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2021년 전국노동자대회에 부쳐! _ 분단의 벽을 뚫고 착취와 억압을 분쇄하여 해방세상으로 나아가자!

전태일 열사가 1970년 11월 13일 분신했으니 그로부터 이제 5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파쇼권력 하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목숨을 던졌던 열사의 분신 이후 반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땅 노동자 민중의 삶은 근본적으로 나아졌는가?

그때와 비교해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자본주의에 어떻게 해서든지 흠집을 내고 폭로, 타격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가진 관념적 ‘급진파’들이 세상의 변화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인가? 세상물정 모르고 19세기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기 철지난 ‘착취이론’으로 독단과 독선에 빠져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난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그때에 비해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그래도 적어도 춘궁기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으로 들로 먹을거리를 찾아다니지는 않는 것 아닌가? 심지어 노동운동을 한다는 어떤 사람조차도 “노동자계급의 임금·복지·노동조건은 향상됐다. 그 결과 한국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바뀌었다. 착취의 쇠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던 무산계급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처지로 안정됐다”며 자본과 권력과의 “나눔, 양보, 타협”을 주장했다. 노동운동을 하다 권력자가 된 어떤 인사는 전태일 열사의 “풀빵 나눔” 정신을 이야기하며 정규직의 양보와 사회적 타협을 주장했다.

1980년대의 제법 오래된 이야기지만, 한때 유명한 진보적 학자로 불렸던 어떤 이는 한강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가리키며 “저 도시의 불빛을 보십시오. 저것이 어떻게 신식민지입니까”라며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상에 취해 자본주의 사회를 미화하고,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 지배조차 식민지 조선을 근대화 시켰노라고 미화하였다.

이 말대로 “조국은 현대화 되었다”, “이게 다 박정희 덕이다”라고 외친다. 심지어 ‘억강부약’, ‘대동세상’을 외치는 여권의 대선주자도 ‘성장회복’을 주장하며 무덤에서 박정희를 불러내고 있다.

박정희 시대인 1964년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는데, 지난 달 10월 한국 수출액은 555억5천만 달러(약 65조원)에 달하고 영국을 제치고 세계 수출8위의 수출대국이 되었다. 삼성전자만 보더라도 올해 3분기 74조억 원, 영업이익 16조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2021년 대한민국은 고도성장을 하고 엄청난 변화를 했다. 이미 25년 전에 ‘부자클럽’이라고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여 “받는 국가에서 주는 국가”로 변모하고, “한국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는 영국·프랑스·일본과 비슷”하다는 복음의 선전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쯤 되면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롭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21세기 ‘아 대한민국’ 찬가를 다시 부를 정도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1970년대에 비해 박정희 시대에 비하면 노동자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들의 삶이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처지”가 된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 것은 권력과 자본의 시혜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열사들의 희생과 피눈물 나는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과 진보적 지식인들, 민주인사들, 청년학생들의 투쟁이 있어서 가능했다. 국가보안법의 하의 ‘민주주의’지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새우꺾기’ 같은 인권침해가 여전하지만, 대외적으로 고문이 근절되고 오늘날 민주주의도 일부 향상됐는데, 그마저도 피를 먹고 자라났다.

그런데 오늘날 누구는 박정희를 소환하고 누구는 전태일을 “나눔과 타협”의 상징으로 자기 멋대로 소환하는 시대에 우리 노동자들은 전태일 51주기를 맞아 다시 “열사정신 계승”을 이야기하고 1990년대 초 노태우 시절에 나왔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평등사회” 건설 주장을 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번영과 인민대중들의 가중되는 빈곤과 중대재해, 실업, 파산의 고통

먼저 1970년대 박정희 시대와 비교해 2021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시기를 비교하는 건 노동자 민중을 과거에 잡아두고 현실을 외면하는 노예로 취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 음식물 남기는 것에 취해 박정희를 소환하고 ‘아 대한민국’을 다시 불러댈 때가 아니다.

