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친미 친일 뉴라이트의 아버지 이승만의 악행을 폭로한다

_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2022년 2월 7일 오후 출판사 <광창미디어> 대표인 신우현 씨는 이인수 박사 부부를 저작권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이승만의 양아들인 이인수씨와 그의 아내 조혜자 씨가 사기 혐의로 혜화경찰서에 고소당한 것이다. 신우현 씨에 따르면 2017년 5월 이인수 씨로부터 이승만의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의 저작권을 2036년 말까지 300만원에 양도 받는 계약을 맺었지만, 문제는 이 책의 저작권이 이인수 씨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책 저작권은 이승만의 유언에 따라 그의 부인인 프란체스카에게 상속되었으며, 이후 이인수 씨가 양어머니인 프란체스카의 재산 상속을 포기하면서 이인수 부부가 이 책의 저작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즉, 계약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이다.(“이승만 양아들 부부 저작권 사기 혐의 피소..고소인 경찰 출석”, 머니투데이, 2022년 2월 7일 기사 참고)

최근에 저작권 논란이 생긴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는 현재 뉴라이트(New Right)로 대표되는 극우세력들이 “이승만의 반일 독립운동 행적”으로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이 책에서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그의 말 대로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면서, 미일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2015년 국내에 출간될 당시, 중앙일보의 채인택 논설위원은 “이승만의 예언은 1941년 12월 7일 일제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적중했다. 홍보 뒤에 가린 군국주의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가 지적한 전체주의의 본질은 지금 되씹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라며, 책을 극찬했다.([책 속으로] “일본 천황제, 미국과 충돌 불가피”…태평양전쟁 발발 예언한 이승만, 중앙일보, 2015년 5월 9일 기사 참고)

1941년 7월 출간된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표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출판은 현재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들이, “이승만의 반일 독립운동 업적”으로 자랑하는 주제다. 문제는 뉴라이트들이 《일본 내막기》로 “이승만의 독립운동”이라 포장하여 이승만이 저지른 수많은 과오와 악행들을 옹호한다는 점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이승만 열풍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상웅씨는 소위 ‘건국절 논란’이 생겼던 2012년에 《독부 이승만 평전》을 집필했다. 참고로 2년 전인 2020년에는 개정판이 출판됐다. 아래의 인용문은 《독부 이승만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총선과 대선이 들어 있는 2012년 들어 수구세력의 이승만 부활 움직임이 극성이다. 어떤 논객은 4.19세대의 이승만 비판을 종북좌파라 매도하고, 어떤 지자체장은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고 호들갑을 떨고, 한 보수단체는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어용화한 공영방송은 그를 미화하는 작품을 만들고, 대형서점에는 이승만을 미화하는 책이 줄줄이 쌓인다. 그런가 하면 이명박 정권은 광화문에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을 지으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우상화에 예산을 퍼붓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모두 박정희의 약효가 떨어지는 듯하자 이번에는 이승만을 부활시켜 수구세력의 구심으로 삼으려는 전략이다.”(《독부 이승만 평전》, 4쪽)

놀랍게도 2012년 당시 김삼웅씨가 《독부 이승만 평전》 서문에서 밝힌 내용은 박근혜 집권이 한참이던 2015년에 현실이 됐다. 실제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는 이른바 ‘국정 교과서 사태’를 촉발시켰고, 뉴라이트 중심의 역사교육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기 이승만을 찬양하는 책들이 줄줄이 국내에 출판됐다. 앞에서 언급한 1941년 이승만의 저서 《일본 내막기》를 포함하여, 미국사 전공자 이주영 씨의 《이승만 평전》, 안병훈 씨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백년동안> 출판사에서 만든 시리즈인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그리고 무려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을 폭로한다는 《이승만 깨기》>등이 그러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시절 출판된 이승만 관련 찬양 서적들은 말 그대로 차고 넘친다. 즉 국가가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포장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와이프를 폭행한 것으로 유명한 개그맨 출신 목사 서세원은 “빨갱이들로부터 나라를 지키자”고 하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영화의 감독을 맡을 것이라 선언하기까지 했다.(서세원, “이승만 영화 감독 포부 “빨갱이로부터 지키자. 좌도 우도 없다”, 이데일리, 2014년 2월 13일 기사 참고)

이승만을 찬양하려는 움직임은 이명박 집권 시절과 박근혜 집권 시절에 정부로부터 많은 동력을 받았다. 정권이 바뀌면서 그 동력이 많이 둔화됐지만, 놀랍게도 이승만을 찬양하는 움직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민의힘 동작을 당협위원장이자,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부회장인 나경원은 2021년 7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서거 56주기 추모식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담화문을 낭독했으며, 대한민국 정치 내에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움직임을 이끌고 있다.

