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혐오의 정치적 기원5-1> 중국 사회성격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적 논쟁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와 대다수 언론들이 여기에 적극 부응하고 있는 현실에서 반중 적대감과 혐오는 필연적이다. 이 혐오를 극복하려고 한다면 이 제국주의 자본주의 하에서 필히 상수(常數)라고 인식해야한다. 그렇다면 이를 변화시킬 수단은 무엇이고 변수(變數)가 무엇인지 고려해봐야 한다. 일극 패권의 조락과 다극화 같은 외부적 요인도 작용하겠지만, 대중들의 대중 적대감과 혐오를 바꿔낼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의 측면이 중요하다. ‘진보진영’이야말로 지배계급이 조장한 대중적 여론, 인식, 감정에 맞서 싸우고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세력이다. 그런데 유독 중국 혐오가 일정한 제동장치 없이 점점 더 빨라지고 확산되는 것은 바로 ‘진보진영’조차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국혐오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수가 상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보단체들 대다수도 중국 비판에 앞장서고 있는데, 애초부터 중국혁명을 자본주의 혁명이라고 사고하는 단체들부터 중국이 등소평 시절부터 개혁개방에 앞장서면서 자본주의, 심지어 제국주의로 변모했다고 보는 단체들까지도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살펴봤던, 《짱깨주의의 기원》(김희교 글, 보리)에서는 진보진영의 중국관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안보적 보수주의의 중국이 문제다라는 프레임이 상상된 중국을 만들어 냈다면, 한국의 진보적 중국연구자들이 만들어 낸 사회주의 중국프레임은 사회주의라는 상상된 중국을 상정해 놓고,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그것이 무너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 그리고 혐오가 뒤섞인 글들을 쏟아 내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다. ‘중국이 문제다라는 프레임의 강화다일부 마르크스 진영에서는 송환법이나 보안법을 미국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중국의 본격적인 팽창정책으로 평가하거나, 노동자 계급 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중국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제 진보진영 내에서의 중국관, 중국사회 성격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진보진영이 역사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진보적’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게 해야 한다.

 

양적, 질적으로 중국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공기업

 

중국사회가 자본주의로 면모했다는 것을 근거로 제기하는 진보진영의 중국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들은 ‘보수진영’과 그 의도, 관점이 다르다 하더라도 중국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판치는 사회에서 중국 적대시에 결과적으로 편승할 수밖에 없다. 김정호 박사는 그 동안 만연한 중국혐오, 심지어 ‘진보진영’ 내에서조차 만연한 중국혐오에 대응하여 중국사회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 편견과 왜곡에 빠졌던 부분에 대해 알려주는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최근 김정호 박사가 중국 공기업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사회 성격을 검토하고 중국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김정호 박사는 중국사회가 사회주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특수한 형태의 공기업에서 찾았다.

중국 공기업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하의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의 일반적 성격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을 공유하긴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착취를 배제한 특수 형식의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고용된 직장이 공기업인 이상, 그 공기업의 이윤(잉여가치의 전화형태)은 우선 국가에게 귀속되며, 다시 최종적으로 본인을 포함한 전체 인민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예컨대 현재 중국의 경우는, 국유기업국유자산관리감독위원회 (혹은 재정부)3)전국인민대표자회의사회(전체 인민)의 순서를 밟게 된다. 당연히 이윤의 전 사회적 환원을 통해서 애초 그것을 생산했던 노동자 자신도 혜택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사적 유물론에 입각할 때 한 사회의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산관계의 핵심인 소유제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기준 중 여기서는 생산관계(소유제)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기준에 입각할 때, 공기업이 국민경제 전반에 대한 확고한 주도성을 갖고 있는 중국사회에 대해서 우리는 사회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또한 중국 공기업이 분포하고 있는 업종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공기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컨대 전력에너지통신 등 국가 기간산업뿐 아니라, 금융건설항공운수 등과 같은 핵심 인프라 업종을 포함한다. 그밖에도 기계제작과 소재부품의 생산, 그리고 자동차조선 등 완성품의 제조 및 심지어는 유통서비스업에도 광범위하게 진출하고 있다.(김정호, “특수 형식의 자본중국 공기업”, [변혁의 시대] 블로그, 2022. 7. 15.)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본주의 내에도 공기업이 존재하지 않느냐, 특히 유럽 사민주의 정부 하에서 공기업이 상당수 존재하지 않았냐고 반박할 수 있다. 김정호 박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 한다.

