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저자)

 

올해 5월은 베트남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해다. 왜냐하면 베트남 현대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 Battle of Dien Bien Phu) 승전 7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년 3월 13일에 시작되어 5월 7일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전투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던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나라에게 전쟁에서 패전한 전무후무했던 사건이었다. 그 당시 대다수의 서구의 지배계층들은 이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하다. 반면에 베트남에게 있어 이 전투는 영광스러운 승리 그 자체였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기 때문이다.

 

1. 디엔비엔푸 지역에 대한 설명

 

디엔비엔푸 시내 야경

 

디엔비엔푸는 베트남 북쪽 디엔비엔 성의 성도로 길이 20km, 폭 6km 분지 지형인 므엉타인(Mường Thanh)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라오스 국경이랑 워낙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디엔비엔푸 시내는 라오스 국경이랑 대략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는 대략 8만 명 정도며, 베트남 주 민족인 킨족은 전체 인구의 1/3 정도다. 즉, 베트남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한 지역으로 타이(Thai)족과 몽족(Hmong), 시라(SiLa)족 등이 거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시골이며,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전혀 아니다. 지난 2023년 1월 글쓴이는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숙소와 공항의 거리가 말 그대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놀랐다.

디엔비엔푸로 가는 교통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10~12시간 이상 버스나 봉고차를 수도 하노이에서 타고 가는 법이다. 두 번째는 그것보다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하노이에서 출발하는 디엔비엔푸 국내선 비행기를 예매하여 비행기를 타고 가는 법이다. 비행기로 가는 경우 대략 1시간 정도 걸리며, 운항편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야할 것이다.

이 곳이 유명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하기 이전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 과정에서 일어났다. 디엔비엔푸 전투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보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저항의 역사다.

1850년대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다낭에 상륙하면서 베트남을 식민지 지배했고, 대략 10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다. 인도차이나라 불린 지역을 북부 통킹, 북부와 중부 안남, 남부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로 나누어 지배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말 그대로 그 지역 민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1941년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의 문맹률은 90% 이상이었고, 병원이나 학교가 매우 부족했으며, 그와 반대로 술집과 아편 흡인장소 그리고 매춘이 프랑스 식민권력에 의해 창궐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것에도 열정을 다했다. 1930년 베트남 북부와 중부에서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프랑스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전투기도 동원했다. 적잖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체포되고 죽었으며, 베트남 공산당이 봉기를 주도했던 응에안 성 소비에트의 경우 프랑스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20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베트남 측 시위대를 전투기로 진압했다는 사실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의 지배 및 통치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접수했다. 일본은 나치가 앞세운 비시 프랑스 정권과 함께 인도차이나를 통치했다. 이들의 통치도 매우 가혹했다. 1945년 일본의 공출로 베트남에선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40만 명에서 많게는 200만 명이나 되는 베트남인이 아사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한 베트남 독립운동 단체가 구세주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

보응우옌 지압 장군 사진
베트민은 1941년 초 중월국경지대에서 창설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단체를 창설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Ho Chi Minh)이었고, 그 군대를 지휘한 장군이 바로 보응우옌지압(Vo Nguyen Giap)이었다.

베트민은 창설시점부터 프랑스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것을 촉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45년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베트민은 일본군의 곡식창고를 습격하여 이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따라서 베트민은 민중의 대대적인 지원 및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전국적인 총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호찌민은 이른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베트남은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베트남에는 장제스가 지휘하는 중국 국민당군과 더글라스 그레이시(Douglas Gracey)가 지휘하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됐다. 이건 1945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따른 결과였다. 물론 영국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차이나를 프랑스 측에게 양도했다. 반면에 국민당은 1946년 초 자국 내의 내전을 대비하여 철수했다. 인도차이나에 다시 들어온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 지배할 궁리를 했다.  호찌민이 독립을 선포하기가 무섭게 베트남에는 옛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에 입성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로써,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고자 했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충돌은 사실상 예고된 것이었고, 여기서 발발한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항불전쟁)이었다.

