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용서받지 못할 내란 주범, 살인마 노태우를 화려하게 복권시켰는가?
전두환과 함께 노태우는 군부요직에 있으면서 1979년 12.12쿠데타 내란주범이었다. 노태우는 군사반란 당시 제9보병사단장으로 있으면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쿠데타에 앞장섰다. 다음날 쿠데타에 저항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부)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내란을 성공시켰다.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회의에 참석하는 등 광주 학살에 직접 가담했다.
이후 노태우는 광주에서 무참하게 자행한 학살의 피가 마르기도 전인 1980년 8월 전두환에 이어 보안사령관 자리를 차지하여 5공 군사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노태우는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에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을 앞세워 시가 지지행진을 했는데, 이 행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노태우는 일찍이 박정희 군사 파쇼 권력이 탄생하는데도 일조했던 반란자기도 했다.
노태우는 군사파쇼 독재자 박정희 사망 이후 꽃을 피우던 민주주의와 민중의 자주적 통일열망, 노동자의 권리확보에 대한 기대를 짓밟고 군사파쇼 체제를 연장시킨 신군부 주범이었다. 노태우는 무엇보다 신군부의 내란 쿠데타에 저항하는 전국적인 투쟁을 압살하고 광주를 고립무원의 도시로 만들어 대량학살한 학살주범이었다.
신군부 배후에는 미제국주의가 있었다. 쿠데타를 승인하고 배후 조정하여 광주에서의 무참한 학살로 반도 이남에 반공체제를 연장하고 지배하고자 한 것은 ‘점령군’ 미제국주의였다.
노태우는 전두환이 권력을 잡고 나서는 5공 권력 핵심부에서 내무부장관으로 민중탄압을 진두지휘했다. 내무부 장관은 국내 ‘치안’을 담당하는 부서인데, 이로써 노태우는 군사파쇼 권력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을 때려잡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앞장섰다. 이후에는 전두환 권력이 만든 민주정의당 총재를 지냈다.
노태우는 1980년대 내내 불타오르던 광주학살 진상규명, 미군철수, 자주통일, 민주주의 요구, 노동자의 권리를 잔인하게 짓밟는데 앞장섰다. 노태우는 노동자 민중의 대대적 저항으로 미제의 주구 신군부 군사파쇼 체제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6.29선언, 일명 속이구로 권력 전면에 나섰다. 노태우는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의 후보단일화 실패와 분열, 1987년 11월 29일 제13대 대선 18일을 앞두고 전두환의 안기부가 조작한 것으로 알려진 KAL858 사건 의혹과 북풍공작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안기부는 이 사건이 김현희를 비롯한 2인조가 칼858기에 폭발물을 설치하여 공중폭발한 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폭파잔해나 115명 탑승객·승무원 시신, 유품 1점도 나오지 않은 전대미문의 실종사건이었다.
칼기858기 폭파 주범으로 알려진 김현희가 김포공항에서 압송되고 있다. |
칼기858유족회와 진상규명 단체에서는 지금까지도 이 사건이 희대의 조작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 실제로 KAL858기 가족회는 지난 2006년 11월 15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KAL858기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하고 그로부터 6개월 뒤인 2007년 7월 11일 진실화해위원회는 KAL858기 사건에 대한 조사개시 결정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칼기 유족회와 진상규명 단체의 성명서다.
지난 20년 동안 KAL858기 사건의 실종자 가족들은, 오직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발전위)에서 7대 조사대상 사건 중 하나로 선정되어 사건의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바다 속 바윗덩어리를 KAL 858기의 동체라고 발표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고, 사건의 핵심인 김현희는 만나보지도 못한 채, 20년전 안기부가 발표한 수사결과를 그대로 베낀 중간발표를 했을 뿐이었다. 큰 기대와 신뢰를 보냈던 가족들과 시민사회는 진실을 외면하는 국정원에 다시한번 절망하고 말았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개시결정의 근거로 삼은, 핵심 의혹들은 ① 이 사건에 안기부가 사전인지 또는 개입하였는가 ② KAL858기가 사라진 원인은 무엇인가: 폭파인가 추락인가 아니면 실종인가 ③ 이 사건을 1987년 대통령선거에 활용하였다는 ‘무지개 공작’의 실체는 무엇인가 ④ 실종자 가족들이 정권에 의해 반북선전 차원에 활용되고, 공안기관의 감시와 미행 등 정신적, 물리적으로 인권침해를 당했는가 ⑤ 이외 김현희의 북한 공작원 여부(어린시절 사진, 조선로동당증, 가족관계, 행적, 자필진술서에 북한식 표기로 쓰여지지 않은 점 등)와 평양 출발 이후 그의 행적을 둘러싼 의혹 등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이중, 이미 국정원 발전위의 중간발표를 통해서도 그 실체가 드러난 ‘무지개 공작’은, 19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로 인해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이 위태롭게되자, 노태우 후보를 13대 대선에서 당선시키기 위하여, KAL858기 실종사건을 조직적으로 이용한 ‘천인공노’할 사건이다. 자국민 100명이 넘게 희생당한 참혹한 비극을 정권 재창출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한일이다.(KAL858기 가족회/KAL858기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KAL858기사건 조사개시 결정을 환영한다!”, 2007년 7월 11일)
칼기 사건에 노태우가 얼마나 개입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태우는 이처럼 115명이나 되는 칼858기 탑승객들이 희생되는 이 잔학무도한 정치공작 사건의 최대의 수혜자였다.