만약 자본주의 사회라면, 비록 공기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한다. 따라서 착취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2차 대전 직후 서유럽에서는 대대적인 국유화 바람이 불었지만, 국유화된 기간산업들은 일반적으로 민간 독점자본의 제반 비용을 낮추는데 주로 복무하였다. 따라서 그곳의 공기업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 대부분을 자본가계급이 향유하였기 때문에 착취가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서유럽의 공기업들은 대부분 적자기업이었으며,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알짜배기기업들은 민간자본에 맡겨졌다. 결국 이 같은 반쪽자리 공기업체계로는 적자의 누적 때문에 오래갈 수 없음이 판명되었다.(같은 글)

실제 1982년 초 프랑스는 사회당 미테랑 정부 하에서 서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부문을 보유한 나라였는데, 당시 공공부문 비중은 11퍼센트에서 22.2퍼센트로 늘어났고, 산업 매출액 중 공기업은 29.4%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프랑스 정부는 이미 다수의 저축 은행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국유화된 기업들 중 상당수는 이미 사실상 공기업에 가까웠기 때문”(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책세상)에 상대적으로 일부 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하기에 손 쉬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미테랑 정부는 경제위기가 도래하고 유럽중앙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관이 압박을 해오자 노동자 임금삭감과 정리해고, 복지후퇴 등 구조조정에 앞장서고 공기업의 사유화 정책에 적극 앞장서고 나서게 되었다. 또한 국영은행들은 민간은행들과 마찬가지고 수익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르노 자동차의 사례에서 보듯, 인건비를 절감해야 한다면서 국내 투자를 기피하고 해외로 생산설비를 이전하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르노 모델’이었다.(공상주의 비판2 기업들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즉각 국가소유로 만들어야 한다”고? 망설임 없는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국가란 말인가? 보론 자본주의 국유화의 의미와 한계 – 유럽의 국유화 사례, 특히 프랑스 미테랑 사민당 정부를 중심으로, 노동자정치신문, 2020년 12월 11일을 살펴보기 바란다.)

질적인 측면 말고도 양적으로도 중국 공기업은 그 수가 엄청나다.

그렇지만 이 수치만으로도 다른 전 세계 공기업 수자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많다. 참고로 중국 외에 공기업 수가 비교적 많은 국가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헝가리(370), 인도(270), 브라질(134), 체코(133), 리투아니아(128), 폴란드(126), 슬로바키아(113) 순이며7), 한국은 현재 30개의 공기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같은 글)

그런데 심지어 중국에서는 존재하는 해외 자본이니 민간 자본조차도 중국 사회주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중국에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혹은 외국자본까지도 지배적인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인 국유경제와 집체경제를 보완하고 봉사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사회인 한국에서 한국전력이나 한국가스공사와 같은 공기업들이 재벌을 비롯한 사적자본의 축적운동에 복무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국에서 민간자본(외국자본 포함)은 세수, 고용창출, 기술개발 등에 있어 공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중국경제의 발전에 복무한다. 또 그 같은 중국경제 내에서의 민간자본의 존재는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주변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교류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매개물이기도 하다.(같은 글)

이처럼 양적, 질적으로 사민주의가 발전했던 유럽의 어느 자본주의 나라를 봐도 중국에서 존재하는 공기업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과 스웨덴 사민당,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등의 사례에서 보듯, 오늘날 유럽에서 사민주의 정당들은 사유화와 반노동 정책에 앞장서는 등 그나마 남아 있던 진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신자유주의 정당으로 면모했다. 나토의 모습을 볼 때, 대외적으로는 미제와 함께 약소국에 대한 침략전에 나서는 반동적인 정당이 되었다.

