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UN참전국의 실체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7월 27일은 정전협정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하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시각은 진보와 보수의 시각을 떠나서 대한민국의 학계·정치·사회·대중문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쓴이는 한국전쟁에 관해 공부 및 여러 글들을 쓰면서 한국전쟁이라는 한 역사적인 사건을 그저 단순히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보는 것이 매우 편파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와 비슷하게 “마오쩌둥의 중국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라는 식의 생각도 해방 전후사와 한국전쟁을 너무나도 모르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경우 한국 사회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기습 남침한 것으로 알려졌고, 북한의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으로 정의한다. 북한(조선)에서는 “미제와 리승만 괴뢰도당이 먼저 침략한 전쟁”으로 알려졌고, 미국의 남한 식민지배를 끝내기 위한 조국해방전쟁으로 정의한다. 그에 반해 미국은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잊혀진 전쟁으로 정의하고 있다. 반면 이 전쟁에서 북한을 도운 중국의 경우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했다는 의미로 항미원조 전쟁이라 정의한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각 주체에 따라 보는 시각이 천차만별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의 성격이나 전쟁범죄의 양상을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성격을 자유롭게 논한다는 것은 지난 2000년대 중반 강정구 교수의 사례만 보더라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영역에 있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전쟁범죄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야 하는 중요한 주제지만, 글쓴이 또한 해당 부분에 대해 <노동자정치신문>에 여러번 기고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냉전 시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놓치는 점을 보고자 한다. 즉, “한국전쟁으로 참전하여 남한에 지원군을 보낸 UN 국가가 비슷한 시기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텔레비전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UN군들을 홍보하는 선전 광고를 적잖게 내보낸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미국의 경우 항상 “우리를 위해 참전해준 혹은 도와준 고마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 외에 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 등도 한국전쟁을 다룬 대중매체들이나 기사 속에서 옹호받고 있으며, 이들 참전용사들이 올라온 유튜브 영상에는 “우리 대한민국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와 같은 댓글들이 달린다.

한국전쟁을 그저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보다보니 우리가 맥락적으로 생략하게 되는 역사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소위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미국·영국·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이 비슷한 시기 무엇을 했는가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학계에서도 여전히 묻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1년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무차별 폭격 학살을 연구한 김태우 교수가 『냉전의 마녀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방문하여 미국과 한국이 벌인 전쟁범죄를 조사한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사단의 구성원은 총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으로 구성됐다. 이들의 국적은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 등과 같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대륙 즉 국적과 인종을 초월했다. 이 조직의 특징이라고 하자면,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덴마크에서 온 이다 바크만(Ida Bachmann)은 조사위원들 중 가장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에 반해 마리아 디미트리예브나 옵샨니코바(Maria Dmitrievna Ovsyannikova)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대령으로 복무한 인물로 열혈 친소주의자였다. 그러나 단체의 성격은 보수주의보단 당연히 반식민주의와 반파시즘 성격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김태우 교수의 해당 저서에서는 이 조사단이 반식민주의와 반파시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비록 해당 저서에서는 몇몇 한계(소련군 200만 강간설 무비판적 인용, 신천 학살에서의 미군 개입에 대한 부정 시도)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전쟁이라는 주제에서 논의되지 않던 역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글쓴이는 이와 같이 논의되지 않은 한국전쟁 역사를 앞으로 많이 논의하고 연구해야 한다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 전후로 소위 UN 참전국들이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도 필요하다.

