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스탈린주의 국가 알바니아 체제전복 기도 – 냉전 다큐

저자: 데이비드(David)
역자(김남기)

 
이 글은 Youtube 채널 중 하나인 The Cold War 동영상 중 하나인 서방의 알바니아 체제 전복 시도에 대한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비록 일정 정도 친서방적인 관점이 있기는 하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동유럽의 작은 나라인 알바니아 사회주의 정권을 어떻게 전복하려 했는지를 아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영상이다. 동영상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역주) 

https://www.youtube.com/live/do0kEBU0_d8?app=desktop 
 
1. 서문
 
이 유튜브 채널을 오래 시청한 구독자라면 냉전이 격화되기까지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에 시작된 냉전은 모스크바의 가장 작은 위성국가였던 알바니아에서조차 가열되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 알바니아에 침투하여 엔베르 호자(Enver Hoxha) 공산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던 서방의 첩보 기관이 수행했던 준군사작전인 벨류어블(가치, VALLUABLE), 비지핀드(BGFIEND), 채리티(관용, CHARITY) 및 폰타나(FONTANA)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론상으론 알바니아는 서구가 노리기 좋은 표적이었고, 소련의 동맹국들과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죠. 하지만 계획 조정 능력 미달과 적절한 정보의 부재 그리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상대 때문에 계획은 혼란스러웠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저는 유튜버 데이비드이고요, 오늘은 알바니아 현대사에 대해 보도록 합시다!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알바니아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2년 동안 공산주의 성향의 빨치산들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영국의 물자 및 공중지원 하에 알바니아를 점진적으로 차지해 나갔습니다. 1944년 5월, 공산당의 지도자인 엔베르 호자는 알바니아 민족해방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고, 호자는 점령군인 추축군 뿐만 아니라 당연히 반공주의자이자 파시스트 협력자들인 발리 콤베타르(Balli Kombetar,  말 그대로 국민 전선)와의 싸움을 이끌었습니다. 그해 11월, 독일군은 수도 티라나에서 철수했고, 호자와 그의 최측근인 메흐메트 셰후(Mehmet Shehu)는 그 나라 최고 정치인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호자는 총리가 된 후 내무부 장관 코시 죠제(Koci Xoxe)의 도움을 받아 정통 스탈린주의 노선을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직후, 죠제는 반대파와 반체제 인사 수천 명을 처형했지만, 그의 업보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죠제는 친베오그라드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알바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티토-스탈린 분열 이후 호자는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1948년 10월, 죠제는 해임되고 호자의 친구인 셰후가 죠졔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9년 5월, 비밀 재판 끝에 한때 사형 집행자였던 죠졔는 사형에 처해졌죠. 죠졔의 처형은 더 광범위한 반티토주의 숙청의 일환이었고, 이로 인하여 알바니아의 공산당인 노동당 당원의 25%가 추방되었습니다.* 
 
* 이 경우 유튜버는 엔베르 호자 정권이 스탈린주의적 숙청을 감행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기본적으로 알바니아의 전후 숙청은 파시스트에 협력한 사람들을 처단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또한, 티토의 경우 스탈린과의 대립 속에서 실제로 미국을 도와 그리스 내전에 패전을 제공한 책임도 있다. 즉, 맑스-레닌주의 진영이나 마오주의 진영이 티토에 대해 수정주의 앞잡이 혹은 제국주의 앞잡이라 비판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호자 정권의 티토주의자 숙청도 단순히 스탈린식 숙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맥락도 같이 봐야 한다.(역주)  

반티토주의의 숙청과 죠제의 처형으로 인한 또 다른 결과는 티라나(알바니아의 수도)가 모스크바의 우산 아래 놓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죠제가 승리했다면, 서방 진영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관계를 발전시킨 것과 비슷하게 알바니아와의 협력 및 협조 관계를 구축하는 데 더 좋은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과 전혀 반대되는 역사를 거리 다루지 않으니 이런 상상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유튜버의 이러한 주장도 앞의 각주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비록 다른 얘기지만, 소련의 정치인인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이 시기 냉전의 성격을 규정하며, “제국주의 진영 및 반민주주의 진영이 서구이고, 반제국주의 및 민주주의 진영이 소련”이라 정의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티토의 그 당시 친서구적 노선은 사회주의 진영의 배신이라 볼 수 있는 지점들도 같이 존재한다.(역주)
 