중국 공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배당은 국가로 귀속되고 이는 인민생활의 발전에 복무하게 된다.

예컨대 국무원 국자위가 2022617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국무원이 직접 관리하는 97개 중앙 국유기업이 2013년 이래 국가에 납부한 세금은 누계 182000억 위안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최대주주인 국가에 대한 이윤배당으로 13000억 위안을 국가에 상납했다. 지금의 환율로 계산할 경우 약 247조원이다. 그밖에도 공기업은 주식시장에 상장할 경우 국가가 보유한 주식의 10%를 사회보장기금에 이체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규정에 따라 같은 기간 이체한 금액은 12000억 위안에 달한다.

중국 공기업이면서 주식시장에 상장된 공상은행의 경우 2017년 벌어들인 50조원의 이윤은 약 70%의 지분을 가진 국가에게 대부분이 귀속되었으며 (홍콩 자치구정부 산하의 펀드가 소유한 지분을 포함할 경우 약 94%), 국가를 통해서 결국 사회로 환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2018년 삼성전자가 벌어들인 동일한 50조원의 이윤은 당시 57% 지분을 가진 외국인 투자가와 약 5%의 지분을 가진 이재용 등 총수일가의 몫으로 많은 부분이 귀속되었다.(같은 글)

게다가 중국의 공기업은 법적으로도 그 지위를 보장받고 있다.

중국 공기업의 국민경제 내의 지배적 지위는 또한 헌법을 통해서도 보장받는다. 관련 조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헌법 제1장 총강>

6.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경제제도의 기초는 생산수단의 사회주의 공유제이다. 즉 전인민소유제와 근로인민대중의 집체소유제이다. 사회주의공유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소멸시키고, 각자 자신의 능력대로 일하고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을 실시한다.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국가는 공유제를 주체로 하고 다양한 소유제 경제가 공통 발전하는 기본 경제제도를 견지하며,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을 위주로 하면서 다양한 분배방식이 병존하는 분배제도를 견지한다.

7. 국유경제, 즉 사회주의 전인민소유제는 국민경제의 주도적 역량이다. 국가는 국유경제의 공고화와 발전을 보장한다.

12. 사회주의 공공재산은 신성불가침하다. 국가는 사회주의 공공재산을 보호한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국가와 집체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같은 글)

진보진영 내에서는 중국에서 ‘개혁개방’ 과정에서 물권법, 채권법이 제정된 것을 근거로 들면서 중국의 자본주의성을 증명하려 들기도 하는데, 이는 위의 중국의 헌법에서도 보장되고 있는 사회주의 공유제를 외면하는 일면적인 태도다.

 

자본과 확대재생산의 두 가지 인식 오류

 

김정호 박사는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여전히 사회주의 생산과 체제를 유지하는 중국의 실제 모습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김정호 박사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밝혔던, 즉 “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라는 정의를 인용하면서 “이는 자신의 크기를 키워 갈 수 있는 가치(응고된 노동시간)이며, 축적과 확대 재생산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중국 공기업은 완전히 그 조건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자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 공기업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하의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의 일반적 성격ㅡ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ㅡ을 공유하긴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착취를 배제한 특수 형식의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과거 계획경제 하에서는 국가가 직접 그의 일자리를 배정하는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시장경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시장을 통해서 공기업에 채용된다. 즉 노동력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상품’으로 변화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고용된 직장이 공기업인 이상, 그 공기업의 이윤(잉여가치의 전화형태)은 우선 국가에게 귀속되며, 다시 최종적으로 본인을 포함한 전체 인민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김정호 박사는 자본과 확대재생산(축적)의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혼란을 겪고 있다. 맑스는 김정호 박사도 인용(김수행 번역,《자본론》1권) 하고 있다시피, 자본이 “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이면서, 자본의 소유자, 즉 자본가는 “화폐를 상품들로 전환시”키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즉 이미 대상화된 죽은 과거의 노동)”로 전환시킨다고 하고 있다.

