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도모르 사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범죄(번역)

예카테리나 블리노바(Ekaterina Blinova)

번역: 김남기(학생)

출처: https://sputniknews.com/politics/201508091025560345/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놀아나고 있고,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신화이자 악랄한 반소선전 중 하나인 소위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 대학살)” 기념물이 미국 자본에 의해 세워졌다.

놀랍게도, “홀로도모르”(“기아 조장”) 거짓 신화의 뿌리는 소련과 서방 간의 오래된 냉전 대치 상황에 있다. 1945년 나치독일의 패전 이후 악명 높은 나치 협력자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와 그 불법무장단체인 우크라이나 봉기군(UPA) 부대- 평화로운 유대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러시아 민간인들을 상대로 했던 무자비한 테러 등 은폐된 범죄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서유럽과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9년 미중앙정보국(CIA)과 미국무부는 OUN과 UPA 지도자들의 미국 이주를 후원했었고, 냉전기 소련을 대상으로 전복부대와 정보요원으로 그들을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들 중 한명인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는 CIA에 의해 “유명한 새디스트나 나치 협력자”로 묘사되었으며, 스웨덴계 미국인 역사학자인 펄 앤더스 루들링(Per Anders Rudling )의 저서 “『OUN과 UPA 그리고 홀로코스트: 역사신화 제조 연구(The OUN, the UPA and the Holocaust: A Study in the Manufacturing of Historical Myths)』”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이 CIA가 전 나치 협력자를 모집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볼리니아와 동부 갈리시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1990년대까지 뉴욕시 퀸즈에 살았으며 CIA와 미국무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다.”라고 몽클레어 주립 대학 소련사 전문가인 그로버 퍼(Grover Furr) 교수는 20155월 스푸트니크(러시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CIA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효과적인 냉전 무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냉전 당시 적국에 대한 값비싼 정보를 워싱턴에 제공하는 동안, CIA는 그 보답으로 민족주의자 퇴역군인들을 영향력 있고 권위 있는 지위에 두면서, 그들이 기존대학에서 준 학문적인 기관이나 학술적 지위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줬다.

이러한 공식·비공식적 학계 연결망을 이용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반러시아 정치선전을 퍼뜨려 왔으며, 신화를 만들었고 OUN과 UPA의 전시범죄를 미화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도모르 추모 조형물

홀로도모르는 이런 신화들 중 하나이며,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고의로 300만에서 700만의 우크라이나인들을 굶겨 죽였다고 주장했다.

“1987년 당시 <절망의 추수(Harvest of Despair)>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홀로도모르 운동의 시작이기도 했다. 영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주로 캐나다에서 자금 전부를 지원받았다. 캐나다 학자인 더글라스 토틀(Douglas Tottle)은 영화에서 나온 사진들이 1921년에서 1922년 볼가 기근(Volga Famine) 당시의 사진이라는 사실과 사진이 1932년에서 1933년 기근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토틀은 이후 집필한 책 사기, 기근 그리고 파시즘: 우크라이나 학살 신화 히틀러에서 하버드까지(Fraud, Famine, and Fascism: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에서 홀로도모르 거짓 문제에 대해 말했다.”라고 그로버 퍼 교수는 전한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신우크라이나 국가의 사상을 흔들어 놓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다른 소련 연방들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정부는 그 시초부터 새로운 국가 신화를 개발할 필요가 없었지만, 우크라이나인 디아스포라에서 만들어진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루들링 박사는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반러시아 신화가 형성되며 두 번째 폭풍이 휩쓸던 빅토르 유시첸코(Viktor Yushchenko, 2004년 서방의 지원을 받은 오렌지 혁명으로도 알려진 마이단(Maidan) 폭동 이후 정권을 잡은 인물) 대통령 시기의 일이다. 유시첸코 정권 당시, ‘기억 경영’과 ‘신화 창조’를 하는 몇몇 기관들이 우크라이나에 설립됐다.

