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사월혁명의 진실
이 글은 《알려지지 사월혁명의 진실》이라고 제목을 달아야 할 거 같습니다.
오늘은 사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이승만의 3.15부정선거가 있던 날입니다. 그런데 사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는 투쟁 정도로만 알려지고, 심지어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둔갑되어 있는데 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사월혁명은 해방 이후 미국과 그 주구 이승만 도당이 자행한 백색테러 학살로 좌절된 민중해방의 열망이 아직 꺼지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진짜 민주혁명이었습니다.
사월혁명은 해방 이후 저질러진 민중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이었습니다.
사월혁명은 빈곤 척결을 위한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었습니다.
사월혁명은 외세가 개입하여 이남을 반공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해 획책한 단정ㆍ단선으로 분단된 나라의 자주통일을 외쳤습니다.
《장면 정부는 반공주의와 냉전 이데올로기로 색깔을 덧씌우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학생과 청년 그리고 혁신계의 반발만 불러오고 통일운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그 단적인 예로 청년·학생단체와 혁신계정당·사회단체의 단체명에는 대부분 ‘통일’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6·25전쟁 정전 이후 겨우 7년 정도 지난 세월이었기에 민(民)의 가슴에는 ‘통일’이 지상과제였다.》
사월혁명은 반미투쟁이기도 했습니다.
사월혁명은 이승만의 축출 이후인 1961년 장면 정권의 미국과의 예속적 경제협력에 반대하는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4월혁명공간의 3대 투쟁은 ‘2·8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2대악법(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반대투쟁’ 그리고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투쟁은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노동자들도 이 투쟁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노동계는 4월 1일 대구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경북지구연합회에서 조합원 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2대악법 반대 규탄대회’를 개최한다. 또한, 4월 7일 ‘대구 2대악법반대 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는 ‘2대악법 반대 및 구속자 석방요구대회’를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고, 이후에도 4월 9일과 11일에도 집회가 계속됐다.》
《‘2대악법’에 대해서 제일 먼저 대구 경북지구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원노조)는 ‘2대악법’ 반대 결의문을 3월 5일 발표한다.》
대구, 마산, 부산 등 영남지역이 이 투쟁에 앞장선 선진적ㆍ진보적 지역이었다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이 투쟁이 전국적으로 불타오르던 시점에 박정희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해방 후 백만명 이상의 민중학살과 한국전쟁기 학살, 한국전쟁 이후 고조된 반공주의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해방열망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이 해방 열망을 짓밟은 미국반대 투쟁으로까지 번지자 박정희를 내세운 군사쿠데타로 이 투쟁을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또 하나의 폭군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독재자 이승만을 하와이로 축출한 것은 아니다.》
(‘악법반대전국청년단체공동투쟁위원회’ 선언문 중에서)
“계속혁명”, “중단 없는 혁명”
사월혁명의 이 정신은 오늘날 윤석열 퇴진투쟁에서도 계승되어야 할 혁명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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