아무튼 그 결과로 스탈린은 남유럽에 확고한 동맹국을 얻게 되었고, 소련 해군은 아드리하해에 있는 항구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그때까지도 격렬한 내전을 벌이고 있는 그리스의 공산주의 진영은 남부 알바니아에서 안전한 보급로와 주둔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1948년 말, 엔베르 호자 정권은 영국, 미국, 이탈리아의 첩보 기관의 눈에 띄게 됐죠. 스탈린이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서방 진영은 일련의 준군사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이 약소국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준군사작전을 동반한 계획이 실행에 옮겨집니다. 
 
* 이 당시 그리스에서는 1946년부터 제2차 내전이 발발하여 좌우 갈등이 심화됐다. 사실 이 내전의 원인은 영국에게 있었다. 1944년 나치로부터 해방된 그리스에서는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온 그리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좌익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는데, 영국 측이 나치에 협력한 왕당파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영국의 이러한 정책은 미국이 이어받았으며, 특히나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실현됐다. 그리스 내전에서 미국이 지원한 우익 세력은 10~15만 명을 학살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했고, 1974년 민주화를 이룩할 때까지 군사독재가 지속됐다.(역주)
 
** 스탈린이 동유럽을 지배했다는 식의 관점은 과거 냉전 시절 서구의 전통주의적 역사학자들이 가졌던 생각이다. 참고로 소련은 냉전 초기 팽창적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수세적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 또한, 소련이 타국을 지배하려는 식의 내러티브에 대해 반론을 가한 적이 있다. 거기다 소련이 동유럽을 위성국화 했다는 주장도, 몇몇 연구들을 보면 각국의 독자성을 원천 무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들도 제법 있다.(역주) 
 
3. 비지핀드 작전 

알바니아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계획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당시 새로 구성된 CIA의 부서 중 하나인 정책조정국(OPC, Office of Policy Coordination)이 수행한 비지핀드 작전(Operation BGFIEND)입니다. 저자 알버트 루루시(Albert Lulushi)에 따르면, 이 계획의 첫 번째 핵심 부분은 실제로 조그 왕(King Zog)에 의해 구상되었다고 합니다. * 그 당시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폐위된 알바니아의 왕은 1948년 12월 23일 자 편지를 카이로 주재 미군 무관에게 보냈습니다. 


* 조그 왕은 알바니아의 국왕으로 1939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영국으로 도망쳤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파루크 1세의 도움으로 이집트에 정착했다. 이 시기 알바니아의 호자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지만,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패했다. 1952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왕정을 전복시키면서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고,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역주)
 

조그 왕은 해외에 있는 알바니아 반체제 인사들을 이용하여 알바니아에 잠입한 뒤 공산주의 정권을 전복시키자는 제안을 담고 있었는데, 조그 왕에 따르면 이는 매우 인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제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해군 정보국은 조그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1948년 봄, 그들은 알바니아에서 합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CIA의 또 다른 지부인 특수군사작전실(OSO, Office of Special Operation)과 접촉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아이디어는 유럽 내 소련 위성국들에 대한 CIA의 정책을 지시한 미국 국가안정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의 10/2 지침에 공감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1948년 7월, OSO(특수군사작전실)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모집한 알바니아 반공 반체제 단체가 침투에 성공하도록 하기 위해 이탈리아군에 C-47 항공기와 자금 및 물자를 제공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채리티 작전(관용 작전, Operation CHARITY)은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 여기서 왜 이탈리아가 알바니아 체제 전복 작전의 중요 요충지가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선, 우선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간략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무솔리니 정권 치하에 있다가 1943년부터 빨치산 투쟁이 일어나 적잖은 이탈리아인들이 무솔리니와 나치에 맞서 싸웠다. 1945년 4월 25일에 해방을 이룩했으며, 무솔리니는 그해 4월 28일에 총살됐다. 1943년부터 빨치산 투쟁을 전개해온 이탈리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에선 전후 좌파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좌파 집권을 두려워한 미국은 이탈리아에서 과거 파시스트 조직을 이용하여 이들의 집권을 막았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미국에 협력하는 국가가 됐다. 따라서 알바니아에 대한 체제 전복 시도의 이탈리아 측 참가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경우 알바니아와 더불어 아드리아해를 끼고 있기때문에 침투 경로 및 침투요원 훈련장소로 사용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역주)

