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중립국가 라오스를 어떻게 파괴했는가?
_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은 인접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침략전쟁을 확장했다. B-52 폭격기와 같은 선진화된 최신식 살인기계를 동원한 미국의 침략전쟁은 동남아시아에 수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자 반전운동가인 브라이언 윌슨(S Brian Willson)씨는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600만 명 이상의 동남아시아인이 사망했고, 21,000개 마을 중에서 13,000개의 베트남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37만 5,000톤의 네이팜 폭탄이 투하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군의 폭격으로 2,600만 개의 크레이터가 형성되었고, 인도차이나에 있는 3,900만 에이커(또는 남베트남의 육지 면적의 91%)의 땅에는 폭탄과 포탄 파편이 흩어져 있었으며, 이는 코네티컷을 제외한 모든 뉴잉글랜드의 크기인 24만 4,000개의 농장에 해당한다.(S Brian Willson, <페이스북 글>, 2021.03.22.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333039487076048&id=100011100283618)
브라이언 윌슨이 주장한 대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벌여놓은 파괴와 살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사회운동가 브라이언 윌슨의 주장만은 아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주인공 벤자민 윌러드 역을 맡았던 마틴 신(Martin Sheen)은 2008년에 <베트남: 미국의 홀로코스트(Vietnam: American Holocaust)>라는 1시간 3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마틴 신은 다큐멘터리에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으로 500만 명(1995년 베트남측의 추정 자료를 인용한 것, 이에 따르면 100만 명의 군인과 4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함)의 베트남인이 사망했고, 미국은 반성하지 않은 채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또 다른 100만 명의 이라크인을 죽였다고 주장했다.(Martin Sheen, <Vietnam: American Holocaust>, 2008. https://www.youtube.com/watch?v=faadbiQXdw4)
라오스에 대한 비밀 군사작전을 승인하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
케네디 행정부에 있으면서 베트남 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1995년 아메리칸 대학에서의 강연에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으로 최소 38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공동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II>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전쟁은 이후로도 2년을 더 끌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접수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이 그 작은 나라 베트남에 투하한 폭탄의 양은 인류사의 모든 전쟁에서 모든 전쟁당사국들이 투하한 것보다 많았고, 2차 대전 때 모든 전쟁당사국이 투하한 폭탄의 3배나 됐다. 시골 지역에는 불발탄이 지천이었다. 약 7,200만 리터의 고엽제가 살포돼 환경을 오염시켰다. 남베트남에서 미국은 전체 1만5,000개 촌락 가운데 9,000개를 파괴했다. 북베트남에서는 산업도시 6곳 모두가 완전히 파괴됐다. 지방 중소도시 30개 가운데 28곳, 소도시 116개 가운데 96곳이 초토화됐다. 1969년 호찌민 사망 후 북베트남 최고지도자가 된 레주언은 한 외국 기자에게 미국이 핵무기 사용 협박을 한 것은 모두 13차례나 된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규모는 충격적이었다. 미군은 5만8,000여 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인 사상자 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로버트 맥나마라는 후일 아메리칸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에서 베트남인 380만 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02)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에서 어떠한 대량살상 행위를 했는지를 보면, 미국이 베트남 인접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어떠한 행위를 벌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 베트남의 주권을 침해하고 파괴했는지는 알지만, 정작 인접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살인적인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라오스의 주권을 어떻게 침해했고, 이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는지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라오스의 상황을 알기 위해선 라오스의 근현대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당시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라오스 또한 1세기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라오스는 베트남 캄보디아와 더불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령에 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고, 라오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잠시나마 경험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을 선언하자, 당시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과 친분이 있던 라오스의 수파누봉(Souphanouvong) 왕자는 호치민의 베트남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1946년 9월에 이르러 라오스에서도 베트민의 후원하에 저항군이 결성됐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라오스의 독립운동 세력 또한 항불전쟁에 참가했다.
