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민주주의ㅡ②] 제1장 중국 ‘인민대표대회’의 역사(제2회)
김정호 북경대 박사/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자문위원
1. 인민대표대회의 전사(前史) (지난 호)
2. 인민대표대회제도의 확립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성립 이후 전국 각지의 인민민주정권 건설이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전국인민대표대회 소집을 위한 조건이 차츰 성숙하게 되었다.
1953년 3월 1일 <인민일보>보도에 따르면, 중앙정부 성립 후 3년여 기간 동안 전국 각성(시), 현, 향(촌)이 각급 인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전국 29개 성에서는 새로 성립한 강소성과 사천성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서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전국 159개 시는 6개 신설된 시를 제외한 나머지 153개시에서 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전국 2167개 현급 행정단위는 38개 신설된 현을 제외한 나머지 2129개 현 모두에서 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전국 28만개 향(촌)도 인민대표회의 또는 농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 상급 인민정부의 비준 하에 전국 대다수 지역에 설치된 각계 ‘인민대표회의’는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의 직권을 대행하면서 상응한 직급의 인민정부를 선출하였다. 이는 가급적 빨리 보통선거를 통해서 인민대표대회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인민민주주의 발전에 유리하고, 전국 인민의 요구에도 부합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기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각급 각계 인민대표회의의 실제 사업상의 경험은 이후 인민대표대회제도의 구축을 위한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1953년 1월 13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20차 회의는 만장일치로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할 것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1953년에 보통선거에 기초하여 향, 현, 성(시) 각급 인민대표대회를 출범하고, 이 기초 위에서 연이어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소집키로 하였다. 회의는 모택동을 주석으로, 주덕 등 32인을 소속 위원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기초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주은래를 주석으로 송자문 등 23인으로 구성된 중화인민공화국 ‘선거법기초위원회’가 성립하였다. 보통선거를 통한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탄생시키기 위한 막이 정식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1953년 성립된 선거법기초위원회 |
1) 선거법 제정과 제1차 보통선거
선거법기초위원회는 먼저 신중국 성립 이래 3년간의 인민정권 상황을 연구하고 소련 선거법의 경험을 흡수하였다. 다른 한 편, 각계 각 방면의 의견을 청취한 후 여러 차례의 토론과 수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 선거법>(초안)을 마련하였다. 이 초안은 1953년 2월 11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22차 회의에 제출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렇게 통과된 선거법을 ‘1953년 선거법’이라 부르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급 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수를 확정하였다.
①향(鄕),진(鎭)* 인대 대표 수—인구 2000명 이하는 15~20인 선출, 인구 2000명을 초과하지 않은 곳은 20~35인 선출, 최소 7인보다 적지 않고 최대 50인을 넘지 않도록 한다.
②현 인대 대표 수—인구 20만 이하는 100~200인 선출, 인구 20만을 초과한 곳은 200~350인 선출, 최소 30인 보다 적지 않고 최대 350인을 넘지 않도록 한다.
③성 인대 대표 수—인구 2000만명 이하는 100~400인 선출, 인구 2000만명 이상은 400~500인 선출, 최소 50인 보다 적지 않고 최대 600인을 넘지 않도록 한다.
④시 인대 대표 수—최소 50인보다 적지 않고, 최대 800인을 넘지 않는다. 시 산하 구(區)의 인대 대표 수는 500~2000명 당 1인을 선출하고, 인대 대표 총수는 35인 보다 적지 않으며 최대 200명을 넘지 않도록 한다.
⑤전국인대 대표 수—전국인대 대표는 성 인민대표대회, 직할시와 인구 50만 이상의 성 산하 산업시의 인민대표대회, 중앙 직할 소수민족행정단위, 인민무장부대와 국외동포에 의한 선거에 의해 탄생한다. 각 성의 전국 인대 대표 수는 인구 80만 명당 1인의 대표를 선출하고, 인구가 특별히 적은 성이라도 대표수가 3인 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
* 향(鄕)과 진(鎭)은 한국의 면과 읍에 해당된다. 양자는 사실상 동급의 행정단위이지만, 다만 진이 다소 규모가 크고 도시화가 진척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참고로 중국의 행정단위는 중앙ㅡ>성, 직할시ㅡ>시(구가 있는 시)ㅡ>현, 구가 없는 시ㅡ>향/진 이상 5단계로 구성된다. 그 외 농촌에 촌(村)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리(里)에 해당되며 정식 행정단위는 아니다. 따라서 촌에는 국가 행정기구가 없으며 주민들이 선출한 ‘촌위원회’를 통해서 자치를 실시한다.