이처럼 이승만을 찬양하는 움직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예시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를 포함한 이승만 찬양 세력들이 가진 찬양 논리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논리에 무수히 많은 허점과 역사왜곡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건국 대통령으로 포장하기 위해, 온갖 무리수와 억지설정을 갖다 붙인다. 이들은 이승만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무수히 많은 악행들을 ‘자유민주주의’, ‘부자나라 한국 가난한 나라 북한’, ‘좌익소탕’, ‘적화통일 방지’식의 용어로 각색을 한다.실제로 나경원 의원은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시절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 역사의 의미를 갈라치기, 분열 에너지에 사용하는 정부·여당의 일부 태도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고 통탄했으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여러 기념행사, 기념 전시에 있어서 외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나경원 “문재인 정부서 이승만 외면…역사 갈라치기 안타까워”, 민중의 소리, 2019년4월 12일 기사 참고)

 

반공을 내세운 이승만의 민중학살 만행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이 저지른 최악의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른바 ‘코리안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잔혹한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이승만과 미국은 이미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대구10.1 항쟁 등을 포함해 대략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여기에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20만 명에서 50만 명을 죽였으며, 예비검속과 형무소 학살, 지방우익단체 및 대책위원회에 의한 학살 그리고 북한군에 빼앗긴 지역을 수복한 후 보복학살 등을 포함하면 그 숫자가 1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연구자들이 추정할 정도다.(《대한민국 악인열전》, 37쪽 참고)

위 사진은 미국이 공개한 보도연맹 학살 장면이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설립된 전국 피학살자유족회의 추산에 따르면, 서울 2만, 경기 6만, 강원 3만, 충북 5만, 충남 3만, 전북 19만, 전남 21만, 경북 21만, 경남 25만, 제주 8만으로 도합 113만 명이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민간인 학살 – 미완의 진실규명과 해원”, 경향신문, 2010년 6월 18일)

이승만이 이런 양민 학살을 자행했지만,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들은 이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로 각색하여 포장한다.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그리고 대구 10.1 항쟁을 폭동이라 주장하고, 국민보도연맹 학살을 빨갱이 방지를 위한 해결책으로 이들은 주장한다.

여기서 이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이승만 정부가 민중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한반도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원했지만, 이를 무참히 진압한 주체가 바로 이승만이었고, 필요하다면 앞에서 언급한 그런 양민학살을 자행한 주체도 이승만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여운형을 포함한 자주적인 통일 세력들을 배제한 체 자행한 미군정의 제국주의적인 행위들도 이들은 그저 ‘공산화 방지’식의 용어로 각색한다. 이들이 ‘공산화 방지’로 왜곡하는 해방전후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미국의 사회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5년 미군이 한국에 진주했을 때도 미국은 일본에 항거했던 반파시스트들로 조직되었으며 국민들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국 정부를 해체시켰고, 일본 파시스트 경찰과 일제시대 때 그들에 협력했던 일부 한국인들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했다. 작은 섬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한 3~4만 명을 포함하여 약 10만 명이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목숨을 잃었다.”(《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33~34쪽)

이들이 이승만을 옹호하는 데에 가장 큰 논리의 핵심에는 바로 ‘경제’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기에 부유한 나라가 됐고, 반면 이승만이 싫어하던 공산주의 나라 북한은 사회주의를 선택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됐으며, 세계최악의 빈곤국이 되었다”는 아주 간단명료한 논리다. 이러한 경제위주의 논리는 더 나아가 이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 지배 옹호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및 타국에 대한 경제침탈 및 주권침탈을 옹호하는 논리로 이용된다. 이것은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닌, 신념화된 극단적 반공주의를 옹호하는 것일 뿐이다.