이로써 자본은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과거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노동력의 소유자(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활기 띤 괴물로 전환”되게 되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이 특정한 역사적 단계 속에서 출현하는 “사회적 관계”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주장을 하고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떼어 내어졌을 때 그것은 자본이 아닌데, 이는 마치 금이 그 자체로서는 화폐가 아니거나 혹은 설탕이 설탕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임금노동과 자본》)

원시공산제의 해체 이래, 상품교역이 생겨나고 생산력의 점차적인 발전에 따라 잉여생산물이 생겨나면서 이 잉여생산물을 독점하는 지배계급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상품생산이 존재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는 아니다.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사회다. 인간의 노동력조차도 상품이 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은 처음에는 화폐형태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자본이 아니다. 자본은 증식하는 가치인데, 자본의 증식이 가능한 것은 가진 것은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서 생산과정에 투입하고 이 생산을 통해 나온 생산의 결과물의 일부를 임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자본가들이 앗아가 노동력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만들어내는 잉여생산물을 독차지 하게 되어 자본규모를 늘리고 자본가로 군림하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노동의 집단적 결실인 자본의 노예가 되어 착취 받고 억압 받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생산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착취하고 지배하는 자본가와 착취당하고 지배당하는 노동자 사이의 주종관계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과거 노예제 시절의 노예와는 다르게 노동자는 인격적으로, 법적으로 명목적인 권리를 획득하지만, 실제로는 현대판 임금노예가 되게 된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을 보장하는 자본의 집행기구에 다름 아니다.

중국에서 공기업 노동자들이 국가 배정 방식이 아니라 “노동시장을 통해서 공기업에 채용”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형태지만, 그럼에도 위의 사례를 보면, 중국의 공기업은 ‘자본’이 아니고,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기업도 아니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업도 아니다. 중국에서 노동자 착취는 공기업이 아닌 사적 기업에서 ‘특수한’ 형태로 벌어진다. 여기서 특수한 형태라는 것은 우선 “중국에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혹은 외국자본까지도 지배적인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인 국유경제와 집체경제를 보완하고 봉사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민간자본(외국자본 포함)은 세수, 고용창출, 기술개발 등에 있어 공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중국경제의 발전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적기업에 고용된 중국의 노동자들이 착취를 받는다 하더라도, 다른 공기업에 만들어낸 생산물, 사회적 가치들이 “우선 국가에게 귀속되며”, 공기업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체 인민에게로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김정호 박사는 “공기업의 이윤(잉여가치의 전화형태)은 우선 국가에게 귀속되며, 다시 최종적으로 본인을 포함한 전체 인민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라고 강조하는데,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의 결실을 다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 일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 초안>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러므로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에 걸맞게 개별 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주는 것을 -공제 후에- 정확히 돌려받는다. 그가 사회에 주었던 것은 자신의 개인의 노동량이다. 예를 들면, 사회적 노동일은 개인적 노동 시간 수의 합의로 이루어진다. 개별 생산자들의 개인적 노동 시간은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자신이 제공한 부분, 즉 사회적 노동일에 대한 자신의 몫이다. 그는 자신이 (사회 기금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공제한 후에) 이러저러한 만큼의 노동을 제공하였다는 증서를 사회로부터 받고, 이 증서를 자기고 소비 수단의 사회적 저장품에서 동일한 양의 노동이 비용을 들인 만큼을 빼간다. 그는 어떤 형태로 사회에 준 것과 동일한 양의 노동을 다른 형태로 되받는다.(<고타 강령 초안 비판>, 박종철출판사, 이수흔 번역)

