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되돌아보며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발생한 퐁니퐁넛 학살 사건의 피해자 응우옌티탄씨가 한국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했다. 2010년대부터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사회와 정부 그리고 한국군에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학살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던 응우옌티탄씨는 지난 2022년 8월에도 한국을 방문했었다.
2018년 4월 국회에서 한국군 학살을 규탄했던 퐁니퐁넛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과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동명이인) |
그러던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해당 학살이 실재했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한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서 퐁니퐁넛 학살 사건이 자행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됐다.
퐁니퐁넛 학살 위령비. 2020년 당시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
사실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가 공식적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학살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늦은 결정이기도 하다. 퐁니퐁넛 학살은 구정 대공세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12일에 발생했다. 구정 대공세 당시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킨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에 맞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으며, 한국군 또한 이러한 작전에 동참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의 청룡부대는 꽝남성 디엔반현에서 74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학살당한 이들 중에는 도저히 베트콩으로 간주될 수 없는 1살이나 2살짜리 영유아도 존재했다.
퐁니퐁넛 학살 사건의 피해자인 응우옌티탄 또한 당시 8살짜리 소녀였다. 응우옌티탄은 이 학살로 동생 응우옌득쯔엉, 이모 판티응우, 엄마 판티찌를 포함해 전 가족을 잃었다. 응우옌티탄 또한 학살 현장에서 한국군이 발사한 총탄에 맞았다. 학살 당시 어린 응우옌티탄은 엄마를 찾아다녔지만, 그녀가 본 것은 숨이 멈춘 가족의 시신이었다. 응우옌티탄의 몸 상태또한 심각했다.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당했다. 결국 동네의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미군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은 뒤 1년 동안의 입원 끝에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공 용의자로 몰려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된 민간인 여성 |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전개한 반게릴라 작전의 일부였다. 20세기 당시 게릴라전을 보면, 이러한 토벌군의 잔혹행위를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홍군을 섬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고·죽이고·약탈하는 삼광작전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마을들이 불에 탔고, 일본군은 홍군과 항일 독립군을 토벌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개입한 이른바 그리스 내전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다. 미군 고문단들은 과거 나치에 협력한 세력들을 도와 그리스 공산당이 지휘하는 좌파 게릴라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했다. 그 결과 그리스에서 10~15만 명이 학살당하고 80만 명이 난민이 되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익 군사독재정부가 25년 동안 그리스를 통치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군고문단이 사용한 방식은 그리스에서 사용된 방식이었다.
결국 이러한 군사작전이 베트남 전쟁에서도 똑같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미국이 세운 남베트남 괴뢰 정부는 이른바 전략촌을 세워,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미군 고문단들의 군사적 이론은 대다수 남베트남 농민들이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것이었다. 즉,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만들어 놓은 군사작전은 이러한 전략전술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거기다가 한국군은 과거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자국민을 최소 수십만 명에서 100만 명 가까이 학살한 집단이었다. 제주 4.3사건에서만 3~8만 명이 학살당했고, 여순사건으로 1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거기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 또한 제주 4.3사건에서 진압군으로 참전했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제주 4.3학살과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을 경험한 이들이 참전한 전쟁이었다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에 따라 빈번히 일어났다. 태생부터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친일 군인들로 구성된 한국군은 학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다. 하다못해, 소위 광복군 출신이라 불리는 우파 독립운동가 출신들 또한 양민학살 면에선 일본군과 크게 차이가 없던 중국 국민당군 출신들이었다. 거기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과 하나회 군부 인사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군사경력을 쌓은 이들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개입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팀 셔록(Tim Shorrock)기자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과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베트남전 참전 경험이 광주시민을 베트콩과 같은 적군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한국 국민이 아닌 것처럼 취급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은 광주시민을 베트콩과 같이 간주했고, 광주에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바로 그 점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과장될 수도 없고, 부정당할 수 없는 우리의 흑역사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최소 수천 명에 달한다. 한국의 국방전사 기록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최소 41,000명 이상의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을 사살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 추산에는 민간인 희생자 숫자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난 이후,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는 전쟁 당시 피해 사례에 대한 자체조사를 실시했다. 통일 베트남측 문화통신부가 이를 담당했으며, 문화통신부는 한국군에 의한 집단 학살로 희생된 민간인 숫자가 최소 5,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에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을 공론화시킨 학자인 구수정에 따르면, 이보다 더 많은 대략 9,00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산했다. 이러한 추산의 경우 구수정 박사가 베트남에서 학업을 하는 과정에서 학살 피해지역에 사는 당사자 수백 명의 인터뷰 및 자료를 수집해서 나온 결과다.