6공화국의 노태우는 ‘물태우’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5공 전두환 파쇼 권력을 연장시키고자 노동자 민중에 대한 야만적인 백색테러독재 체제를 지속했다.
“공과 과” 운운은 군사파쇼 체제를 미화하여 현 억압체제를 정당화 하는 수단
1990년에는 동유럽 사회주의와 쏘련 사회주의가 해체되던 시점이었지만, 노동자들은 노태우 정권의 파쇼 만행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 현대중공업에서는 어용노조의 직권조인에 맞서 노태우 쿠데타일인 12월 12일부터 128일 투쟁을 전개했다. 이 공장 점거 투쟁 과정에서 노조파괴를 위한 1.8 테러사건과 2.21 식칼테러사건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1989년 3월30일 ‘아침이슬’이라는 작전명으로 명명된 공권력 진압작전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가두에서 투쟁을 이어가다가 파업지도부 위원장이 경찰에 출두하던 4월10일경 마무리 되었다.(조돈희,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기획] 노동자 고공농성의 역사와 의미②, 참세상, 2009.07.13.)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역사에 전면에 나선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조직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이 출범했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셋이 작당하여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자당이 창당한 날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 창립대회장에 경찰병력을 난입시켜 전노협을 해체시키고자 획책하고 130여 명의 전노협 지도자들을 구속 수배하는 탄압을 자행했다.
노태우 정권은 또한 1990년 4월 3일 방송 장악을 위해 KBS 방송민주화에 호의적이었던 서영훈 사장을 비롯해 윤혁기 부사장 등 임원 및 간부 4명을 해임시키고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낙하산으로 임명했다. 노태우 정권은 이에 저항하던 KBS조합원 및 사원 117명을 백골단을 동원해 강제연행해 갔다. 노태우 정권은 정권에 항의하여 방송 민주화를 위해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고 또다시 333명을 싸우던 경찰측은 밤 11시 45분에 ‘여의도 진압작전’이란 명칭으로 KBS 농성 강제해산에 돌입해 50여분 만에 본관 2층 로비에서 사원 333명을 강제로 끌고 갔다. 이 투쟁으로 14명의 노조 간부들이 구속됐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4월 25일부터 파업을 벌이던 현대중공업에 28일 새벽 6시 경 1만 5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진압작전을 개시하여 철야 농성 중인 1천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노조 사무실을 비롯해 현대중공업 주요 시설을 장악했다. 경찰 진압으로 현대중공업 노조 간부와 활동가들 70여 명은 82미터 높이의 골리앗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저항을 지속했다. “경찰이 강제해산에 나설 경우 분신ㆍ투신하겠다”며 완강하게 고공농성을 사수했다. 공권력 투입과 골리앗 농성 중이던이 5월3일까지 가두시위 관련 연행자가 730명을 넘어설 정도로 탄압은 극에 달했다. 골리앗 고공농성은 5월 10일 자진 농성 해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노태우 정권은 이에 앞서 1989년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던 교사 1천527명을 비롯해 89년 전후 사립학교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200여명을 해직시키고, 200명이나 되는 교사들을 시국사건 관련 임용제외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태우 정권은 1980년 6월에는 해고자 복직서명을 주도한 전교조 교사 1천여 명을 중징계하는 파쇼적 만행을 자행했다.
6공 시절 4,573명의 노동자들이 노조활동 관련해 강제해고를 당했다. 이는 하루 3.1명꼴이고 한 달 93.3명 꼴이다. 부당해고자들 중 복직된 노동자들은 3.9프로인 177명에 불과하다.(전노협, 전국노동자신문 57호, 1992년 5월 6일자 참고) 이것만 보더라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노동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탄압을 당했는지 잘 알 수 있다.
