 결성을 통해 단일한 전선을 형성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투쟁해 나가야 한다.
박근혜 정권은 정권말로 치닫고 있지만, 공황이 전면화 될수록 독점자본의 이해를 전면에 관철시키려고 국정원, 검찰, 경찰 등 국가 테러 기구를 전면에 내세워 노동법 개악과 노조 파괴를 자행하는 등 노동자 민중에 대한 폭력을 전면적으로 자행하는 집행위원회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해 나갈 것이다. 파쇼 권력과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다.
쏘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체제가 강성했을 때, 계급투쟁이 고조됐을 때, 비록 자본주의일지라도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아졌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내리고, 계급투쟁이 약화됐을 때, 노동자들은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잔혹하게 사용되고,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가혹하게 내팽개치게 되었다.
빈곤과 실업,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일련의 기업살인 등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적대계급과 권력에 대한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절감하는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 적대적인 사회에서 계급투쟁이 부활해야만 노동자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 거대한 이념을 넘어 소박한 진리로 다가온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노동자 정리해고를 중단하라”
이 참혹한 죽음의 행렬을 끝장내야 한다. 자본의 지배가 노동자들의 참혹한 죽음과 대량 폐기를 낳았다면 이 자본의 지배를 끝장내는 것으로 죽음의 행렬을 끝장내야 한다. 조선소에서, 건설현장을 중심으로, 더 나아가 전국의 노동자들이 이 참혹한 죽음과 대량 노동자 폐기를 중단시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 대량 해고를 위해 노동자에 대한 각종 폭력 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을 끝장내야 한다.
구의역 기업살인 희생자 어머니의 절규를 가슴 속에 새기고, 계급지배에 대한 피맺힌 계급적 분노를 다지며 투쟁하자.
“울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 나왔습니다“
울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 용기내서 나왔습니다. 큰 아들 말고 동생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상처로 인해 다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저희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가 필요할까요? 다 필요 없습니다. 살아서 제 곁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우리 아들을 살려주세요.(울음) 저는 지금도 우리 아들이 온몸이 부서져서 차가운 안치실에 누워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회사는 지킬 수도 없는 규칙을 만들어놓고, 우리 아이의 과실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서울메트로 설비처장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찾아와서 (출동) 보고를 안 한 우리 아이의 과실이라고 했습니다. 전자운영실에 보고를 안 하고 작업하면 전철이 평소 속도로 달려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규정을 어겨가며 혼자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 겨우 스무 살입니다.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다니며, 배운 대로, 그리고 시킨 대로 일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규정을 어겨서 개죽음을 당했다니요? 간절히 부탁드리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힘없는 우리로서는 여론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들의 원통함을 풀고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죽은 아들을 봤습니다. 머리털이 피에 붙어…(울음) 20년을 키운 어미가 아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이…(울음) 우리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지나갈 때, 뒤통수만 봐도 우리 아들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울음) 뒤통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짙은 눈썹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보니, 우리 아이가 입고 나간 옷이 맞았습니다… (울음)
“더는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니 더는 살아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 아이가 죽고 나도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는 눈을 감으면 사랑스러운 아들 모습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참한 사고 후 아들 모습만 떠오릅니다. 제 심장의 두근거림이 저 지하철 소리처럼 쿵쾅거립니다. 혼자 얼마나 무서웠고 두려웠을까요? 3초만 늦게 문이 닫혔다면, 제가 그 따뜻한 손을 부빌 수 있었을텐데…(울음)
저의 남은 인생은 숨을 쉬고 있지만 제가 살아있는 게 아닌 삶을 살 듯합니다. 그래도 제가 부모로서, 지금 상황에 우리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우리 아이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면,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만은 밝히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억울하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직 빈소도 마련하지 못하고, 차가운 곳에 있습니다. 제발 우리 아이를 떳떳하게 보내게 도와주십시요. 힘도 기댈 곳도 없어 기자들에게 이렇게 읍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 아이 팔다리가 끊어졌다면 내가 팔다리가 되어 살아가면 될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 어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에게 늘 책임감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는 절대 그렇게 키우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 강하고 지시 잘 지키는 사람이 개죽음당하는 사회입니다. 그 어린나이에 죽은, 산산조각 난 아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개죽음 당했다고 합니다. 첫째를 그렇게 잃었는데 둘째도 그렇게 잃을 수 없습니다. (울음) 첫째를 미친 듯이 그렇게 키운 게 후회가 됩니다.
“백 몇 만원 월급에도 100만 원 적금 붓던 아들”
우리 아이는 속 깊고 착한 아이였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대학을 포기하고 누가 공고를 가서 돈 벌어오라고 하겠습니까. 장남이라는 책임감에 스스로 공고를 선택했습니다. 빨리 취업을 해서 부모님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학은 나중에 돈을 벌어 간다고 했습니다. 그때 말렸으면…
그렇게 취업을 하고 나서도 한 달에 백 몇 만원 받는 적은 월급에서도 매달 100만 원씩 적금을 부었고 동생 용돈도 줬습니다. 끼니를 걸러가며 말입니다. 하지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모가 걱정할까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종일 끼니도 걸러가며 일했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당장 그만두라고 했을 겁니다. 그 백 몇 만 원이 뭐라고….(울음) 자기가 장남이고 책임감이 강한 게 문제였습니다. 부모에게 말하면 걱정하고 그만두라고 할테니 이야기를 안 한 듯합니다. 자기가 더 참으면 공기업 직원이 되리라 믿고 참은 듯합니다. 우리가 아이를 책임감 없는 아이로 키웠다면, 술이나 마시는 아이였다면, 차라리 그런 아이였다면 내 곁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상사 지시대로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게 너무나 후회됩니다. 왜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을까요….(울음) 지금 그런 게 모두 다 후회스럽고 한이 됩니다
죽은 당일 날도 종일 굶어가며, 시키는 대로, 쫓겨 다니며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잘못해서 죽은 거라니..(울음) 불쌍하고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아이 유품인 갈색 가방을 병원에서 받았습니다. 아이 가방은 학교 다닐 때 검사한다고 열어본 이후 처음 열어봤습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사발면이 들어있나요? 여러 가지 공구들 사이에는 숟가락도 들어있었습니다. 비닐에 싸여있는 것도 아니고…(울음) 그 사발면 용도는 한 끼도 못 먹었으니 그거라도 먹으려고 했던 거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규정을 어겼다고 하는데 무슨 규정을 어겨가면서 무슨 일을 했나요? 시킨 것은 저들인데 규정을 어겼다고 해요.
“제발 억울함을 꼭 풀어주세요”
기자님들, 제발 우리 아이의 억울함을 꼭 밝혀주세요. 한창 멋 부리고 여자친구 사귈 나이입니다. 이렇게 원통하게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지금도 지하철은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죽을 수 있습니다. 정말 엄마로서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아이가 살아올 수는 없습니다.
삼일을 못 봤는데, 너무 보고 싶습니다. 군대 간 거라고, 유학 간 거라고 살라고 합니다. 저는 평생 아이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만 죽이는 게 아닙니다. 이 진실을 제발 알아주고, 우리 아이의 원통함을 풀어주세요. 우리 아이 차가운 데서 꺼내주길 바란다. 정말 부탁드립니다.(허환주 기자, “죽은 아들, 20년 키운 어미도 못 알아보겠더라” 기사에 전문 게재, 프레시안, 2016.05.31.)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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