이들은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북한의 궁핍한 사정을 근거로 “자본주의는 성공. 사회주의는 실패. 따라서 자본주의를 선택한 이승만이 옳다”라는 아주 선동적인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절대적인 자본주의 옹호는 결국 자본주의가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빈부격차와 무절제한 시장경제의 옹호로 접근하게 되며, 사회주의 제도가 강조하는 대중적인 복지와 사회복지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이승만식 논리에 따라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 이기심을 살려두어야 거기에서 무한한 발전의 동력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김기협 씨는 이승만 찬양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가 안병직에게는 자본주의의 절대적 정당성에 대한 증거다. 과거에서 미래까지 변하지 않는 정당성이다. 지금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건 말건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유방임 원리를 지켜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자본주의가 과거에도 언제나 우월한 체제였다는 믿음을 그는 굽히지 못한다. 1930년대 대공황 속에서 소련이 가장 적은 충격을 받았던 사실을 그가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북한 경제가 한때 남한보다 우월했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다. (중략)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에 북한의 성취를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역사의 대목 대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의 역사로만 해석해야 하는 편향성 또한 피할 수 없다. 공산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을 실패할 운명의 나라로, 자본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한을 성공할 운명의 나라로 규정한다는 것은 역사학의 문법에 맞지 않는, 쉽게 말해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래서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원리주의 성향의 유사종교가 떠오르는 것이다.”(《뉴라이트 비판》, 184~186쪽)

 

이승만의 알려지지 않은 제국주의 침략 복무 및 일제 옹호

 

이승만을 찬양하는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이승만 정부가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복무했다는 사실에도 아주 무감각하다. 한국전쟁 당시 UN군으로 참전한 프랑스군은 1953년 한반도에서 휴전협정이 성사되자. 인도차이나 전선으로 배치됐다. 그리고 인도차이나로 배치된 병력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 군대에게 패배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를 위해 막대한 물자를 지원했다. 1954년 당시 이승만은 우방국 프랑스를 위해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파병하고자 했다.

“미국 정부는 우리나라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1월 자청한 한국군 1개 사단의 파병도 재검토했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정부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 반공정신의 고취가 파병의 목적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은 설명했다.”(《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383쪽)

이처럼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이승만을 옹호하는 논리는 쉽게 말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찬양하는 세력들은 어떻게든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포장하고자 한다. 맨 앞에서 뉴라이트들이 이승만을 반일 투사로 만들기 위해 예시로 드는 《일본 내막기》 집필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승만의 기회주의적인 처사였다. 젊은 시절부터 미국에서 생활했던 이승만은 미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보고 있었고, 이승만이 책을 쓰던 시기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원조를 늘리는 한편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까지 내렸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전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놓여있던 조건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예측이 아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시정부와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년 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라는 인물을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며 매도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하기 이전까지는 그리 일본에 적대적인 인사도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인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승만의 일본 비호적인 행동은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집필한 《이승만 평전》>에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겠다.

1. 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총격 사건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킨 살인범이고, 일본과 같은 강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2. 이승만은 1912년 11월 18일 자 《워싱턴 포스트》회견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했다”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사실상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3. 1913년 하와이에서 강연 중 “청일전쟁 시 각국 군사들은 행위가 부정하여 그 나라 국기의 빚이 다들 흑암한 추태를 입었으나 오직 일본 군인은 행위가 단정하여 일본의 태양기는 광명한 일광을 받아 공중에서 기색이 늠름하게 휘달렸다”는 믿기지 않은 일제 찬양 발언을 했다.

4.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에드버타이스>지에서 “나는 한국은 물론 하와이에서도 혁명운동을 꿈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스타블렌턴>지에서 “우리는 어떤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전 인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 가운데서 어떤 반일 감정도 일으키길 원치 않는다”고 발언했다.

5. 이승만은 1919년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약 한국에 자유를 준다면 일본에 감사하고 우정을 느낄 것이고, 만약 우리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일본은 정복자로서 불신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는 ‘굴욕적인’ 언행을 보였다.

8. 이승만은 1922년 9월 하와이 귀환 기자회견에서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는 망언을 거듭했다.

이 밖에도 이승만의 대일 관련 망언은 수없이 많다.

7. 최고 수훈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훈장을 받기에는 그의 행적에 미심쩍은 점이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현실감각이 무딘 외교관이나 기독교 선교사라 해야 어울린다.(《이승만 평전(개정판)》, 129~130년)

소위 독립운동 시절의 이승만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일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나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묘사돼서는 절대 안 될 인물이다. 독립운동 시절 일본을 비호하는 태도를 보였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을 등에 업고 친일파를 이용하여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한국전쟁 전후로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고, 1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을 국가 보안법으로 감옥에 구금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승만을 옹호하려는 논리는 그 반공주의적 허구성이 들어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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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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