그 외에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외교부장이었던 응우옌티빈이라는 인물은 1970년대 초반 이른바 제3세계 비동맹회의에서 “한국군의 공식적 양민 학살의 건수가 대략 3,000건에 이른다.”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은 1970년대 중후반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라는 책을 통해,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크고 작은 미라이 학살을 최소 43건 이상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러한 추정치들을 종합해서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국방부 측에서 추산한 41,000명의 베트콩 사살 기록에 포함되어 있는 셈이며, 대략 9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베트남 측에서 기록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민간인 학살 기록은 많다. 사실 국내에 소개된 학살의 경우 한베평화재단과 같은 시민단체에서 공론화했기에 그만큼이라도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주로 꽝남 성과 꽝응아이성 그리고 빈딘 성에서 일어났는데, 꽝남 성에서만 최소 4,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꽝응아이 성에선 1,700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학살의 특징이 있다면, 희생자 대다수가 베트콩으로 간주될 수 없는 여성, 노인, 어린이였다는 점이다.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발생한 빈호아 학살의 경우 총 43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3일간 지속적으로 자행된 이 학살에서 희생당한 이들 중에는 임신부 7명이 있었다. 마을에 살던 80살 노인은 한국군에 의해 목이 잘려서 논에 걸어놓게 됐으며, 또 다른 2명은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이런 끔찍한 학살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되었기에, 마을 생존자들은 이후 한국군 증오비를 만들었을 정도다. 한국군 증오비 옆에 있는 위령비에는 희생된 430명의 이름이 촘촘히 적혀 있고, 증오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은 이 작은 땅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다시 말하면 병오년 10월 23일(음력), 추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 여단 1개 대대가 이곳을 행군해 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 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언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 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를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에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 학살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견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불모지로 만들었다.”
빈호아 학살 한국군 증오비 |
증오비의 내용을 보면, 학살의 피해자인 마을 주민들은 단순히 학살을 자행한 한국군만 지목하지 않고 있다. 한국군을 보낸 미제국주의도 규탄하고 있다. 즉, 베트남 민간인들이 보기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하늘에서 무차별적으로 네이팜탄을 쏟아 붓고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하는 미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글을 오독하며, 마치 한국군만 지목하는 것처럼 왜곡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런 이들은 글의 맥락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전쟁을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이 전쟁이 마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왜곡한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남베트남을 지키러 간 것이고, 한국 또한 이러한 가치를 지키고자 베트남에 병력을 파병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경제발전이라는 단어가 항상 붙어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논리를 들이댄다. 이들 머릿속엔 베트남 전쟁은 간단하게 말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며, 돈을 번 전쟁인 것이다.
이런 반공주의적 관점이 만들어낸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2003년 이라크 전쟁이다. 미국의 불법적 침공으로 일어난 이라크 전쟁은 노무현 정부 초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전쟁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서방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했고, 이는 결국 진보진영에 큰 분노를 사게 됐다. 파병에 대한 반대여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일보>나 <서울신문>, <동아일보>등은 제2의 중동특수니 국가지위 상승이니 하며, 파병을 부추겼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현재 국민의힘)이 이런 여론을 부추기면서 파병을 찬성했으며, 심지어 <문화일보>는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중동진출, 1990년대 이후 걸프전 등에 따른 해외 진출 및 특수가 그것이다.”라며 이라크 전쟁을 묘사했다.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서울대학교 박태균 교수 말대로 이라크 전쟁 당시 “전투부대 파병을 통해서 한국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전투 과정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고, 한반도는 안보 위기에 휩싸였다는 기사”는 없었다. 바로 이것이 베트남 전쟁을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반성하지 않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2023년은 이라크 전쟁 발발 20주년이면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철수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는 현재 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갈 길은 먼 것 같다. 비록 퐁니퐁넛 학살을 법원이 인정했지만, 여전히 그 외의 학살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인터넷에서 자주 보인다. 이제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실대로 인정할 때가 왔다. 결국 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태도가 이라크 전쟁과 같은 또 다른 제국주의 학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것이 바로 이라크 전쟁 발발 20주년·베트남 전쟁 한국군 철수 50주년에 우리가 기억해야할 사실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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