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의 극우 반동화가 조선일보 기고로 마침표를 찍었다!
* 이 글은 [전선] 140호에도 같이 실렸습니다.
반공 극우 파쇼 신문 조선일보에 대한 태도는 정치적 입장을 가늠해보는 잣대와 같은 것이다. 특히 ‘진보진영’ 내에서 조선일보의 지지, 격려, 고무를 받는다는 것은 그 단체, 정당이 ‘진보’의 이름을 내걸고 얼마나 가장 사악하고 파렴치하게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일찍이 종북몰이를 등에 업고 ‘진보운동’을 분열시켜 왔던 정의당이 바로 그러하다. 정의당은 조선일보 같은 사악한 파쇼 반동 언론의 부추김과 격려, 고무를 받고 성장하였고 거기에 취해 조선일보에 인터뷰까지 하는 것으로 마지막 남은 ‘진보’라는 수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회진보연대는 제2의 정의당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반자본 신자유주의 반대’를 내걸었으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특유의 반공반북 입장을 내걸었다. 반제국주의가 빠진 ‘진보’를 내걸었다. 한지원은 반북 반공 ‘진보’를 천명하는 사회진보연대의 인격화된 화신이다. 한지원의 정치적 행보는 사회진보연대의 그것을 대변하고 웅변한다.
한지원은 지난 민주노총 선거에서도 민주노총 후보들이 반미반제가 아니라 반북을 내걸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런 입장으로 인해 그 동안 조선일보에 ‘진정’한 좌파로 기사화 되기도 했다. 사회진보연대 산하 학생단체인 학생행진은 마침내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을 공개 지지하는 것으로 ‘진보’단체라는 마지막 껍데기를 벗어던졌다. 사회진보연대의 이론적 스승인 윤소영 교수 역시 이와 같은 길을 개척하며 사회진보연대의 행보에 방향을 제시했다.
사회진보연대의 우경화는 한지원의 조선일보 기고로 다시 한 번 우경화의 정점을 찍었다.
한지원은 조선일보 칼럼(노동개혁은 당사자들 대화 지원이 최선, 2022년 3월 23일)에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며 윤석열 정부가 앞으로 취할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한지원은 이 칼럼에서 문재인 정권의 최저임금 정책과 실업정책과 비정규직 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한지원의 비판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본과 조선일보의 극우 반동적 관점에서의 비판이었다.
한지원은 문재인 정권이 제도를 오남용해서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인상한 것이 문제였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최저임금 정책이 비난받는 것은 최저임금 인상을 내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양두구육처럼 최저임금 인상을 내걸고는 자본진영의 격렬한 반발에 굴복하여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약간의 최저임금 인상을 도로 물렸으며 결국은 최저수준의 최저임금 인상, 실제로는 실질 최저임금 인하를 했기 때문이다.
한지원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 성장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일자리 확대 정책들에 대해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오남용 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가 이 정책들에서 비난 받는 이유는 이러한 정책을 내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양두구육적이었고 결과적으로는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은 실질 최저임금 인하와 노동자계급의 전반전 실질임금의 인하, 소득의 기반이 되는 복지정책의 정체, 물가인상, 특히 주택가 폭등과 부채급증 등 노동자와 민중의 전반적인 빈곤의 증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주장했듯이, 노동자들과 민중의 전반적 빈곤과 상태 악화는 자본주의 이윤과 착취체제에서 필연적이다. 자본의 성장과 이윤확대와 노동자 민중의 임금 및 소득, 상태는 적대적이고 반비례한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이 자본주의 법칙을 부분적으로 완화시키지 못한다면 성장이 분배를 향상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이 적대적 법칙이 필연적으로 관철되는 것은 새 기계와 생산방식의 도입, 노동자들 내부의 경쟁의 격화, 인플레이션 등으로 임금인상 효과 보다 더 지배적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인상과 복지 확충 투쟁이 필요하면서도 이 착취체제를 철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실업정책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내에서 정권의 실업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업은 만성화 된다. 고용 없는 성장은 필연적이다. 자본이 규모를 확장하고 투자를 점점 더 늘려도 자동화, 기계화, 합리화 등으로 고용규모를 상대적, 절대적으로 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신기계 도입은 노동시간 단축과 위험한 노동의 해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업과 노동시간, 노동강도의 증가, 노동자들의 개인적, 집단적 저항력의 약화를 야기한다.
