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내에 침투한 오열(五列)을 척결하지 않고 적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2015년 10월 22일)
“민주노총, 할 수 있는 일이 ‘뻥파업’뿐인가?”(조건준 금속노조 경기지부 교육선전부장, 프레시안, 2015.10.20)
이런 관료분자들이 민주노총을 망치고 금속노조를 망치고 운동을 적들에게 팔아넘기는 거간꾼이다.
“민주노총 할 수 있는 일이 ‘뻥파업’뿐인가?”라고 비난했으면, 그 논리적 귀결은 의당 ‘뻥파업’이 아니라 진짜 ‘총파업’이 되도록 하고, 총파업이 안 되더라도 총궐기로 떨쳐 일어서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자는 정권과 자본의 노동법 개악 공세에 맞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투쟁하자고 호소하고 그에 앞장서야 할 때 투항하자고, 자본과 정권에 ‘정책대안’으로 협조하자고 선동하고 있다.
이 작자는 “민주노총은 소속 노동조합과 달리, 기업을 넘어선 협상의 마당인 노사정위원회의 밖에 있다. 민주노총은 마당 밖의 노동자들을 투쟁에 동원도 못하고, 협상장 밖에서 움직이느라 협상장 안에 있는 소속 노동자들을 협상 테이블에서 전혀 대변도 못한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의 주장은 ‘총파업’이지만 현실의 처지는 ‘뻥파업’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같은 기사)면서 뻥파업을 비난하는 체 하면서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종용하고 있다.
과거 민주노총 내 협조주의자들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서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를 합의하고, 지금 한국노총 어용들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서 노동자 민중의 삶을 송두리째 적들에게 넘기는 것을 보면서, 바로 그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작자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를 거부하고 협상장 밖에서 움직인 것 때문에 “‘총파업’이지만 현실의 처지는 ‘뻥파업’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자는 원인과 결과를 호도하고 엉뚱한 데로 전가하고 있다.
철도노조 김영훈 집행부처럼 총연맹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자가 철도노조 임단협에서는 하반기 투쟁과 임금피크제 투쟁을 위해서라며 근속승진제 폐지에 합의하고, 정작 임금피크제 반대를 위해 민주노조 운동 진영이 사활을 걸고 투쟁할 때에는 임금피크제를 합의하는 것처럼, 노사협조주의가 총전선 구축을 막고 노동자들을 패배로 몰아넣는 것 아닌가? 그런데 조건준은 정반대로 사고하고 있다.
조건준은 “민주노총 총파업에 기대기보다 취업 규칙 개정에 대해 개별 동의로 할 수 없도록 합의한 노조도 있다. 임금을 깎는 정도와 연한을 낮춰 임금피크제를 사실상 수용한 노조도 있다.”(같은 기사)면서 임금피크제를 수용한, 자신과 같은 노사협조주의자인 김영훈을 결과적으로 넌지시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건준은 ‘노동시장 재편’은 이미 끝났다면서 지금의 ‘노동시장’ 개악을 기정사실로 인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박근혜 파쇼 정권과 자본에 맞서 “노동자 총파업으로 청와대로” 향하고 “민중 총궐기로 청와대로” 나가자는 정치투쟁에 대한 절절한 호소를 조롱하고 비아냥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모든 문제를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돌리는 ‘기승전박(근혜)’의 사회운동 패턴이 두드러진다. 그러니 ‘노동 시장 개혁’이라는 쐐기 쟁점을 던지면, 덥석 물어 박근혜 정권 반대 투쟁을 한다. ‘노동자 총파업으로 청와대로’ 향하고 ‘민중 총궐기로 청와대로’ 가려는 애절한 분노를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이제는 무기력한 반복을 성찰할 때를 이미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같은 기사)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투쟁을 가로막는 분자들의 실체와 주장이 이 보다 더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을까?