둘째 선거를 주최하는 기구와 관련하여, 중앙 인민정부와 지방 각급 인민정부 하에 성립된 중앙과 지방의 각급 선거위원회를 선거 사무를 처리하는 공식기관으로 설정하였으며, 그 성립•구성•직능 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였다.
셋째 선거절차와 관련하여 선거위원회의 성립, 선거구 획정, 유권자 등록, 후보자 선출, 선거일시, 장소 등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하였다.
▲1953년 선거법 |
이 밖에도 ‘1953년 선거법’은 신중국의 첫 번째 인민민주주의 성격을 갖는 선거법으로서, 중국 선거제도의 민주주의 원칙을 확립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편성원칙
이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향유하는 선거민이 광범위한 것을 의미한다. ‘53년 선거법’은 “만 18세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민족과 종족, 성별, 직업, 사회출신, 종교‧신앙, 교육정도, 재산상황과 주거 기한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동시에 법에 의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의 선거권에 대한 제한 역시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예컨대, “이하의 정황 중 하나라도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상실한다. 1. 법에 따라 아직 성분을 변화시키지 않은 지주계급분자 2. 법에 의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반혁명분자 3. 기타 법에 의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자 4. 정신질환자”가 그에 해당되었다.
(2) 평등원칙
선거법은 “모든 선거민은 단 하나의 투표권만 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선거법은 일부 문제들에 대해 특별한 규정을 두었다. 예컨대 전국과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의 대표 수는 모두 일정한 인구비례를 기초로 선출하도록 하였지만, 동시에 선거법은 민족 간의 차이를 적절하게 감안하였으며, 도시와 농촌, 한족과 소수민족에 대한 서로 다른 비례 규정을 두었다. 물론 소수민족에 유리한 방향으로 규정하였다.
(3) 직접선거와 간접선거의 동시 병용
선거법은 인민 대표의 선거는 직접선거와 간접선거 두 가지가 있다고 명시하였다. 직접선거의 범위는 향/진, 시 산하의 구(區), 구가 없는 시 인민대표대회의 대표를 선출하는 경우까지 해당된다.
간접선거는 인민대표대회의 대표가 선거민의 직접선거에 의해서가 아닌 하급 인민대표대회의 선거를 통해서 성립되는 것을 말한다. 선거법은 이에 대해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 성, 현 그리고 구를 설치한 시의 인민대표대회의 대표는 직속 하급 인민대표대회의 선거에 의해 성립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두 가지 방식을 병용하는 이유는 주요하게는 중국의 경제, 정치, 문화 등 제반 현실적 요인 때문이다. 예컨대 국토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각 지역의 경제‧문화 발전이 불균등하고, 인민의 민주주의 의식이 아직 낮고, 많은 사람들의 선거 경험이 부족한 것 등이 고려되었다.
(4) 무기명투표와 거수표결의 병용
선거법은 “현급 이상 인민대표대회의 선거는 무기명투표 방식을 사용 한다”고 명시하면서도, 다른 한편 “선거인이 문맹이거나 장애인이어서 글씨를 쓸 수 없을 경우 다른 선거인이 대신 쓸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문맹이라는 점을 고려하였다.
(5) 등액선거(等额选举)
등액선거는 후보자 수와 당선자 수를 같게 하는 방식으로써 ‘비경쟁 선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선거법은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모두 단독 혹은 연합으로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으며, 선거민 또한 단독 혹은 연합으로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선거에서 최종적으로 표결에 부쳐지는 후보자는 선거위원회가 사전에 각 방면의 의견을 종합하여 최대다수의 선거민의 뜻을 감안하여 확정토록 하였다.