 
작전의 목표는 알바니아 내의 반공 저항 세력과 연계하고 내부 정치 상황, 방어 시설, 전투 서열(부대의 편성과 편제, 단위부대 부호, 지휘 구조, 병력의 배치와 운용 및 장비, 보급 방법 등을 정리하여 계층 분포로 표현한 정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1949년 2월 15일 알바니아 중부에 첫 시작으로 4명의 요원이 투입되었고, 이 중 3명은 4월 28일 그리스 카스토리아에 있는 기지로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이 무렵 OSO와 이탈리아 해군 정보국은 두 번째 ‘쌍둥이’ 프로젝트인 폰타나 작전(Operation FONTANA)을 게시하게 됩니다. 폰타나 작전은 알바니아 남부에 침투해 항구와 비행장 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알바니아 당국의 그리스 공산주의자 지원을 감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조그 왕과 정책조정국(OPC, Office of Policy Coordination)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특수군사작전실(OSO, Office of Special Operation)과 정책조정국(OPC)는 같은 기관에 속해 있긴 했으나, 이들은 독립적으로 종종 경쟁하는 기관처럼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1949년 6월 정책조정국(OPC)은 자체적인 체제 전복 프로그램인 비지핀드 작전을 추진하여 공식적인 승인을 얻었습니다. 이 작전에서 최소한의 목표는 엔베르 호자 정권이 더 이상 그리스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을 지원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호자 정권 그 자체에 반대 및 반체제 행위를 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작전 최대 목표는 정권을 완전히 전복하여 없애버리는 것이었죠.  
 
4. 벨류어블(가치) 작전 

다시 정리하자면, 1949년 말까지 알바니아에서는 세 개의 작전이 별도로 분리되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MI6로 더 잘 알려진 영국 정보기관이 자체 프로젝트인 벨류어블 작전(Operation VALUABLE)을 시작했으니까요! 이 작전은 미국이나 이탈리아의 작전과 비슷한 성격으로, MI6가 알바니아 반공 망명자들을 모집해 몰타에서 훈련시키고 ‘픽시(pixies)’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벨류어블과 비지핀드(BGFIEND)의 리더십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정책조정국(OPC)와 MI6, 미국 국무부, 그리고 영국 외무부는 알바니아에 대한 각국의 고위급 정책을 같이 조정했습니다.

1949년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 파리에 기반을 둔 알바니아 이민자 단체를 중심으로 자유 알바니아를 위한 국가위원회(NCFA, National Committee for a Free Albania)를 공동으로 설립했습니다. 자유 알바니아를 위한 국가위원회(NCFA)는 주로 비밀경찰인 시구리미(Sigurimi)를 중심으로 호자와 셰후 세력의 굴레 아래에서 살고 있는 알바니아 민간인들의 곤경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표면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은밀하게 자유 알바니아를 위한 국가위원회는 벨류어블 및 비지핀드 활동의 전위대 역할을 하며 요원들을 식별하고 모집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알바니아에 대한 첫 번째 침투는 영국의 MI6가 감독했습니다. 각각 4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1949년 10월 초 알바니아 남부해안에 상륙했죠. 이 작전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고, 시구리미가 침투한 요원들을 가로막았으며, 작전 중 4명이 죽으면서 끝났습니다. 이후 영국이 지원한 작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 미국의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50년 1월, CIA 보고서에 따르면 비지핀드(BGFIEND)는 총 11개 팀을 알바니아에 침투시켜 군대와 공산당에 침투해 저항군을 조직하고 일부 목표물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이 작전에서는 지하신문을 창간하고 수백만 장의 선전물과 반체제 선전물, 전단지를 공중 투하하는 등 심리전을 수행했습니다. 이때 알바니아에 뿌려진 상당수의 선전물과 전단지에는 스탈린을 우스꽝스럽게 조롱하는 만화를 실었습니다! 또 다른 전술은 그리스나 아드리아해에서 운영되는 비밀 라디오 방송국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책조정국(OPC)은 실제로 이 분야에서 매우 창의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허구에 기반한 가상의 과학 단체 중 하나인 지중해 해양 생물학 연구소를 설립한 다음 파나마 국기를 게양한 선박을 빌려 알바니아 당국에 방해받지 않고 방송을 송출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했습니다. CIA의 정책조정국은 심지어 공산당 관리들에게 당혹스러운 소포를 우편으로 보내 이들의 신용을 떨어뜨려 조직 내부에서 의심을 받게 하려 했습니다.