김정호 박사는 “축적과 확대 재생산의 가능성”에서 “중국 공기업은 완전히 그 조건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자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가지고 “‘자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축적과 확대재생산은 비단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가 존립할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이고 사회주의에서도 대규모 발전한 생산력 기반 위에서 확대재생산은 인민들의 물질적, 문화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생산과정의 사회적 형태가 어떻든, 생산과정은 연속적이어야 하며 주기적으로 동일한 국면들을 끊임없이 통과해야 한다. 사회가 소비를 멈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을 멈출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 생산과정도, 그것을 연속된 전체로서,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으로서 고찰할 때에는, 동시에 재생산 과정이다.”(《자본론》1 하, 제23장 <단순재생산, 비봉출판사, 김수행 역)라고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맑스는 《자본론》2권에서도 “생산이 자본주의적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이라 할지라도, Ⅰ부문의 이 생산물들은 이 부문의 생산분야들 사이에서 재분배될 것이며, 한 부분은 그것이 생산물로서 나온 그 생산분야에 직접 남을 것이고, 다른 한 부분은 다른 부문으로 옮겨질 것이며, 그리고 이 생산물들이 이 부문의 여러 생산분야들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라고 하고 있다. 스탈린은 이를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맑스의 재생산론의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 즉 사회적 생산을 생산수단 생산과 소비재 생산으로 구분할 데 대한 명제, 확대 재생산에서 생산 수단 생산의 우선적 성장에 대한 명제, 1부문과 제2부문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명제, 축적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잉여 생산물에 대한 명제, 사회적 폰드의 형성 및 그 사명에 대한 명제, 확대 재생산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축적에 대한 명제 이 모든 기본 명제는 비단 자본주의적 구성태에만 타당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어느 사회주의 사회도 인민 경제를 계획화할 수 없는 바로 그러한 명제인 것이다. 맑스를 본다면 그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 법칙의 연구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본론>에서 자기의 재생산 도식이 사회주의에 어떻게 적용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론>, 2, 20, ‘1부문의 불변자본이라는 절, 즉 제1부문 내에서의 제1부문 생산물의 교환을 설명하고 있는 절에서 맑스는 이 부문에서의 생산물 교환은 사회주의 하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단히 진행될 것이라고 부언하고 있다.(스탈린,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경제적 제 문제”)

사실상 맑스주의 재생산론은 현대 사회가 해마다 축적하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으며 또 축적은 해마다 확대 재생산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하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집중화된 대규모적인 사회주의적 공업은 맑스주의적 확대재생산론에 의해서 발전되고 있다.(스탈린, “쏘련에서의 농업 정책의 제 문제에 대하여”)

맑스는 “잉여가치의 생산 또는 이윤획득이 이 생산양식의 절대적 법칙이다”라고 강조했다. 자본주의에서 축적과 확대재생산의 궁극적 목표는 자본의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인간의 필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도 이윤이 되지 않으면 생산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이윤이 된다면 “혹성이라도 합병”하려고 하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축적과 확대재생산은 경쟁을 가속화 시키고 노동자들의 실업과 빈곤, 비정규직을 확대시키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 노동소외 등을 가중시키고 과잉생산 공황을 낳는 원인이 된다. 노동자들은 생산을 하면 할수록 그 생산의 결실에서 소외되고 자본가들은 점점 더 생산과 기업의 지배자가 되고 노동자들은 자본에게 생사여탈권을 빼앗기게 된다.

반면 사회주의에서 축적과 확대재생산은 전체 노동자 민중의 정신적, 물질적, 문화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목표다. 따라서 명백하게 생산의 추동력, 목표가 전혀 다른 사회주의 생산과 확대재생산을 ‘자본’ 범주로 놓고 볼 수도 없고, 그것을 착취의 결과물인 잉여가치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가치법칙에 대한 혼란과 왜곡

 

김정호 박사는 시장과 계획, 가치법칙과 관련해서는 더 혼란을 겪고 왜곡을 하고 있다.