이러한 비경쟁선거의 경우 선거민은 찬반만을 결정 할 수 있고 다양한 인물 중에서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협상정치’의 묘미를 발휘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상 선거위원회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상층의 의지를 많이 반영하는 선거법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적절한 수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인민대중의 의식수준의 상승에 따라 민주적 절차가 훼손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1953년 선거법’은 대표의 임기 중에라도 다수 선거민 혹은 선거단위가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고 간주하는 사람에 대해선, 법정 절차에 따라 소환하여 보궐선거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1953년 선거법’은 선거민 혹은 선거단위에게 자신이 선출한 대표에 대한 감독과 파면권을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1953년 선거법의 주안점은 당시 중국의 실정에 부합하는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배제하면서도 대신 실질적인 규정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당시의 역사적 조건의 제한을 받아 ‘1953년 선거법’은 일부 문제 조항도 존재하였다. 예컨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등액선거’ 규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소환 파면권을 명기하긴 하였지만, 선거민이 선출한 대표에 대해서 감독과 파면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구체적 규정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실제 실행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저런 부족함이 있을지언정, 1953년 선거법이 반영하는 신중국의 민주주의의 진척은 매우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전국 각계 민족과 인민의 일치된 노력을 통해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과거 수천 년의 봉건제 역사를 지닌 중국에서 인민민주를 실현하는 선거법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인민대표대회제도가 전국적 범위에서 확립되는데 있어 광범위한 대중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같은 성과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 예컨대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불리는 영국과 미국의 선거법의 발전과정을 보면, 수백 년에 걸친 점진적인 진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오늘날의 보통선거권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보장한다는 절대적 명제 하에서 이들 나라의 민주주의와 선거제도가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나 인민민주주의 국가 역시도 노-농 계급의 권력을 보장해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에 있어서는 양자는 동일하다. 다만 이 같은 과제는 자본주의국가와 비교할 때 후자가 훨씬 빨리 실현할 수 있음을 중국 사례는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초기에 극소수 일부 착취계급의 선거권에 대한 제한이 있었을지라도, 절대다수에 대한 ‘보통선거권’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확립되었다.
2) 제1차 전국 보통선거의 실시
1953년 5월초 시장(西藏, 티벳)을 제외한 전국 42개 성과 시에서 선거위원회가 성립하였으며, 각 성에 속한 현(시)의 선거위원회 또한 대부분 성립하였다. 이리하여 전국적 범위에서 본격적으로 기층 선거가 시작된 것은 1953년 중순이다.
먼저, 기층 선거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257만9390명 간부가 선거 조직사업에 참가하였다. 첫 보통선거 실시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신중국 성립 후 제1차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1953년 6월 30일 현재 중국 인구는 6억191만 명(대만 및 국외 화교 포함)이었다.
전국에 등록된 선거민 총수는 3억2381만 명이었는데, 이는 만 18세 이상 인구 총수의 97.18%에 해당되었다. 법에 따라 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은 정신병자를 포함하여 2.82%에 지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선거민 중 실제 투표에 참가한 사람은 2억7809만 명으로 등록 선거민 총수의 85.88%이었다. 여성은 84.01%가 투표에 참가하여 남성과 투표율이 비슷하였다. 소수민족 지역 중 부분적으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기층선거를 진행하지 못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의 소수민족 3/4 인구를 포괄하는 지역에서 기층선거가 진행되었다.
1954년 6월 19일, 중앙선거위원회는 중앙인민정부에 전국의 기층선거가 순탄하게 완수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전국 첫 기층선거에서 모두 561만9천 명의 기층 인민대표대회 대표가 선출되었는데, 그중 여성대표는 17.31%를 점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공업과 농업분야의 생산전선 및 기타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우수한 인물들이었다. 이들 인민 대표들은 도시와 농촌에 골고루 분포되어 광대한 인민대중과 밀접한 연계를 유지함으로써, 인민민주주의 제도가 진일보 공고화 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 제1차 기층 보통선거 모습(북경) |
그런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헌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보통선거 후 각급 정권의 조직형식에 있어서는 일정하게 정해진 틀이 없었다. 따라서 성, 시, 현의 첫 인민대표대회 회의는 기존의 인민정부가 소집하였다. 첫 회의에서는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독자적인 인민정부를 선출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선출된 기층의 인민 대표들이 다시 모여 상급인 성, 시, 현의 인민 대표를 선출하는 일이다. 이 같은 결정이 이루어진 후 1954년 6~7월 중에 전국 150개 시, 2064개 현, 그리고 중앙 직할시의 170개 구(區) 등지에서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 회의에서 각각 제출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초안)을 토론하였으며, 선거법의 규정에 따라 각각 성, 직할시, 내몽고 자치구의 인민대표대회 대표 총 1만 6680명을 선출하였다.