조건준 같은 작자들에게는 노동자 대중들은 없다. 노동자 주체는 없다. 오직 자신처럼 변혁운동을 포기한 노사협조주의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정책 대안만 있다. 그러니 이런 노조관료 분자들에게는 과거 1998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반대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한 36일 투쟁은 안중에도 없으며, 같은 해 만도 기계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 공장점거 파업도 안중에 없고, 1999년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한라중공업 노동자들의 72일 동안의 파업을 포함한 공장점거 투쟁은 안중에도 없다. 더불어 2001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과 2002년 발전, 가스, 철도 3사 노동자들의 대중파업도,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공장점거 파업도 안중에도 없고, 2013년 철도노동자들의 23일 총파업 투쟁도 안중에도 없다.
게다가 노조 존립 자체를 위해 열악한 조건에서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와 우선적 정리해고, 우선적 희망퇴직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했고, 하고 있는 것 또한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비록 아직 현실화 되지는 못했지만 총파업과 총궐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민주노총 지도부와 전국의 활동가들의 사활을 건 노력은 안중에도 없다. 이러한 투쟁들이 저자 같은 관료주의자, 노사협조주의자들에게는 다 ‘전략과 실천’이 없는 무모한 투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노사협조주의자들의 ‘전략과 실천’
보라, 그러면 과연 이 작자의 ‘전략과 실천’은 무엇이었을까?
“사회적 교섭은 노동의 요구를 쟁점으로 만들어 지지를 넓히고, 그것을 통해 투쟁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교섭=타협하기 위한 것’이라는 타협만을 추구하는 자세도 문제지만 거꾸로 일체의 사회적 교섭을 거부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은 해악이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을 활용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을 드러냈다. 동시에 총파업을 남발했지만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해 군사적 측면에서도 무능했다. 교섭도 투쟁도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금지된 무능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조건준,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 매일노동뉴스, 2009년)
노사정위에서 사회적 교섭을 하자는 말이다. 그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사회적 교섭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금지’ 외에 ‘다른 길’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억압과 통제’에 답답해한다. 그리하여 그는 1968년 프랑스 혁명에서 외쳤던 구호인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구호를 차용하며 노사정위원회 복귀 금지에 맞서 투쟁할 결의를 다진다. 그에게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억압과 금지는 안 보이고, 대신에 노사정위원회 반대가 금지이며 억압이다. 결국 그는 총파업으로 헛심 쓰지 말고 사회적 교섭에 매진하여 타협과 양보를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임금동결이나 삭감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친다. 그러나 경제위기로 인한 생산감축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고 잔업 · 특근에 의존하던 임금은 줄어들고 있다. 기업 차원의 임금을 넘어 정규직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비정규직을 위해 사용하는 조치를 노동조합들이 우선적으로 실천하면서 비정규직을 위한 사회임금을 요구하자는 사회연대임금 제안이 나온다. 노동운동의 일각에서는 이 같은 제안에 대해서도 개량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것도 저것도 금지된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임금협약은 깎이고 만다.”(같은 책)
그는 ‘금지’를 뚫고 정규직의 임금동결과 삭감으로 비정규직을 위해 사용하자며 ‘사회연대임금’을 주장한다. 이는 조건준이나 강신준 교수 같은 개량주의자들이 한 때 주장했던 사회연대임금론이다.
1820년대 이후 영국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대립이 첨예해졌을 때, 자본가들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는 반동적 경제학자들이 ‘임금기금제’를 주장했다. 임금기금제는 임금은 기금처럼 한정돼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통해 임금인상을 해봤자,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을 줄이는 결과만 가져오기 때문에 임금인상은 무용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그러니 임금인상 투쟁을 하지 말고 한정된 임금기금 가지고 노동자들끼리 잘 나눠서 쓰라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임금기금제는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생긴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 불가능한 성역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본에 복무하는 반노동자적인 이론이다.
사회연대임금론은 이러한 자본의 ‘임금기금제’ 논리에 포섭된 주장에 불과하다. 사회연대임금론은 노동자의 착취분에 다름 아닌 자본의 이윤을 침해해서 노동자의 생활임금 쟁취를 하자는 주장을 무용한 주장으로 만든다. 대신에 정규직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 임금을 보전하는 하향평준화를 바람직한 조치라고 간주하게 한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하여 생활임금을 쟁취하는 대신에 임금기금을 가지고 다투게 하여 계급분열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논리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정규직 임금의 일부를 받는 대신에 정규직화 요구를 포기하고 여전히 저임금과 비정규직 노예 상태를 영원히 감내하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지난 6월 SK하이닉스 어용 노조에서 조건준의 주장을 실현하고 나섰다.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과 조선일보 등 자본가 신문에서는 이를 ‘임금공유제’ 사례라며 극찬을 하고 나섰다.