제일 먼저 미국에 대해 언급하겠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남한 이승만 정부를 위해 보낸 국가였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최소 3만 6,000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92,134명이 부상당했다. 그 당시 참전한 미군 병력이 170만 명이 넘는다는 걸 생각해보자면,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입은 손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3일도 안되어 참전했다. 개전 4일 만에 북한의 수도 평양을 폭격했고, 개전 10일 만에 미 지상군은 북한의 인민군와 첫 교전을 벌였다. 한국전쟁에 대해 공부해본 이들이라면 이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이 냉전 과정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를 아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 나치에 협력한 전범들을 유럽에서 이용했다. 대표적으로 1946년에 발발한 그리스 내전에서 미국은 나치에 협력한 왕당파 세력을 돕기 위해, 군사 고문단을 보냈다. 그리스 내전을 우익의 승리로 마무리한 미국은 그리스에 우익 정부를 세웠고, 해당 정부는 25년간 군사독재를 유지했다. 이들은 당연히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또한, 미국은 반소공작을 진행하며 우크라이나에 나치주의자들을 보내 소련을 사보타주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즉,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나치 학살자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반소투쟁을 전개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은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문제에도 개입했다. 필리핀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몰아냈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필리핀에 친일한 인사들을 앞세워 친미반공 정부를 세웠다. 반면에 반일 게릴라 투쟁의 선봉이었던 필리핀 공산당과 그 휘하의 후크발라합 등은 합법적으로 정치무대에 참여하고자 했지만,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더글라스 맥아더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무산됐다. 미국은 친일 친미 성향의 필리핀 반공주의자들을 동원하여 좌익 게릴라를 소탕하고 1만 명 이상의 인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인도차이나의 경우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자, 식민지 지배자 프랑스를 돕기 위해 1950년에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보냈으며, 프랑스의 전쟁 비용 80%를 대신 부담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참전국가 영국은 어땠을까? 영국 또한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영국이 인도를 1947년에 독립시켰다고 얘기한다. 그 말은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그 과정이 단순히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식민지 시기 영국이 만들어 놓은 종족 갈등은 결과적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열로 이어졌고, 그것은 현재로까지 이어진다. 영국이 중국령 홍콩을 150년간 지배한 사실 또한 널리 알려졌다. 영국이 홍콩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보인 폭력성은 1950년대와 1960년대 공산주의 성향의 시위를 진압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그리스 내전의 시작은 영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그리스에 입성하면서 전쟁의 불씨를 키웠다. 바로 친나치 성향의 왕당파를 지원하고 허용한 주체가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냉전 초기 미국의 개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외에도 영국은 말레이시아 내란 개입을 통한 독립운동 세력 탄압에 열을 올렸다. 또한 케냐의 독립운동 세력인 마우마우단이 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이 독립운동을 탄압했으며, 학살도 벌였다. 케냐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영국은 케냐인 9만 명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참전국 프랑스 또한 한국전쟁 전후로 수많은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을 벌였다. 우선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것은 프랑스와 베트남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이 식민지 전쟁을 벌이면서 수많은 베트남인들을 학살하고 죽였다. 50만 명이 그렇게 죽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찌민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심지어 한국전쟁에 파병했던 병력 일부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에 베트남으로 보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이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도 그런 잔혹한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는 인도차이나보다 더 잔혹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알제리인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세티프-겔마 학살로 무려 2만 명에서 4만 5,000명의 알제리 민간인을 한달 간 학살했다. 1954년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8년간 식민지 전쟁을 벌였다. 1962년 알제리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는 알제리인 100만 명을 죽였다. 심지어 1955년 8월 20일 프랑스는 콘스탄틴에서 1만 명의 알제리인을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뿐만아니라 프랑스는 자신의 수도에서 알제리인들이 평화적인 항의시위를 벌이자, 발포하여 200~300명의 알제리 민간인을 학살하고 그 시신을 세느강에 투기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게다가 프랑스는 인도양에 있는 아프리카 섬인 마다가스카르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다가스카르에서도 반식민지 운동이 전개됐는데, 프랑스는 여기에도 군대를 보내 수만 명의 마다가스카르인을 학살했다. 대략 5만 명에서 많게는 9만 명의 마다가스카르인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학살당했다. 1958년 핵보유에 성공한 프랑스 당국은 태평양에 있는 타히티를 포함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방사능을 노골적으로 유출하는 핵실험을 30년간이나 자행했다. 소위 한국전쟁 자유민주주의 참전국 프랑스는 이런 짓거리를 자행했다. 한국전쟁 시기 프랑스는 이런 학살 만행을 저지르고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한 주체였다.

그 외에도 한국전쟁 서방 참전국은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있다. 그 당시 네덜란드 또한 인도네시아에서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전쟁을 벌였고, 처참히 실패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무려 10~20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죽였다. 벨기에 또한, 자신들의 식민지인 콩고를 지배했다. 심지어 한국전쟁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5년이 흐른 시점에도 벨기에인들은 콩고에서 인간 동물원을 전시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콩고의 독립운동가 파트리스 루뭄바가 저항하여 콩고는 1960년대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루뭄바가 소련에 친화적이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과 함께 루뭄바를 암살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벨기에 식민당국에 협력한 모부투를 않혀놓고 30년 동안 독재 통치를 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UN으로 참전한 국가들은 소위 자유민주주의와는 매우 상반된 행동들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전쟁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의 남침에 맞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수호한 UN 자유수호 국가”라 배우는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런 국가들이 말 그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주는 국가들로 착각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한 비극적인 코미디가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글쓴이는 앞으로의 한국전쟁 연구가 UN 참전국의 실체를 폭로하는 방향으로도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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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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