1946년 11월 프랑스는 하이퐁을 포격 및 폭격하여 당일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포격 및 폭격으로 발생한 민간인 부상자는 25,000명 정도에 달한다. 하이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프랑스군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 하노이를 그해 12월에 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항불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주로 베트남 북부와 통킹 지역에서 치러졌다. 어쨌든 전쟁 초기 프랑스는 최신식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군함과 대포로 무장했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민을 상대로 압도적인 화력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베트민은 항불항전 전략을 1·2·3단계로 이론화했다.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총비서인 쯔엉찐은 1947년에 쓴 글에서 방어에 치중해야 하는 1단계, 아군과 적군이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2단계, 아군이 총반격에 나서는 3단계로 설정했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실제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전투는 그렇게 전개됐다. 프랑스는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워 이른바 레아 작전(Operation Léa, Chiến dịch Việt Bắc)을 실행했다. 이들은 공수부대까지 투입하여 수천 명의 베트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그러나 작전에서 목표로 했던 호찌민을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프랑스는 1950년까지 전선이 교착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민중의 지지를 얻으며 해방구를 확장했고, 1950년에는 중월 국경지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소련이 핵개발을 하면서 미소냉전이 보다 격화됐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과 소련이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지원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반면 프랑스는 반공을 내세우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식민지 전쟁을 반공주의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고 획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아래 4장을 통해 보도록 하겠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전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베트남인들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베트민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던 전쟁이었다. 베트남인들 대다수는 프랑스의 군사적 행동을 식민지 지배라고 생각했다. 당시 호찌민의 연설을 보면, 이 전쟁의 성격은 너무나도 분명해진다.

“베트남 혁명의 주요한 과업은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는 것이며,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고 베트남을 재통일하는 것이며, 모든 형태의 봉건적 착취를 일소하고, 논을 경작자에게 돌려주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봉건주의에 대한 투쟁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혁명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혁명의 적들은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입니다. 혁명의 창끝은 그들을 겨냥해야 합니다.”

1950년부터는 국제정세 및 전황이 베트민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우선 1950년 1월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수교를 맺었다. 마오쩌둥은 베트민을 위해 군사고문단 파견과 장비 및 물자를 지원했고, 이에 따라 베트민의 무장력도 강해졌다. 1950년 가을 베트민은 중월국경지대에서 프랑스 정예군 1만 명을 격퇴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군을 향한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중월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동케 전투의 경우 프랑스 최정예 부대인 외인부대를 포함하여, 프랑스군 300명이 전사하고 적잖은 탄약과 무기를 확보했었다. 베트민이 전개한 중월국경지대에서의 총 반격으로 프랑스군은 수천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동케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호찌민
이와 같은 중월국경지대 전투가 있은 직후인 1951년 초 베트민은 홍강 삼각주와 하노이를 향해 공세를 가했다. 즉, 앞서 언급한 3단계 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물자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큰 전투에서 네 차례나 패전했다. 결국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수천 명 이상의 큰 사상자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나 베트민은 그 이후 다시 승기를 잡았다. 1951년 10월 초 프랑스군 15개 연대가 두옌하, 훙난 그리고 띠엔 훙 지구에서 베트민과 대규모 전투를 시작하여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여기서 베트민이 승리했다. 꽁호와 안미 그리고 안빈 이 세 지역에선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기도 했었다. 1952년 베트민은 호아빈에서 벌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정규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1952년 겨울 라오스 쟈로 평원과 1953년 삼네우아 해방, 1953년 나산 전투에서의 승리 등으로 다시 승기를 잡았다. 또한 베트민은 베트남의 중부지대와 중부 고원지대 그리고 남부에서도 승리를 이룩했다.

1953년으로 접어들면서, 서구 열강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휴전회담을 통해 합의를 보려고 했으며, 인도차이나 또한 그러했다. 1953년 5월 앙리 나바르 장군이 프랑스극동원정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프랑스 측의 전황은 암울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라오스의 저항조직 파테트라오를 지원했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프랑스가 세운 괴뢰국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는 이를 막기 위해 라오스 국경지대에 대규모 요새를 세웠고, 이게 바로 디엔비엔푸였다.