“우리나라 대기업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의 희생 위에 고임금·고복지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중소기업 비정규직 임금은 대기업 정규직의 40% 정도밖에 안 된다. 하이닉스 노조가 자신들의 임금 일부를 협력 업체 직원들에게 내놓은 것은 정규직 노조도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실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하이닉스 방식의 임금 공유제가 더 많은 사업장에서 확산되었으면 한다.”(조선일보 사설, “정규직 양보로 비정규직들 숨통 터준 하이닉스 勞使”, 2015.06.09.)
‘사회연대임금제’와 ‘임금공유제’는 노동자의 생활임금 쟁취 원칙이라는 ‘금지’를 뚫고 자본에 포섭된 협조주의자와 자본 및 정권이 쟁취해낸 ‘공동 투쟁’의 쾌거인 것이다.
이 관료분자의 ‘전략과 실천’은 이뿐만이 아니다.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에서 시작된 주간연속 2교대제 논의도 마찬가지다. 심야노동을 줄이자는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노동시간이 줄어드니 임금이 줄어들게 된다. 생산도 줄어든다. 회사에서는 일정한 임금양보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생산량을 맞추자고 한다. 그런데도 노동조합 일각에서는 실질임금삭감도 없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강도 강화도 없고, 고용불안도 없는 이른바 ‘3무 원칙’을 들이댔다.”(같은 책)
이 작자에게는 3무 원칙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했던 현대자동차 내의 선진 활동가들과 수년 동안 야간노동 철폐를 위한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분투가 ‘전략과 실천’없는 무용하고 하찮은 일에 불과한 것이다. 대신에 실질임금을 삭감하고 노동강도를 높이고 전환배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자본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심야노동을 줄이자고 하여 야간노동 철폐의 의의와 원칙을 훼손시킨다.
이 관료작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쌍용차 투쟁이 패배한 것은 선제적으로 자구안, 즉 양보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끝물’에 양보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기까지 한다.
“생존게임에 빠지지 않는 또 다른 방법은 회사가 ‘선착순’을 선언하기 전에 노조가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고용도 지키고 임금도 지키겠다며 ‘전부(全部)’를 취하려 하면 거꾸로 ‘전무(全無)’라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것도 대충 어설프게, 어정쩡한 시점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버려야 한다. … 그렇다. 선제적인 자구안은 분명히 양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양보가 아니다. 가질 수 있는데 가지지 않는 것을 ‘양보’라고 한다. 가질 수 없는데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양보가 아니라 집착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쌍용차지부는 자구안을 제출하자는 의견에 대해 강경한 견제와 비판을 의식해 주춤거렸다. … 쌍용차 지부의 자구안은 어설픈 미끼였을 뿐만 아니라 시기도 늦었다. 끝물에 미끼를 던지면 이미 배를 불린 고기는 물지 않는다. … 끝물에, 그것도 어설픈 미끼를 던진 결과 처절한 생존게임으로 내몰린 것이다.”(같은 책)
조건준은 쌍용차 지부가 화끈하게 초장에 양보하지 않아서 정리해고를 맞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건준에게 공세는 전면적인 투쟁이 아니라 ‘선제적’인 양보다. 노동자들의 임금과 단협 따위는 낚시꾼에게 던져줄 미끼에 불과하다.