5. 경제전쟁 작전 

이들의 세 번째 작전은 바로 경제전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지핀드 작전 요원들은 알바니아의 산업 및 농업생산 센터를 파괴하고, 공산당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위조 화폐와 가짜 식량 쿠폰을 유포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알바니아의 국경 밖에서 정책조정국은 침투한 요원들에게 “알바니아의 수출 상품의 저질품들을 섞거나, 이를 파괴 및 방해 혹은 지연시키고, 트럭 및 트랙터용 예비부품들을 제외할 것을 촉구”하도록 했습니다. 호자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앞서 언급한 트럭과 트랙터의 예비푸품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든 것들을 그렇게 방해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지도요. 그러나 여기서 언급해야할 것은 정책조정국(OPC)이 “제안한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서에서 검토했다는 사실입니다.

정책조정국은 준군사 행동을 극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낙관적이었는데, 아테네의 비지핀드 작전을 위한 무기 창고에 4,000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무기가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엔베르 호자를 무너뜨리겠다는 최종 목표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950년 8월, 미 국무부와 영국 외무부는 정권전복 계획을 포기하고 저강도 게릴라 활동과 정보 수집에만 집중하기로 합의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정책조정국(OPC)은 독일에 알바니아 준군사 요원들을 위한 훈련 캠프를 마련했으며, 훈련 캠프는 한 번에 250명의 신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특수작전요원 훈련을 연상시키는 과정을 거친 요원들은 그리스의 준비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알바니아 내 출신 지역으로 공수 투입되었습니다. 저자 알버트 루루시에 따르면, 시구리미는 아주 초기 단계에서부터 훈련 기지에 침투해 비지핀드(BGFIEND) 요원들의 이동 시스템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알바니아 쿠케스 출신 신병인 ‘그존(Gjon)’이 갑자기 캠프에서 사라진 것을 발견하면 해당 지역에 침투한 것으로 예상하고 감시를 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독일의 경우 서독이 동독보다 나치 청산이 잘 안되었다. 참고로 알바니아에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침투시킨 알바니아 요원들은 과거 파시스트들에게 협력했던 사람들이었다. 즉, 그런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곳이 독일에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참고로 서독의 경우 우크라이나 나치 협력자인 스테판 반데라도 머물렀다. 우크라이나의 극우민족주의 단체는 서독에도 제법 자리를 잡았었다. 이런 사실과 연결해서 보자면, 서독에는 과거 나치 및 파시스트 잔당들이 서구의 지원을 받았던 장소이기도 하다.(역주)