수파누봉의 얼굴이 들어간 파테트 라오 선전화 |
수파누봉 왕자는 1949년부터 베트민의 지원을 받으며 동북부 라오스 지역에서 독자적인 게릴라 투쟁을 펼치기 시작했고, 라오스의 게릴라 세력은 베트민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에 맞서 크게 활약하기도 했다. 1951년에는 라오스에서 이른바 파테트 라오(Pathet Lao)가 창설되어,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전쟁에 나섰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집필한 회고록 <디엔비엔푸>에서는 1953년 삼네우아 해방에 대해 수파누봉 왕자의 말은 인용하며, 베트남과 라오스의 혁명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삼네우아 해방은 침략자들에 대한 라오스 모든 민족들의 수년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입니다. 베트남-라오스 결속의 결과이며, 공동의 적에 대항해 싸운 베트남 인민과 군의 무조건적인 지원의 결과입니다.”(보 응우옌 잡, 강범두, <디엔비엔푸> 길찾기, 2019, p.369)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프랑스가 참패를 당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항불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전후로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의 독립이 결정됐고, 라오스 또한 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제네바 회담을 통한 라오스의 독립은 더 큰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프랑스가 물러난 이후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동남아시아 문제에 내정간섭을 일삼게 됐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사>를 집필한 소병국 교수에 따르면, 1954년 독립 후 1975년까지 라오스의 국민국가 건설 실험과정은 외세 특히 미국이나 북베트남의 영향을 받는 우익·중도·좌익 당파들의 이합집산을 통한 세 차례의 연립정부의 부침,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내전이었다.(소병국, <동남아시아사>, 책과함께, 2020, p.591~592)
제네바 회담 이후 라오스에는 중립정부가 구성됐지만, 대립과 분열이 끊이질 않았다. 1961년 케네디의 취임 며칠 전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ov) 수상은 국제 혁명을 지원하겠다는 강력한 어조의 연설을 했는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라오스에서는 라오스 정부군(Royal Lao Army)과 좌파 세력인 파테트 라오(Pathet Lao)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119) 이것이 바로 라오스 내전의 시작이었다.
파테트 라오의 병사들 |
미국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정부는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에게 군사고문단과 물자를 지원함과 동시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그린베레로 대표되는 미국의 특수부대는 반공주의 성향의 강한 라오스의 몽족(Hmong)을 규합하여, 반공주의 군대로 양성했고, 라오스의 정부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행위 자체가 라오스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의 말대로 “라오스는 산악지대에 고립된 나라였기 때문에 ‘자유 세계’의 안보를 내세워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더욱 어려웠던 곳”이었다.(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70) 그렇지만 미국은 내정간섭을 했다. 수많은 물자와 장비가 라오스 정부군과 반공 성향의 소수민족인 몽족 민병대에게 전달됐다. 당시 라오스 주재 미국 대사였던 그레이엄 파슨스(Graham Parsons)는 미국 국회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연립정부의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16년간 노력했다.”(촘스키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413)
라오스에 대한 미국의 군사작전은 1964년을 시점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이라는 조작극을 준비하면서 라오스에서의 은밀작전을 게시했다. 34 알파 작전으로 불린 미국의 작전은 라오스에 대한 공중 작전을 포함했다. 당시 라오스에는 T-28형 전투 폭격기에 의한 공격이 지속됐고, 이들 폭격기에는 라오스 공군의 표시가 그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미국 민간항공인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를 가장한 미국 CIA 소속기와 조종사가 담당했다. T-28편대에 의한 라오스 영토와 파테트 라오 거주 지역에 대한 불법 공격은 심지어 북베트남의 국경 쪽으로도 접근하기까지 했었다.(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제2판)>, 창비, 2006, p.427)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폭격한 라오스 지역들 |
당연히 미국의 이러한 행위는 제네바 합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근거를 들어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자가 미국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미국은 1965년 2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플레이쿠(Pleiku) 미군기지가 베트콩에게 공격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른바 북폭(北爆)을 게시했다. 미국의 린든 B. 존슨(Lindon B. Johnson) 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을 게시함과 동시에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대에도 폭격을 게시했다. 미국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일부 지역을 폭격한 표면적인 명분은 베트콩의 물자 보급로 차단이었다.
수파누봉과 호치민 |
1960년대부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물자를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이 바로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이다. 북베트남 정부는 해로를 통해서도 많은 물자 지원을 했는데,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미해군이 남베트남 해로를 봉쇄하자,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호치민 루트를 유용하게 사용했다. 과거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자전거를 사용했던 북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트럭을 통해 남베트남에 있는 혁명 세력에게 물자를 지원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의 존슨 정부는 호치민 루트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1971년 미국의 닉슨 정부는 말로는 베트남화를 추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쟁을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1971년 미국은 남베트남 응우옌반티에우 정부의 군대를 100만 명까지 확장했고, 이들을 무장시켜 구정 공세 이후 힘을 잃은 베트콩들을 상대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캄보디아 침공 이후 미군과 남베트남군 2만 명을 동원하여 람손 719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미 이들의 침공을 알고 있던 북베트남군은 이들을 격퇴시켰으며, 티우 정부의 허약성을 제대로 보여줬다.(후루타 모토오, 박홍영, <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 일조각, 2007, p.59) 이 작전에서 남베트남군 8,000명과 미군 215명이 전사했다. 1972년 미군은 북베트남에 대한 마지막 폭격을 가한 뒤, 1973년에 파리 평화조약을 맺고 철수했다. 라오스는 1975년 12월 라오스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통일을 이룩했고,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라오스 내전 당시 미군의 임무는 민간인 뒤에 숨어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장군을 앞세워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미국이 라오스를 지원한 데에는 이 나라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지원 규모도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으로부터 군 예산의 100%를 지원받는 나라가 바로 라오스 왕국이었다.(촘스키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413~414) 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동안 라오스는 미군의 폭격과 군사작전으로 인해 철저히 파괴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대략 80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중 1/4이 라오스에 투하됐다. 아래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오는 내용이다.
