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생애
_ 김남기
2013년 10월 4일 베트남에서 한 노장이 10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베트남 정부는 국장으로 온 국민의 존경과 애정을 모아 장례를 치렀고, 뜨거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빈소를 찾아 헌화하는 조문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길가에 늘어선 조문행렬이 2㎞ 가까이 되어 외신기자들이 취재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TV 뉴스로 방영되었을 정도다. 그의 죽음을 추모했던 이들 중에는 베트남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안경환, 「다윗의 전략으로 베트남 승리 이끌다」, 『아주경제』, 2020.03.09. https://www.ajunews.com/view/20200308211941624) 그를 추모하기 위해 유럽에서부터 베트남까지 온 이탈리아사회주의자(정황상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좌파지지자로 추정된다)도 있었다. 그는 유로뉴스(euronew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당시 우리는 거리에서 “잡 장군! 잡 장군! 호치민! 베트남은 승리하리라!”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세대와 인류전체의 희망을 대변했죠.”(「State funeral in Vietnam for war hero General Giap」, 『euronews』, 2013.10.12. https://www.youtube.com/watch?v=arEVkpCaZys&t=92s)
유로뉴스와 인터뷰했던 이탈리아인의 주장처럼,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과 서독, 네덜란드, 스웨덴,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집회가 20대 청년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당시 미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던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으며,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베트남 인민이 승리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서방의 젊은이들은 호치민(Ho Chi Minh)과 더불어 베트남의 다른 인물의 이름도 외쳤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베트남의 명장이자 20세기 최고의 명장인 보 응우옌 잡(무원갑,武元甲, Võ Nguyên Giáp) 장군이다.
보 응우옌 잡과 호치민 사진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가진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베트남 혁명 군대의 사령관이었으며, 공산당의 지도자였다. 그는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과 더불어 항일투쟁과 항불투쟁 그리고 항미투쟁을 이끌었으며, 이들과의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특히나 그는 1945년에는 베트남에서 8월 봉기를 주도하여 베트남의 군주제를 철폐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하여,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다. 또한 미국과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할 수 있도록 많은 기여를 했다. 이런 인물이 바로 보 응우옌 잡이었던 것이다. 이런 전설적인 업적을 달성한 인물이 보 응우옌 잡이기에 그의 업적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얘기해보고자 한다.
1. 초기 생애와 항일·항불투쟁
보 응우옌 잡은 1911년 8월 25일 베트남 꽝빈성에서 태어났다. 잡 장군의 외할아버지는 1880년대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프랑스 저항 운동 즉 판보이쩌우가 주도했던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이러한 배경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3살이 되던 1924년 잡 장군은 옛 황궁의 수도 후에에 있는 국학에 입학했으나, 베트남의 온건 성향의 독립운동가 판추찐의 장례식에 참여한 뒤 곧바로 급진적인 활동에 뛰어들었다.
1927년 국학에서 퇴학당한 뒤 신월혁명당에 가입했으며, 18살이 되던 1929년 신월혁명당의 동지였던 응웬반따오를 따라 하노이를 방문했다. 이후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0년 반프랑스 봉기에 참가했다.
당시 잡 장군은 옛 황궁의 수도 후에(Hue)에서 시위를 주도했다가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1933년 3년간의 감옥살이 끝에 석방된 그는 하노이 대학에서 법학(역사과에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으로 학위를 받고, 졸업 이후에는 사립학교에서 역사 교사가 됐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중국의 <손자병법>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립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응우옌 티 민 카이와 결혼했다고 한다. 또한 동료였던 쯔엉찐과 협력하여, 각종 활동 및 독립운동 사업을 진행했으며, 1938년 다시 공산당이 불법화 되면서 도피생활을 했다.
여기서 그의 처제와 부인이 프랑스 당국에 잡혀 감옥살이를 하다 목숨을 잃었고, 중국으로 가게 된 그는 1940년 응우옌 아이 꾸옥 즉 호치민을 만나 베트남 독립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371~372를 참조)
이렇게 해서 1941년 5월 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한 호치민과 더불어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을 이끌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베트민 군대를 지휘하게 됐다. 따라서 보 응우옌 잡 장군 또한 항불투쟁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베트남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1944년에는 베트민의 정규군대를 창설했으며, 1945년에는 거의 10,000명이나 되는 베트민군을 지휘했다.
