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참혹하게 죽었다! 나라를 위한 청년은 있어도,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누가 누구에게 추모와 애도를 강요하는가?

 

누구는 학업과 경쟁에, 누구는 노동에, 또 누구는 코로나19에 시달리다가,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끼면서 할로윈 축제를 즐기고는 가정으로 되돌아갔을 죽지 않아도 될 청년들이 무려 155명이나 참혹하게 죽었다. 의식불명 상태의 중상자들도 있어 사망자가 늘어날 수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죽음 직전의 공포에서 살아남는 수천 명의 청년들, 친구를 잃고 끔찍한 정신적 충격과 고통에 시달리게 될 청년들은 수만 명에 달할 것이다. 희생자들의 수천, 수만 명의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이 이 참혹한 죽음 앞에 몸부림치며 비통해 하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사망자 명단에 있을 정도로 이 참극의 희생자들 대다수는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청년, 노동자들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막을 수 없는 불가피한 천재지변이 아니다. 이번 참사는 최대한으로 규정하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사건”이거나, 최소한으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과실치사”거나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에 해당된다. 정부(대통령 윤석열)와 서울시(시장 오세훈)와 용산구청(구청장 박희영)은 사망 사건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용인하거나 행정적 과실이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참혹한 죽음을 초래했다.
이번 이태원 행사가 주최 측이 없는 행사라 하더라도 정부와 서울시와 용산구청은 이번 행사를 안전하게 치를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책무”가 있다는 재난안전기본법만 보더라도 정부와 서울시와 용산구청은 이 사회적 재난을 조장하거나 막지 못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윤석열 정권은 정권 퇴진 촛불투쟁에는 수천 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했어도, 10만 여명이 모이는 이태원 행사에는 고작 137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행정안전부 장관(이상민)이라는 작자는 집회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가하면 “통상과 달리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며 불가피한 사건 정도로 취급하며 뻔뻔하게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이 참사는 진상규명이 온전하게 되지 않았고 엄중하게 책임자 처벌이 된 것도 아니다. 게다가 확고한 재발방지책이 확정,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권은 11월 5일까지 국민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서울시청에는 영정도 없는 합동분향소를 차렸다. 윤석열 정권은 공무원들 전체에게 추모 리본을 착용할 것을 지침으로 내리고 있다. 경찰은 압사 사고가 났던 장소 채증기록과 SNS영상분석 등으로 개인들에게 살인 책임을 물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도하고 파렴치한 정권은 애도를 강요할 주체도 아니고 추모의 주도자들도 될 수 없다. 이번 이태원 참사의 중대책임자들이 그 책임을 슬그머니 면피하고 마치 애도와 추모의 주도자, 진상규명의 행위자들로 나서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서양 문화를 누리면 다 죽어 마땅한가?

 