“재래식 무기의 배치 형태를 기준으로 볼 때도 베트남전은 역사상 어떤 전쟁보다도 규모가 컸었다. 한 지역 전쟁에서 미군이 폭격으로 사용한 전비가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이 투입한 총 경비를 초과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중 폭격으로 사용된 폭탄이 약 200만 톤에 육박했던 반면, 베트남전에서는 라오스 국경의 침투로에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쏟아부었던 폭탄만 총 200만 톤이었다. 이 폭탄량은 호치민루트에 대한 공습이 하루에 500회를 넘지 않았을 때까지의 집계였다.”(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27~328)
미군의 라오스 폭격으로 생긴 크레이터 |
이러한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이 얼마나 많은 양의 폭탄을 라오스에 투하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의 비밀 군사작전은 1961년에 시작됐고, 정기적인 폭격은 1964년 초에 시작되었다. 북부 라오스를 목표로 한 배럴 롤(Barrel Roll) 작전은 정기적인 북베트남 폭격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64년 12월에 시작되었고, 1966년에 폭격이 한층 더 강회되었으며, 구정 공세가 한참이던 196년에는 폭격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촘스키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41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에는 미국의 라오스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미군은 11만3,716개 지점으로 23만516회 출격해 275만6,941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공산계 반정부 무장조직 파테트 라오(Pathet Lao)가 장악한 ‘돌항아리 평원’은 미군의 폭격을 가장 심하게 당한 가운데 하나였다.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대부분 파테르 라오에 가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몽족 병사들이 남은 마을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1969년 9월 돌항아리 평원지역 대부분은 주민 소개가 끝났다. 작가이자 반전운동가인 프레드 브랜프먼은 1,000명이상의 라오스 난민을 인터뷰한 결과를 토대로 “돌항아리 평원은 700년 동안 역사에 기록을 남겼지만 이제 마침내 사라졌다”고 썼다. 라오스의 많은 지역이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05)
베트남 전쟁 당시 라오스에 살고 있던 프레드 브랜프먼(Fred Branfman)은 저서 <단지평원의 목소리(Voices from the Plain of Jars)>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1965년 5월부터 1969년 9월까지 단지평원에 대한 2만 5,000회가 넘는 출격이 이루어져 7만 5,000톤 이상의 폭탄이 투하됐다. 지상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했으며 수만 명이 지하로 내몰렸고 결국 지상의 사회 전체가 철저하게 무너졌다.”(하워드 진, 유강은, <미국민중사 2>, 이후, 2008, p.227)
라오스 주재 미국 대사 윌리엄 설리번(William Sullivan)은 라오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인 월터 헤이니가 난민들의 증언을 꼼꼼하게 수집해서 엮은 기록을 두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준비”되었다고 설명했다. 헤이니는 라오스에 있는 한 유엔 관리의 증언을 인용하며 이는 “폭격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1968년의 폭격은 인근 마을에서 생명체가 전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1969년에 폭격기들이 매일 날아와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 하면서 폭격이 절정에 달하자 마을 사람들은 외곽으로 빠져나가거나 숲속으로 점점 더 깊이 숨어들었다. 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민들은 참호나 토굴 혹은 동굴에서 연명했다. 그들은 밤에만 농사를 지었다. 밀고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폭격은 주민들의 물질적인 기반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데 주력했다.”(촘스키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419)
인명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라오스 내전을 검토하면서 인구 1/10이 넘는 35만 명(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의 인명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다.(촘스키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422)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5만 명 이상의 라오스인이 죽었고, 미국의 폭격으로 라오스는 초토화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라오스를 폭격하며 단순히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겨냥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지만, 실제로 이들이 폭격한 지역 대다수는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대량의 인명 살상을 저질렀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도륙하고 학살했는지는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인 브라이언 윌슨이 주장한 600만 명의 동남아시아인의 죽음에는 당연히 미국의 폭격과 군사작전으로 죽은 35만 명의 라오스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베트남 전쟁이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미국이 자행한 600만 명의 동남아시아인 학살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의 허구성을 잘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자행한 대량학살이자 전쟁범죄였고, 라오스에서의 전쟁도 마찬가지며, 미제국주의의 잔혹한 침략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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