앞에서 어느 진보적 학자가 한강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이야기하고 조국의 발전상에 취해 우익으로 변절한 사례를 이야기 했는데, 그 세상물정 모르는 책상머리 지식인은 그 불빛 아래서 저임금 장시간, 야간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보지 못했다.  ‘아 대한민국’ 찬가가 광주학살의 피가 마르기도 전인 1983년에 발표돼 초현실적인 노래로 전두환 파쇼권력 하 대한민국 현실을 역으로 고발했듯이, 2021년에도 경제강국 대한민국을 ‘헬대한민국’이라 부르며 적나라한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1800년대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착취이론에 불과하다고 폄하를 받고 심지어 자본가들의 적대를 불러오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사상을 만들었던 맑스는 1849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주위의 집들이 한결같이 작다면, 그 집은 주택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작은 집 옆에 궁전이 하나 솟아 있다면, 그 집은 오두막으로 오그라들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행로 속에서 그 작은 집이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옆에 있는 그 궁전이 동일한 정도로 혹은 더 큰 정도로 높이 치솟는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의 거주자는 자신의 사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더욱더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짓눌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임금노동과 자본)

이처럼 우리의 욕구, 요구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물질적, 문화적 요구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하며 발전한다. 우리의 욕구가 사회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비해 우리의 문화적 물질적 삶이 전반적으로 나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그때에 비해 불평등, 사회양극화는 훨씬 더 심해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의 착취와 억압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의 결과로 인류역사상 최고의 거대한 문명의 발전을 이룩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치솟아 오르고 있고 물질생산력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과학기술 발전은 자동화, 합리화를 낳으면서 대량으로 노동력을 폐기하고 대량해고 만성실업 사회를 만들고 있다. 비정규직이 점점 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불안정 노동사회 사회를 만들고 있다.

재벌들과 그 일파들, 일가족들은 전 사회의 부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북을 ‘폐쇄경제’로 비난하지만, 북은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도 자력갱생의 기치를 내걸고 자주적으로 살아가는데 비해, 21세기 초개방된 이남사회에서는 해외자본이 국내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고 요소수 대란에서 보듯, 언제든지 세계경제의 부침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탈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우리는 전태일 열사가 권력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소환되고 전태일 기념관이 관의 지원으로 만들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전태일 다리를 경찰이 사면에서 포위하고 열사를 추모하며 투쟁하는 비정규직 집회가 탄압당하는 그런 기묘한 시대를 살고 있다. ‘노동존중’을 내세워 당선된 ‘촛불혁명 정부’ 하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출신 총연맹 위원장은 노동3권의 권리를 파괴당하고 구속되고,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섰던 활동가들이 수십 년씩 검사구형을 받고 중범죄자가 될 위험에 처해 있는 그런 이상한 사회를 살고 있다. 코로나는 만민평등한 질환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약자에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사회적 재앙은 대량 정리해고와 만성화된 실업과 중소상공인들의 파산으로 그 자연적 질병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코로나방역조차도 만민평등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리를 봉쇄하고 저항을 통제하는 권력의 이중적인 잣대로 변해버렸다.

맑스는 궁전과 오두막 사례를 들었는데, 한쪽에서는 수십, 수백채 주택을 보유하는 자들과 태어날 때부터 수채의 주택을 상속 받고 금수저로 태어나 평생 금수저로 운명이 정해지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 반대편의 청년들은 고시원을 전전하고 있으며 대다수 국민들은 전세난에 시달리고 있다. 천정부지로 오른 주택가에 절망하고 분노하고 있으며 평생을 은행의 채무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 노동자 민중이 안고 있는 주택문제는 주요하게는 토지문제다. 토지의 사적소유가 존재하고 토지로부터 지대수취가 가능하고 거주공간인 주택이 상품으로 매매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을 포함한 거대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를 손에 넣고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다.