창설될 당시 수십 명이었던 군대가 1만 명으로 증가한 것을 보면, 그가 군대를 양성하는 데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군대를 이끌고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치르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OSS가 그를 도왔다.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잡 장군은 OSS와 협력했으며,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자, 호치민의 부름에 따라 8월 봉기를 주도했으며, 이 8월 봉기는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발발하여 성공함으로써 단기간에 베트남 전역을 하나로 통합했다. 궁극적으로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
“나는 성공을 100%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군의 강약점을 조목조목 분석했고, 이를 우리가 여하히(의견,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찌 되어 있게) 이용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이지요.”
위의 글은 2019년 국내에 출간된 그의 자서전 『디엔비엔푸』 서문에 나오는 역자와 보 응우옌 잡 장군이 나눈 대화의 일부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20세기 최고의 명장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는 바로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대략 8년간 치른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그 전쟁을 종결시킨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를 빼놓을 수 없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성공한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디엔비엔푸 전투까지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1945년 베트남의 독립 선언 이후 강대국들은 베트남을 16도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시켰다. 북부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주둔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베트남에 입성했던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군은 철수했고, 결과적으로 과거 베트남을 식민 통치하던 프랑스가 다시 들어왔다.
1946년 2월 중국 국민당군대가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하자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입성했으며, 호치민과 프랑스측은 퐁텐블로 협상을 통해 합의를 보려했다. 그러나 1946년을 기점으로 작은 충돌이 벌어지다가, 1946년 11월 프랑스의 군함과 항공기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포격 및 폭격하여 6,000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프랑스-베트민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한 프랑스군은 1946년 12월 수도 하노이에 입성하여 베트민군과의 전투를 치르고 점령했다. 이후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를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치렀으며,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1950년부터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군을 상대로 적잖은 전투를 치렀다.
1950년 9월 보 응우옌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 부대들은 중월 국경 지역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했으며, 특히나 동케 전투의 경우 프랑스 최정예 부대인 외인부대를 포함하여, 프랑스군 300명이 전사하고 적잖은 탄약과 무기를 확보했었다. 1950년 10월 말 중월 국경 지대 전투가 베트민의 승리로 끝나면서, 베트민은 프랑스군의 중요 거점들을 포위할 수 있었다.
1951년 프랑스는 미국의 물자지원을 바탕으로 네이팜 폭탄 공습을 통해 베트민의 반격을 막아냈지만, 1952년 호아빈 전투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남부 그리고 라오스 지역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보 응우옌 잡 장군은 프랑스가 세운 괴뢰국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이를 짐작한 프랑스는 베트남 라오스 국경지대에 큰 요새 하나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인도차이나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이 된 앙리 나바르 장군(Henri Navarre)은 그해 11월 라오스 국경 산간지대에 있는 디엔 비엔 푸의 대규모 요새를 구축하고 11,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디엔비엔푸 요새를 세운 프랑스군 중 일부는 “이 요새에 겁먹은 베트민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하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망상과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현실성 없는 생각이었다.
수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프랑스군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한 보 응우옌 잡 장군은 프랑스가 세운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잡 장군은 최정예 부대와 각종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5만 명 이상의 정규군대를 동원했고, 그 외에 베트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민중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했다. 수많은 민중들이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식량과 탄약, 의약품 그리고 무기와 각종 군장비 등을 옮겼고, 또 지원해줬다. 이러한 지원하에 베트민은 프랑스 기지에서 100m나떨어진 곳 까지 비밀리에 참호를 구축했으며, 200대 이상의 대포도 디엔비엔푸 기지 사방에 있는 산속에 배치해놓았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베트민은 1954년 3월 13일 프랑스의 디엔비엔푸 요새에 집중포화를 날렸다. 베트민의 대포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고, 항공기를 통해 물자를 지원받던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에 놓이게 됐다. 물론 프랑스군은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5,000명 이상의 최정예 부대를 더 투입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또한 잡 장군의 베트민들은 대공포를 동원하여 프랑스의 항공기들을 차례대로 격파했고, 프랑스 항공기 총 64대(48대는 상공에서 16대는 지상에서)가 격추됐다.(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356쪽)
이에 따라 프랑스의 디엔비엔푸 요새는 차례대로 베트민군에 의해 함락됐고, 1954년 5월 7일 56일 간의 포위 끝에 베트민군의 위대한 승리로 종결됐다.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천재적인 전략전술을 발휘하여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를 격파했다.