지난 2019년 12월 19일 현실사회주의 문제를 둘러싼 토론회가 있었다. 이 토론회에서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 채만수 소장과 <노동자연대> 이정구 선생은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사회주의=계획경제’, ‘자본주의=시장경제’라는 등식을 고수한 것인데, 이 두 분의 주장대로라면 한 사회의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은 소유관계와 국가의 성격 외에도, ‘시장과 계획’이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과연 올바른 판단일까?(같은 글)

시장과 시장경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자본주의라 할 수는 없고,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사회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시장과 상품거래가 있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과 거래 없이 계획경제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또한 상품 생산과 생산계획이 독립적인 개인, 개별 기업 차원에서 이뤄지고 전 사회 차원에는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이 지배하며 상품을 서로 교환한다. 자본주의는 한 마디로 상품경제가 지배적인 사회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심지어 인간 노동력조차도 상품이 되고 거래가 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개별적 생산, 무정부적, 무계획적 무정부적 시장과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 국가 차원에서 중앙집중 계획을 통해 생산하고 노동을 배분한다. 사회주의는 궁극적으로 시장과 상품생산이 지배하는 사회에 비해 시장과 상품생산의 절멸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다. 그러나 한순간에 시장이 절멸될 수는 없다. 사회주의에서도 역시 자본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국유기업 생산물과 협동조합 생산물과의 거래, 협동조합 생산물 상호 간의 거래, 다른 나라와의 무역, 여전히 남아 있는 소생산자들 간의 거래 등에서 시장과 상품교환이 존재하게 된다.

김정호 박사는 소유관계와 국가의 성격과 ‘시장과 계획’과의 관계를 별개로 파악한다. 그러나 시장과 상품 거래가 지배적인 사회의 소유관계와 중앙계획이 지배적인 사회의 소유관계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그 국가는 사적소유를 보장하며, 사회주의와 그 국가는 중앙계획 체제를 보장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의 법적표현은 재산권 보장과 물권법, 채권법 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사회주의에서는 기업과 토지의 공유제 같은 사회주의적 소유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사회주의적 소유관계가 병존하고 있다. 시장과 계획 역시 병존하고 있다. 이 양자는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게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이 지배적이냐 계획이 지배적이냐? 어느 요소가 우세를 차지하느냐?, 규정적이냐? 이다. 이것은 다른 사회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요소다. 김정호 박사 자신도 그러하기에 중국에서 시장과 상품경제가 존재하지만, 공기업의 양적, 질적 문제, 사회주의적 소유의 문제 등으로 어느 것이 더 지배적이고 우세한지 살펴보지 않았나?

맑스는 이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의 부는 ‘거대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 부의 ‘원소 형태이다.(맑스, 《자본론》1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산물을 상품으로 생산한다. 상품을 생산한다는 사실이 이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으로부터 구별하는 점은 아니지만, 그 생산물의 지배적이고 규정적인 성격이 상품이라는 것은 이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으로부터 구별하는 점이다.(맑스, 《자본론》3권)

김정호 박사는 가치법칙에 대한 이해, 가치법칙의 존재와 가치법칙의 지배와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의 혼란을 겪고 왜곡을 하고 있다.

상품의 가치가 그것의 생산에 지출된 필요노동시간으로 결정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된 상품의 가치 안에 이미 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가치법칙은 잉여가치법칙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것은 참으로 심오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이 분리하여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실제 양자는 완전히 서로 다른 개념이다. 맑스의 공적은 바로 가치법칙이 아닌 잉여가치법칙을 발견한 데 있다. 이점은 정치경제학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이정구씨와 같은 분이 ‘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등식을 입증하기 위해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 두 범주를 혼동하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을 신봉하는 이정구씨가 이처럼 두 개념을 혼동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토니 클리프를 비롯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 ‘잉여가치’ 범주를 ‘가치법칙’ 범주와 혼동하고, 단순히 가치법칙의 존재를 통해서 현실 사회주의는 착취가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임을 입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가치법칙은 그 자체로서 잉여가치와 동일시 될 수 없으며, 양자는 전혀 별개의 두 개의 범주이다. 가치법칙이 의미하는 것은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등가교환’일 뿐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결합할 때만, 비로소 생산과정에서의 부등가교환인 부불노동의 착복 즉 착취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교환가치의 존재, 그리고 상품과 시장의 존재 유무는 그 사회가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결국 채만수씨와 이정구씨가 앞서 ‘사회주의=계획경제’, ‘자본주의=시장경제’ 등식을 고수하는 것은,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시장경제와 잉여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양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결과라는 점이 분명해졌다.(같은 글)