 

3. 디엔비엔푸 전투의 전개과정과 승리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1953년 11월 20일 오전 6시 30분, C-47 정찰기 1대가 디엔비엔푸 마을을 선회하며 폭격을 가했고, 이후 64대 이상의 프랑스군 정찰기에서 공수부대가 투하됐다. 당시 이들이 낙하한 곳에는 베트민 2개 중대가 있었으며, 양측의 전투가 발생했다. 프랑스군도 최소 4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베트민의 2개 중대도 적잖은 병력이 손실됐다. 이후 앙리 나바르는 이 디엔비엔푸에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고, 최소 11,000명 이상의 병력을 디엔비엔푸에 배치했다. 디엔비엔푸 요새를 세운 프랑스군 중 일부는 “이 요새에 겁먹은 베트민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하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망상과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프랑스군의 망상이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망상은 당시 프랑스 여론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어, 공수부대의 투하가 프랑스에 알려지자 『로로르』라는 프랑스 신문은 1면에 “앙리 나바르가 베트민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했다. 수천 명의 공수부대원이 디엔비엔푸를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군대의 용맹과 지도자의 권위를 확인했다.”라는 표제를 달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프랑스는 베트민의 군사적인 능력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딩인비엔푸 전투를 회고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호찌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소련제 트럭을 활용했고, 5만 명의 병력과 26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동원했으며, 산길을 지나 물자와 화기를 운반했다. 이들은 중포와 방공포도 운반해 기지에 배치했다. 베트민 병사들은 직접 포탄을 머리에 이고 날랐으며, 대포를 맨손으로 끌고 갔다. 당시 어떤 베트민 병사는 대포를 옮기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서 임무를 수행했다. 말 그대로 베트민에게 있어 이것은 총력전이었다. 전 민중이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결했다. 당시 베트민 부대들은 프랑스군의 항공기가 정찰하면, 풀숲이나 밀림에 숨었으며, 정찰기가 사라진 이후 다시 진격했다.

대포를 운반하는 베트민 병사들을 표현한 모형

디엔비엔푸 베트민 사령부가 있는 곳
프랑스군 디엔비엔푸 요새에 대한 본격적인 제1차 공격은 1954년 3월 13일에 시작됐다. 밀림 속에 잠복해 있던 베트민군의 대포가 계곡 바닥에 모여 있는 프랑스군에게 분당 50발의 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1차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활주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물자보급과 병력 보급은 프랑스군의 항공기로부터 낙하산 투하에 의존하게 됐으며, 프랑스군 포대 지휘관인 피로트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 충격을 받아 스스로 자살했다.

1954년 3월 15일에는 프랑스군의 요새 가브리엘과 앤 마리 이 두 곳이 베트민군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다음 날인 16일 프랑스군은 병력을 증강했으며, 전투를 통틀어 총 16,200명의 프랑스군 병력이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다. 3월 27일 베트민은 프랑스의 엘리안느 1기지를 확보했으며, 활주로 중앙에 포탄을 퍼부었다. 3월 30일 베트민은 이른바 A1 고지라 불린 엘리안느 2기지에서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A1 고지에 견고한 지하 벙커를 건설했으며, 기관총을 비롯한 중화기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를 배치해 항공기의 폭격 지원을 받으며 진지를 지켰다. 베트민군은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5일간 연속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으며 고지의 절반을 차지했다.

베트민 측 대공포 부대
이후 A1 고지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있다가 5월 1일 다시 시작됐다. A1 고지가 완벽히 점령당한 것은 1954년 5월 6일 베트민 부대가 프랑스군의 철통같은 방공호에 1,000kg의 폭탄을 터뜨린 다음 고지를 점령하면서였다.

다음 날인 5월 7일 오후 4시 반에 완전히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비밀 터널을 굴착하고 1톤의 지하 폭발물을 설치하여 진지 대파 후 최후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들은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베트민은 1차 공격을 실행한 이후 프랑스군의 거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베트민은 대공 방어 진지를 증강했으며, 프랑스군 수비대의 방어 진지는 점차 감소했다. 1954년 3월 29일 베트민은 비행장 동쪽과 남쪽 그리고 남영강 동쪽 고지를 점령했으며, 야포와 박격포 사격을 가한 뒤 4개 주요 진지를 점령하고자 지뢰밭과 철조망 방어 지대를 지나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희생이 급증하자 신병들은 밀림 속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4월 1일 지압 장군이 디엔비엔푸에서 직접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당시 프랑스군의 막강한 항공 화력 및 공세로 베트민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압 장군은 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하여 적은 인원으로 프랑스군 진지에 바짝 다가가서 참호를 부수는 작전을 사용했다.