디엔비엔푸에 있던 16,200명의 프랑스군 중에 2,293명이 전사하고 6,650명이 부상당했으며 11,721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반면 베트민은 23,000명 이상의 사상자(이중 8,000명에서 10,000명 이상은 전사자)가 나왔지만,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으며, 궁극적으로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1964년 당시 보 응우옌 잡 장군이 본인이 쓴 글인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 위대한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고, 이 위대한 승리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보 응우옌 잡, 강범두, 『디엔비엔푸』, (길찾기, 2019) p.501)
사진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장면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국가에서 이에 맞선 투쟁이 일어났다는 점과 제3세계 운동이 확산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에 영감을 받아 프랑스의 드골 정권에 맞서 벌어진 알제리 독립 전쟁을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룬 업적은 실로 위대한 업적이었다.
3. 베트남 전쟁과 케산 포위전 그리고 구정 대공세(테트 대공세)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베트남은 제네바 회담에 따라 북위 17도선으로 남북 분단됐다. 베트남 북부에는 호치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성 있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자리 잡았고, 베트남 남부에는 1949년 프랑스가 자신들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괴뢰정권 바오다이(Bao Dai)가 이끄는 베트남국이 유지됐다. 프랑스가 물러나게 되자 이곳에 또 다른 강대국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 나라가 바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베트남 남부 지역에 있던 바오다이 정권을 지원하다가, 자신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친미 제국주의자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남베트남이 프랑스 괴뢰 정권에서 미제국주의의 괴뢰 정권이 된 계기였다. 제네바 협정에서 2년 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선이 약속됐지만, 선거에서 패배할 것을 안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렇게 되면서 베트남은 또 다른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이다.
응오딘지엠이 초대 대통령으로 있던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이 지원을 받으며 강력한 반공 독재정치를 펼쳤다. 전혀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았고, 부정부패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프랑스군 출신의 남베트남 군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베트남 남부에서 혁명활동을 하던 베트콩에게 무기를 팔아넘기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극단적인 반공독재국가를 세워 민중 전체를 적으로 돌렸는데, 이는 1960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의 창설로 이어졌다. 베트콩 창설 이후 남베트남 내부에서의 혁명운동과 반정부 시위는 급격히 증가했고, 1964년 미국은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5년에 이른바 북폭을 실행했고, 다낭에 3,000명의 미군을 상륙시킴으로써, 프랑스가 밟았던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미군의 병력은 1965년에 18만 명을 돌파했고, 1968년에는 54만 9,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항일전쟁과 항불전쟁에서 게릴라전에 단련된 베트콩과의 전투로 수십만의 미군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끔찍한 수렁에 빠졌고, 1967년 말에는 미군 전사자가 최소 2만 명을 돌파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던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기습적인 대공세를 감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테트 대공세 즉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다.
구정 대공세가 시작되기 10일 전 북베트남군은 라오스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미군 기지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는데, 이것이 바로 케산 포위전(Siege of Khe Sanh)의 시작이었다.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시킨 북베트남군은 1968년 1월 21일 새벽 케산 기지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으며, 여기에는 14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격 첫날에만 300발의 대포 포탄이 떨어졌고, 그날에만 미해병대 18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작전에 투입된 제임스 헤브론(James Hebron)은 마이클 매클리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들이 퍼부어 대는 포탄이 폭우처럼 쏟아졌습니다. 첫날 하루만 300발이 떨어졌죠. 77일간 지속되었던 포위는 그저 죽음과 파괴의 연속이었습니다.”(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37)
2017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을 보면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던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잘 알 수 있다.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 해병대는 북베트남군에게 포위되어 큰 난관에 빠지게 됐습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이것이 미국판 디엔비엔푸 전투가 될 거라고 했죠. 베트남 전쟁의 승패가 달린 전투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북베트남군은 병력 대부분을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상태였어요.”(Ken Burns, 「The Vietnam War」, 『PBS』, 2017.)