러시아와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1932년에서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희생자 숫자가 명백하게 과장됐을 뿐만 아니라 “홀로도모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 미국 역사학자인 마크 B. 터거(Mark B. Tauger) 교수는 1932년에서 1933년까지의 소련 기근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고, 주변 환경에 의한 재앙이었으며, 분명하게 그 지역에서 소련 정책과는 관련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중매체와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대기근이 1930년대 당시 소련 전역을 강타했으며 인위적이었다고 표현해왔는데, 이는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과 종종 다른 국가의 집단을 파괴하기 위해 고의로 저지른 학살로 묘사됐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전적으로 틀렸다. 기근은 우크라이나나 소련의 농촌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근본적으로나 전적으로 인위적이지 않았고, 소련 지도부 내에서 스탈린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런 재앙을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소규모지만 늘어나고 있는, 새로운 기록문서에 의존하거나 다른 출처로 비판적 접근을 한 문서들은 기아의 대량학살이나 의도주의해석에서 결함을 보여줬고, 다른 해석을 했다.”고 터거 교수는 그의 연구물인 데이비스와 스테판 휘트크로프트의 논평, 기아 시대: 소련 농업, 1931~1933(Review of R.W. Davies and Stephen G. Wheatcroft, The Years of Hunger: Soviet Agriculture, 1931~1933)에서 주장했다.

터거 교수는 기후 조건이 1932년과 1933년 기근에 주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홀로도모르” 신화를 지지하는 자들은 1917년 볼셰비키가 집권하기 한참전인 19세기 말까지 러시아가 주기적으로 기근에 고통 받았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또한 그들은 1920년과 1921년, 1924년, 1927년과 1928년에 심각한 기근들이 있었던 사실은 외면한다.

아주 흥미롭게도, 공식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차 자료는 1928년에서 1929년까지 아주 심각했던 기근이 주로 가뭄 같은 자연재해로 발생했으며,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다른 지역들 보다 더 많은 원조를 소련 정부로부터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명백하게도 소련에서 우크라이나 농민들에 대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음모가 조작된 이론임을 명백히 입증한다.”고 그로버 퍼는 저서 『거짓 유혈: 티모시 스나이더의 유혈의 땅(역자: 2021년 3월에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피에 젖은 땅: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현재 3쇄나 찍힐 정도로 사회과학 서적 베스트셀러다.)에서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모든 비난이 조작이라는 증거(Blood Lies: The Evidence that Every Accusation Against Joseph Stalin and the Soviet Union in Timothy Snyder’s Bloodlands Is False)』에서 언급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아조프(Azov) 대대 우익 전사들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특히 집산화 – 1930년대 초 스탈린의 정책은 개인들의 땅들을 집단농장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 로 굶주렸고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터거 교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런 연구들은 낮은 수확에 영향을 준 환경적 요인과, 기근과 흉작의 지속적 회복, 1930년대 당시의 대규모 수확, 이 시기의 소련 농장의 기계화, 소련인구 증가, 소련 시대의 식량생산과 소비의 장기간 증가 등을 축소하거나 실제 수확자료를 무시한다.” 소련 농민과 집산화 1930~1939(Soviet Peasants and Collectivization, 1930~1939)

그 학자에 따르면, 스탈린 정권이 “강제적으로” 집산화를 시행했다 하더라도, 그 정책은 “소련의 전통적 농업에 실질적인 현대화를 가져왔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상대적으로 높은 식량생산량과 소비의 기반을 닦았다.” 「스탈린, 소련 농업과 집산화 1930~1939(Stalin, Soviet Agriculture and Collectivization, 1930~1939)」

놀랍게도, 1932년과 1933년의 기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과 1947년의 기근을 예외로 한다면 소련을 강타한 마지막 대기근이었다.

“홀로도모르” 신화가 결코 믿을만한 증거에 기초하지 않았고 그것이 사기라고 입증할만한 충분한 사실적 자료들이 있지만, 그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놀랍지 않게도, 워싱턴은 신냉전 방식의 반러시아 캠페인의 일부로 그 신화를 지지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수없이 반복한다 하더라도 거짓은 절대 진실이 될 수 없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1184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