1954년 4월 10일 이후 잠시나마 디엔비엔푸 전투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는데, 그 동안 프랑스 공군은 디엔비엔푸에 병력을 증강하고 탄약과 식량을 공중 투하했다. 대략 4,000명 이상의 최정예 공수부대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중에 증원됐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급품은 번번이 베트민 쪽에 떨어지기도 했다. 지압은 휘하 병력 3만 5,000명과 압도적인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대공 화기로 프랑스군 참호를 격파했다.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이 마지막 공세에 나선 것은 1954년 4월 29일에 이르러서였다. 5월 초부터 베트민은 디엔비엔푸의 외곽 방어선까지 돌파했으며, 내부의 프랑스군 요새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군의 내부 방어진지가 하나씩 함락되었고, 앞서 언급한 A-1 고지도 그렇게 함락됐으며, 디엔비엔푸의 지휘관 드 카스트리가 있던 지휘부 요새도 백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지압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총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1954년 5월 7일 오전, 작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적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극소수의 항공기가 식량만을 공수 투하할 뿐, 탄약을 운반해 온 항공기들은 하노이로 돌아갔다. 적 지역 여기저기서 무기를 파괴하는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련의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넘롱강에 던져 놓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아군은 준비 명령을 수령했다. 14:00시, 어느 아군 부대가 507번 거점을 공격했다. 적은 미미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 승리에 이어 우리는 넘롱강 좌안의 508번, 509번진지를 소멸시켰다. 적이 큰 혼란에 빠져 전투 의지를 상실했음이 명백해졌다. 백기가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15:00시,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집단전술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곧바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아군 여단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상호 협조 하에 적 지휘소를 직접 타격했다. 비록 적은 아직 10,000명이나 남아있었지만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적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17:30분,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카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 ‘결전필승’이라는 구호가 적인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이에 대해 호찌민은 다음과 같은 축하서한을 보냈다.

“우리 군이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저는 우리 모든 장병, 전시 근로자, 청년 의용대, 지역 주민들이 부과된 각자의 과업을 획기적으로 완수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위대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함락된 프랑스군 참호 실제 사진
결과적으로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의 승리로 종결됐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293명 전사, 6,650명 부상 그리고 1,729명이 실종됐다. 대략 11,721명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으며, 미군 2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베트민의 경우 최소 4,020명에서 많게는 8,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략 1만 명 정도 전사했다고 추산하는 경우도 있다. 병력 5만 5,000명 중에 대략 2만 5,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디엔비엔푸에서만 최소 62대의 프랑스 측 항공기를 격추시켰고, 그 시기 다른 전선에서 베트민은 177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 병사들이 보인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당시 적이었던 프랑스군 지휘부로부터도 인정받았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던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을 마음 속으로 존경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에 대해 존경심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베트민에게 붙잡힌 프랑스군 포로 행렬
“그들은 사냥총과 같은 치졸한 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전쟁 준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분대에서 중대로, 대대에서 연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한 사단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베트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보병이었다고. 이 인내심 강한 병사들은 운동화에, 밥 한 공기만으로 하룻밤에 50km를 행군했다. 그리고 전투에 임해서는 군가를 불렀다. 이처럼 뛰어난 보병이었기 때문에, 디엔비엔푸에서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병력에서 수적으로 열세였고 프랑스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미군도 격퇴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보병이었다.”