제2, 제3의 협조주의 조건준을 일소해야 한다
조건준은 수십 년 동안 노동운동, 아니 노조운동을 하면서도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고 둘을 주면 셋을 달라며 공세를 취하는 자본의 끝없는 이윤축적욕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 자본을 위해 극렬한 공격을 자행하고 있는 국가의 폭력성과 반동성을 모른다. 그저 자신과 같은 관료주의자들이 세 치 혀와 간교한 머리로 정책을 만들어 제시하면 정권과 자본의 공세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은 금속노조 경기지부 교선부장으로 있지만 오랫동안 금속노조 중앙 정책국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던 조건준은 한 때는 “뜨거웠던 80년대와 호흡하며 학업 대신 운동을 택했”(위 책자의 자기소개 중에서)던 투사였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동유럽과 쏘련 해체 이후에 운동의 변혁적 전망을 상실한 자들이 이처럼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정권과 노동자 사이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며 운동을 망쳤다. 이러한 작자들이 모여서 자본주의 내에서의 ‘정책대안론’을 외치며 대중투쟁을 자신들의 머리로 대체할 수 있다고 외치며 ‘타협과 양보, 항복과 패배주의’로 귀결되는 노사협조주의, 노사정협조주의를 외쳤다. 이러한 작자들이 모여서 “투쟁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며 민주노총이 정권, 자본과 결전을 앞둔 상황에서 국회 논의 기구에 들어가자며 항복과 타협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가 정권 후반기 최대 역점 사업으로 노동시장 구조개편을 밀어붙이고 한국노총의 노사정위원회 복귀 여부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노동계의 또다른 한 축인 민주노총이 존재감을 잃은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명분과 투쟁을 강조하는 민주노총이 총파업 외에 다양한 정책 대안이나 사회연대 전략 등을 내놓지 못해 시민의 관심과 지지에서 멀어지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 이런 비판은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나온다. 민주노총의 한 상근자는 ‘민주노총이 의제와 쟁점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선도해야 했는데 한국노총만 지켜본 게 아니었냐는 우려와 비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다른 상근자는 ‘현재의 조직 동원력으로는 총파업을 통한 투쟁만으로 정부가 주도하는 노동 현안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어렵다’며 ‘외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책 대안, 야당과 시민단체 등과의 연대 등 다양한 방법과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김민경 기자, “민주노총이 안 보인다”, 한겨레, 2015-08-19)
이처럼 운동의 변혁적 전망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정책대안’ 운운하며 노동자의 항복과 양보를 종용하는 제2, 제3의 조건준과 같은 작자들이 민주노총 내에, 노동운동 내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상근자’라는 익명의 이름 뒤에 숨어 소부르주아 신문과 결탁하여 “의제와 쟁점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선도”하고 “외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책 대안, 야당과 시민단체 등과의 연대” 운운하며 투쟁 전선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는 정책‘대안’은 과연 노동운동과 노동자의 삶에 무엇을 남겼나?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 개악에 노조 지도자들이 들러리로 참석하여 동의하는 것도 모자라, 작금의 한국노총의 노사정위 참여는 노동개악 재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 눈앞에서 똑똑하게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국회 논의기구 운운하는데 국회에서는 2013년 철도 파업을 파괴하고, 2014년 가짜 세월호 특별법과 2015년 공무원연금 개악을 합의하는 일련의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폭거를 자행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사활을 걸고 총파업과 총궐기를 조직해야 하는 시점에서 민주노총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전히 ‘자본가 민의의 정당’인 국회에 기대고, 야당에 의존하여 노동개악을 막아 보겠다는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협조주의 분자들이 단위 사업장과 운동 전반에 뿌리 내리고 있다. 철도노조 김영훈 위원장의 임금피크제 잠정 합의는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과연봉제-퇴출제 같은 “‘전면적 노동개악’ 빗장을 열어주는”(전국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지부 쟁의대책위원장 일동, 2015년 10월 21일) 폭거로 지금 총파업과 총궐기를 앞두고 투쟁 전열을 다지고 있는 운동진영에 찬물을 끼얹었다. 언론에서는 철도노조의 임금피크제 잠정합의를 대서특필하고 있다.
노동운동 내부의 이러한 관료분자들, 김영훈, 이경훈처럼 노조의 지도자 위치에 있으면서 노동자를 배신하고, 노동운동을 분열시키고, 패배로 몰아가는 협조주의 세력들과의 내부 투쟁이 없이는 총파업도 총궐기도 없다.
대적전선에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내부의 적들을 일소해야 한다. 내부에 오열(五列)을 남겨 두고서 어떻게 적과 싸워 승리할 수 있겠는가?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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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5열을 생성할 수 있는 저들의 역량은 어디서 찾아오는 것일까요?
투쟁!~
적극 동감합니다.