1988년 당시 779명에 달하던 양심수는 노태우 정권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89년에는 1,515명, 1990년에는 1,812명, 1991년 1,352명 등으로 증가해 6,614명에 달하며 감옥은 양심수로 넘쳐났다. 특히 1991년 4월은 노태우 정권의 야만적 탄압이 극한에 달한 시점이었다. 1991년에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분신정국’, 노태우 군사파쇼 체제의 야만적 탄압에 저항하는 일련의 극한투쟁이 전개됐다. 이 시기 동안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3명이 타살되고 8명이 분신자살하였다. 그런데 ‘분신정국’이라는 용어는 노태우 군사파쇼 정권과 언론들이 ‘5월 투쟁’의 정당성을 왜곡하고 분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어였다. 물론 이것이 모략적 성격을 지니기는 하지만 당시의 극한적 탄압의 양상을 부분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강경대 추모사업회) |
이어서 노태우 정권의 파쇼 통치와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항의하여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 가천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5월 18일 노동자 이정순 과 같은 날 전남 보성고 학생이었던 김철수, 5월 22일에는 정상순 열사가 잇따라 분신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5월 25일에는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경찰의 진압을 피하다 압사사고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991년 2월 구속돼 강경대 치사사건에 대해 옥중 단식농성하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5월 4일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다가 6일에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미 박창수 열사는 구치소에 구속되었을 당시에 ‘전노협 탈퇴’를 겁박하는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수차례 고문을 당하기도 했는데 박창수 열사의 죽음은 안기부에 의한 타살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극한적인 투쟁으로 정권이 위기에 처하고 제2의 6월 항쟁으로 발전할 기세를 보이자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일으켜 궁지에서 탈출했다.
노태우는 한편 재임 기간 중 한편 재벌들로부터 4,500억원 ~ 4,6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 비자금 중 20억을 김대중이 받기도 하여 파문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태우는 1990년 수서지구 택지 개발 과정에서 정태수 당시 한보그룹 회장으로부터 150억 원의 비자금을 받고 택지 일부를 특별분양하는 뇌물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노태우 부인 김옥숙의 사촌 동생인 박철언은 당시 ‘6공의 황태자’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다가 슬롯머신 업자로부터 6억 여 원의 뇌물을 받고 구속되기도 했다.
노태우의 “공과 과” 운운하며 유일한 치적이라고 하는 ‘북방외교’ 본질은 무엇인가? 노태우 군사 정권의 ‘북방외교’는 대외적으로는 “북방 외교를 실현해 북한을 포위하고 고립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대내적으로는 8.15 남북 학생 회담 등 군사독재에 저항하면서 불타오르던 통일운동을 체제내화 시켜 제압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서중석 : 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와 남북 학생 회담에 대한 요구가 분출하자, 노태우 정부는 1988년 6월 2일 소위 창구 단일화 조치를 발표했다. ‘통일 논의를 적극 개방하고 건전한 통일 논의의 활성화를 뒷받침하되, 대북 제의나 접촉의 창구는 정부로 일원화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속에서 남북 학생들이 실무 회담을 열겠다고 한 6월 10일 전날인 9일, 전국 25개 대학의 학생 1만여 명이 6·10 남북 학생 회담 성사를 위한 100만 학도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6월 10일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출정식을 열고 판문점으로 가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봉쇄됐다. 학생들은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890여 명이 연행되고 3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김덕련 전 기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독재 타도’ 외침, ‘분단 철폐’ 함성으로 번지다”, 프레시안, 2017.04.16. 기사 참고)
노태우 정권 시절에 자행된 파쇼만행에 대해 짧은 글로는 다 담을 수 없다. 사과 한 마디로 쿠데타와 광주 학살에 면죄부를 받을 수도 없지만, 노태우 아들이 몇 차례 광주에서 조문을 하기도 했지만 자기 입으로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광주시민들은 군을 경찰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군은 후퇴할 줄 모르므로 시민들이 물러서지 않는 한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다” (노태우 회고록 중에서)
전두환 씨에 대해서도 두둔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태 진압의 1차적 책임은 광주지역 계엄분소장에게 있었다면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참모로서 조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진압작전과 관련된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12.12 사태는…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 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 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 중)
(KBS뉴스, “아들 ‘대리 사과’에 열어본 10년 전 노태우 회고록”, 2021.10.27.)