대장동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시청이 판을 깔아주고 그 위에서 산업재해 명목으로 권력자 자식은 50억을 받아갔다. 투기자들은 수백억, 수천억 이익을 누리고 그 막장 투기판에는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 같은 법조 브로커 일당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투기적 이익을 나눠먹고 있다. 그런데 전국 곳곳, 특히 인구와 생산과 행정이 집중되는 거대 도시에는 수십, 수백의 대장동들이 있다. 용산에서의 학살은 바로 그 대장동들에서 벌어졌던 참극이었는데, 여전히 주거문제는 계속 심화되고 있고 철거민들의 수난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제 부역자들은 반공주의 투사, 미제의 개가 되고, 소작민들을 수탈했던 지주들은 자본가들로 변신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며 권력과 부를 대대손손 누렸다. 그 반역의 역사적 전통을 따라, 노태우 군사 파쇼 권력 하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앞장서며 “1991년 6월 서울지방검찰청 11층 특별조사실에서 잠 안 재우기를 담당하셨던 검사”였던 곽상도는 민간권력의 시대에 거대한 권력과 부를 누리는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고문검사 출신 곽상도의 아들 곽병채(31세)는 대장동 개발 투자사 화천대유에서 퇴직금 50억 원을 받고 이중 44억이 산업재해 명목으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정신적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반면에 오늘날 청년들 대다수는 만연한 실업에 허덕이며 오늘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으며 그중 다수는 구직노력을 포기하여 실업자 통계에도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고통 받고 있다. 청년들은 헬대한민국 하에서 3포, 4포, 5포도 모자라 절망하고 급기야는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자가 속출하고 있다. 이제 고독사는 가난한 노년들만의 몫이 아니라 청년들도 고독사로 죽어가고 있다. 40대, 50대 들의 고독사가 노인들보다 더 많다고 하는데, 그들 대다수의 고독사 뒤에는 실업과 가정의 해체가 있었다.

특히 우리가 절망하고 참을 수 없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름다운 청년’ 노동자들이 연이어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는 참담한 현실 때문이다. 구의역에서 김군이 중대재해로 사망하고 외주화가 청년을 죽였다고 사회적 공분이 일어났지만, 그 후에도 청년 노동자 김용균은 1인 작업을 하다가 중대재해로 끔찍하게 죽어갔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외쳤던 정권 하에서 비정규직은 확산일로에 있고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산재사망의 집중 노출되면서 제2, 제3의 김용균들이 생겨나고 있다.

고득학교 실습생 홍정운 군의 산재사망 사례 역시 참담하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 업체는 실습생의 허리에 무거운 납덩이를 달게 해서 강제잠수를 시켰다. 1년에 수십만 원에서 최대 수백만 원 드는 전문 잠수사 비용을 줄이기 위해 천금과도 맞바꿀 수 없는 고귀한 청년을 끔찍하게 수장시켰다. 특성화고 출신 형제 노동자들 중 형은 중대재해로 손가락이 잘리고 동생은 사망하는 비극적 사례도 있었다.

과연 우주 전부와 같이 소중한 젊은 생명들이 잇따라 중대재해로 죽어나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그래도 산업자본주의 초기 아동노동이 사라졌으니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냐고 할 수 있겠는가?

고등학교 실습생들의 중대재해 사망과 청년노동자들의 사망은 일부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도 세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참담한 기사에서 고발했듯이, 청년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은 전체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이다. 자본가들과 부유한 자들이 권력과 부를 대물림 하는 뒤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중대재해를 대물림하고 비정규직을 대물림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내몰리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에게는 언론이 앞장서서 악랄한 비난을 퍼부어대고 있다.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은 착취와 억압사회를 영구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적대시하는 자본가들의 노동자 적개심이 사회 전체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권력교체냐 권력연장이냐, 아니면 분단과 착취 철폐로 나아갈 것인가?

“1년만 기다려 달라”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잠재우며 달래 왔던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이제 6개월 여도 채 남기지 않고 끝나가고 있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까지만 더 기다려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5년만 더 권력을 연장시켜주면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줄 테니 한 번만 밀어달라고 할 텐가? 이명박과 박근혜의 후예들은 정권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며 자기들한테 권력을 달라고 외치고 있다.

참으로 구역질나고 파렴치하고 복장 터지는 일들이 거리낌없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형태를 4지 선택의 다당제라고 하는데, 언론에서는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민주/국힘 양당의 대선예비 후보선출만을 집요하게 보도하며 십 수 명의 대선예비주자들, 민주 국힘 양당들 중에 고르라고 강요하고 있다. 다른 선택지는 없으니 최악이 싫으면 차선이나 차악을 고르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내쫓고 들어선 현실적인 선택의 결과물인데 오늘날 최악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국민의힘조차도 문재인 정권의 실정을 들어 정권교체를 주장할 지경이 되었다. 이는 사실 새로운 정치상황이 아니다. 오늘날 비극적 죽음으로 망각하고 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조차도 사실은 노무현 정권의 실정의 반사적 대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둘로 압축되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양당 후보들 중 과연 오늘날 노동자 민중이 처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선명하게 내걸고 싸우고 해결하겠다는 자들, 정치세력들이 있는가?

