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동자정치협회]가 출판한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을 읽고(김규상 캐나다 교포)
김규상(캐나다 교포)
먼저 최근 페이스북에서 읽은 연재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그로부터 20여년 후 나는 차를 몰고 고향을 찾아 주변 풍광을 둘러보았다. 주변 서원과 가마터와 사찰을 돌아보며 비로소 내 조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그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 곳은 조부의 나라였을 뿐이다.” – <어느 여름> 제17화, 박기민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마을을 훗날 다시 찾아본 이라면 누구나 느낄만한 감정이다. 세월만 지났지 여전히 고향마을은 그 시절 그 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지나간 세월 때문에라도, 그 곳은 더이상 그 때 그 시절의 그 곳이 아닌 것이다.
소책자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을 읽고나서 든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30여년 전 80년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노맹의 <성격과 임무>라든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라는 말들과 다시 마주치니, 다시 찾은 고향 주변의 풍광을 얼핏 다시 보는 듯했다.
그렇다. 이 책자는, 한국사회, 곧 한국자본주의의 실체를 밝혀내고자 했던 80년대의 논쟁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글이다. 30년도 더지난 시점에서 그 논쟁의 핵심을 간추려내고, 그것을 현재시점에서 재구성했다. 과거 비슷한 내용의 신문기사도 여러번 봤고, 세세한 내용까지 망라한 두꺼운 책들도 본 적 있지만, 이 책이 남다른 것은, 바로 그 현재성, 즉 옛날이야기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시점의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이자 새로운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분석은 ‘쭉정이와 알곡’을 가리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즉, 낡고, 그래서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들을 걸러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지난 30여년간 변화해온 현실이다. 바로 이 현실에 비추어 가며 80년대 한국사회 성격논쟁의 주요 쟁점들을 되짚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실 그 자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않는다고 할 때, 방법론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대목마다 <자본론>과 <제국주의론>에서 인용한 것을 보더라도 그렇고, 주요쟁점들을 서술해가는 논리전개과정을 보더라도 그렇듯이, 책자는 맑스레닌주의 원칙에 충실하기를 표방하고 있다. 문제제기해야 할 지점과 문제제기의 방향이 현재의 정세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현 정세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대중들을 오리무중에서 헤매게 하고, 결국엔 정세를 유지, 고착시키려는 세력들만 도와주고 마는지가 모든 글과 주장의 관건이라 할 때, 이 책자는 그 관점과 서술방식, 즉 방법론 면에서 요즘 그 어떤 글이나 주장보다도 탁월하다.
예컨대, 한국자본주의의 ‘경제종속성’ 문제만 보더라도, 그 문제인식과 해결방향에 있어서, 경제종속에서 탈피하여 한국자본주의를 살리려는 것으로 귀착하는 주장들을 단호히 반대하고, 제국주의체제와 연결된 한국자본주의의 착취체제를 철폐해야함을 분명히하고있다.
또한 ‘중진자본주의론’에 깔린 우파적, 개량주의적 자세를 비판함은 물론이요, 80년대 당시 가장 강력한 논지 중의 하나였던 ‘독점강화 종속심화’론에 전제로 깔린 기술종속, 시장종속 문제가 더이상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혁명성을 잃고 자본의 이해를 옹호하며 우경화 또는 개량주의화할 여지도 파헤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낮은 생산력’ 개념을 근거로 당시 변혁의 성격과 과제를 설정했던 사노맹의 주장을 살펴보면서,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 시점에서 볼 때는 더더욱, 얼마나 자가당착이었던지를 밝히고 있다. 안병직교수를 비롯한 우파경제학자들의 개량주의화와 변절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책자가 과거 논쟁에 대한 비판적 정리작업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30여년의 현실변화과정을 놓치지 않고 반영하고 있는 올바른 문제의식, 그리고 문제제기의 지점을 올바르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한다. 그것은 한국사회에 여전히 관철되고있는 ‘신식민지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자본주의로 나타나는 그 ‘특수성’의 문제를 앞으로 더 연구해야할 과제로서 제시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당연하게도 이 책은, 80년대의 양대 모순이자 과제였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그리고 통일운동과 변혁운동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나서 가장 인상깊게 다가오는 점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이 책이 맑스레닌주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면서도, 80년대 한국사회성격논쟁을 통틀어서 당시 ‘자주파’ 진영을 제외하고는 넘지 못했던 반북주의 또는 북맹의 한계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향에 다녀올 때나, 옛날을 돌이켜보는 이의 마음 속에 어떤 것이 들어오느냐 하는 것은, 고향의 모습이나, 옛 추억 자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지난 시절을 어떻게 지내왔고,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을 추천한다. 노/정/협
* 신간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 인터파크, 예스24 등을 통해 구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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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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