이처럼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전두환과 12.12쿠데타를 옹호하고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고 있다. 노태우는 광주 학살 진상도 은폐하고 있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노태우는 광주학살 배후였던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침묵했다. 광주학살뿐만 아니라 칼기 사건 의혹과 노태우 정권 시절에 일어난 백색테러, 학살, 고문, 조작, 인권유린, 노동자탄압에 대해 한 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천수를 누리다가 사망했다.
노태우의 공은 오직 전두환에 이어 파쇼 테러 체제를 유지시킴으로써 친미 반공주의, 반민중적 체제를 공고하게 한 것이다. 노태우의 “공과 과” 운운하는 가당찮은 논리는 노태우 정권 시절 희생당하고 고초를 겪은 수많은 노동자 민중을 기만하고 군사파쇼 체제를 정당화 하는 짓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여전히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을 내세워 간첩조작을 일삼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며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을 탄압하는 현 억압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다.
노태우 국가장은 문재인 정권의 본질을 새삼 확인시켜준 폭거
노태우는 죽음으로써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한 번에 정리하고 화려하게 복권했다. 노태우는 죽어서 산 것이다. 누가 살인마 노태우를 정성껏 예우하며 영생하게 했는가? 누가 노태우의 역사적 과오를 복권시켰는가?
두 말할 것 없이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한 문재인 정권이다. 윤석렬의 전두환 옹호발언은 권력연장 차원의 정략에서 비난하던 자들이 전두환과 같은 내란주범 노태우를 국가장으로 예우하여 복권시켰다. 이로써 노태우는 문재인 정권이 열어준 공식석상에서 화려하게 복권했다. 노태우의 복권으로 전두환도 복권되고 쿠데타와 민중학살에 정당성을 가질 기회를 얻게 됐다.
노태우 정권의 국무총리였던 노재봉은 “노태우, 전두환 등 정규육사 1기생들에게) 한국 정치는 국방의식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인식됐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통치기능에 참여하는 계기였고, 1기 장교들의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각하와 그 동료들”은 “목숨을 담보로 투철한 군인 정신과 국방 의식을 익혔을 뿐 아니라, 국민의 문맹률이 거의 80%에 해당하던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현대 문명을 경험하고 한국에 접목시킨 엘리트들이었다”고 추도사를 했다.
그런데 노태우를 찬양하는 노재봉의 추도사나 27일 “고인께서는 1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국가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번 장례를 국가장으로 하여 국민과 함께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예우에 만전을 기하겠다”라는 국무회의 발언이나 하등 다를 게 있는가.
“전두환 정권도 공과가 있고, 5·18과 쿠데타만 빼면 괜찮은 정권이었다”는 윤석렬의 가당찮은 전두환 옹호 발언과 노태우에게 국가장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전두환에게도 복권의 기회를 열어준 문재인 정권이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에게는 오직 대선 정권연장을 위한 정략적 의도만 있지 역사의 진실을 밝힐 의지도, 반역의 역사를 청산할 의지도, 역사를 새롭게 열 계획과 전망도 없었다.
칠레의 잔학한 독재자 피노체트조차도 제대로 역사의 준엄한 단죄를 받지는 못했지만, 죽기 전 8년간은 가택연금과 석방, 기소와 기각을 당하면서 말년을 보내다 사망했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정객들은 전두환에 대한 비난 역시 변죽만 울렸지 실제 재산몰수, 재수감, 학살진상규명 같은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고 미적대다가 전두환이 말년에 골프나 치러 다니며 안락하게 천수를 누리게 하고 있다.
임기 내내 단 한 명의 양심수도 석방하지 않고 중대범죄자 이재용을 석방시켜 이건희의 삼성 후계자로 공식 인정한 문재인 정권에게 남아 있는 또 하나의 과제는 “국민통합” 운운하며 퇴임 전에 이명박과 박근혜를 사면하는 것이다.
이로써 해방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미제와 그 주구 친일, 친미 반공주의자들이 이 땅의 통치자, 지배자들이 되었던 반역의 역사, 단죄하지 못하는 역사는 다시 연장되고 공고화되게 되었다. 문재인 정권은 신적폐로 구적폐 국민의힘을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반역사의 중대한 일부이다. 문재인 정권은 때로는 대립하고 싸우는 체하면서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후예인 국민의힘과 함께 손잡고 이 친미 반공 부르주아 체제를 영속적으로 수호하는 버팀목이다. 노태우 국가장은 그 진실을 새삼 확인시켜줬던 난폭한 폭거였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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