 

4. 미국 제국주의의 프랑스 식민지 전쟁 옹호 및 지원

디엔비엔푸 전사자 묘역
디엔비엔푸 전투는 100년간 베트남에서 지속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는 사실에서 아주 위대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라는 역사에는 주목해야할 또 다른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제국주의의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이다. 사실 미국이 처음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9년 미소냉전이 본격화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게 됐다. 즉, 여기서 반공의 논리가 작용했으며, 프랑스도 이 전쟁을 반공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 했다. 물론 프랑스 식민지 전쟁이라는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반공과 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주의라는 자신들이 가진 모순 그 자체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는 1951년 1,490억 프랑에서 1952년 1,960억 프랑으로 증가했고, 인도차이나로 항공기, 전투차량, 중화기, 탄약, 상륙함, 차량, 무전기, 네이팜탄, 연료를 신속히 보내주었다. 미국은 1952년에 프랑스 전쟁 비용의 40% 1953년에는 50%를 부담했다. 1954년에는 이 수치가 대략 80%까지 상승했다.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고 한다. 미군 정규군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사실상 미국이 이 전쟁을 치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규모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와중에도 확인이 된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및 프랑스 지도부는 소위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것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술핵무기 3발을 사용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옵션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회고록 내용을 보자.

“1954년 4월 초순, 프랑스와 미국 장군들은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기지에 병력을 증원하기위해 미국에 전투기 대대와 중폭격기 대대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관료 사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공기 투입으로도 프랑스 원정군을 구할 수는 없으며, 국내외 여론의 심각한 비난에 직면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앞서 언급한 전술핵 관련 부분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미 공군 참모총장 네이선 트와이닝)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멀쩡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아,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또한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한 미군도 있었다. 이들은 민간업자로 위장한 CIA 요원이었으며, 이들 중 2명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중 한 명은 2004년 CIA가 비밀 해제한 정보에 따르면 맥거번 2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민간 조종사로 CIA에 고용된 인물이었다.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식민지 지배자 프랑스를 돕기 위해, 비밀리에 CIA 요원을 민간업자로 위장시켜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했던 셈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제국주의는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부터 프랑스의 부도덕한 식민지 유지 전쟁을 반공이라는 논리로 포장하면서 도왔던 것이다. 따라서 미제국주의자들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은 마땅히 규탄 받고 강력히 비판 받아야할 역사적 사실이다.

 

5.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의 현재성

디엔비엔푸에 있는 승리 기념상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베트남은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신식민주의적 지배에 맞서 다시 한번 저항해야 했지만, 디엔비엔푸 전투가 제3세계 인민들의 탈식민화 운동에 준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특히나 프랑스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경우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1962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시기 미제국주의자들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영웅주의를 칭송했다면, 소련과 중국은 베트민 전우들의 승리를 환영했다. 어찌됐든 디엔비엔푸 전투는 냉전시기 탈식민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반제국주의 투쟁사에 앞으로도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다.

디엔비엔푸 승전 70주년 열병식
2024년인 올해는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되는 해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글쓴이는 페이스북에 베트남 친구들이 많은데 이 중 한 사람은 열병식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친구들의 페이스북에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기념하는 여러 포스팅들을 쉽게 확인하고 있다.

이제 70년도 더 지난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과연 현재성이 없을까? 글쓴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현재까지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이른바 제3세계 나라에선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맞선 항쟁들과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맞선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영미 제국주의자들이 후티를 축축한다는 명분을 들어 예맨을 폭격했지만, 이들의 저항 앞에 제국주의자들은 먼저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 2023년 여름 니제르에서 시작된 반프랑스 봉기는 아프리카 사헬 지대를 거쳐 거세게 일어나고 있으며,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고 있다. 이처럼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움직임에 훼방을 놓고 간섭을 하는 주체는 미국 제국주의 자신이다. 마치 이들이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지 전쟁을 도왔듯이 말이다. 즉, 지금도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간섭에 맞선 저항이 이른바 서구 일극패권체제에 반대하는 나라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전은 지금도 의미하는 바다 크다.

지난 2023년 1월 글쓴이는 베트남을 여행하며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글쓴이는 디엔비엔푸 승전 박물관과 A1 고지,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한 베트민 사령부 진지 및 프랑스군 사령관이 항복한 참호까지 두루 관광했다. 글쓴이는 베트남 민중의 항쟁 유적지를 돌아보며 깊이 감동했다. 현재 우리들 앞에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세는 점차 반제국주의 진영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 항쟁이 보여주듯이, 디엔비엔푸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또 다른 국가에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제3세계 해방전사들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는 막대하다. 이 글이 많은 이들에게 반제항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상으로 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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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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