김정호 박사는 가치법칙과 잉여가치 법칙을 분리하고 있으며 가치법칙을 단순하게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등가교환’”의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다. 김정호 박사는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고 이 가치를 기준으로 상품과 상품이 서로 교환이 된다는 것만으로 가치법칙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가치법칙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요소이다. 이는 가치의 기본 규정을 가치법칙 자체로 왜곡하는 것이다.

가치법칙의 기본 내용은 상품의 가치가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며, 상품 교환이 상품의 가치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품 경제를 관철하는 하나의 객관적 필연성이다… 가치법칙은 상품 생산의 경제법칙이다. 사람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든가 않든가에 관계 없이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반드시 가치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사유제를 기초로 하는 상품 경제, 특히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가치법칙이 거대한 작용을 미치고 있다.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 경제관계의 각 측면이 모두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먼저 사유제 상품 경제에서는 가치법칙이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사회 각 생산 부문간의 배분 비율을 자동적으로 조절한다…역사적인 사실은 가치법칙에 의해 조절되는 자본주의 생산이 결코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동요와 경제 공황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는 상품생산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법칙의 작용 범위는 지극히 제약되었다.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상품생산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가치법칙 또한 가장 넓은 활동 장소를 갖고 있다.

가치법칙은 상품생산의 경제법칙이며 상품생산과 함께 작용하기 시작하여 상품생산의 소멸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갈 것이다.(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개론 중국 당 학교 경제학 교과서 <자본주의편> , 일월서각)

한 사회의 총노동시간이나 혹은 그것이 담보하는 가치로 하여금 시장기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노동분할을 실현하게 하고 또 그 분할의 정당성을 사후적으로 판정하도록 만다는 상품생산 사회의 동력, 그것이 바로 가치법칙이다. 따라서 가치법칙이란 전혀 어떤 사전적인 조정이 없이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개인의 사적 노동을 사회노동의 한 부분으로 포섭하고, 그 사적노동의 유용성을 사회적으로 판정하는 계기로서 작용한다.(정운영, 《노동가치이론 연구》, 까치글방)

상품의 가치의 크기는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이와 같은 상품의 가치규정을 기초로 하여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치법적이라고 한다.(“가치법칙”, 《경제학사전》

김정호 박사가 과학적인 정치경제학 체계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경제학 체계를 자기 맘대로 창안했다면 모를까, 어느 모로 보나, 가치법칙을 단순하게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등가교환’”의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가치의 개념 속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포함하고 있는데, 자본주의는 교환가치, 즉 상품교환을 위해 생산하는 사회이고, 사회주의에서는 인간의 필요와 유용성, 즉 사용가치를 위해 생산하는 사회라는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가치법칙과 잉여가치 법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 법칙을 기본 동력으로 하여 가치법칙에 작동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생산방식과 기계 등을 통해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보다 우월한 생산방식을 채택하여 특별잉여가치라고 한다. 특별잉여가치의 추구는 자본주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추동력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새로운 생산방식과 기계를 채택하여 우월한 경쟁을 하는 자와 그 경쟁에서 탈락하는 자로 단순 상품 생산자를 분해하여 자본가와 임노동자를 낳기도 했다.

가치법칙은 상품 생산과 교환을 규제하기도 하는데, 시장에서 상품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데, 수요 보다 공급이 많을 때는 가격이 내려가고, 수요가 많을 때는 가격이 올라간다. 그 가격의 오르내림의 중심선이 바로 가치이다. 가령 가치 보다 가격이 높으면 수요 보다 공급이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가격이 떨어지게 된다. 반대의 경우는 반대다. 이에 따라 가치법칙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배분하게 한다.