이들 성, 직할시, 자치구 인민대표대회 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초안)을 토론하고 정부 사업보고를 심사하는 외에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를 선출하였다. 중앙선거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25개 성, 내몽고자치구, 시장(티벳)지구와 14개 직할시에서 총 1136명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가 선출되었다.
인민해방군 역시 군인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자신에게 할당된 전인대 대표 60명을 선출하였다. 화교(華僑)사무위원회도 자신들에게 배정된 대표 30인을 선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지구와 사업단위에서 선출된 전인대 대표는 총 1226명이 되었다. 그중 여성대표는 147명으로 11.9%를 차지하였으며, 소수민족 대표는 모두 177명으로 14.44%를 차지하였다.
1954년 9월 15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가 마침내 북경에서 개막되었다. 이 회의에는 1211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회의의 주요 의사일정은 아래와 같다.
① 헌법과 몇 가지 중요 법률의 제정
대회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중화인민공화국인민대표대회 조직법>,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조직법>,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법원조직법>,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검찰원조직법>, <중화인민공화국 각급 인민대표대회와 지방 각급 인민위원회조직법>을 통과시켰다.
② 정부사업보고에 관한 토론
대회는 주은래 총리가 중앙인민정부를 대신하여 행한 <정부사업보고>를 청취하고 <정부사업보고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③ 국가지도자 선출
충분한 협상과 민주주의 기초위에서 대회는 모택동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주덕을 부주석으로 선출하였다. 대회주석단의 제의를 받아들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위원장 1인, 부위원장 13인, 위원 65인, 비서장 1인을 임명하였다. 유소기를 위원장으로, 송경령 등 13인을 부위원장으로, 팽진(彭真)을 비서장으로 임명하였다. 동필무(董必武)를 최고인민법원 원장으로, 장정승(张鼎丞)을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국가주석 모택동의 지명에 따라 국무원 총리로는 주은래가 결정되었다. 다시 국무원 총리 주은래의 지명으로 나머지 국무원 성원에 대한 인선을 통과시켰다.
이상 제1기 전인대 1차 회의의 개최는 중국 인민대표대회 제도가 기층에서부터 상층까지 전국적 범위에서 정식 수립되었음을 상징한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정치운행 틀이 마련된 것이다.
▲1954년 9월 개최된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모습 |
3) 신중국 근본법—‘1954년 헌법’의 제정
(1) 제정과정
1954년 9월 20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이 통과되었다. 이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과한 첫 번째 법률이다.
그에 앞서 중앙인민정부위원회는 1953년 1월 13일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기초위원회’를 성립하였다. 1954년 3월 20일 헌법기초위원회는 중공 중앙이 기초하고 모택동 주석이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제출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초안 초고를 접수하였다. 곧 이어 북경과 전국 대도시에서 제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사회 각 방면의 대표 총 8000여 명이 조직되어 2개월여 기간에 걸쳐 이 초안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이 초안을 기초로 수정된 헌법 초안을 중앙인민정부위원회가 1954년 6월 14일 공표하여 다시 전국 인민들의 토론에 부쳤다.
전국적 토론은 근 3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광대한 인민들이 헌법초안을 열렬히 지지하였는데, 수많은 지역에서 보고를 듣고 토론에 참가한 수자는 전체 성인 인구의 70%이상으로 집계되었다. 이렇듯 전국민적 토론을 거쳐 헌법초안에 대한 118만 건의 수정과 보충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들 의견들에 기초하여 헌법위원회가 원래 초안에 수정을 가해 재수정한 헌법초안을 1954년 9월 9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34차 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최종적으로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제1차 회의 토론에 제출되어 확정되었다.*
* 중국의 ‘1954년 헌법’ 제정 과정은 여러 면에서 한국의 제헌헌법 제정과정과 비교가 된다. 한국의 경우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198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동년 6월 1일 소집된 제2차 국회 본회의를 통해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과 국회법 기초위원을 선임하기 위한 전형위원(각 도별로 1인)을 선출하였는데, 이들 전형위원으로 하여금 기초위원 30인을 선출케 하였다. 제헌국회는 이리하여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유진오의 안을 원안으로, 권승렬의 안을 참고안으로 한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다. 서상일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기초위원들은 당초에 내각책임제로 기초하였던 헌법안을 대통령제로 하려는 이승만 의장의 개인적 의도에 따라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안의 기초 작업을 완료하였다. 이 헌법안이 동년 6월 23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통과되었으며, 7월 17일 이승만 의장이 서명‧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제헌 헌법은 발효되었다.