그가 단행했던 케산 포위전은 미군의 막강한 항공 공습과 이를 통한 반격으로 77일 만에 미군이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끝났지만, 포위전을 통틀어 미군의 사상자는 만만치 않았다. 총 1,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이중 300명은 미군의 케산 요새 내에서 전사했다. 그 외에 남베트남군이나 고산족 병사들까지 합치면 최소 3,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경우 미군의 추산에 따르면 최소 10,000명에서 15,000명 정도인데, 미군베트남원조사령부(MAC-V)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북베트남군 전사자는 5,550명 정도라고 한다.
1968년 케산 포위전 당시 미 해병대
결과가 어찌됐든 보 응우옌 잡 장군과 북베트남 지도부는 케산 포위전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에게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라는 심리적인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구정 대공세는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이 반격을 가하면서, 수많은 전사자가 나왔지만, 이것은 역으로 미국 내의 반전여론과 반전운동을 강화했다. 이렇게 되면서 존슨 행정부를 이은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에서의 철군을 감행하게 됐고, 1973년 파리 평화조약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군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5년 호치민을 이어 최고 지도자가 된 레주언(Le Duan)은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남베트남 통일을 위한 대공세를 감행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키운 북베트남 군대는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키고 통일을 이룩했다. 이로써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일본과 프랑스 미국에 맞서 승리한 군사 전략가로 등극했다.
4. 결론 그는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한 장군이다
지금까지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업적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의 항일투쟁은 민중봉기의 연장선상에서 얻은 승리였다. 반면 항불투쟁의 궁극적인 승리와 항미투쟁에서의 승리는 군사적인 전략전술을 통한 승리였다. 방법이 어찌됐건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맞서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무찌른 위대한 군사 전략가다.
일각에서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을 ‘붉은 나폴레옹(Red Napole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사적 업적과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미사여구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나폴레옹 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는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이은 프랑스 혁명 전쟁을 프랑스 제국의 정복주의 전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 정복전쟁은 결과적으로 끝이 비참했으며, 프랑스 혁명의 고귀한 정신을 퇴보시키는 역행적인 행위였다.
반면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했다. 쉽게 말해 인물의 성격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 나폴레옹은 침략자인 반면,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침략을 격퇴한 명장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 점에서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나폴레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다소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비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서거한지 8년이 됐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맞서 투쟁한 위대한 장군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의 투쟁은 수많은 좌파들과 수많은 서방 제국주의 치하의 국가들에게는 많은 영감을 줬다.
필자는 이 점에서도 보 응우옌 잡 장군은 큰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라는 흐름 속에서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좌파와 민족해방세력들의 투쟁력과 행동력을 길러줬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정신은 미제국주의의 악행과 만행이 지속되고 있는 시점에서도 유효하다.
마지막으로 2005년 당시 구수정 박사(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공론화에 앞장 선 인물이다)의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겠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의 다음과 같은 명언은 지금도 분명 유효할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본국을 무찌른 사건이야. 이 승리는 그 뒤 유럽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약소국들, 특히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의 물결을 이끌었지. 미국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민족의 독립과 자주와 통일을 갈망하는 전세계 인민의 승리였어.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긴 항전의 역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어. 그것은 21세기에도 유효하지. 오늘날의 강대국들도 독립과 자유를 바라는 약소국의 열망을 절대 얕봐선 안 돼.”(구수정, 「“이라크 침공은 역사의 단죄 받을 것”」, 『한겨레21』, 2005.04.27.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13720.html)
2005년 당시 구수정 박사와 보 응우옌 잡 장군
5. 참고문헌
구수정, 「“이라크 침공은 역사의 단죄 받을 것”」, 『한겨레21』, 2005.04.27.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13720.html
정인환, 「베트남 전쟁영웅 ‘붉은 나폴레옹’ 떠나다」, 『한겨레』, 2013.10.06.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605927.html
황영식, 「[지평선/10월 8일] 붉은 나폴레옹」, 『한국일보』, 2013.10.07.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605927.html
안경환, 「다윗의 전략으로 베트남 승리 이끌다」, 『아주경제』, 2020.03.09. https://www.ajunews.com/view/20200308211941624
「State funeral in Vietnam for war hero General Giap」, 『euronews』, 2013.10.12. https://www.youtube.com/watch?v=arEVkpCaZys&t=9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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