누구는 ‘서양문화’, ‘귀신문화’에 물든 청년들을 나무라고 있다. 심지어 이 비통한 죽음에 대해 조롱하고 고인들을 매도하기조차 하고 있다. 과연 이 냉혈한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수학여행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는데 이 난리냐”고 외쳤던 짐승과도 같은 자들과 조금이라도 다를 게 무엇이 있는가? 과연 이 수많은, 무고한 청년들의 집단 죽음과 가족들과 친구들의 비통한 몸부림들이 당신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짐승과도 같은 냉혹한 자들이 무고한 청년들과 가족, 친구들의 집단적 비극 앞에서 운운하는 문화의 ‘자주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이미 우리 삶 깊숙하게 들어온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기다가 이러한 비극이 생겨도 똑같이 희생자들을 조롱하고 모욕할 것인가? 청년들이 케이 팝 공연을 보다가 사고를 당해도 그럴 것인가?
서양 문화, 전통문화 이런 구분은 이번 사고의 본질이 전혀 아니다. 서양식 축제에 참가하면 다 죽는가? 서양식 축제를 즐기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마땅히 죽어야할 죽음들인가? 심지어 참담하게도 인과응보라고 하는가?
그것이 과연 이번 이태원 집단 압사 사건의 원인이라도 되는가? 죽음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이러한 논의들은 청년들 문화적 소양, 심지어 타락상 때문에 비극적 사건을 자초했다는 식으로 희생자들과 가족을 매도하고 이번 사고의 진짜 책임자들의 죄를 면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문화를 놓고 본다면 청년들 개인들은 문화의 창조자가 아니다. 문화의 창조자는 이 사회의 지배자들인 국내외 자본가들이고, 이 사회는 이미 전 세계적인 차원의 자본주의 사회다.
청년들이 누리는 문화는 이미 청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청년들이 자라나고 성장하면서 만들어지고 조장된 문화다. 이 문화를 청년들은 불가피하게 수용한다. 이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용하면서 살고, 거부하는 자각된 소수라 할지라도 부지불식간에 그 인식, 편견, 관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듯이, 청년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이 시대의 산물이고 이를 대다수 청년들이 수용하고 누리고 즐기고 향유한다.
이 사회의 지배적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고립된 한 세대를 넘는 자각한 전체 세대의 집단적 투쟁이 필요하다. 사회 전체를 바꿔야지만 문화의 민중성, 자주성도 생긴다.
언론들 중에서 이 사건의 진짜 원인과 책임을 호도하기 위해서 참가자들 일부의 일탈이나 무책임함, 부주의함 등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살아남은 청년들은 담벼락 위에서 압사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심폐소생술에 동참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구조에 동참하기도 했다. 청년들과 한 업소 직원은 새벽까지 시신 50 여구를 맨 손으로, 들 것으로 나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구조하기도 했다. 이태원 축제에 참가한 청년들 상당수는 공포 속에서도 충분하게 공동체 의식을 발휘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안전하게 축제를 즐길 권리가 있다. 그들은 축제를 즐기다가 안전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그들은 죽지 않고 건강하게 미래를 꿈꿀 권리가 있다. 누가 이들 무고한 청년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고 고귀한 생명을 빼앗았는가?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태원에서 10, 20대 희생자들의 참담한 죽음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도 이 사건에 대해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이제 세월호 참사 9주기를 앞두고 있다. 공식 침몰 원인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진실로 공인, 강요되고 있고,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참사 원인들은 묵살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8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가운데 이번 이태원 사고가 났다. 세월호 참사 당시 고등학생 세대들은 이번 이태원 참사 희생자 상당수인 20대로 성장하거나 희생된 10대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 대다수 학생들과 같은 세대다.
죽음의 원인은 다를지라도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참담하게 죽어가고 있다. 청소년 실습생들은 연이은 죽음들을 맞이했다, 구의역의 김군, 김용균부터 또 다른 김용균들에 이어, 최근 SPC그룹 계열사 SPL 경기 평택 제빵공장에서는 20대 여성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를 만들다가 상반신이 배합기 내부 기계에 끼어 사망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SPL은 사망사고가 발생했음에도 곧바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더욱이 사망한 동료를 목격한 이들은 사고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업무를 강요하기도 했다. 심지어 SPC는 사망한 노동자의 장례식장에 사고 현장에서 만들어진 빵을 가져다 놓는가 하면 장례식장에서는 유족에게 ‘합의’를 종용하는 잔인한 짓들을 자행하기도 했다.
한국 10~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20대 사망자 가운데 절반 정도가 자살이다. 대다수 사망의 원인은 우울증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그 우울증의 원인은 또 무엇인가? 빈곤과 실업, 소외, 가중되는 경쟁, 빈곤이 낳은 가족파탄 등 사회적 문제들이 우울증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노동을 하다 중대재해로 죽든, 이번 이태원 압사 참사처럼 축제를 즐기려다가 죽든 이 사망들은 사회적 재난이다. 이 사회적 재난으로부터 죽지 않아도 되는 고귀한 청춘들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청년들은 지금 노동을 하며 이 사회와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복무하고 있고, 또 학업을 하며 그것을 예비하고 있다.
이들 청년들은 대다수는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나라를 위한 청년들은 즐비해도 청년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이 자본의 국가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생산 가능 인구를 빨리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새로운 착취재료이며, 청소년, 청년들은 곧 투입될 예비된 착취재료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본의 착취와 이윤을 위해 헐값으로, 비정규직으로 투입된다. “죽음의 외주화”라고 외주화가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이라고 공인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연이은 참사를 목도하고 외주화가 전면 중단되거나 축소됐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외주화는 여전히 확대일로에 있으며 “죽음의 외주화” 역시 확대일로에 있다.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저들은 MJ세대 운운하며 세대 갈등을 조장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 역시 없다. 청년을 위하지 않는 나라가 중장년과 노년을 위해 복무할리 만무하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착취와 억압을 주된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들을 위한 나라는 자본가들, 부자들의 소유권, 재산권, 기득권 보호를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그런 것이 아니다. 착취자들이 없다면 국가는 인민의 생명과 안녕을 보호 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청년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세대의 참된 주인으로 만든다.
윤석열 정권은 “국가 애도 기간 중에는 행사와 축제를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가운데 ‘행사’를 자제하라는 건 바로 집회를 자제하라는 요구이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투쟁을 멈추라는 것이다. 특히 정권은 이로써 이번 이태원 참사를 국가적 추모와 애도라는 명목으로 도덕적으로 통제하고 이 참사의 성격 규정을 독점하여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려 하고 있다. 대다수 언론들도 이 기조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이태원 참사 진상을 호도, 회피하는 책임자들이 강요하는 추모와 애도를 전면 거부하자. 노/정/협

이 기사를 총 429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