노동악법을 폐기하고 노동3권을 보장하겠다!

비정규직을 철폐하겠다!

정리해고를 없애겠다!

죽음의 외주화를 없애고 누더기가 된 중대재해법을 실질적인 중대재해 기업살인법으로 고치겠다!

저임금을 없애고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을 보장하겠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여 생활임금을 보장하겠다!

국가정보원을 해체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겠다!

사드를 완전 철거시키겠다!

미군을 철수시키고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복지비용으로 전용하겠다!

미국 눈치 보지 않고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판문점 선언과 평양선언을 이행하겠다!

거주용이 아닌 주택을 전면 몰수하겠다!

주택 무상화, 의료 무상화, 보육 무상화, 교육 무상화를 실시하겠다!

정권연장이든, 정권교체든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 현 시점에서 이 둘은 서로 대립적인 정치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지겹도록 경험했듯이, 상투적인 수준에서의 착취자, 권력자의 교체에 다름 아니다. 과연 지금 유력한 여야의 대선 주자들 중 누가 권력자가 된들 과연 이러한 노동자 민중의 절박한 요구들이 해결되겠는가? ‘적폐청산’ 운운하지만 이러한 요구들이 우리사회의 구조적, 역사적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척결하지 않고 가능하겠는가? 이윤 중심의 사회, 착취체제, 재벌체제를 유지하고, 북을 적대시하면서 한미동맹을 우상숭배하고, 분단모순이 지속되는데 이러한 요구들이 실현가능하겠는가?

결국 이러한 절박한 과제들은 역사의 진보적 발전에 노동자 계급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듯이 진보적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진보적 농민들, 청년들, 지식인들이 굳게 손잡고 해결해야할 과제들이다.

앞서 한 ‘노동운동가’는 “북유럽 수준의 복지국가”로 나아가자고 하는데, 과연 ‘헬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을 뚫고 어떻게 ‘복지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그는 “나눔 양보, 타협”을 외쳤는데 과연 투쟁 없이 그러한 것들을 쟁취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것은 이 주장은 우리운동의 근본목표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정치적 전망의 문제다.

북유럽 타협체제라는 것이 그 나라 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과 제3 세계를 착취, 수탈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일시적으로 얻어진 것인데, 북유럽에서도 그러한 타협체제는 무너졌다. 사민주의 정권들은 노동자 민중을 배신하여 정권을 잃어버리고 정권을 잡은 사민당, 노동당, 사회당들은 긴축정책에 나서면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부르고 있다.

자본주의의 공황과 실업문제는 여전하다. 영국에서 청년들은 폭동에 나서고 있고, 프랑스, 독일에서의 노동자들이 새로운 결전태세를 다지면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을 내걸었던 우리 운동이 정리해고와 파견법을 수용하고 분열되고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듯이 스웨덴 모델은 한국에서 파탄 났다. 우리 운동이 나아가야할 목표를 “북유럽 수준의 복지국가”로 삼으면 복지국가는커녕 저임금, 장시간 노동, 무복지의 자본천국을 영속화 하게 된다.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21년 전국노동자대회 구호로 제출된 ‘불평등 세상’은 에둘러 표현되고 있지만 바로 자본주의 사회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그 특수한 역사적 조건으로 인하여 분단되어 있고, 미제국주의가 ‘점령군’으로 있는 반공반북 친미 숭배사회다. 반공반북은 해방 이후 대규모 유혈학살과 국가보안법으로 인하여 북사회주의의 진실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게 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의 정치적 전망을 왜곡하고 질식시키고 있다.

‘평등사회 대전환’은 재벌들의 지배와 분단과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면서 해방의 조건을 실현하고 착취와 억압의 자본주의 사회를 철폐하고 노동자 민중의 완전한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분단의 벽을 뚫고 착취와 억압을 분쇄하며 완전한 해방세상으로 나아가자!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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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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