자본 간 경쟁의 법칙은 최소한의 노동자 고용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내도록 자본을 부추긴다. 여기에 자본의 위기, 공황 시에 대량실업은 더 만연하게 된다.
비정규직 확대 역시 비용을 절감하고 노동자들을 자본의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유연화)하고, 노동자들의 저항을 약화시키려는 자본의 필요, 자본주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정권의 의지, 정책을 넘어서는 문제다. 게다가 정권은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집행위원회다. 문재인 정권은 노동존중이라는 거짓 수사를 내걸고 사회적 대화라는 기만으로 노동자계급 내의 관료들을 포섭하고 노동자 내부를 분열시켰으며 노동자들을 환상과 기대에 빠뜨림으로써 저항력을 약화시켰다. 이를 통해 자본의 이해를 효과적으로 관철시켰다. 코로나 방역 조치를 명목으로 한 기본권 침해도 자본과 권력의 무기가 되었다.
과학적, 진보적, 당파적 인식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이렇게 현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 반대 심지어 때로는 맑스주의 수사를 내걸면서도 정반대로 나아갔다. 한지원은 문재인 정부를 우경적 관점으로 비난하면서도 ‘사회적 대화’를 결론적으로 강조하면서 문재인 정권이 추진했던 반노동적이고 기만적인 정책과 합치되면서 자본의 주구가 되었다. 조선일보의 사악한 의도에 따라 춤추며 계급협조주의, 노동자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개혁에 성공한 서유럽 국가들” 운운하면서 윤석열 차기 권력이 개혁을 성공시킬 것을 주문하는데 독일의 하르츠 개혁,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에서 보듯 노동개혁은 반노동자적이었고 노동운동의 약화를 추구한다. 한지원도 다른 글에서 더 내고 늦게, 덜 받는 연금개혁도 지지하고 사회보장성 강화라는 민주노총의 입장도 비난하며 ‘재정건전성’이라는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다.(저성장·고령화·불평등 시대의 연금개혁, 매일노동뉴스, 2022.02.17.)
스웨덴의 복지국가 모델을 근거로 이들 개량주의자들은 사회적 타협을 노동운동의 대안으로 내세우는데, 한국대사와 스웨덴 대사, 스웨덴 노총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스웨덴노총 부위원장은 “노조할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파업하고 투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구어블린 부위원장은 이 대사에게 “우리라고 대화만 하는 것이 아니다. 1938년 살트훼바덴 협약이 타결되기까지 40년가량 지속적으로 파업하고 투쟁했고 결국 사용자들이 대화테이블에 앉아 대화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 결국 합의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스웨덴의 복지체제조차도 이처럼 스웨덴 노동자들의 줄기찬 투쟁과 1938년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스웨덴 인근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발전한’ 유럽국가의 노동자에게도 정치적 대안이 되었던 쏘련 사회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유럽, 서유럽의 계급타협 체제는 쏘련 사회주의 해체와 유럽 노동자계급 투쟁의 약화, 사민당 정권의 우경화 등으로 급격하게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다.
그러나 한지원은 이 글에서 단 한 번도 투쟁과 노동자들의 권리, 노동악법 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마치 입각한 정부관료라도 된듯, 윤석열 정부에 노동개혁을 성공시켜 달라는 당부와 조언만 하고 있다.
사회의 진보와 연대에 복무한다는 진보단체인 사회진보연대와 한지원은 왜 이토록 변절 수준으로 정치적으로 타락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해체 경험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전면 부정하고 현존 사회주의에 적대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혁명적인 정치적 전망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착취 체제의 포로가 됐다. 반제국주의 관점을 상실한 채 ‘신자유주의’ 반대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보적 발전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과 기층 노동자 민중에 대한 신뢰의 결여, 엘리트주의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주지하듯, 가장 극렬하고,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퇴보적인 윤석열을 지지하고 그 정치적 타락상을 조선일보라는 반동매체를 수단으로 확인함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반공 반북, 친미 사회진보연대의 반동적 타락상은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을 준다. 사회진보연대를 준열하게 규탄하자! 사회진보연대의 정치적 타락상의 원인을 발본적으로 규명하자!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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