▲1954년 6월 천진시 공상업계에서 헌법 초안을 토론하는 모습 |
(2) 주요내용
1954년 헌법은 중국혁명과 그 이후 신중국 건설의 역사적 경험을 총괄하였다. 국가의 성격, 사회주의로의 이행 절차*, 국가의 정치제도, 인민의 권리와 의무, 민족자치제도 등 국가의 정치생활 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하였다.
* 중국은 헌법이 제정될 당시 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을 막 완성한 상태로, 아직 사회주의로의 본격적인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국가의 성격
<헌법>제1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국가다.”고 규정하고 있다.
■ 사회주의로의 이행 절차 문제
<헌법>제4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권력과 사회역량에 의지하여 사회주의 공업화와 사회주의 개조를 통해서 점차 착취제도의 소멸을 보장하고,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한다.”고 규정하였다.
■인민민주주의 정치제도
<헌법>제2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체의 권력은 인민에게 속한다.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이다.”라고 명시했다. 헌법은 분명하게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최고 권력기관이자 국가의 입법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대한 문제는 모두 각급 인민대표대회를 통해서 토론하고 결정된다. 전국적으로 중대한 문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토론을 경과해 결정하며, 폐회 중에는 그 상무위원회의 토론을 거쳐서 결정한다. 지방의 중대 문제는 지방 인민대표대회의 토론을 거쳐서 결정한다. 국가 행정기관은 국무원에서 지방 각급 인민위원회에 이르기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지방 해당 인민대표대회를 통해서 구성되며, 그것의 감독을 받고, 그 성원들은 또한 파면될 수 있다. 국가 각급 법원과 검찰기관은 모두 동급 인민대표대회에 의해 탄생되며, 그 감독을 받고, 그 성원 또한 인민대표대회에 의해 파면될 수 있다.
국가원수의 직권은 전인대 상무위원회와 국가주석이 함께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인대 상무위원회이든 국가주석이든 모두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권력을 초월할 수는 없다.
■공민의 기본 권리와 의무
헌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 법률상 모두 평등하다고 명기하였다. 공민의 기본 권리로는 이하 내용을 포함한다. 즉 민주적 권리로는 공민은 보편적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향유한다. 기본적 자유로는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여행, 시위, 거주, 이주, 종교 및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 인신의 권리와 인격권에 있어서는 공민은 인신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으며, 어떠한 공민도 법원의 결정 혹은 인민검찰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체포될 수 없다.
그밖에 공민의 주택은 침범 받지 않으며, 통신 비밀은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 경제문화와 사회적 권리에 있어서 공민은 노동할 권리를 갖는다. 노동자는 교육을 받을 권리, 휴식의 권리를 갖는다. 노년, 질병 혹은 노동 능력을 상실할 때에는 물질적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문화예술창작과 기타 문화생활을 누릴 자유 등을 규정하였다.
이상의 권리와 함께 공민의 의무도 규정하고 있다. 공민의 기본 의무로는 공민은 필히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며, 노동기율을 준수하고, 공공질서와 사회도덕을 준수해야 한다. 공민은 공공재산을 보호하고 보위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법에 따라서 납세 의무를 지니고 병역 의무를 다해야 한다.
■ 민족자치제도
헌법은 국내 각 민족 간에 평등‧우애‧상호부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지방은 ‘민족자치제도’를 실시한다고 함으로써 각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보장하였다. 민족자치와 지방자치 기관의 구체적 형식은 자치를 실시하는 민족의 다수 인민의 뜻에 따라 규정하며, 자치기관은 직무를 집행할 때에는 현지 민족의 통용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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