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 《프랑스 내전》 “파리꼬뮌을 보라,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주제: 맑스주의 고전읽기 세미나
시간: 2023년 2월 14일  19시

맑스의 프랑스혁명사 3부작 중《프랑스 내전》은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국가일반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맑스는 1871년 파리꼬뮌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본질과 그 특징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1871년 3월 18일 – 1871년 5월 28일까지 72일 동안 단명했지만 섬광처럼 빛나는 파리꼬뮌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민중 국가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까지 원시공산제 이후 계급국가가 출현한 이래 고대사회는 노예소유주가 노예들을, 중세 봉건사회는 봉건왕, 귀족, 지주들이 농민들을,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억압, 착취하는 계급지배 사회였습니다.
반면에 파리코뮌은 비록 짧고 파리에 한정돼 있었지만 억압 받고 천대 받던 생산대중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였습니다.

파리는 섬광이었습니다. 파리코뮌의 섬광은 진보적 인류가 꿈을 꾸던 이상들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사회였으며 이 짧고 강력한 섬광은 이후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실현되었고 해방된 국가들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파리코뮌은 프랑스 지배계급이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외세에 항복했을 때 민중의 무장력으로 외세에 항전하고 파리를 지켜냈습니다.
코뮌의 최초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장인민으로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코뮌은 민중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아니라 보통선거로 선출되어 선출자들이 언제든지 즉시 소환가능한 시의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다수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코뮌은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활동하는 행정부인 동시에 입법부였습니다.
코뮌의 의원을 비롯 공직자들의 봉급은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방치안판사와 재판권도 선거로 선출되며 책임지고 소환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상비군과 경찰을 없애고 인민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예속, 억압하던 교구목사의 권력을 분쇄하고자 했습니다.
그 권력은 막대한 토지소유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토지몰수가 단행됐을 것입니다.
모든 교육시설은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개방되었고 교회와 국가의 간섭은 배제됐습니다.
코뮌은 여성과 아동의 야간노동을 없앴습니다.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했습니다.
코뮌은 탈출하거나 조업중단을 한 모든 작업장과 공장을 노동자협동 조합에 보상을 조건으로 양도했습니다.
코뮌은 상점주, 수공업자, 상인들의 채무도 탕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존 착취자들, 기생자들의 국가를 대신한 진정으로 생산자 인민대중의 국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엥겔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참모습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처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최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맑스와 엥겔스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두고 굳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독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엥겔스는 《프랑스내전》 서문에서 파리코뮌의 최고의 교훈은 기존 낡은 국가를 폐지시킴으로써 새로운 노동자 민중의 국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엥겔스는 세습군주정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시 민주공화정이라는 북미의 양당체제 역시 공화.민주 양당 정상배들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며 민중을 기만하는 제도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착취국가에 대한 숭배와 미신으로 기존 국가기구, 관료기구를 분쇄하지 않고 의회주의에 빠져 그대로 인수하여 사용하려는 1891년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속물들에게 파리코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진면목을 보라고 외첬던 것입니다.
이 속물들은 오늘날 진보정당을 내세운 의회주의자들에게도 상당부분 나타나고 있습니다.
맑스는 이와 관련 1871년 4월 12일 파리코뮌 와중의 “파리코뮌에 관하여 쿠겔만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은 나의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보면, 프랑스 혁명의 다음 과제는 더이상 전처럼 관료적 군사적 기구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고 이를 분쇄하는 것이며, 이것이 대륙에서의 모든 진정한 민중혁명의 필수적인 것이라는 나의 언급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파리에 있는 영웅적인 우리 당의 동지들이 시도하고 있는 바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역사적으로 지배계급들이, 1848년 2월 혁명 민주공화정의 부르주아들이 못하던 과제들을 꼬뮌의 전사들은 단박에 해냈습니다. 기존 관료적, 억압적 국가기구들을 분쇄했고 수탈자들을 수탈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맑스는 코뮌이 패배한 핵심 이유는 이 독재를 철저하게 행사하지 못한데 있다고 봤습니다.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이 파리에서 베르사이유로 도망하여 외세와 결탁하여 절치부심 코뮌을 분쇄하려 할 때 베르사이유로 진군하여 이들을 분쇄하지 않고 은행자금을 단호하게 몰수하지 않아 반역자들이 반란자금으로 빼돌리게 하였고 중앙위원회가 너무 빨리 그 혁명 권한을 꼬뮌에 양도하는 심각한 패착을 했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자치와 연합에 대해서도 중앙집중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파리꼬뮌의 영웅적 시도는 외세와 손잡고 민중과 조국을 배신한 지배계급 복고자들의 잔학한 보복으로 3만 명 이상의 피학살자를 낳으면서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프랑스 부르주아의 똘레랑스(관용)가 제국주의 식민지배시절이나 코뮌에 대한 대량살육에서 볼 때 얼마나 위선적이고 사악한 사기인지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프랑스 부르주아는 파리코뮌의 역사, 자료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침묵하는 것으로 코뮌을 망각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보적 인류에게 꼬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찬란한 역사의 한 장입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코뮌의 경험으로 거듭 부각시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앙위원회로의 권력의 민주적 집중, 통일된 중앙집중은 파리코뮌으로부터 자유주의, 자치, 분산을 근거로 삼는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근거입니다.
오늘날 대륙뿐만 아니라 영국을 포함하여 모든 나라들에서의 혁명의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1970년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의 비극적 패배, 베네수엘라에서 미제 지원을 받는 우익들의 쿠데타 준동, 최근 페루에서의 우익 쿠데타와 카스티요 정부의 축출과 민중학살, 사민주의 정부의 배반과 지배계급 대들보로의 변신, 유로코뮤니즘의 우경화, 사회주의 내 수정주의의 등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약화와 당의 우경화, 사회주의 전복 등 전 세계의 진보적 인류의 경험은 정치적 특수성과 역사성이 어떻든 바로 파리코뮌의 교훈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전으로부터 그 교훈을 배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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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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