가치법칙은 이처럼 자본주의 상품생산과 교환을 지배하는 법칙이며 상품생산과 교환이 전면화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작동하는 법칙이다.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특성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비해 사회주의는 생산과 분배, 교환, 노동력 배분이 중앙계획에 의해 의식적,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다.

사회주의 계획과 상품생산, 가치법칙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가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사회주의 제도 하에서도 가치 법칙이 존재하며 작용하는지 묻는다.

그렇다. 존재하며 작용한다. 상품과 상품 생산이 있는 곳에는 가치법칙도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가치법칙의 작용 범위는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상품 유통, 즉 매매를 통한 상품교환, 주로 개인 소비 상품 교환에 미치고 있다. 물론 이 분야에서는 가치법칙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절자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가치법칙의 작용은 상품 유통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작용은 생산에도 미친다. 물론 우리 사회주의적 생산에서는 가치법칙이 조절적 의의는 가지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시 생산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생산을 지도함에서 있어서 그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한 된다 … 그렇다고 하여 이 모든 것은 가치법칙의 작용범위가 우리나라에서도 자본주의 하에서와 같다거나 가치법칙이 우리나라에서도 생산의 조절자로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 가치법칙의 작용범위는 우리 경제 제도 하에서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며 국한되어 있다 … 도시에도 농촌에도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가 없고 생산수단이 사회화되었으니만큼 가치법칙의 작용범위와 생산에 대한 그 영향의 정도가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스탈린,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 제 문제”)

“진정한 사회주의라면 가치법칙이 적용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사회주의에 대한 초보적 이해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에서는 상품 생산이 절멸된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가치법칙이 존재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회주의 일반에서도 가치법칙이 작동한다. 다만 자본주의처럼 전면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사회주의 국가 보다 가치법칙이 폭넓게 작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가치법칙의 존재를 가지고 자본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상품생산이 존재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상품생산이 지배적이냐 마느냐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했듯이, 가치법칙에 있어서도 가치법칙이 존재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가치법칙이 지배하느냐 아니냐로 구별해야 한다.

김정호 박사는 이렇게 중국사회를 규정한다.

현재 중국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그에 따른 계급관계가 상당한 영역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히 ‘착취’가 객관적 현실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이 전반적으로 ‘착취 사회’라거나 계급모순이 ‘주요모순’인 사회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같은 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계급관계가 상당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특수한 형태로 ‘착취’가 객관적 현실로 존재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실사구시적 태도다. 그러나 중국 사회는 “공기업이 국민경제 전반에 대한 확고한 주도성을 갖고 있”고, “중국 공기업이 분포하고 있는 업종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공기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략적 사업 부분에서 국가 계획이 지배하고 있다. 코로나 19 대응에서도 보듯 여전히 중국은 계획이 두드러지게 작동하고 있다. 더욱이 시진핑 정권 하에서 중국은 ‘공동부유’, ‘조화사회’를 내걸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실제 중국에서는 후진타오 정권 하에서는 민간기업이 발전하고 국유기업이 후퇴(민진국퇴)했음에 비해 시진핑 정권 하에서는 국유기업이 발전하고 민간기업이 후퇴(국진민퇴)하고 있다.

김정호 박사는 즉 시장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주요한 기반과 수단으로 사용하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극복해야할 과제로 인식하는 대신에 사회주의 건설의 모범으로 강조하려다 보니 논리적 모순에 빠져버렸다. 이로써 자신이 실사구시적 태도로 제시했던 중국의 사회주의적 면모들을 스스로 훼손하고 자본주의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버렸다. 결국 그러다보니 중국이 국가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심지어 제국주의라는 ‘진보진영’ 내의 비과학적이고 종파주의적인 입장들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들의 논거를 더 확고히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중국 혐오에 맞서 투쟁하고 엄호하는 것은 중국의 사회주의적 성격, 진보적 성격이지, 자본주의적 요소 때문이 아니다. 중국에 필요한 것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강화와 국제주의적 계급의식, 당의 사상성 강화다. 중국의 발전한 생산력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강화로써 인민복리에 복무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포위, 고립, 섬멸시켜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강화해 들어가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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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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