6. 보고서

그리고 현지 비지핀드 팀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알바니아에 대한 높은 수준의 정책과 전략을 공유했지만, 작전 및 전술적 수준에서는 벨류어블(VALUBLE)과 비지핀드(BGFIEND)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몇몇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1951년 11월에 작성된 정책조정국 보고서를 보면 벨류어블 팀과 비지핀드 팀이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음에도 서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런던의 영국 정보국은 과거는 지나간 일로 치부하고 비지핀드(BGFIEND)와 벨류어블(VALUBLE)의 훌륭한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현장의 열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을 통해 두 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이탈리아와 특수군사작전실(OSO)의 합동 작전인 채리티(관용, CHARITY)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1950년 12월과 1951년 5월, 상당한 규모의 채리티 작전팀이 알바니아 보안군과 두 차례의 대규모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두 명의 이중 첩자에게 배신당한 8명의 반공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는 알바니아의 쿠케시(Kukes) 인근 제페(Zepe)에서 알바니아 정부군 450여 명과 충돌했습니다. 이탈리아 측의 전투 보고서에 따르면 “치명상을 입은 채리티 분대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지휘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제페 전투에서 살아남은 네 명은 알바니아의 무넬라에서 다른 동료들과 합류했지만, 5월에 다른 두 명의 망명자에게 배신당하고 이번에는 최대 600명의 알바니아 정부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17명으로 구성된 채리티 팀은 전투를 벌여 단 두 명만 잃었지만,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후퇴를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비지핀드(BGFIEND) 임무에도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작전 패턴의 일부였습니다. 침투한 팀은 종종 탈영병이나 이중 첩자에게 배신당하고 곧 마흐메트 셰후의 시구리미에게 살해되거나 체포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1951년 10월 10일, 라디오 티라나는 체포된 14명의 스파이에 대한 재판이 곧 열린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후 몇 주 동안 라디오는 이들의 자백을 방송하며 비지핀드 작전의 세부 사항을 공개했습니다. CIA 국장 월터 베델 스미스(Walter Bedell Smith)는 실패한 프로그램에 왜 그렇게 많은 자원을 투입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격렬한 비망록을 작성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의 정보 평가에 따르면, 비지핀드의 노력이 호자의 정권을 강화하고 셰후가 이끄는 비밀경찰 시구리미에게 알바니아에 남아 있던 반공 저항 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52년 1월에 작성된 작전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전년도에 54명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이 중 39명이 알바니아에 성공적으로 잠입했다고 합니다. 이 중 6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포되었으며 6명은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고 3명은 실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책조정국(OPC)은 인내심을 잃지 않고 더 많은 알바니아 이민자 팀을 훈련하고 파견했고, 결국 이들의 행동은 죽음이나 체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마침내 1955년 말, CIA는 수백만 달러가 투입된 작전에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강화라는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 외에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음을 결국 인정했습니다. 이후 작전명이 오보푸스(OBOPUS)로 변경된 비지핀드(BGFIEND) 작전은 약간의 기념식과 함께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1985년에 관련 저서를 저술한 저자 니콜라스 베델(Nicholas Bethell)에 따르면, 모든 알바니아 전복 프로젝트는 한 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바로 영국의 킴 필비(Kim Philby) 때문에 말이죠. 이 MI6 요원은 소련을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는 영국 스파이 조직인 악명 높은 ‘케임브리지 파이브’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습니다. 1963년 모스크바로 망명하기 전인 1949년 10월부터 1951년 6월까지 필비는 워싱턴에서 CIA의 연락 요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즉, 잘못된 인물이 적절한 장소와 적절한 시기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필비 자신은 회고록 ‘나의 침묵의 전쟁’에서 비지핀드와 벨류어블 작전 요원들에 대해 소련에 배신한 책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미 인용한 루루시와 같은 다른 저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정책조정국(OPC)과 영국의 MI6는 각자가 보유한 알바니아 임무에 대한 작전 및 전술적 세부 사항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킴 필비는 모스크바나 티라나에 정확한 정보를 보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7. 다른 요소들

실패의 원인은 다양한 요인에 기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구리미는 독일에 있는 CIA의 훈련 캠프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책조정국(OPC) 측의 전체 계획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책조정실은 호자에 대한 내부 반대가 실제보다 더 강력하고 조직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정보에 의존했습니다. 이는 정책조정실이 알바니아 보안군의 힘과 기술을 과소평가하게 만든 것과 같은 정보였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비지핀드 작전 기획자들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더욱 심화하였습니다. 제임스 맥카거(James McCargar)와 에드먼드 마이클 버크(Edmund Michael Burke), 두 사람 모두 정보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전무했고, 계속된 실패가 보고되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임무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을 얘기하자면, 버크는 나중에 뉴욕 양키스와 뉴욕 닉스 구단주로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알버트 루루시는 비지핀드가 CIA에게 큰 손실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맥카거와 버크가 세운 계획은 이후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같은 더 성공적인 비밀 작전의 표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과테말라 쿠데타와 킴 필비와 캠브리지 파이브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으니 아직 영상을 보지 않으셨다면 다시 제 채널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를 총 89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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